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현장과 정책 분야에 10여 년을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온 필자로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복지 정책에 대한 논쟁, 특히 기본소득에 대한 자해적 비난에 대하여 개탄과 경악을 금치 못한다. 상기 타이틀에 한국 정치인들에게 고함이라는 부제를 달았으나, 이의 대상에는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부패 정치인의 대명사를 배출한 수구적 야당의 정치 집단을 논의에서 제외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져야 마땅하나, 다만 상황에 따라 살아남은 이들의 현존을 그저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현실 정치 제도의 결함과 역사적으로 누적된 부패를 청산하기에 역부족인 시민운동 역량의 한계를 탓할 뿐이다. 동시에 지난 4년간의 문재인 정권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무능과 실책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전부터 부동산 투기의 천국으로 변모한 대한민국에서 최고 최상의 복지 정책은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친 후 안락함을 제공해줄 주거의 해결이다. 현 정권의 출범 이래, 핵심적인 부동산과 주거의 정책으로 진보적 시민사회는 보유세 강화와 양도 차익의 회수를 중장기적인 근간을 삼고 가난한 서민을 위한 장기공공임대주택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민간영역의 사회주택 활성화를 촉구해 왔다. 그러나 현 정부는 주택 정책을 수요공급의 시장 논리로 환원시키고, 단기적이며 수치적인 경제 성과를 시현하기 위하여 오히려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여 왔다. 복지는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지는 산업 현장의 제1차적 영역과 사후적으로 안전망을 구축하는 사회 정책이라는 제2차적 영역으로 구성된다. 근래에 들어오면서 제1차적 영역의 중요성이 보다 강조되면서 사회 정책 역시 산업경제 정책의 핵심적 중심의 영역으로 재구성되어 제1차적 영역과 제2차적 영역이 상호 결합되고 서로를 지원하며 순환하는 역동적 체계를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제1차 영역의 기본적 조건으로 적정 임금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최저임금의 시간당 1만 원과 주당 노동시간의 52시간 제한을 내세운 대선 공약을 충분한 설명도 없이 자본자산들의 압력에 밀려 일방적으로 포기했으며, 경제력 10위의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국제 노동기구의 기본 요구 수준조차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현 정권이 과연 복지를 논할 자격이 있는가 반문해 본다. 이에 더하여 복지 제도를 확장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정적 지원이 뒤따라야만 한다. 뒤에 보다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복지의 주요 지표인 공공 지출 비중에 있어 대한민국은 복지선진국의 3분의 1수준이며 OECD 평균의 40%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복지국가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자산누진세를 중심으로 조세개혁과 증세가 필연적임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은 무슨 까닭인지 출범부터 일체의 증세 논쟁을 거부하여 왔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여의도 국회의원들이 미국 상원의 진보적 정치인인 버니 샌더스와 엘리자베스 워런의 최근 눈부신 활약을 본받기 바랄 뿐이다.) 본격적인 기본소득의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서구의 복지 역사를 간략하게 일별하여 본다.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으로 농민들을 농지에서 추방하여 이들 다수가 실직 상태에서 부랑자로 전락하면서 사회적 불안으로 증대하자, 빅토리아 왕조의 영국은 강제노역을 포함한 빈민법을 제정하여 근대적 개념의 사회복지를 국가 단위에서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공공부조를 중심으로 한 빈민법은 이후 스핀햄랜드 시행과 신빈민법을 거치면서 낙인 효과라는 복지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킨다. 이렇듯 복지 역사의 과정에서 실책으로 인하여 산업화를 가장 먼저 이룩한 영국이 현재처럼 2류 국가로 전락하는 불행을 맞이한다. 복지 정책의 중대성을 다시 일깨우는 대목이다. 전기의 발명 등으로 시작된 제2차 산업혁명 시기인 19세기 말 후발의 산업국가로 강대국 대열에 뒤늦게 참가한 독일은 대규모의 공장제 실시로 인한 노동자 조직과 갈등 및 공산화의 위협 등에 대응하여 수혜자 부담 원칙의 본격적인 사회보험을 실시하게 된다. 