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평등법)은 여성만을 위한 법도,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도, 장애인만을 위한 법도, 인종적 차별을 겪는 자들만을 위한 법도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법이다. 사회 각계 각층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이 참여한 '평등의 에코-100(echo-100)' 캠페인의 취지가 그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부터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죽음, 밥벌이 때문에 견디는 직장갑질, 저 멀리 북극곰의 문제, 미친 부동산 가격 문제 등등. 이것들은 이제 평등에 관한 문제와 연결돼 있다.
<프레시안>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100명의 선언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각자가 고민한 차별에 대해 물었다. <프레시안>은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시민들을 릴레이로 인터뷰 해 싣는다.편집자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① "조주빈 처벌하면 만사 끝?…성차별 끊어내는 게 폭력 근절의 전제" (☞바로가기)
② "죽음 마저도 차별당하는 사람들…장례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바로가기)
③ "'저렴한 목숨'은 죽어도 되나…산재와 차별은 같은 뿌리" (☞바로가기)
④ 기후위기 최대 피해자들에 "학교는 어쩌고 왔니"라 묻기 전에 (☞바로가기)
프레시안 : 민달팽이유니온(민유)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의 단체회원이다. 단체회원이 된 이유가 있나. 주거와 차별이 어떤 관련이 있나.
경서 : 그동안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할 때 차별금지 사유 중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같은 '성소수자'에 집중했다. 아니면 인종 차별, 장애인 차별, 학력 차별 이런 식으로 정체성에 대한 차별에 대해서만 논의가 전개됐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거면 주거, 노동이면 노동, 이렇게 영역별로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주거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을 관장하는 곳이다. 의식주의 한 부분. 한 사람이 받는 차별이 주거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차별은 주거의 영역에서도 당연히 나타나고 있다. 민유는 주거권 보장을 주장하는데, 주거권은 단순히 부동산의 문제만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산다는 것. 시혜적인 복지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기본적인 권리의 문제다.프레시안 : '한 사람이 받는 차별이 주거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
경서 : 빈부격차, 양극화는 한국사회의 오래된 테마이다. 경제적 계층이 사회적 계급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중심에 부동산, 집이 있다. 부동산으로 계급화된 사회다. 집이 있느냐 없느냐, 집이 어느 동네에 있느냐로 모든 게 달라진다.
이 부동산 계급은 또 그대로 세습된다. 세습될수록 그 격차도 점점 심해지고 더 공고해진다. 지금의 청년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빈부격차가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주거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평등함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민유가 마주하는 현실들, 민유는 처음엔 청년 주거문제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청년을 비롯해 소외계층의 주거문제로 확장하고 있다. 민유가 현장에서 보는 주거환경이 너무나 열악하다. 소외계층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제가 주거다. '살기가 힘들다'라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집 문제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주거문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프레시안 : 주거문제는 주로 주택시장의 문제로 다뤄지는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나. 실제로 민유가 다루는 주거문제는 어떤가.
경서 : 주택시장의 문제도 있지만 주택시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높은 집값은 당연히 문제다. 지금의 집값은 대출이라는 은행, 버블 같은 게 끼어있다. 주변을 둘러봐도 대출 없이 집 샀다, 빚 없이 집 샀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집값이 손에 닿지 않는 무엇이 됐다. 내 집 마련을 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대출을 받아야 하는, 금융자본주의에 실천해야만 한다.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선 집을 사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 '내 집 마련'이 목표다. 나라에서도 집 살 수 있게 싼 이자율로 돈을 빌려준다. 그런데 왜 집을 꼭 소유해야 하나. 집이라는 게 소유해야만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건가. 집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어딘가에서 살아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집을 빌려서 사는 사람도 안전할 수 있는 것, 세입자의 주거권도 보장되는 세상이다. 시장의 문제라는 점에도 공감하기 어렵다. 수요와 공급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신도시 같은 데 둘러보면 미분양 아파트가 많다. 빈 채로 낡아가는 집도 있다.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빈집이 많은데 집 없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 곳은 또 없다. 분명 공급이 부족한 건 아니다. 숫자로만 보면 공급은 이미 100%를 넘었다. 공급보다는 분배가 필요한데 이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본다.프레시안 : 시장의 문제를 제외하고 '주거문제'로 불리는 게 무엇이 있나.
