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산 : 글로벌 아웃도어 시티
먼 산이었다. 원산(遠山)이라 일렀다. 가는 길은 멀고 설었다. 첩첩산중,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험준한 산맥을 에둘러야 했다. 오죽하면 말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고비 쉬어간다 하여 마식(馬息)령이라고 불렀다. 마침내 당도한 동쪽 땅끝 마을에서는 망망대해, 깊고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행차했던 나랏님이 원산의 꼴이 꼭 삼봉산을 축으로 마늘 꼭지처럼 생겼다고 하셨단다. 원산(元山)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 사정이다. 이름 따라 간다. 네이밍과 브랜딩, 개명은 운명도 바꾸었다. 으뜸도시, 개항의 파고가 가장 먼저 미치는 원조도시가 되었다. 반만년 반도에서 문명의 젖줄은 늘 대륙이었다. 평양과 개성과 한양 등 수도의 거개가 서쪽에 치우친 까닭이다. 반면 원산은 평양에서는 150㎞, 서울에서는 180㎞ 떨어진 외지이다. 거리는 물론이요 높이도 복병이다. 동고서저(東高西低), 서쪽은 평야요 동쪽은 산야인바, 동쪽 바다는 반도에서 오래 소외된 변방이었다.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한 산,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운 금강산을 찾는 이조차 구태여 산 너머 원산까지 이를 연유가 없었다. <금강전도>의 겸재 정선도, 방랑시인 김삿갓도 바람과 물이 깎아 만든 층암절벽과 괴암괴석의 찬란한 만물상을 찬탄했을 뿐이다. 해금강까지는 그리지도 노래하지도 않았다. 원산은 내내 한적하고 한가한 어촌이었다. 오천년만의 대반전은 남방에서, 바다에서 불어 닥쳤다. 섬나라 일본이 굴기했다. 서세동점의 파고에 재빨리 올라타서 ‘아시아의 악우(惡友)’이길 망설이지 않았다. 1868년 메이지유신과 함께 가장 먼저 단행한 사업이 홋카이도 병합이다. 다음으로는 류큐 병합(1879)에 나섰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1876년 강화도조약도 체결되었다. 아이누가 살아가던 에조치는 단숨에 식민지화했으며, 중국과 일본 사이 균형외교를 하던 류큐 왕국은 차근차근 병합했다면, 조숙한 중앙집권국가조선은 야금야금 잠식해가는 방책을 취한 것이다. 그때 부산과 인천과 더불어 개항장이 된 곳이 바로 원산이었다. 부산은 오래 일본과의 연결망이 작동했으며, 인천은 황해 건너 중국과의 네트워크가 역력했던 장소이다. 반면 원산이야말로 ‘일본의 충격’이 빚어낸 식민지 근대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적막하던 바닷가에 바글바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외지인도 드물던 마을에 외국인들이 집결하였다. 정박한 상선을 보노라면 일본이 가장 많았고, 러시아가 그 다음 순이었다. 오사카만큼이나 블라디보스토크와도 돈독했다. 여기서 왜 원산이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남하하는 신흥세력 러시아를 견제하는 항구도시가 필요했던 것이다. 1860년 베이징조약, 만주의 3분의 1이 연해주가 되어 러시아로 귀속되었다. 키릴문자를 쓰고 동방정교를 따르는 낯선 나라가 동아시아의 일원이 된 것이다. 조선은 졸지에 두 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함경도는 연해주와 맞닿는 접경지대가 되었다. 함경도와 연해주를 바라보는 곳에 에조치가 자리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직후에 홋카이도 병합을 단행한 것 또한 명명백백 북방의 신흥제국, 러시아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원산은 서해의 인천에 부럽지 않을 만큼 국제도시로 비상했다. 1916년 조선 최초의 수영 강습회가 열린 바다가 원산이었다. 1929년 만해 한용운이 원산 일대를 기행하며 남긴 <명사십리>를 읽노라면, 전망 좋은 바닷가에 외국인들의 별장이 스무여 채 줄지어 서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대 동북아시아의 대표적인 휴양도시, 레저타운이 조성된 것이다. 1930-40년대에는 캘리포니아의 유행이 실시간으로 전파되어 이국적인 해안 풍경을 연출했다고도 한다. 송도원 유원지, 송도원해수욕장, 명사십리해수욕장은 흡사 서핑 족들로 가득한 LA의 베니스 비치, 롱 비치, 말리부 비치를 연상시켰다.