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죽음 마저도 차별당하는 사람들…장례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죽음 마저도 차별당하는 사람들…장례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② 박진옥 사단법인 나눔과나눔 상임이사

평범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평범함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평범함'이란 게 대체 뭘까. 나는 평범한가, 평범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가. 평범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평범한가. 반대로 평범하지 않은 건 노력이 부족해서인가, '비정상적'인 건가.

'평범'이라는 단어가 평범하지 않게 들린 건 지난 5월 말이었다.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 시작됐을 때, 청원 이유에 들어있던 '평범함을 빼앗긴 사람'이란 문구에 꽂히면서다.

청원은 지난해 동아제약 채용 성차별 사건을 알린 당사자 A 씨가 작성했다.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한 '평등의 에코-100(echo-100)' 캠페인이 출범했다. 인권시민사회단체, 종교계, 문화예술계 등 다양한 영역에 있는 100명의 사람들이 지지를 선언하며 국민동의청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A 씨가 면접에서 겪은 사건이 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으로 이어졌듯이 100명의 사람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경험으로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지난 5월 25일부터 시작된 '차별금지법 제정하자! 10만행동'의 결과는 약 3주만에 나왔다. 차별금지법 제정 국회청원이 10만 명을 돌파했다.

형사사건인 디지털 성범죄부터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죽음, 뭐 같은 밥벌이 때문에 견디는 직장갑질, 저 멀리 북극곰만의 문제인 것 같은 기후위기와 '오늘이 제일 싼' 집 문제 등등. 평범하게 흘러가는 일상은 사실 평범해선 안 될 이야기로 굴러간다.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묘하게 같은 이야기로 들린다면 이제 합의가 아니라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뜻일 거다.

<프레시안>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100명의 선언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각자가 고민한 차별에 대해 물었다. <프레시안>은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시민들을 릴레이로 인터뷰 해 싣는다.편집자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① "조주빈 처벌하면 만사 끝?…성차별 끊어내는 게 폭력 근절의 전제" (☞바로가기)

▲매년 유엔이 정한 빈곤철폐의 날에 무연고사망자들을 봉안한 '무연고추모의집' 앞에서 합동위령제를 진행하고 있다. 쪽방촌 주민들은 먼저 무연고로 보낸 동료를 추모하고 본인도 무연고로 이곳에 올 예정이라고 말한다. ⓒ나눔과나눔
흔히 '죽으면 끝'이라고 한다. 착하게 살든 나쁘게 살든, 돈이 많든 적든 누구나 죽는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남은 짐을 정리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장례는 분명 남은 사람들을 위한 자리다. 누가 오고 몇 명이 오고, 화환이 몇 개가 오고 조의금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등등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에게는 큰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장례를 치를 형편이 안 되거나 치러 줄 사람이 없으면 무연고사망자로 처리된다. <평등의 에코-100>에 참여한 박진옥 사단법인 나눔과나눔 상임이사는 십여년 전 위안부 피해자의 장례를 지원하면서 무연고사망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박 상임이사는 장례를 할 수 있고 없음에서 차별이 있다고 말한다.

프레시안 : <평등의 에코-100>은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박진옥 : 차별금지법 제정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는 획일성을 강조한다. 차별금지법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인권이나 차별은 특정한 누군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다양한 사회 분야의 사람들이 자기가 있는 현장에서 차별금지법이 바로 우리의 삶과 연결됐다는 이야기를 하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될 것 같다. 저는 죽음과 장례 영역. 이런 활동에서도 차별과 다양성이 보장되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캠페인에 참여했다.

프레시안 :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만큼은 평등하다는 말도 있다. 죽음과 차별이 어떤 관련이 있나.

박진옥 : '누구나 죽는다'라는 명제를 보면 죽음은 평등하다. 문제는 죽음 이후의 장례와 같은 사후 사무에 있다.

단적인 예로 신문에 부고란이 있다.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 장례 소식을 알린다. 부고란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알릴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상징하는 바가 있다. 부고란은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는, 보전할 가치가 있는, 인정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과 아닌 삶을 구분하는 공간이다. 부고란을 통해 공적으로 애도할만한 삶, 주목할 만한 삶과 아닌 삶을 나눈다.

프레시안 : 사회가 개인의 죽음을 두고 그 삶을 판단하면서 필요한 사람, 살 가치가 있었던 사람과 없었던 사람을 구분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박진옥 :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하지만 정말 평등한가. 죽음 이후의 장례와 사회가 그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차별적이다. 무연고사망자는 시신이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 마치 존재한 적도 없는 사람이 된다. 애도가 없어도 되는 사람, 애도할 사람도 없고 애도할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처럼 사라진다.