경서 : 열악한 주거의 문제가 있다. 열악한 주거는 안전의 문제, 건강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사회문제로 이어지는 문제다. 민유는 이런 주거환경에 대한 문제도 계속 제기하고 있다. 주거환경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지옥고'라는 게 있다. 반지하, 옥탑, 고시원을 말한다. 지옥고에 사는 사람도 많지만, 그중 청년의 비율이 매우 높다. 애초에 지옥고가 '주거'로 존재하는 것도 문제지만, 왜 그런 곳에 청년이 많이 살고 있는지를 우선 봐야 한다. 청년일 때는 아직 자산이 없다. 집을 구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없다. 그런 시기의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없다. 자본금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지옥고. 청년들이 계속 지옥고에 들어가서 사는 이유다. 그런데 지옥고가 저렴한 것도 아니다. 창문도 없는 고시원 방이 수십만 원을 한다. 열악한 주거에 살면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부분들도 있다. 이게 마치, 심하게 말하면 부동산 경제가 청년들에게 빨대를 꽂고 빨아먹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통계도 그렇게 보여주고 있다.프레시안 : 그럼 그중에서도 청년들이 겪는 주거문제라면 어떤 게 있나.
경서 : 청년만 겪는 건 아니지만, 두드러진 변화로는 가족형태가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특히 청년세대에는 1인 가구가 많아졌다. 그런데 주거정책에 이런 변화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청년주택'을 예로 들자면, 민유는 청년주택을 매우 비판했는데 '도대체 청년을 어떤 존재로 보고 있느냐'고 했다. 청년이 사는 데 뭐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거지, 청년이면 집이 작아도 되나, 청년이 살면 얼마 살지 못하고 쫓겨나도 괜찮다고 생각하나. 또 청년 중에는 장애인이 없나. 청년주택은 대체로 평수가 매우 작다. 거의 5평 정도다. 다섯 걸음이 채 안 된다. 여기서 밥 먹고 공부하고 잠을 자고, 이런 일상을 보낼 수 있나. 과연 청년주택이 주거권을 보장한다고 할 수 있나. 원룸이라는 것 자체가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넣는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에 불과하다. 이걸 청년주택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선제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손님을 초대할 수도 없고 휠체어가 돌 수도 없는 공간, 이게 청년주택이라면 할 말이 없다.프레시안 : 정말 발 뻗고 누워 잘 수만 있는 곳. 청년주택 뿐 아니라 대학가나 청년들이 사는 원룸 대부분이 그럴 듯하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집에 잘 있지도 않게 되는 것 같다.
경서 : 왜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생각해보면, 청년을 애초에 독립된 존재로 바라보는 그런 관점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주거급여 관련 법에도, 30세 미만의 경우에는 주거급여를 받을 때 아직도 부양의무자 기준이 있다. 원가족과 거주지가 달라도 30세 미만이면 주거급여를 받을 수 없다. 그 30세 미만이라는 기준이 어디서 나왔는지도 알 수가 없다.
어떤 근거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는데 30세라는 기준이 존재한다. 그러면 원가족이 수급가구에서 탈락될까봐, 내가 돈이 필요해도 경제활동을 못 한다. 원가족에 돌아가 함께 살든지, 혹은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노동현장에 나간다. 이런 식으로 청년을 미완적이고 원가족에 예속된 존재, 임시적 형태의 그런 존재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더욱 방 쪼개기 고시원 성행한다. '아직 젊으니까 이렇게 살아도 돼', 이런 식이다.프레시안 : 1인 가구를 위한 정책도 없고.
경서 : 다양한 형태의 가구, 가족, 가족구성권의 문제다. 그동안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집이 공급됐다.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 살만한 처지가 됨에도 불구하고 1인 가구라면 가점을 받을 수 없다. 점수가 부족해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주거정책 우선순위가 가족이 있느냐, 그것도 법적으로 혼인하고 아이를 낳은 '정상가족'이어야 한다. 그런 것에 있어서 1인 가구가 굉장히 문제적인 상황에 있다.