이후 사회보험제도는 유럽 대륙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으로 안착하고 제도적 경제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국외자들에 대한 '포용'을 중심 과제로 삼게 된다. 북유럽의 스웨덴은 후진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1930년대에 노농(勞農) 연정의 기반 위에 진보적인 사민당이 집권하면서 국가의 역할을 '인민의 집'으로 선언하고 이후 현재까지 보편적 복지를 국가의 기본 정책으로 시행해 오고 있다. 30년대의 사회연대임금 타결과 60년대의 '렌-마이드너'라는 산업혁신 정책, 그리고 제3차 산업혁명과 세계화 이후 젠더 이슈(여성의 부엌으로부터 해방과 사회 참여)와 생애주기의 맞춤형 복지를 도입하면서 사회수당과 사회서비스 영역을 확충하고 강화하여 왔다. 이렇듯 서구 복지 정책의 역사는 산업화의 단계와 상황적 조건에 따라 복지 정책의 내용이 공공부조에서 사회보험을 넘어 사회수당과 사회서비스 분야로 확산 발전되어 왔다. 여기서 반드시 눈여겨볼 지점은 항상 후발 참여국가가 앞서 시행한 선발국가들의 제도적 한계를 뛰어넘어 복지의 새로운 영역을 혁신적으로 추동하여 왔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해당 국가군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변화와 여건이 주요하게 작동한 배경도 있겠지만, 복지제도가 갖는 특유의 성격인 구축 효과(embedding effect)의 영향이 매우 크다 할 것이다. 한번 시행을 도입하여 구축되면 이에 따른 시혜자의 절대적인 이익관계가 형성되면서 정책의 변경이 정치적으로 매우 어렵게 된다. 따라서 한번 복지 정책의 경로를 설정하면 이를 수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에 산업화 과정의 초기, 제2차 산업혁명 그리고 제3차 산업혁명과 세계화 등에 상황의 변화에 따라 영국은 빈민법에 기초한 공공부조, 유럽 대륙은 포용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보험, 그리고 노르딕 지역은 보편적 사회수당과 서비스를 복지 정책의 역사적 궤적에 따라 각자의 중심축으로 삼게 되었다. 현재 세계 경제의 여건과 흐름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전후 케인즈 이론 중심의 정책이 황금기를 구사하다가 7~8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와 고(高)실업 문제로 몰락하고, 금융통화 중심의 세계화라는 명분과 때 마침의 소비에트 몰락으로 신자유주의로 대체되면서 이후 소위 '워싱턴 켄센서스'라는 미국 중심의 단일 체제가 대세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의 통화 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고하고 대안의 체제를 암중모색하는 와중에 있으며,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양적완화라는 긴급 수단에 기대어 연명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더하여 산업경제의 영역은 제3차 산업혁명기와 탈산업화의 과정을 지나 소위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필자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 대신에 '지식혁신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하고자 하며, 지식혁신경제에 대한 상론은 '다른백년'이 3월 말경 출간 예정인 하버드대학의 석좌교수인 로베르토 M. 웅거의 최근 저술 <지식경제 시대의 도래>를 참조하여 주길 요청한다. 세계경제포럼 등 주류 사회의 예측대로 미래 사회가 전개된다면, 거대 기술 기업들이 사이버 포털과 기술 기반을 거점으로 지구적 규모의 독점과 수탈을 강화하여 양극화가 심화되는 한편, 과학기술의 발전과 혁신에 따라 인류가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 대부분이 과거처럼 육체노동과 사무관리 업무에 의존하지 않은 채 시스템 자체의 운용과 개선을 통해 이루어질 전망이다. 특히 사회복지 영역의 핵심주제인 일자리 부문에 있어서는 기존의 관행과 형태를 넘어서는 격변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산업화 이후 전형적인 방식으로 아침 8~9시에 출근하여 하루 8시간 이상의 노동을 진행한 후 저녁 6시경에 퇴근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다양한 유연 모델과 비선형적 형태, 필요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가 사라지는 GIG(이벤트식 직업)방식, 그리고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불리는 불안정한 계약직 등의 확산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작업과 재택근무의 가능성이 확인된 만큼, 이러한 방향의 급속한 확산 가능성을 우리는 현재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상황의 전개가 목전에 다가왔는데 과연 기존의 산업 체계에서 발전해온 전통적 복지 체계가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일자리와 직업 체계가 마구 무너지는 