차별금지법에서 정하고 있는 차별금지 사유들이 있다. 성별, 나이, 장애, 피부색 등. 가구와 가족형태도 중요한 차별의 요소 중 하나다. 장례에서 문제가 되는 건 이 부분이다. 장례를 할 권리가 오직 연고자에게만 있다. 연고자만이 시신을 인수해서 장례를 치를 수 있다. 법적으로 연고자는 법적 배우자, 그리고 직계 존비속, 형제자매까지다. 요즘은 예전과 가족과 가구를 이루는 형태가 다양화됐다. IMF를 겪으면서 가족구조가 크게 변했다. 이혼도 증가하고 전통적인 가족공동체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부모자식간의 혈연관계도 쉽게 단절된다. 1인 가구도 많이 늘어났다. 가구와 가족형태의 변화를 보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 비혼이 늘어났다. 형제자매가 없는 사람도 많고 또 고아로 홀로 살아온 사람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다.

프레시안 : '무연고사망자'라면 막연히 신원불상자의 객사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박진옥 : 아름다운재단에서 하는 <18세 어른>이라는 캠페인이 있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홀로 남은 사람도 있고, 가족은 있지만 모든 가정이 화목한 것도 아니지 않나. 소외되고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 미혼모·부, 독거노인. 친인척이 이민상태인 사람도 많다. 무연고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연고자가 돌보지 않는, 돌볼 수 없는 숱한 개인사가 존재한다. 이렇게 가족과 가구의 형태가 다양해지는데 현재 법률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차별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결혼도 안 하고 형제도 없다면, 법률상 무연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연고가 있다. 친구도 있고 하던 일도 있다. 크리스천이라 교회 공동체도 있고. 그런 관계가 있다. 그런데 무연고다. 친한 친구가 내 장례를 하고 싶어도 연고자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만약에 내가 법적으로 결혼을 한 건 아니지만 30년 함께 산 사실혼 배우자가 있다면,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우자는 내 장례를 할 수 없다. 바로 이런 게 가족과 가구 형태에 따른 차별이다. 가족의 형태는 더 다양해지고 있는데 현재의 법률과 사회는 여전히 흔히 말하는 정상성, '정상가족'을 기준에 두고 애도할 수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을 구분 짓는다.
▲2018년 마련된 서울시 공영장례 빈소 전경-무연고사망자와 저소득시민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서울시립승화원에 설치된 빈소는 공영장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눔과나눔

프레시안 : '정상적인 삶'을 살았느냐로 애도할 가치가 있는 삶을 판단하는 것도 문제지만 '무연고'로 분류하는 기준도 문제가 있다.

박진옥 : 사례를 더 들면, 가장 쉽게 접하는 사례는 조카다. 조카는 자식뻘이다. 그런데 조카가 삼촌의 장례를 할 수 없다. 고모가 조카들을 자식처럼 키웠어도. 시장 상인도 있었다. 시장에서 수십 년 동고동락한 다른 상인들이 고인의 장례를 치르고 싶어했는데 못했다.

나눔과나눔은 홈페이지에서 무연고사망자의 부고를 알린다. <비마이너>가 이를 기사로 알린다. <비마이너>의 부고란을 보고 무연고사망자의 친구들이 장례에 오기도 한다. 친구가 죽었는데 무연고가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던 거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나눔과나눔이 나오고 거기에 부고가 계속 올라오고 있으니까. 어떤 사람은 친구의 부고를 보려고 한달 동안 매일 홈페이지에 들어왔다고 했다. 장례를 하다 보면, 고인과 관계가 있던 사람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사회적으로는 아니라지만 고인의 지인에게는 중요한 부고다. 그런데 사회는 고인을 '무연고사망자'라고 분류해서 치워버린다.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취급한다.

프레시안 : 누구나 무연고가 될 수 있다. 취약계층이 많을 것 같은데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무연고사망자가 되나. 가구나 가족형태의 문제 외에 다른 이유가 있나.

박진옥 : 연고자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연고자가 있는데 관계가 단절된 경우가 많다, 연고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또 연고자가 경제적 어려움 같은 개인사를 이유로 시신 인수를 해도 무연고사망자가 된다.

이주노동자가 그런 경우가 많다. 시신을 본국까지 이송할 수 없다. 본국에 있는 가족들도 너무 가난해서 그런 절차를 감당할 수 없는 거다. 누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사연이 다양하다. 나이로만 봐도 영아부터 100세 어르신까지 있다.

