교집합 1: 단계적 해법
트럼프 행정부가 추구한 일방적인 '빅딜'이 '노딜'로 끝나자 미국 조야에선 단계적 해법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내정자는 지난해 9월 25일 언론 인터뷰에서 "단기적으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하는 것이 희박하다는 엄연한 현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며,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식은 우선 군비통제에 착수하고 군축 프로세스는 시간을 가지고 이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한미경제연구소도 최근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47명이 참여한 보고서를 통해 "작은 단계가 대북 외교를 재개하는데 최선의 길"이라고 강조했다. 비핵화를 장기적인 목표로 유지해야겠지만, "북한의 핵무기나 사찰·검증 문제를 초기부터 과도하게 제기하면 협상이 실패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만큼 단계적 접근에 대한 공감대가 미국 전문가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블링컨 국무장관 내정자가 19일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밝힌 입장도 주목된다. 그는 비핵화 추진을 두고 "나는 시작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시작하겠다"며, "단계적 합의"도 검토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단번에 비핵화를 이루려고 했던 것을 두고 "돈키호테식 비즈니스"라고 혹평한 바 있는데, 대북정책 재검토의 방향에 이러한 문제의식이 깔려 있는 셈이다. 아직 바이든 행정부의 구체적인 정책은 나오지 않았지만, 북한의 핵 능력을 '동결→감축→폐기'로 나누어 추진하겠다는 기류는 읽힌다. 그리고 이는 북한의 오랜 제안과 흡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북한이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미국과의 협상에서 줄곧 견지해온 원칙은 "단계적·동시적 조처"이다. 이는 2018년부터 시작한 북미정상회담에서도 어김없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트럼프의 일방적인 '빅딜론'에 막혀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바이든 행정부가 단계적 해법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차집합을 줄이고 교집합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교집합 2: 민생 중시
단계적 해법은 당사자들의 요구 사항이 적절하게 합의되어 '동시적 이행'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다. 북미관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제재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의 합의 사항을 "동시적·병렬적"으로 이행할 의사를 밝히면서도 제재는 예외로 못 박았었다. '선 비핵화, 후 제재 해결'을 고수한 것이 김정은과 트럼프의 우정이 배신으로 끝난 중대 원인이었던 것이다. 조 바이든이 대선 후보 당시 밝힌 입장과 북한이 8차 당대회에서 천명한 입장 사이의 차집합도 컸다. 그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할 때까지 강력한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또한 "제재 완화에 앞서 북한이 중대한 핵폐기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선 비핵화 조치, 후 제재 완화'로 해석될 수 있는 입장도 피력했다. 이에 실망한 탓인지, 김정은은 8차 당대회에서 결연한 의지를 나타냈다. 그는 "미국에서 누가 집권하든 미국이라는 실체와 대조선 정책의 본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는 미국의 제재 중독을 겨냥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곤 "객관"인 제재에 고통스러워하고 해결을 요구하기보다는 "주관"인 자력갱생과 자급자족을 강화하는 "절호의 기회로 반전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에 담긴 북한의 대외 메시지는 '제재할 테면 해라. 우리는 우리식대로 가겠다'는 것이다. 이는 향후 대북 협상에서 중요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북한이 협상에 임할 동기 자체가 약해질 수 있다. 대미 협상의 중대 목포가 제재 해결에 있었는데 이것이 실현되지 않자 북한 스스로 제재 해결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단호하게 돌아섰기 때문이다. 북한이 협상에 임해도 문제는 남는다. 북한이 단계적 비핵화의 상응조치로 제재 해결 요구를 내려놓더라도 이보다 훨씬 까다로운 요구, 즉 미국의 핵전력과 남한의 첨단무기를 포함한 상호 군축 요구를 초기부터 내놓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한미 양국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렇듯 차집합이 커지고 있는 차에 교집합을 만들 수 있는 실마리가 나왔다. 블링컨이 인준 청문회에서 밝힌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미국이 해당 정권과 정부에 강한 불만이 있고 특정한 조처를 하더라도 해당 국민에게 해롭지 않는 방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두 가지 교집합을 합하면
이 두 가지 교집합, 즉 단계적 해법과 민생 중시가 긍정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키면 새로운 시작을 도모할 수 있다. 단계적 해법의 1차적인 과제는 북핵 동결이다. 특히 북한이 다양한 핵무기 증강 계획을 밝히고 있는데,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핵물질 생산 동결을 이뤄내는 것이 매우 시급하고도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의 핵물질 생산 중단과 북한의 민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제재 해결을 핵심적인 의제로 삼아 대북 협상에 나설 필요가 있다. 블링컨도 바로 이 문제가 핵심적인 검토 대상임을 밝혔다. 민주당의 에드 마키 상원의원은 블링컨에게 비핵화를 최종 상태로 삼되, 북한의 검증가능한 핵 동결에 대한 상응조치로 제재를 완화하는 "단계적 합의"에 관한 입장을 물었다. 이에 대해 블링컨은 "우리는 전반적인 대북 접근과 정책을 재검토해야 하고 또한 그렇게 하고자 한다"고 답했다. 이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후보 때 북핵 동결에 대한 상응조치로 제재 완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나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이 완전히 비핵화할 때까지 제재는 유지할 것"이라고 말한 것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다. 북핵 동결과 제재 완화를 골자로 하는 1단계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는 최대 현안이 되고 있는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미래지향적 결단이다. 문재인 정부와 바이든 행정부가 연합훈련 취소를 결정하면 위에서 말한 잠재성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양국 정부가 좌고우면할 것이 아니라 조속히 결단해 북한의 화답을 유도할 때인 것이다. 또 하나는 '최종 상태(end state)'에 관한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전망이 어두울수록 단계적 해법에 나설 동기가 약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최종 상태에 대한 창의적인 해법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교집합도 찾을 수 있다.다음에 이어질 글 : 최종상태? 비핵지대의 역사성과 보편성에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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