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만나는 허브였던 원산의 풍경이 극적으로 뒤바뀐 것은 1945년 해방이다. 일본이 물러난 공백을 다시 북방세력, 소련이 채웠다. 행정구역도 재편했다. 1946년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편입시킨 것이다. 이제 원산은 강릉과 원주, 강원도의 남쪽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복마전이 전개되는 복선이 되었다. UN군이 점령했다가 중공군이 탈환하는 등 북조선과 남한이 남방과 북방이 엎치락뒤치락 일진일퇴 공방을 거듭했다. 1860년 이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유라시아와 아메리카가 경합하던 연장전이었다. 앵글로색슨은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슬라브족들은 시베리아의 4대 강을 따라 동진(東進)하는 대항하시대를 개창했던 바, 대항하시대와 대항해시대가 원산에서 합류하여 대폭발의 대결장으로 변했던 것이다. 결정타는 역시 원산폭격이다. 무차별적인 B29 폭격으로 20세기 초 아메리카풍 국제도시 원산의 흔적은 깨끗하게 지워진다. 시베리아풍 소련의 김서린 입김이 물씬 미치는 군사도시로 전변한 것이다. 냉전기 노동당 고위 간부나 인민군 고급 장교들만이 천혜의 풍경을 감상하는 예외적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2. 청진과 나선 : 청해 도시 네트워크
원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더 올라가면 청진에 닿는다. 원산이 김정은의 고향이라면 청진은 그의 반려, 리설주가 나고 자란 곳이다. 북조선 제3의 도시이자, 으뜸의 패션 도시이기도 하다. 평양보다도 유행 속도가 빠르다. 평양의 아녀자들이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스키니진이나 나팔바지, 미니스커트도 앞장서 용감하게 먼저 입은 이들이 청진의 아가씨들이었다. 청진이 핫플레이스, 힙한 도시가 된 것은 바다 건너편 일본의 영향 탓이다. 일본 상품을 가장 먼저 수입하는 도시가 청진이다. 일본의 재고상품이 청진에서 먼저 풀린다. 북조선 기준으로는 최첨단 패션이다. 정치적 중심지가 아닌 고로 당의 눈치도 훨씬 덜 본다. 근엄한 권력과 멀수록 심신은 자유로운 법이다. 패션산업을 비롯해 문화와 예술에 특화될 수 있다. 본디는 공업도시로 출발했다. 일제는 청진을 제철도시와 항만도시로 키웠다. 미쓰비시 광업과 일본제철이 합작 운영을 시작한 때가 1935년이다. 훗날 박정희 정권 포항 발전 전략의 원조라고 함직하다. 1940년대 청진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원산이나 함흥은 비할 데 없었고, 부산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대동아공영권, 대륙 진출에 사활을 걸던 시절이다. 제국의 본토 일본열도에서 제국의 프런티어 만주국으로 가는 허브시티였다. 동경(東京, 도쿄)과 신경(新京, 장춘)을 청진항이 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서쪽 도시들, 복으로는 홋카이도의 삿포로와 하코다테부터 니가타, 시모노세키, 오사카까지 청진의 환동해 네트워크는 부챗살처럼 활짝 펼쳐져 있었다. 역시나 그 흔적은 당시의 엽서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1930년대 중반 청진상공회의소에서 발행한 ‘약진도상의 청진항’이다. 세이신(SEISIN)은 청진의 일본식 발음이다. 북선(北鮮, 함경도)에서 가장 큰 도시, 약진하는 청진이라 했다. 1940년대 그림도 흥미롭다. 연안 매립을 통한 계획도시였다. 항만 배후 주택가에는 유럽풍 건물들이 즐비했다. 반도와 열도를 잇는 북쪽 항구도시의 관성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59년 재일교토 북송사업도 니가타와 청진을 통해 이루어졌다. 1970년대 일본인 납치사건을 주도한 공작선들이 출항했던 항구 또한 청진이었다. 고로 북-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가장 큰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포항제철 만들 듯이 얼렁뚱땅 식민지 배상문제를 퉁치고 갈수는 없는 노릇이다. 