프레시안 : 무연고 사망 아기가 있을 수 있나. 학대 사망 같은 경우인가.

박진옥 : 다 학대라고 할 수 없다. 출산하는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아기를 무연고로 보내기도 했다. 출산을 의료기관이 아닌 곳에서, 이를테면 집에서 하는 것이다. 집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있다.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임신. 병원도 제대로 못 가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운 적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그러다 병원도 아닌 곳에서 홀로 출산을 하는데 그러다 아기가 죽으면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 여성은 아기 죽인 혐의로 수사를 받는다. 베이비박스에 두고 간 아기가 죽는 일도 있다. 많이 아팠거나 난치병이 있었다든가. 아기의 죽음에도 이유가 정말 많다. 학대라고만 할 수 없다. 학대 사건이 많이 알려지면서 무연고 사망 아기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일들이 많다. 조심하고 있다. 아기가 무연고사망자가 된다는 건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다. 잘 안 알려져 있다. 아기의 죽음은 쉬쉬하는 것도 있고. 특히 여성에게 손가락질할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여성이 임신하고 출산을 하기까지 어떤 사회안전망이 있었나.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다, 어디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가르쳐주기를 하나.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지 영아 유기, 영아 살해 이렇게만 조명하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

프레시안 : 갓 태어난 아기의 죽음, 개인의 죽음이지만 개인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장례를 할 수 있고 없고도 문제지만 죽음 자체에도 제도의 한계나 사회안전망의 부재가 느껴진다.

박진옥 : 무연고사망자의 직업도 다양하다. 공무원 생활을 30년 한 사람도 있었다. 안정적으로 잘 살았는데 말년에 무언가가 삐끗한 거다. 강남 대치동에서 큰 학원을 운영한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자녀들이 다 미국에 있었는데 자녀들이 시신 인수를 포기해서 무연고사망자가 됐다.

무연고사망자를 개인이 잘 살고 못 살고의 어떤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 개인 차원의 죽음이라고 보면 해결되지 않는다. 예전엔 개인의 문제였다. 질병을 예로 들면, 그건 개인의 건강 문제였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족공동체가 환자를 돌봤다. 보육이나 노인돌봄도 각 가정이 알아서 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점점 개인이 책임지지 못하고 가정이 대응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나고 그게 사회문제로 드러났다. 건강보험제도나 고용보험, 산업재해, 연금 등등. 복지제도가 늘어나고는 있지만 죽음이나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하다. 단적으로 국립의료원은 돈이 없는 사람도 치료해준다. 그런데 죽으면 그 가족들에게 '돈이 있으면 장례하고 없으면 시신 포기하면 국가가 화장해준다'라고 얘기한다. 그게 끝이다. 죽음 이후는 개인이나 가족공동체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연고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기 돈으로 하겠다 해도 못 하고.

프레시안 : 가족이 죽었는데 시신을 포기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박진옥 : 시신 인수를 포기한 이유도 다양할 것이다. 제3자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다.

무연고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처음에 사망자의 가족들이 그렇게 미웠다. 그래도 가족인데. 가족이 죽었는데 왜 포기하는 거야, 왜 와보지도 않는 거야, 이렇게. 그러다 가끔씩 찾아오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이야기 들으면 또 (사망자가) 나쁜 놈이었네, 아 좀 잘 살지, 하는 생각도 드는 거다. 현장에서 계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고인의 삶을 알게 되면서 지금은 그런 생각이다. 잘 못살고 싶었던 사람들이 어딨겠나. 잘 살고 싶었는데 잘 안 됐겠지. 고인도 그 상황에 나름 최선을 다한 게 아니었을까, 하고. 사회적 기준이나 이런 점에서 미흡할 수 있지만 나름 그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살다 간 사람 아닌가, 하고 정리하게 됐다.
▲장례절차가 모두 끝나고 위패를 가져갈 가족이 없어서 고인의 이름을 소지하는 것으로 장례를 마무리한다. 육신에 이어 이름마저도 재로 변하는 순간이다. 만나자마다 먼길 떠나는 고인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나눔과나눔

