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평등법)은 여성만을 위한 법도, 성소수자만을 위한 법도, 장애인만을 위한 법도, 인종적 차별을 겪는 자들만을 위한 법도 아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한 법이다. 사회 각계 각층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시민들이 참여한 '평등의 에코-100(echo-100)' 캠페인의 취지가 그것이다.
디지털 성범죄부터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오는 죽음, 밥벌이 때문에 견디는 직장갑질, 저 멀리 북극곰의 문제, 미친 부동산 가격 문제 등등. 이것들은 이제 평등에 관한 문제와 연결돼 있다.
<프레시안>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지하는 100명의 선언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각자가 고민한 차별에 대해 물었다. <프레시안>은 '평등의 에코-100(echo-100)'에 참여한 시민들을 릴레이로 인터뷰 해 싣는다.편집자
[차별의 평범성 드러내기]
① "조주빈 처벌하면 만사 끝?…성차별 끊어내는 게 폭력 근절의 전제" (☞바로가기)
② "죽음 마저도 차별당하는 사람들…장례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바로가기)
③ "'저렴한 목숨'은 죽어도 되나…산재와 차별은 같은 뿌리" (☞바로가기)
④ 기후위기 최대 피해자들에 "학교는 어쩌고 왔니"라 묻기 전에 (☞바로가기)
⑤ "대한민국의 부동산 경제, 청년들 등에 빨대를 꽂고 있다" (☞바로가기)
프레시안 : 차별금지법을 지지하는 <평등의 에코-100>은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오진호 : 직장갑질,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 힘들어하는 직장인들을 상담하면서, 이들이 겪는 부당한 일들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말고도 대응할 수 있는 다른 힘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차별금지법은 고용, 교육, 재화 및 용역, 행정서비스 등 4가지 영역에서의 차별을 금지한다. 직장갑질은 이 중 고용상 차별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프레시안 : 채용과정에서의 차별, 고용형태나 임금을 다르게 적용한다든가 하는 차별이 생각난다.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불리는 차별은 어떤 게 있나.
오진호 : 직장갑질, 직장 내 괴롭힘에는 폭언·폭행, 비하·무시 등 다양한 행위가 있다. 업무 배제 같은 업무상 지시도 경우에 따라 괴롭힘이 된다.
차별은 직장인들이 자주 겪는 갑질 중 하나다. 우선 성차별, 성적 괴롭힘인 성희롱이 있다. 또 나이가 어리다거나 많다는 이유로 차별이 발생하기도 하고 고향이나 학벌에 따라 발생하기도 한다. "지잡대 나와서 그렇다"와 같은 모욕적인 발언,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은 차별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이루어지는 괴롭힘이다.프레시안 : 갑질이나 괴롭힘은 조직 내 문제로 여겨지거나 가해자 개인의 인성 문제로 인식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오진호 : '직장'은 독립된 별도의 섬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가진 여러 문제가 그대로 발현되는 공간이다. 예를 들어 군기를 잡는 문화가 심한 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가 특별히 군대 흉내를 내려고 해서가 아니라 우리사회 곳곳에 남은 군사문화 잔재가 강하게 남아 그런 것이다. 유교문화도 마찬가지다.
직장 내 갑질이나 괴롭힘은 직장 내에서 권력관계의 우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발생한다. 그렇다는 건 우리사회가 만들어 놓은 위계적인 구조가 괴롭힘이나 갑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특정인이 좀 더 나빠서. 폭력적인 사람이라 더 괴롭힘이나 갑질을 하기도 하지만 온전히 개인이나 특정 조직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사회의 뿌리 깊은 문화적이고 위계적인 요소들이 작동한다.프레시안 : 괴롭힘이 권력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의미인가.
오진호 : 현행법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을 '업무상 우위에 있는 자'에 의해 발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괴롭힘은 권력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직장이 아니라 일상에서 벌어지는 괴롭힘 모두 피해자의 어떤 차별적인 위치, 취약한 상황을 통해 일어난다.
