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번도약, 북조선' 이스라엘 전편 바로 보기
1. 건국의 아버지
텔아비브 공항의 정식 명칭은 벤구리온 국제공항이다. 1948년 건국 초대 총리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공항으로 중동의 이 작은 나라를 세계와 잇는 관문 역할을 한다. 내가 이른 것은 2016년 12월 말이었다. 서아시아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아랍 세계를 두루 살피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여전히 이스라엘과 편치 않은 아랍국가가 적지 않다. 괜히 여권에 이스라엘 방문기록을 남겼다가는 트집 잡히기 쉬웠다. 뜻하지 않게 아랍에서 유럽으로 이행하는 중간 기착지로 삼게 된 것이다. 70년 전에는 유럽에서 아랍으로 유대인들이 이주했다. 척박한 땅이었다. 영토의 절반이 사막이었다. 석유조차 나지 않았다. 맨손과 맨몸으로 맨땅을 일구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태생부터가 개척국가, 스타트업 나라였다. 그 20세기 이스라엘의 '건국의 아버지'가 바로 벤구리온이었다. 그 벤구리온의 젊은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가 시몬 페레스이다. 파릇파릇한 스물다섯 때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이스라엘을 방문하기 석 달 전에 사망했다. 9월 28일에 눈을 감았다. 93세, 근 일백년을 지긋이 살았다. 극단의 20세기,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얼추 70년 동안 국가경영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장관만 10번을 했고, 총리도 70-80-90년대 한 차례씩 3번이나 역임했다. 말년에는 대통령으로도 추대되었다. 우리로 치자면 이승만 시대부터 박근혜 시대까지 공직을 두루 경험한 것이다. 영욕의 세월이 아닐 수 없다. 1994년 노벨평화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는가하면, 일생을 항상적인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2016년을 페레스 없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디 이스라엘은 사회주의 국가로 출발했다. 키부츠의 농업에 기초한 공동체 경제를 강조했다. 건국 초기 노선 투쟁이 치열했다. 스탈린을 모시는 이들은 강철국가 소련을 따르고 싶어 했다. 벤구리온과 페레스는 자주노선을 견지했다. 주체사상, 유대교 사회주의를 고수했다. 유대교의 도덕과 교리를 기반으로 민족정신을 구현하는 독립 국가를 우뚝 세우고자 했다. 역사도 전통도 종교도 말살한 공산국가는 유대인의 정신과 어울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첫 20년, 순항하는 듯 보였다. 이웃 이슬람 국가들과의 항상적인 전시 상태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3배나 증가하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배 가까이 뛰었다. 주택과 도로부터 전력망과 항구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정부가 대규모 투자한 결과였다. 정부는 거의 모든 산업의 투자자이자 소유자였고, 경제정책과 통화정책의 결정자였다. 그러나 국가가 선도하는 사회주의 체제의 유효성은 딱 거기까지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시스템이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인플레이션 증가율이 400%까지 치달았다. 이스라엘 통화인 셰켈의 가치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텔아비브 증시도 폭락장을 거듭했다. 국가는 재정파탄을 경험했고, 개인은 실업과 빈곤의 늪에 빠졌다. 오늘날 스타트업의 천국, 창업국가, 혁신국가의 모델로 간주되는 이스라엘과는 전혀 다른 나라였던 것이다. 그 전면적인 개혁과 전폭적인 개방을 진두지휘했던 이가 바로 시몬 페레스다. 총리 취임 직후 미국으로 날아가 대규모 차관 제공을 약속받았다. 급한 불을 끄고 나서는 체질개선, 대규모 구조조정에 임했다. 건국의 초석을 다졌던 사회주의와는 급진적인 작별을 고했다. 중국의 개혁개방,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베트남의 도이모이에 앞서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체제전환을 실험한 것이다.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민간영역을 키워가며 자본주의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정연한 논리로 '노사정 위원회'를 만들어낸 이가 바로 페레스이다. 이스라엘 특유의 '선군' 산학 복합체 모델을 완성한 사람 또한 페레스이다. 탈피오트를 만들어 군대가 축적한 기술을 시장과 결합시켰다. 요즈마 펀드를 지원하여 대학과 연구소의 지식을 자본과 융합하는 물꼬를 틔웠다. 이스라엘은 고등교육을 이수한 우수한 인력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또 만인이 군복무 경험이 있는 규율 잡힌 사회질서를 자랑했다. 인재와 민간의 역량을 혁신적인 창업으로 연결하는 이랑을 파고 고랑을 만들어준 것이다. 1990년대 탈냉전과 함께 저변의 저력이 일거에 폭발한다. 제3의 물결, 세계화와 정보화와 금융화의 물결에 가장 잘 적응하고 가장 잘 성공한 나라로 부상하였다. 괄목상대할만했다. 경제의 기반은 기술이고, 기술의 근간은 교육이다. 과학과 공학이 경영학과 금융을 만나 창조경제, 창의 산업이 만발하였다. 이스라엘에서 발명된 USB가 글로벌 정보산업을 지탱하였고, 이스라엘이 개발한 알약보다 작은 카메라가 환자들의 몸속을 관찰하며 생명을 살렸다. 이스라엘이 만든 GPS 시스템이 전 세계를 관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자율주행차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교통사고가 난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발명된 로봇다리를 통해 다시 걸어 다닐 수 있으며, 파킨슨병과 다발성 경화증으로 고생하던 이들도 이스라엘이 개발한 치료제로 증상을 완화시키고 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21세기 최고의 창업국가 이스라엘을 만든 '건국의 아버지'는 명명백백 벤구리온이 아니라 시몬 페레스이다.2. 미션 임파서블