프레시안 : 무연고사망자 늘어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박진옥 : 걱정이다. 사망자의 가족이 걱정된다. 법적인 연고자가 없는 사람들보다 연고자가 있지만 포기한 경우가 많다. 이유는 관계 단절, 경제적 이유.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시신 인수를 포기하고 장례를 하지 못하는 거다. 그런데 이게 '장례를 못했다'라고 끝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 사람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 누군가의 장례에 가게 될 것이다. 고인을 애도하고 남은 가족들을 위로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고인을 함께 기억하고 슬퍼할 것이다. 그게 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을까. 자기는 가족을 포기했는데.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수십 년 연락도 안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지만 정말 괜찮냐는 거다. 나는 그 사람들의 심리상태가 걱정이다. '나는 돈이 없어서 가족 장례도 못 치렀다'라는 죄책감이나 후회,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혹은 연고자는 아니었지만 죽은 사람과 관계가 있었든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장례는 죽은 사람을 보내는 과정이지만 남은 사람들이 애도를 통해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년 무연고사망자가 3000명 정도였다. 가족이나 지인이 2~3명 있었다고 치면 1만 명이다. 장례를 포기했거나 치르고 싶었는데 못 치른 사람이. 사회가 이걸 방치한다는 게 불안하다.

프레시안 : 장례를 치르고 말고가 남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인가.

장례식 : 트라우마가 남을 수 있다. 시신 인수를 포기할 때 위임서를 쓴다. 연고자가 장례를 안 하겠다는 위임서다. 그거 한 장 쓰는 게 뭐가 어렵냐 싶겠지만 정말 어렵다. 한 번은 몇십 년 연락 안 된 오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 나눔과나눔을 찾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너무 당황스럽고 놀란 상태에서 시신을 확인했는데, 담당자가 "돈 있으면 장례하고 없으면 포기해라" 이런 거다. 그 사람도 나이가 많고 장례를 치를 형편이 안 돼서 위임장을 썼다. 그런데 내려가는 길에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다. 다음날 다시 연락해서 어떻게든 장례 치르겠다니까 이미 서류가 접수돼서 안 된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고 가서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동생의 시신을 확인했다.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시신 위임서를 받았는데 도저히 못 하겠는 거다. 계속 '아, 동생이었는데'. 한참을 고민하다가 하루의 말미만 달라고, 지금은 못하겠다고 하고 나왔다. 물론 가정사 같은 이유로 그냥 쓰는 사람도 있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프레시안 : 장례를 치른다는 게 '인간의 도리를 다한다'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박진옥 : 어떤 사람은 위임서 작성하고 나서 밤에 친구랑 술 마시다가, 친구가 '아버지 장례 안가냐' 그래서 '안 갈 거다. 위임했다' 하니까 친구가 '너 그럼 안된다'면서 장례에 끌고 왔다. 장례 끝나고 가면서 '그래도 잘 왔다'고 했다.

이런 일을 종종 목격한다. 장례를 통해 치유하는 것. 어떤 이유로 관계가 단절됐든 상처가 있든.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고인의 아내와 딸이었다. 가정폭력 때문에 오래전에 도망쳤다고 했다. 근데 장례에 온 거다. 고인의 딸이 장례 끝나고 문자를 보냈다. 고인이 되게 미웠고 그래서 장례도 안 하려고 했다고. 근데 장례를 하고 나니 이제 죽었다는 걸 받아들이고 내가 좀 용서할 수 있게 됐다고 하셨다. 사실 장례라는 게 죽음을 인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남은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한 무언가를 정리하는 거다. 이런 기회를 제공하느냐 안 하느냐는 꽤 크다. 관계가 단절돼서, 돈이 없어서 장례를 못하는 게 당연해선 안 된다. 아무런 대책 없이 사람들을 방치하는 거다. '너희들의 심리는 너희 알아서 해라' 이렇게. 이걸 계속 겪어보니까 이게 된 사람과 안 된 사람의 차이가 크다. 그래서 걱정이다.

프레시안 : 장례 왜 치러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을 거 같다. 개인의 죽음이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나.

박진옥 : 우선은 '공영장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공영장례는 개인의 죽음을 사회적으로 애도하는 것이다. 무연고사망자의 시신은 그냥 '처리'만 되고 아무런 애도 과정이 없다. 나눔과나눔은 그 누구도 장례의식 없이 시신이 처리되지 않도록 장례를 지원하는 단체다.

공공은 정부와 공동체를 말한다. 공공이 단지 무연고사망자뿐 아니라 저소득 시민까지, 재정적 어려움 있는 사람들도 인간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게 가족과 지인들이 애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애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 고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마음을 정리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게 공공장례다. 우선 고인의 연고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장례가 어려우면 최소한 장례를 할 수 있게 공공이 지원하는 게 첫 번째다. 두 번째는 가족이 아니라 해도 지인이나 누군가가 고인의 장례를 하고 싶다면 할 수 있다면 '가족대신장례'를 지원한다. 세 번째는 가족도 지인도 없으면, 아무도 장례를 안 한다면 사회 공동체가, 시민들이 함께 잘 가시라고 애도한다.