1인 가구라면 딱 떠오르는 게 원룸이다. 그런데 원룸은 분리된 생활을 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집보다는 임시거처에 가깝다. 1인 가구는 임시적인 존재라고만 놓고 정책을 세운 것이다. 그 사람들이 1인 가구로 살수밖에 없거나, 스스로 그렇게 살려고 결정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런 점은 정책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그 삶의 형태를 부정한다. 또 1인 가구뿐 아니라 혈연이나 법적인 혼인관계가 아님에도 함께 살려고 결정한 사람들도 있다. 가족의 역할을 하는 공동체다. 하지만 가족이 아니라고 한다. 비혈연·비혼인 공동체는 주거정책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나와 내 동성파트너가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청약을 넣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형태의 다양한 공동체가 있음에도 이를 위한 정책이 전무하다. 그런 사람들의 문제가 더 심각한 이유는 빈곤과 소수자의 문제가 결부되지 않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이 살든 셋이 살든, 집 사서 살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 그 사람들의 주거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파트너와 함께 살지 이를 포기하고 혼자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갈지 선택해야 한다. 주거정책의 대상이 되려면 공동체를 해체해야 한다. 실제 존재하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주거정책에서 배제되고 소외되는 게 문제다.프레시안 : 민유가 말하는 '주거'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주거권에 대해 설명해 달라.
경서 : 민유가 쓰는 문구 중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라는 게 있다. 집은 사람에게 기본적인 것이다. 이게 없으면 사람의 삶은 망가지고 흔들린다. 그런 기본적인 요소가 시장의 재화로만 다뤄지는 게 사실은 슬픈 일이다.
주거는 밥을 먹고 누워 잘 수 있는 어떤 공간이라는 걸 넘어서 생활의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고 개인이 가진 삶의 형태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아가 인간은 주거를 중심으로 사회적인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한다. 민유가 또 하는 말 중에 '집이라는 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재생산행위를 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재생산행위는 휴식, 수면, 식사를 포함해 최소한의 자기계발, 공부 이런 거. 그 필요성이 코로나19 사태로 더더욱 중요해졌다.프레시안 : 삶 전반의 '인프라'처럼 느껴진다. 주거권의 문제에서도 다양한 층위의 차별구조가 작동할 것 같다.
경서 : 차별금지법은 주거권 문제와 교차시켰을 때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 많다. 예를 들어 요즘 주거정책 핫이슈는 '신혼부부'다. 하지만 신혼부부에게 혜택을 준다는 건 차별적이다.
누군가의 가족 형태를 조건 삼아, 그리고 누군가의 재생산 권리, 임신할 수 있는 권리를 조건으로 삼아 주거를 주겠다고 한다. 주거정책을 주거정책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인구정책으로 환원시켜 보는 것이다.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나 주거권 이슈가 존재한다. 쪽방촌이나 장애인 인권. 그리고 시설에 관한 문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청소년이나 장애인의 경우 시설이 많다. 그런데 시설화가 과연 괜찮은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시설은 주거가 아니다. 탈가정 청소년 시설인 쉼터의 경우, 잠깐 쉬어 가는 곳이다.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거처다. 왜냐면 법적으로 청소년에게 안정적인 주거를 보장하는 방법이 거의 없다. 결국에는 쉼터를 전전하든가, 원가족에 복귀하든가 둘 중 하나다. 하지만 많은 이유로 탈가정을 선택한 청소년인데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게 과연 괜찮을까 싶다. 같은 맥락에서 장애인 시설이라는 게 괜찮은 것인가. 장애계에서 탈시설 운동이 활발한데, 그 부분은 잘 몰라서 설명드리기 어렵다.프레시안 : 주거권을 처음부터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또 어떤 문제가 있나.