1993년 9월 13일 오전 11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첫 평화협정이 시작되었다. 역사적인 날이었다. 당시의 외교부 장관도 시몬 페레스였다. 오래된 노력의 결실이었다. 1994년 오슬로 협정과 노벨평화상으 로 가는 첩경이었다. 압도적인 감동과 기쁨, 환호와 희열의 순간이었다. 어제에서 내일로, 과거에서 미래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가는 이정표였다. 1994년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되고 북조선의 핵개발과 미국의 제재가 악순환을 이루는 지난한 '고난의 행군'의 출발이 되는 해였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스라엘이 (일시적으로) 성취한 중동의 평화가 실상은 핵 억지력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사실이다. 영변의 핵시설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스라엘은 디모나 프로젝트를 가동하였다. 디모나 원자로를 가동함으로써 오히려 전쟁 자체를 방지하고 평화로 가는 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내부와 외부의 반발을 뚫은 최고 지도부의 결단이었다. 그 역사적 선택에도 시몬 페레스가 있었다. 건국 직후부터 자주국방은 이스라엘의 숙원이었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이 아무리 우호적이라 한들, 국내 정치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중동 정책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었다. 안보만큼은 외국 정부에 의존해서는 국가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없었다. 종속국가가 아니라 주권국가가 되어야했다. 국제정치의 인질이 될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 변화의 이니셔티브를 쥐어야 했다. 반드시 자주국방을 달성해야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핵무장을 하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가장 어려운 길이기도 했다.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해칠 것이라는 내부의 우려가 적지 않았다. 일부는 또 소련의 반응을 두려워했다. 이란부터 이집트까지 주변 이슬람대국의 대응도 걱정이었다. 경제적인 논란도 적지 않았다. 여전히 근근이 살림을 영위하고 있는데 원자력에 자원과 자금을 할당한다면, 그만큼 빈곤 탈출의 속도가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없지 않았다. 이 모든 반대와 우려를 잠식하고 핵개발을 정책 결정자들에게 설득해내었다. 그 다음에는 젊은 과학자들도 견인해야 했다. 원자로는 예나 지금이나 위험도가 큰 시설이다. 디모나 원자로는 네게브 사막의 허허벌판에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뛰어난 과학도와 공학도,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까지 마련해 주어야했다. 이 모든 난관을 뚫고 핵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전략 수립 다음에는 지략이 필요했다. 그 유명한 '핵 모호성'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핵무기의 존재를 확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모호한 전략이었다. 반신반의하는 케네디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고안된 신박한 아이디어였다. 그 후 핵 모호성은 반세기 가까이 이스라엘의 공식 입장이 되었다. 이 단어 또한 페레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임기응변이 장기적인 정책으로 수립된 것이다. 그 표현 덕분에 중동에서는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더는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 멸망을 도모할 수가 없었다. 디모나의 존재는 사방의 적국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지워내려는 욕구를 더욱 증폭시키는 반면으로, 결코 전면전으로 치달을 수 없는 방파제 역할도 했던 것이다. 언제든 핵 공격으로 보복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중동 정세의 게임 체인저가 된 것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는 법이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통념이 중동 전체에 퍼져나갔다. 이스라엘은 명민하게도 그러한 의혹을 확증하거나 부인하지도 않았다. 의혹은 단단한 돌처럼 굳어졌고 움직이지 않는 확신이 되었다. 