철저한 배상금 청구를 종잣돈으로 삼아 반도와 열도의 새로운 관계, 단번도약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청진을 새로이 디자인해야 한다. 백년 구업은 풀되, 구습에 얽매여서도 아니 될 것이다. 현재처럼 북도 남도 일본과 소원한 국면은 동아시아의 장래를 위해서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방치하면 심히 곤란하다. 관여해서 관리해야 한다. 이미 두 번이나 반도를 친 나라이다. 운명공동체로 튼튼하게 엮어 두어야 한다. 저 위로는 오오츠크해 지나 북극해까지, 더 아래로는 오키나와 지나 인도양까지 동해는 유라시아의 북쪽 바다와 남쪽 바다가 합수하는 미래해가 될 수 있다. 청해 도시네트워크의 허브도시로 청진의 청사진을 그려본다. 청진 위로는 또 나선이 있다. 나진과 선봉을 아울러 나선특별시가 되었다. 경제특구이기도 하다. 선봉이 선봉인 것 또한 북풍 때문이다. 소련이 아시아 전선에 개입하여 식민지 조선에 상륙해서 가장 먼저 해방시킨 지역을 ‘선봉’이라 일컬었다. 식민지 근대성으로 휘황한 청진과 원산으로 치고 나아가는 길목에 선봉이 터했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지척, 연해주와 함경도를 잇는 길목이었다. 지금도 ‘조선-러시아 우정의 다리’가 나선과 하산을 연결한다. 북중러 3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특별한 공간이다. 나진선봉을 북조선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한 해가 1991년이다. 탈냉전의 선봉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금평/위화도 경제특구, 개성공업지구, 원산금강산 관광지구, 신의주 국제무역지대 보다도 먼저 가장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미 몰락한 소련과 동유럽에 견주어 중국의 개혁개방이 성과를 거두고 있던 시절이다. 북조선 또한 나선을 홍콩처럼 발전시키고 싶어 했다. 이른바 ‘일국양제’를 모방하여 나선에서만큼은 외자를 유치하고 기업 합작도 허용키로 한 것이다. 자본주의를 껴안은 신사회주의, 외세를 품은 새 주체의 선봉적 실험장으로 나선을 구상한 것이다. 두만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오래된 뒷배가 있었기에 더욱 과감한 결단을 취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3. 남북 고성 : 어스벨리(Earth Valley)
원산도 청진도 나선도 가볼 수 없는 땅이었다. 옛 엽서를 뒤지거나 구글 어스의 도움을 얻어 간접체험만 할 뿐이다. 그나마 육안으로 금강산을 저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동해안 해파랑 길을 따라 최북단, 고성의 통일전망대이다. DMZ 너머 금강산의 자태가 또렷하게 눈에 든다. 백두산과 한라산이 장엄하다면, 금강산과 설악산은 찬란하다. 백두산의 천지가 헨델의 메시아에 어울린다면, 금강산의 만물상은 모차르트의 미뉴에트를 연상시킨다. 헌데 DMZ 너머 저곳 또한 고성이라 한다. 강원도만 남북으로 갈리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고성군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다. 유일무이 남북이 함께하는 군 단위 지자체가 고성이다. 북고선과 남고성은 면적 또한 거의 흡사하다. 북고성의 끝자락에는 금강산이 터하고 있고, 남고성의 밑자락에는 설악산이 자리하는바, 북방의 동해와 남녘의 동해를 잇는 연결고리가 고성인 것이다. 동해북부선 개통식 또한 고성의 제진역에서 열렸던 바이다. 산길과 물길과 철길이 고성에서 합류한다. 동해물과 백두대간과 남북철도가 고성에서 합일한다. 우로는 바다요, 좌로는 산이라. 남북고성의 형세를 살피노라니 자연스레 뉴질랜드의 뉴플리머스가 떠올랐다. 작년 이맘때 한 달 살이 지긋하게 머물렀던 곳이다. 산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법인 자격을 취득한 타라나키도 자리하는 곳이다. 뫼도 가람도 사람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시작한 천지개벽국가의 상징 같은 곳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세계적인 실험도 전개되고 있다. 목하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기후재앙인바,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고 기술이 있다면 3년짜리 비자를 내어주고 잠잘 곳과 일할 곳을 제공하는 ‘임팩트 비자’가 운영되고 있다. 