경서 : 한국은 사회적으로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모습에서 조금만 달라져도 쉽게 배제하고 차별한다. 성소수자가 그런 상황에 많이 노출된다. 꼭 성소수자라서가 아니라, 다양한 층위의 차별이 적용된다. 민유에는 '성소수자 주거권 네트워크'라고 하는, 성소수자의 주거 실태를 조사하고 이들의 주거권을 확보할 방법을 연구하는 연대체가 있다. 거기서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레즈비언의 경우에는 성소수자 차별을 겪으면서 여성차별도 함께 겪는다. 여성의 요구는 잘 수용하지 않는다든지, 집주인과의 다툼에서 폭력적인 언사를 듣는다든지, 집주인이나 부동산에서 허락 없이 집에 들어 온다든지. 여기에 성소수자가 주로 겪는 폭력을 함께 겪는다. 그런 여러 층위의 차별이 있다.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서 주거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의 경우엔 어떤 하나의 성별로 패싱되는 경우가 아니면. 예를 들어 mtf(남성 신체에서 여성으로) 트랜스젠더의 경우, 겉보기에 여성으로 패싱이 되지 않는다면, 보기만 해도 계약을 안 한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패싱이 된다 해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1이라면. 안 하겠다고 엎는 경우도 있다.프레시안 : 민유는 청년 주거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많이 참여했던 것 같다. 민유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것 같나.
경서 : 반만 듣고 반은 흘려버리는 것 같다. 민유에서도 고민하는 문제인데, 그냥 홍보용으로만 나가는 자리에는 최대한 가지 않으려고 한다.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는 자리. 청년을 어떤 위원회나 회의 자리, 정부정책이 하는 그런 곳에서 많이 부르는데 보여주기 식이라 느껴지면 되도록 안 가려고 한다.
또 동시에 그런 자리에라도 가야지 한마디라도 할 수 있다. 거기에 가야 그래야 한마디라도 지금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주거문제가 뭔지 알릴 수 있고, 계륵 같은 위치 같다. 사실 '청년을 대표한다'는 말도 웃기다고 생각한다. 민유가 청년 주거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이게 단순히 청년이 겪고 있어서 문제라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주거문제를 겪는데 청년이라는 집단에서 특히 주거문제가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현상으로, 사회문제로. 그랬을 때 청년을 대표하는 게 무엇일지 고민한다. 민유가 정치집단으로서 대표성을 가지느냐보다도 청년 주거정책을 다루는 그 자리에 의문이 든다. 청년의 표를 가져가기 위해 저렇게 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청년 주거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걸까.프레시안 : 청년 주거문제, 나아가 청년문제를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인가.
경서 : 청년문제를 경제정책이나 일자리 공급의 문제인 것처럼 보는 게 지금 정부와 사회의 방식이다.
무슨 말이냐면 청년들이 진짜 한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청년들이 진짜 괜찮냐, 라는 게 주제가 되는 게 아니라 청년들은 우리 사회의 일꾼, 미래의 일꾼인데 이들이 곧 노동력인데 이 노동력이 괜찮냐는 식이다. 노동할 수 있는 인구, 시장을 유지할 수 있는 인구,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인구.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신혼부부 정책' 같은 괴이한 정책이 나온다. 세상에 어떤, '임신하면 가산점을 줄게'라는 발상을 할 수가 있나. 이건 청년을 노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인구, 노동력이 될 수 있는 인구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동원의 대상으로만 보는 거다.프레시안 : 청년 당사자에게는 하나의 현실이지만 주거문제에서의 청년, 청년문제에서의 주거는 의미가 조금 다른 것 같다.
경서 : 주거문제에서의 청년이라면 청년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주거문제에서의 청년을 대표로 하는 듯하다.
부동산 투기사회에서 계급의 차이가 점점 쌓여서 폭발한 게 청년 주거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청년 주거문제가 이슈가 된 지 10년 정도 됐다. 처음 이야기할 때는 '지옥고'같은 언급이 없었다. 마치 그런 곳에 청년들이 사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 왔다. 주거문제에서의 청년은 마치 청년을 어떤 위치에 놓고 볼 것인가의 문제다. 청년을 무엇으로, 청년으로 누구를 호명할 것인가의 문제. 무슨 존재로 볼 것인가.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볼 수 있나. 그게 아니라 생애 주기의 한 시점, 일시적인 시점으로 청년을 호명할 것인가.프레시안 : 청년을 일시적인 시점으로 본다는 게 무슨 뜻인가.
경서 : 그 시점이 지나면 문제가 해결된다 생각한다는 뜻이다. 청년기는 일시적이니까 청년문제도 일시적일 거라는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는 식.