이웃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파괴하겠다는 야망을 하나둘 버리기 시작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에서 톡톡한 효과를 발휘했다. 이집트도 시리아도 이스라엘의 중심부만큼은 공격하지 않았다. 변방에서의 승리에 만족할 뿐 중앙으로까지 진출하지 못한 것은 핵 대응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거꾸로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 1977년 11월이다. 4차례 중동전쟁에 모두 개입했던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조약도 '핵 모호성'에서 비롯했던 것이다. 유럽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아랍에 세워진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아랍의 제2차 홀로코스트를 원천 봉쇄하게 된 전략이 바로 '핵 모호성'이었다. 그런데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과 이슬람국가의 평화체제를 만인이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서아시아 대분열체제, 중동의 분열과 갈등에 기생하는 세력도 잔존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의장 아라파트를 인정하지 못했다. 테러리스트와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견디지 못하는 내부의 적폐가 여전했다. 결국 페레스와 아라파트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던 라빈에게 총구를 겨눈다. 일국의 총리가 암살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 암살범의 정체는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유대인이었다. 아랍 국가들과의 평화협정을 막는데 필사적인 내부 세력이었다. 실제로 이스라엘 본국의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가 빈발하였다. 오슬로 협정은 평화로 가는 마침표가 아니라 한숨 돌리는 쉼표에 그쳤던 것이다. 더 멀리 나아가야 했고, 더 깊이 진행되어야 했다. 라빈 총리의 후계자로 이 임무를 계승한 인물 또한 시몬 페레스였다. 평화는 간단한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절망에 굴하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강철 같은 정신력이 필히 요청되었다. 그 부단한 인내심과 고단한 추진력을 감당할 철인으로 그만한 인물이 또 없었다. 페레스는 1960~70년대의 자주국방 모색부터 1980~90년대의 평화체제 건설까지 이스라엘의 대외전략에 깊숙이 개입했다. 실제로 오슬로 협정 이후 이스라엘 경제는 더 넓은 중동으로 개방될 수 있었다. 대외 개방과 내부 개혁의 공진화, 이스라엘식 개혁개방이 본격화된 것이다. 21세기 혁신국가, 창업국가의 밑바탕을 반세기 가까이 다진 일등공신 또한 시몬 페레스라고 하겠다.3. 비저너리 : 뿌리와 자리
군사부(君師父) 일체를 체현한 인물이다. 리더이자 멘토였다. 비저너리(Visionary)였다. 이스라엘 청년들에게 세 가지만큼은 가장 앞서가라고 주문했다. 깊은 바다, 높은 우주, 그리고 심오한 생명이다. 세 가지의 공통점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학문이다. 호기심 넘치는 호학 군주였다. 국사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짬을 내어 고등학교에 나가 재능 기부 자원봉사로 정기적인 수업을 했을 만큼 미래세대에 대한 애정과 열정 또한 남달랐다. 기계공학과 소립자 물리학, 분자과학 등 과학자와 공학자 양성에 양팔을 걷어 붙였다. 소명의식으로 가득했고, 사명감으로 투철했다. 불가능한 것을 꿈꾸었으되, 리얼리스트이기도 했다. 과거에 안주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지폈다. 기억은 이미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가보는 것이지만, 상상은 아직 안 가본 길을 미리 가보는 것이다. 전문가란 단지 과거에 근거한 존재들이다.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전문가는 부재하다. 도래하지 않는 미래는 도전자와 개척자가 만들어낸다. 이스라엘을 유대교 사회주의 국가를 이스라엘 특유의 자본주의로 전환시킨 것도, 항공산업과 우주산업과 생명산업을 필두로 한 밀리테크의 최선진국으로 만든 데도 모험과 탐험을 마다치 않는 시몬 페레스의 과감한 리더십이 있었다. 임종을 앞둔 페레스는 그가 일생을 통해 꾸었던 꿈을 한 움큼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일한 후회라면 더 큰 꿈을 꾸지 않았던 것이라고 했다. 이 타고난 몽상가에게도 시련이 없었을 리가 없다. 그때마다 오뚝이처럼 되살아나고 다시 일어섰던 배경에는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유대교 학자, 랍비였다. 이스라엘 건국 정신의 뿌리였다. 유럽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탈출하는 과정에서도, 아랍의 불모지 요르단 계곡에 최초의 키부츠를 건설하며 생명의 땅으로 탈바꿈해가는 와중에도, 새벽마다 늘 일찍 깨어나 나직하게 경전을 암송하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어려운 선택에 직면할 때마다 가장 흠모했던 할아버지의 정신을, 그 '거대한 뿌리'를 되새김질 하면서 의지를 다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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