상황에서 기존의 일자리만을 방어하는 고용보험의 강화가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한가지 예로 북유럽이 시행을 자랑하며 기존 산업 체계에 부응해오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이미 실효성을 상실하면서 심각한 비판에 직면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상황의 전개에는 새로운 해법과 대응책이 필요하다. 18세기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앞서가는 선각자들에 의해 기본소득의 선행적 개념들이 제기되어 왔으며, 1980년대를 지나면서 벨기에의 루뱅 대학이 중심이 되어 이론적 체계와 정책적 대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주요 선진국가들에서 국민 발안과 실험적 정책 그리고 양심적인 기업인들과 대선 과정의 주요 후보들에 의해서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이미 일부의 시행 결과로 긍정적인 성과들을 상당히 누적하여 왔다. 작년 미국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도 기본소득이 주요한 현안으로 부상하였으며, 최근에는 코로나19 충격에 따른 구제 지원 정책의 후속 작업으로 미국의 산업경제 정책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제임스 칼브레이스 교수가 문화예술 분야와 사회적 경제영역에 기본소득에 준하는 지원책을 제안하고 나섰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주창하고 나선 정치인 이재명 경기도지사 역시 십수 년 전부터 이 분야에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학자들과 수년간 학습과 토론을 진행하여 왔으며, 전문가 입장인 공동저자로서 본인이 직접 단행본을 출간하면서 기본소득의 국제네트워트인 BIEN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일부의 여당 정치인들이 세계적으로 기본소득이 아직 본격적 수준에서 시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이의 시행을 선도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무책임하며 소모적이라는 비난을 가한다. 무지한 것인가? 이들의 발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우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사회보험을 도입한 당시의 독일과 보편적 복지를 내세우며 사회수당과 서비스를 전면화했던 당시의 북유럽 국가들은 모두 후발적 참여 국가들이었으며, 당시의 선진 제국들이 시행하지 않았던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한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위에 언급한 것처럼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인 대한민국은 이제야 복지국가를 향한 여정의 초입에 서 있어, 구축 효과의 부담이 상당히 적으며 따라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구체적으로 기술하자면 복지정책의 주요한 평가 기준으로 GDP 대비 국민 분담률을 살펴보면 선진복지국가군은 45%에 달하여 OECD 평균은 35% 수준을 유지하는 데 반하여 한국은 겨우 27~8%에 머물고 있다. 자산에 대한 누진과세 등 조세의 여력이 상당히 있다는 반증이다. 직접적인 복지 지출액에 대해서도 선진복지국가군은 GDP의 30%가 넘어서고 있고 OECD 평균 역시 22~25% 수준을 보이고 있는데 반하여 한국은 겨우 10%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한마디로 현대적 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현재의 복지재정을 2~3배로 확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더구나 지식혁신경제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한국은 기존 산업의 추적자 지위에서 혁신의 선도자(prime-mover) 위치로 전환을 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자연스레 선도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산업적이며 기술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혁신을 가능하게 하고 촉진할 수 있도록 복지체제에도 역동성을 도입해야 하는데, 다행스럽게 구축 효과의 부담이 가장 적고 복지재정의 잠재력이 상당한 한국이 새로운 복지 개념을 도입하는데 매우 유리한 환경과 자체적인 필요를 지니고 있다. K-방역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대한민국이 선도적 혁신국가로 나서는 것이 단순하게 빈말로 이루어질 일은 아니다. 요약하면, 대한민국이 기본소득을 선제적으로 도입 시행하는 것을 위험하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혁신을 주도하기 위한 자체의 필요와 여건에 따라 앞서 나가는 포석이라고 높게 평가하면서 심도있는 논의와 연구를 진행해야 마땅하다.