하지만 이미 통계로도 드러나고 있다. 2030 주거빈곤의 청년들은 3040에도 그런 상황에 높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 세대가 3040이 됐을 때 과연 괜찮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괜찮지 않을 것이라는 징후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지금 중년세대, 중년에 접어들고 있는 40대를 예로 들 수 있다. 기혼의 유자녀 40대와 비혼의 40대는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다. 전혀 다른 대상이다. 중년 비혼을 위한 정책이 무엇이 있나.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다. 복지정책의 구멍처럼, 어떤 보호도 없는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청년문제가 단지 일시적인 문제라고 보면 안 된다.프레시안 : 차별과 공정은 어떤 관계일까. 이를테면 '이준석식 공정'을 외치는 이준석 당대표가 선출됐다. 그후 정치권에서 '청년'이 화두가 된 것 같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나.
경서 : 답변을 드리기 조심스럽다. 이준석 당대표라는 현상은 저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우익적인 흐름과 닿아있다고 본다. 그렇게 보았을 때 사실 놀랍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환영하느냐면 환영할 수 없다 당연히. 이준석 대표가 말하는 청년과 우리가 말하는 청년은 분명 다르다. 이준석 대표가 말하는 청년은, 중산층에서 자란 엘리트 청년을 말하는 것일 테다. 나아가 그러한 계급이 되고 싶은 청년까지 포함해서. 우리가 말하는 청년은 공정함을 말할 수 있는 세상에서 이미 배제된 청년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가 말하는 '바람직한 청년'이 아닌 청년.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고, 누가 보기에는 굉장히 불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청년. 우리가 연대해야 하는 청년은 그런 청년이다.프레시안 : 의미심장한 말이다. 세상은 이미 불공정하고 여기서 공정한 경쟁을 하기보다는, 당장의 생존이 더 급하다는 뜻 같다.
경서 : 현재 청년세대에서 우울증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청년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불공정함에 분노할 수 있다는 것도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공정함에 분노할 수 있는 청년만이 청년인 것처럼 말하는 게 당황스럽기도 하다. 겨우 공정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 당대표가 될 수밖에 없다면. 나라의 가장 큰 정당 중 하나의 당대표가 됐는데 필요한 어구가 겨우 공정이라면 미래가 어둡지 않은가. 우리는 저 청년이 아니라 청년으로서 말할 수 있는 다른 가치를 더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저와 주변은 1년 사이에 6명이 넘는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그것도 아주 젊은. 심각한 징후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런 상황에서, 겨우 말할 수 있는 게 공정이라면, 글쎄다. 먹을 빵이 아예 없는 사람 앞에서 네 빵이 더 크니 내 빵이 더 크니 싸우는 게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 공정이라는 가치가 중요해지는 장면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이 말해야 할 것이 공정은 아닌 것 같다. 공정함과 불공정함의 기준이 되려는 사람들, 그 판을 만든 사람들, 우리는 그들과 싸워야 한다.프레시안 :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주거권 보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하나.
경서 : 많은 사람이 차별금지법은 자신의 일상과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한다. 근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언제든 차별이라는 상태에 놓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정체성 중에 모든 것이 다 주류일 수는 없다는 것. 어느 곳에선가 기어코 비정상일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은 결국 모든 시민을 위한 법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차별금지 사유로 언급되는 것들을 실제 삶의 현장에서 보아야 한다. 그게 주거영역이나 노동영역, 이렇게 영역별로 놓고 보면 굉장히 쉽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차별금지법이 도래한 이후 다가올 주거정책을 생각하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혼부부 정책이 차별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도 있고,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계약이 거절된다거나 집에서 쫓겨나는 그런 사람들이 대항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또 휴먼시아 거지? 이런 단어들도 차별의 하나인데, 마치 사는 곳, 계급에 의한 차별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있다. 차별에 대한 민감성이 높아지면 이것도 차별이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아까 말한 가족구성권도 있다. 혈연이 아니고 법적 혼인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가족'의 역할을 하면서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공동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을 기대한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무엇보다도 '왜 그런 정책이 필요해'라고 물었을 때 '이런 차별이 있으니까'라고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구조도, 근거도 없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반영되지 않는 목소리, 사각지대에 놓인 삶을 드러내고 보호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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