직장 내 성차별을 예로 들면 성별 위계의 아래에 있는 여성이 차별을 겪는 경우가 많다. 다른 직원에 비해 고용형태가 불안한 계약직이나 간접고용 형태의 노동자라면 괴롭힘에 대응하기 더 어렵다. 나이가 어리거나. 연차나 직급이 낮은 경우도 마찬가지다.프레시안 : 고용상 차별을 금지하는 개별 법들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이전에도 몇 개 존재했다. 남녀고용평등법이나 장애인차별금지법 등.
오진호 :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많다. 사회문화부터 법제도 미비 등등. 복합적인 문제다.
제가 봤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불이익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신고했을 때 불이익을 받을까 봐. 성희롱을 예로 들면 피해자가 회사를 못 다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점들이 피해자가 괴롭힘을 신고하거나 문제 제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인 것 같다. 그런 점을 보호하는 게 중요하다. 차별금지법은 차별에 대해 문제 제기한 당사자를 보호할 수 있는 조항이 있어 의미있다고 생각한다.프레시안 :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달라진 점이 있나.
오진호 : 법이 시행된 후에 직장갑질119에 관련 제보가 늘어났다. 괴롭힘이나 갑질 자체가 늘어났다기 보다는 직장인들의 인식이나 환경이 달라진 것 같다.
무슨 말이냐면 이전에는 직장인들이 자신이 겪은 부조리나 부당한 행위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찜찜하고 부당한데 이걸 표현할 개념도 없고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하는지 몰랐던 점이 분명 있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생기고 직장갑질을 제지하는 제도 등이 생기면서 '내가 겪은 게 갑질이구나', '괴롭힘이구나' 생각할 수 있게 된 거다. 그런 점에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목소리를 주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뭔지 이름 붙이고 '내가 겪은 게 무엇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게 해주는 법이다. 말할 수 있게 되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해결방법을 고민할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갑질 문제에 이야기하고 있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겪은 일들을 개념화할 수 있을 때 그걸 더 쉽게 이야기하고 문제 제기할 수 있고 대응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프레시안 : 그럼 법 시행 후 직장 내 괴롭힘이 줄어들고 있나.
오진호 : 직장갑질119에서 관련한 실태조사를 했었는데 줄어들었다고 답한 사람들도 있고 잘 모르겠다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
법의 한계와 맞닿은 이야기다. 한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저는 핵심적으로 법의 적용범위가 너무 좁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은 괴롭힘이나 갑질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아 괴롭힘 금지 조항도 적용되지 않는다. 또 간접고용 노동자, 원청의 관리자가 하청노동자에게 하는 괴롭힘이나 갑질은 현행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으로는 문제 제기하기 어렵다. 최근 늘어나는 프리랜서나 플랫폼 노동 등의 고용형태에도 적용하기 어렵다. 적용되지 않는 노동자의 숫자를 보면, 우선 5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만 몇백만 명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800만 명, 프리랜서가 200만 명이다. 그럼 직장인 1000만 명 가까이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적용되지 못하는 셈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괴롭힘이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특정 사람들이 못 느낀다는 건, 이 특정인들이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것이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더욱 필요한 사람들이다.프레시안 : 코로나19 이후 노동문제가 많이 불거진 것 같다. 직장갑질에 있어서도 코로나 전후로 달라진 점이 있나.
오진호 : 코로나로 인해 발생한 새로운 노동문제가 발생했느냐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는 그보다 이전부터 있었던 문제, 계속 이야기했지만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았던 노동현장에서의 여러 문제가 코로나를 계기로 폭발했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어 고용유지지원금 문제가 있었다. 정규직 노동자는 고용유지지원금을 쉽게 받는데 파견이나 하청, 용역, 비정규직,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받기 어려웠다. 고용유지지원금이 안 나와서 무급휴직이나 연차휴가를 강요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위치, 제도의 사각지대 문제는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문제다.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더 차별을 받는 상황이 됐다. 또 콜센터에서 발생한 집단감염 사례가 있다. 코로나 이전에도 밀집 노동을 해왔고 이전부터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렇게 방치해온 것들이 코로나19라는 위기 속에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떠밀리고 있는지로 드러난 것이다. 노동문제, 직장 내의 문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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