이미 진보학자들의 국제적 추이는 기존 복지 체계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으로 혁신적인 경제운용 성과를 전 국민에게 배분하는 배당 성격의 기본소득과 모두에게 가장 소중한 공공재로서 과학 기술과 이에 기반한 산업 기반에 대한 공적 통제를 강화하고, 공유적 소유 개념에 따라 사회적 상속을 통한 개별 단위 기본자산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의 토마 피케티 교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만 필자의 견해는 사회적 상속 혹은 자산의 중과세에 기반한 기본자산에 대한 논의는 기본소득의 점차적 시행과 추후 안정적 기반이 형성된 이후 이에 대한 반성과 평가 위에서 재론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판단한다. 지금은 기존의 복지정책과 기본소득 간의 상호적 보완과 결합에 올곧이 집중할 시점이다. 오히려 보좌진들이 올린 몇 페이지의 보고서에 의존하여 기본소득을 백안시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인으로서 대단히 무책임한 행동이다. 기본소득을 무조건 부정하는 자세가 아니라 이를 여하히 미래지향적으로 검토하고 실천적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 모름지기 시대의 흐름과 필요에 의해서 제기된 정책의 정합성을 검토하고, 실천적 의지와 지속적인 노력을 담아내고 시행 이후 실효적인 반성과 발전적인 재구성을 통하여 더욱 진전시켜야 마땅하다. 기존 복지제도의 강화론자이든 기본소득도입의 지지자이든 '모 아니면 도 (all or nothing)'라는 자세를 버리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자세로 상호보완과 결합을 검토해야만 한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의 기본소득에 대한 전향적 비판을 아래에 열거하고자 한다. 우선 조만간에 시행할 기본소득과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본자산의 도입은 미래를 향한 올바른 방향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것이 만병통치의 해법일 수는 없으며, 맹점의 하나인 정책의 무지향적 성격을 기존 복지제도로서 보완하여야 한다. 전반적으로 적용하기에는 기본소득 제도에 대한 경험의 역사가 일천하고 여전히 실험 단계에 있으며, 따라서 현재의 시점에서는 제한된 영역과 부문 혹은 계층과 지역에 일차적으로 적용해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욱이 한국처럼 다층적 다면적 갈등과 차별이 전면화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무조건의 일반적 적용이라는 이상적인 기본소득의 모델은 한국 사회가 제1차적 영역에서 상대적인 공정성과 안정을 확보한 이후에야 비로소 보편적인 방식으로 시행을 검토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지원의 내용이 용돈 수준의 푼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은 지극히 옳고 타당하다. 재정적 여력과 준비상황에 따라 시차를 두고 점차적으로 적용의 대상과 범위를 확장하여 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적용대상을 선택하고 우선순위를 설정하되 지원액수가 실제적인 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수준에서 시작할 것을 조언한다. 예컨대, 사회 신참의 청년실업군, 농어산촌민, 문화예술인 등에 대하여 월 4~50만 원, 연간 500만 원 수준 이상의 지원으로 시작하는 동시에 참여적 방식으로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영역에 참여하는 해당 개인들에게 일정한 보조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미래의 새로운 일자리를 일구는 것을 검토해 보자. 기본소득이 가지는 잠재적 매력과 행정적 용이함(공정을 포함)을 충분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구체적인 현안에 집중하여 해결하려는 정책지향적 기존 복지정책의 강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기본소득과 무관하게, 교육과 공공보건, 의료체계와 재난구제, 주거와 장애 등 영역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개입과 책임성은 더욱 강화되어야 하며,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여건과 환경의 조성에도 정부는 과감한 투자를 지속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기본소득의 도입은 다가오는 미래사회에 대응하는 역동적이며 정합적인 필요조건이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서구사회가 시행하고 발전시켜온 시회안전망이라는 복지제도를 경험의 한 축으로 삼되, 새로이 전개되는 사회경제적 상황과 조건에 발맞추어 새로운 개념(기본소득)의 사회정책을 조세개혁과 더불어 현실적 방식으로 도입하는 정치권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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