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을 잃고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일어난 '준강간', 동의 없이 촬영한 '불법촬영', 거기에 약물사용이 의심되는 상황. 지난해 7월 실제 일어난 사건이다. 피해자는 신고했다. 가해자의 휴대폰을 디지털포렌식한 결과, 그 영상을 여러 메신저와 소셜미디어 등에 업로드와 다운로드를 반복한 정황이 나왔다. 그런데 처벌은커녕 몇 달째 수사가 진척이 없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 피해자의 몸에서 약물검출이 안 됐다. 그래서 준강간범죄를 수사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영상을 유포했는지는 정황만 있을 뿐,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고 했다. 피해자는 신고할 때부터 영상 유포가 의심되니 컴퓨터와 클라우드 드라이브 등을 함께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경찰은 압수수색이 아닌 '임의제출'을 통보했다. 피해자는 15일, 서울 서초구 서초경찰서 앞에서 열린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준강간 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기자회견에 입장문을 보냈다. 피해자는 "(경찰로부터) 가해자의 노트북을 임의제출 받으려다가 '멸실됐다'는 소식을 들은 날, 분노와 절망에 빠져 창밖으로 몸을 던지려던 저를 부모님이 잡아주셨다"라며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지금도 하루에 수백번 저를 찾아온다"라고 전했다. 피해자는 "피해를 겪고 이를 입증한 증거물이 있는데도 나의 피해사실을 사회가 정한 사법제도 시스템 안에서 인정받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인 줄 꿈에도 몰랐다"면서 "수사과정에서 제가 지금까지 믿어온 사회정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방이 막혀있는 방에 홀로 갇혀있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끔찍하다는 표현으로 형용할 수 없는 불법촬영물들, 수사기관이 저에게 2차 가해하며 했던 말들과 말투 표정 하나하나가 비디오 플레이어 재생되듯 매일 떠오른다"면서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는 걸 갈지만 수사과정에서 일어난,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마주하며 저는 산산조각났다"고 했다.
"GHB(물뽕)의 존재가 알려진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성범죄에 사용되는 약물은 마약이나 향정신성 약품들, 종류가 너무 다양하고 약물에 의한 성범죄는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2019년 버닝썬 사건 이후 경찰은 약물관련 범죄 수사 지침을 개정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약물이 의심되는 사건에서 가해자를 기소조차 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GHB는 피해자가 전혀 기억을 못할뿐더러 몇 시간이 지나면 체내에서 대부분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4년 동안 약물이 의심되는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약물이 검출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합니다. 제 사건에는 15분짜리 동영상이 있습니다. 약물이 검출되지 않았더라도, 피해자가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이라면 약물수사 지침에 준해 기소하도록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간곡히 탄원드립니다.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피해자가 보호받고 범죄자가 합당한 죄의 대가를 치르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주십시오."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공대위는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이들은 "약물이 의심되는 성폭력 사건들은 이 사례처럼 약물 검출이 안 됐다는 이유만으로 가해자가 불기소되거나 법적 처벌을 피한다"라며 "이런 허점이 범죄자들에게 더 이상 악용되지 않도록"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 피해지원팀장은 불법촬영물 유포 여부도 적극적으로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팀장은 "지난해 한사성 접수된 전체 피해 유형 중 약 56.8%는 촬영물 이용한 성폭력이다. 불법촬영, 비동의 유포, 유포 협박, 촬영물을 이용한 그루밍성착취 등을 모두 합한 값"이라며 "피해자들은 유포의 중단뿐 아니라, 가해자가 갖고 있는 촬영물의 완전한 삭제와 유포 가능성의 차단까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가해자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수사가 종결되는 경우가 많고, 가해자가 다른 핸드폰 제출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즉각적인 압수수색이 없어서 가해자는 얼마든지 증거를 인멸하고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제출한다. 수사기관이 구글 드라이브 등 온라인 저장공간을 안 보는 경우도 많다"라며 수사의 허점을 지적했다. 이어 "가해자가 처벌을 받더라도 피해자는 끊임없이 영상이 유포되진 않을까 불안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 사건의 철저한 수사를 통해 피해자들이 재유포의 불안을 해소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돼야 한다"고 전했다. 이하 피해자 입장문
머릿속에 셀 수 없는 수많은 실타래들이 얽히고 설켜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르겠는 심정으로, 저는 하루하루를 정신과 약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꿈도 많았고 정말 열심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범죄자였던 당시 남자친구도 제가 누구보다 신뢰하며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마주해야 했던 단순히 끔찍하다는 표현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불법촬영물들, 수사관이 저에게 2차 가해를 하며 했던 말들과 말투, 표정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마치 비디오플레이어가 자동재생 되듯이 매일 매일 저에게 찾아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앞으로 제 삶을 위해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수사과정에서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직접 마주하며 저는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피해자가 피해를 겪고도, 또한 그것을 입증할 명백한 증거물이 존재함에도, 피해사실을 사회가 정한 사법제도 시스템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일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수사과정에서 제가 믿어왔던 사회 정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사방이 막혀있는 컴컴한 방에 홀로 갇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해자 노트북을 임의제출 받으려다 멸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분노와 