개성공단은 남북합작, ‘우리 민족끼리’ 정신의 발로였다. 남한의 자본과 기술에 북조선의 저임금 노동력을 결합하여 세계 시장에 상품을 수출하자는 발상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발상이었으되, 지금은 또 다른 파격과 혁신이 요청되는 시점이다. 남북고성을 산업문명 너머 생명문명의 허브/허파로 탈바꿈해가면 좋겠다. 남북은 물론이요 주변 4강과 UN이 함께하는 지구촌 모델로 가꾸어 가면 더더욱 좋겠다. 디지털 산업의 메카, 실리콘 벨리를 넘어서는 생명산업의 숨통, ‘어스 벨리’(Earth Valley)에 대한 상상력을 지피는 땅이다. 이미 세계 도처에 ‘국제평화대학’의 꼴을 취한 학교는 적지 않은 바, 기왕이면 남북고성에는 인간의 평화, 국가 간 평화 너머의 큰 배움을 지향하는 지구생명대학이 들어서면 좋겠다. 하늘 아래 새 것 없다고, 여기저기 리서치를 해보니 이미 “지구대학”(Earth University)이 코스타리카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벌써 30년 넘게 운영 중이란다. 단번에 결심했다. 내년 이맘때에는 카리브해에 있을 것이다. 새해 첫날부터 스페인어 공부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카리브해의 지구대학을 연구하여 동해를 끼고 있는 고성에 들어서면 딱 좋을 지구대학 2.0을 구상해볼 작정이다. 금강산의 만물상은 다시금 지구적 영감을 제공한다. 우리 민족끼리로는 더 이상 충분치 않다. 우리 인간끼리도 이제는 미진하다. 삼라만상, 생물(DNA)과 활물(DATA)까지 아울러 만물의 그물을 탐구하고 수양하는 미래대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인과 만국 사이의 영세중립을 넘어서, 만물과 만상과 만사의 영구평화, 생명평화를 염원한다. 코스타리카는 군대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어설피 군대 없는 한반도를 말하지는 않겠다. 이상을 꿈꾸되 현실주의자가 되고자 한다. 상상을 지피되 몽상에 빠지지도 않는다. 영세중립 스위스에도 군대는 여전한 바이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 미국과 중국 사이, 남과 북에서 군대 없는 나라를 상상함은 백일몽에 그칠 따름이다. 그러나 국지라면 어떠할까? 군대 없는 생명특구 조성도 요원한 일일까? 남북고성군은 어떠할까? 군대 없는 고성군, 생명평화의 실험군으로 남북고성을 리브랜딩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 역시 불가하다면 군대의 성격만이라도 혁신적으로 바꾸어보면 어떠할까? 애당초 군대의 목적이 무엇인가.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21세기 국민의 생명은 적국과의 경쟁과 전쟁에 달려 있지 않다. 제1순위가 기후재앙이다. 전쟁에서 죽어가는 숫자보다 지구가열화(global heating)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들(과 동물들과 식물들)의 숫자가 월등하게 많아진 다. 시대가 바뀌었다면 군대의 역할 또한 진화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서라도 ‘기후부대’ 내지 ‘기후특공대’ 창설은 시급한 과제이다. 기후는 땅과 하늘과 바다를 가리지 않는다.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이다. 고로 육해공군이 합작하는 최정예 전천후 부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국방부와 환경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또 기후재난은 북과 남을 가리지도 않는바, 역사상 최초의 남북합동군사훈련을 펼쳐보기에도 최적의 과제이다. 더 나아가 기후위기는 한반도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일본과 러시아, 중국과 미국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다. 남북고성이, 남북강원도가 남북한이 주도하는 미래형 6자회담도 만들어 볼 수 있는 것이다. 판갈이가 도통 어렵다면 패러다임 전환, 아예 새판을 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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