프레시안 : 사회공동체가 개인의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박진옥 : 왜 이걸 해야 하느냐면, 아마 죽음은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질문했을 거다. 사회적으로 장례식이 왜 중요하냐는 뜻이기도 하고.

부고란으로 설명했지만 장례의 유무는 죽음으로 차별을 조장하는 것이다. 의례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되지 못하는 사람, 정상적인 죽음과 비정상적인 죽음을 나누는 것이다. 사회가 장례라는 걸 통해 죽음의 의미를 위계화한다. 개인의 삶을 평가하는 어떤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과 맞는 사람에게 다른 대우를 한다. 배제와 차별을 강화하는 게 장례다. 내가 주장하는 게 아니고 문화의 상징인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장례의 가치가 거기에 있고 장례라는 게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와도 떼놓을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무연고사망자, 장례를 치르기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회가 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죽음을 예측 가능하게 하는.

프레시안 : 예측 가능하다면?

박진옥 : 본인의 장례를 걱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독거어르신, 쪽방 주민 등등. 3040대인데 자신의 장례를 걱정하며 전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연고는 자기도 안다. 자기가 죽으면 무연고사망자가 된다는 것을. 그러면 장례도 없고 어떻게 되나 싶은데, 서울시에서 공영장례가 시행되면서 최소한 내가 죽으면 저렇게 장례를 해주는구나 알게 됐다.

공영장례는 죽은 사람의 존엄함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당신이 혼자가 아니고 사회가 당신의 장례를 어떻게 할지, 사회적 연대와 약속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죽음은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다. 장례를 사회보장으로 해야한다는 주장하는 이유다. 죽은 사람의 존엄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산 사람들의 존엄을 지켜나갈 수 있다.
▲헌화했던 꽃으로 고인의 마지막 가시는 길 꽃길 되시라 국화꽃잎을 따서 뿌려드린다. ⓒ나눔과나눔

프레시안 : 같지만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개인의 죽음을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박진옥 : 정말 중요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2020년 무연고사망자가 약 3000명이다. 3월에 기사가 나왔는데 그걸 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3000명의 무연고사망자가 있었네.' 타인의 죽음, 어떤 통계.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 일본의 한 영화감독이 한 말인데 저는 그 이야기를 보고 무연고를 이렇게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2만 명이 죽었다. 그걸 2만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하면 피해자의 가족들, 사회적인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 죽음을 한 사람이 죽은 2만 개의 사건으로 기억해야 한다"라고. '무연고사망자 3000명'이라고 끝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죽은 3000개의 사건이라고. 나눔과나눔이 '리멤버 캠페인'이라는 걸 한다. 무연고사망자의 사연으로 메시지를 쓰는 활동이다. 캠페인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놀라는 게, 무연고사망자는 '서울역 홈리스의 죽음' 이렇게 생각한 거다. 근데 사연을 보면 '이분 내 옆집 살던 분인데?' 하는 거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오며가며 얼굴 마주친 사람들. 내 이웃이 이렇게 무연고사망자가 됐다는 데서 놀란다. '2020년 3000명의 무연고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문장이 아니라 내 이웃, 내 지인이 죽은 3000개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만약에 내 친구가 무연고로 갔다면 무연고사망자가 된 내 친구의 장례였던 거지 3000명이 죽은 한 개의 사건이 아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다. 무연고의 죽음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죽음이지만 사회 공동체가 함께 애도해야 하는 이유. 사회적 애도라는 말은 사회적 참사 이런데 많이 쓰니까 나는 그래서 공동체, 공동의 애도라고 썼으면 한다. 시민이 동시대를 함께 산 사람에게 애썼다, 수고했다, 잘 가시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함께 그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문화. 이게 개인의 죽음을 사회가 받아들이는 태도인 것이다. 간디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 수 있고 그 국민의 도덕적 수준이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있다고. 저는 이걸 죽음으로 바꿔도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회가 죽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회가 산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 죽은 사람을 존엄하게 보낸다면 산 사람도 존엄하게 대하는 사회일 것이다. 죽음은 누구나 맞이한다. 하지만 그 이후의 장례와 애도의 기회에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원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2-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