절망에 빠져 모든 이성을 잃고 창밖으로 몸을 던지려던 저를 부모님이 잡아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제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절망적인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백 번 저를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렇게 두 다리에 다시 힘을 주고 제 목소리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들릴 수 있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부조리로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 그리고 아무 관계도 없음에도 저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사회봉사단체 선생님들, 또 저와 같은 형편의 약자들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가 사라진다면 매일매일 마주해야 하는 고통에서 저 자신은 해방되겠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무너지는 저에게 그러지 말라고 다독입니다. 저는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진 자이던, 혹은 못가진 자이던 상관없이, 범죄 피해자가 정당한 수사에 기반하여 정의로운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성폭력피해자들이 피해를 당하고도 2차 가해로 인해 자책하거나, 피해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잘못된 수사관행으로 인해 피해사실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제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살아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피해자가 되어 불합리한 현실을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 저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일들에 분노하기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무관심하였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직접 피해를 겪은 저조차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이 암담한 현실은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란 것을 말입니다. 제 목소리는 허공에 공허한 외침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주변 분들의 도움을 받아 하나 둘 씩 목소리를 합해간다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작은 변화들이 시작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 저는 이 글을 씁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의를 위해 싸워 오신 감사한 분들이 계셨기에, 그래서 많은 것들이 변화해 올 수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저는 지금 이 글을 씁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또 매순간 나쁜 생각들이 저를 찾아오지만 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우리 모두가 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때까지, 먼저 행하고 계시는 존경하는 사회단체 선생님들을 따라 결코 무너지지 않고, 세워 놓으신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시민여러분, 약물에 의한 성범죄가 20년 넘게 근절되지 못하고 판을 칠 수 있는 우리 사회가, 이제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함께 목소리 내어 주십시오, 약물이 검출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소조차하지 않는 수사기관의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방관하는 관행을 이제는 끊어 내어 주십시오... 2019년 버닝썬사건이 우리 사회를 크게 뒤흔들어 약물관련 성범죄 수사지침서까지 개정한 이후에도, 우리 경찰은 아직도 약물이 의심되는 '준강간' 성폭력 사건에 대해 가해자를 기소조차하지 않는 수사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준강간의 도구가 되는 약물은 마약이나 향정신성의약품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한 예로 GHB,일명 '물뽕' 약물에 대한 사회적 폐해는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2019년에 MBC 뉴스데스크는 독일기자가 실제로 물뽕을 투약 받고 보이는 증상을 방송에 송출하기도 했으며, 그러한 결과로 2019년 8월에는 경찰청차원에서 약물관련 수사지침서를 개정하기도 했습니다. 개정된 수사지침서는 GHB증상으로1.주변 사람과 정상적으로 대화하지만 잠든 후 깨어나면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함,2.자유의지를 상실한 채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사지침서를 개정까지 하고서는 약물이 인체에서 검출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기소조차하지 않는 악습을 2021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언론보도로 확인된 내용을 보면 GHB약물은 6시간이면 인체에서 대부분 빠져나가 피해자에게서 약물이 검출된 사례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4년 동안 한 건도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백히 관찰 가능한 15분 분량 동영상이 발견되었으니 이제는 악한 관습을 끊어 낼 작은 계기라도 마련된 것이 아닌지요? 약물이 검출되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정상적이지 않은 동영상이 발견된다면, 약물수사지침서에 준하여 기소를 하도록 관련 수사지침서를 개정한다든지 뭔가 변화가 있어야하지 않겠는지요? 수사의 단서가 될 유일한 동영상이 발견되었는데도 여성가족부에서 지원한 대학병원 전문의를 비롯한 여타 전문가들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저의 사건을 담당한 서초경찰서 여성청소년과 과장님의 결정이 대한민국 경찰청의 공식적인 의견인지 묻고 싶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여성사회의 고통과 외침에 침묵을 넘어 방관자로 일관하실 것인지요? 지난 20년 동안 고통 받고 있는 이 약물에 의한 성폭력이 의심되는 준강간 성폭력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법무부를 위시하여 경찰청,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등 범정부 차원의, 더하여 시민사회단체가 협력하는 범국가 차원의 협의체를 구성해 주시기를 탄원 드립니다. 대한민국 국민 절반이 수십 년 동안 고통 받아 온 이 일을 이제는 더는 외면하지 말아주시기를, 그리고 가능한 해결책을 강구하여 시민사회에 대답해 주시기를 대통령님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 여러분들께 간곡히 탄원 드립니다. 피해자가 보호받고 범죄자는 합당한 죄의 댓가를 치르는 공정한 사회....... 이것이 우리 선량한 시민사회 모든 구성원이 바라는 대한민국의 2021년 오늘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2021년 4월 15일 피해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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