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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하나의 꽃, 그러나 지금 무섭게 망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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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하나의 꽃, 그러나 지금 무섭게 망가지고 있다"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 ⑦ <녹색평론>의 성취와 한계
1999년 7월 김종철은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와 비평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인간·흙·상상력에 관한 에세이> 등 두 권의 책을 잇달아 발간했다. 앞의 책은 1991년 이후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동안 틈틈이 쓰거나 말했던 기록들을 묶어낸 것으로 녹색평론사에서 출판했고, 뒤의 책은 주로 <녹색평론> 발간 직전의 강연들과 이용악, 신동엽 시인 등에 대한 평론, 그리고 1970~80년대에 썼던 문학평론을 모은 것으로 삼인에서 출판했다. 그의 저서 출간은 첫 책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년) 이후 20여 년 만이다. 1991년 11월 <녹색평론> 창간 이후 대학 교수라는 본업 외에 잡지 편집자이자 운영자, 그리고 필자라는 1인 4역을 감당했던 그가 두 권의 책을 냈다는 것은 잡지 운영이 자리를 잡았고 본인 역시 저서 발간을 감당할 정도로 여유를 갖게 됐음을 의미한다. 김종철은 <간디의 물레>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7쪽)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서문에서는 자신감마저 느껴진다.
"지금은 생태학적 관심을 중심에 두지 않는 어떠한 새로운 창조적인 사상이나 사회운동도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나는 믿는다. 세계 전역에서 뭉게구름이 사라지고, 여름이 되어도 제비를 볼 수 없게 된 지금 우리는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종래의 관행을 되풀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문화는 이제 인간 자신의 존재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뼈저린 성찰 없이는 지속불가능한 현실에 직면하였다."(5쪽)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그해 11월 대산문화재단이 제정한 제7회 대산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이어 2000년 5월 <녹색평론>이 단재 신채호의 사상을 기리기 위한 단재상(한길사 제정) 학술 부문 수상자로 결정됐다. 인물이 아닌 잡지가 단재학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대단이 이례적인 일이다. 리영희·김진균·이만열 등 학술상 심사위원들은 <녹색평론>이 한국의 지성계에 생태학적 인식을 드높이는 데 기여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창간 10주년을 맞는 2001년 11월에는 교보환경문화상(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 제정) 제4회 대상 수상자로 <녹색평론>이 선정됐다. 말하자면, <녹색평론>은 창간 10년이 채 안 돼 생태사상을 주창하는 인문환경잡지로서 그 존재 의미를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셈이다.
▲ <간디의 물레>(김종철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과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김종철 지음, 삼인 펴냄).
사실 <녹색평론>은 창간 1년 만에 잡지 발행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인 열성 독자들을 확보했다. 창간 두 달 만에 정기구독자가 1000명을 돌파했고, 당초 3000부였던 발행 부수가 1년 만에 5000부가 된 것이다. 김종철 본인의 표현을 빌자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답답한 마음을 견디다 못해 불쑥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제 이 잡지가 없어지면 적어도 서운하게 여길 사람들은 적지 않은 숫자가 되었다."(<녹색평론> 7호, 머리말,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47쪽) 특히 창간 1년 4개월만인 1993년 3월, <녹색평론> 첫 1년간(창간호~6호) 실렸던 글 중 23편을 골라 <녹색평론선집 1>을 펴냈는데, 이는 "이 잡지가 호를 거듭함에 따라 조금씩 널리 알려지면서 새로운 독자들이 꾸준히 증가하였고, 그 과정에서 창간호를 비롯하여 이미 절판이 된 지난 호들을 찾는 새 독자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녹색평론선집 1> 5~6쪽) 이처럼 뜨거운 반응은 김우창이 지적한 것처럼 그동안 한국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생태'라는 새롭고 중요한 현실이 김종철과 <녹색평론>에 의해서 처음으로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잡지 발행 두 권 만에 정기구독자가 1000명을 넘고, 여섯 권 만에 지난 호들을 찾는 독자들이 많아진 것은 김종철의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을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 그가 갈망했던 '우정의 공동체' '사상의 공동체'가 만들어질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녹색평론> 3호 머리말에서 "이런 일의 배경에는 어떤 갈망,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감수성에 대한 실로 뜻깊은 내적 갈망이 우리 사회 내부에서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내면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한 '느낌의 공동체'가 눈에 보이지 않게 형성되어가고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29쪽) 또 6호 머리말 '생명의 그물'에서는 "개발이니 진보니 하는 것이 실상은 '위장된 테러리즘'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이른바 주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주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면서, 인간 가치를 수호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녹색평론>을 통해 확인되기를 바란다. 실은 이러한 공통의 정신의 공동체를 발견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의 원천"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위의 책, 46쪽) 특히 열성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첫 1년간의 <녹색평론> 기사에서 <녹색평론선집 1>을 편집한 직후인 1993년 1/2월호에 쓰인 <녹색평론> 머리말에서는 그의 고양된 정신 상태가 시적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세계는 하나의 꽃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기(氣)이니 틀림없이 하나의 꽃일세. 우리는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저 산을 들어올리고, 제비꽃을 피게 하고, 강물을 흐르게 하는 기운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정말이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름 없는 한 떨기 풀잎도, 한 송이 꽃도, 한 마리의 벌레도 내 형제라는 것을 우리는 왜 못 알아차리는가? 오늘 아침 산책길에 나는 땅이 나를 떠받들어주는 것을 느꼈다. 아스팔트길에서 흙길로 들어서자마자 내 몸은 갑자기 가볍게 공중으로 뜨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흙 속에 살고 있는 무수한 내 형제 들, 즉 미생물들이 내 몸뚱아리를 들어올려 주었던 것이다. 내 형제들이 나에 대한 공경(毕恭毕敬)이 이러할진대 나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이 아름다운, 그러나 지금 무섭게 망가지고 있는 산천에 살고 있는 모든 목숨붙이들이 고통스럽게 토해내는 신음소리가 너무나 큰소리로 들리기 때문에 우리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조그마한 희망의 가능성이 열릴 것인가? 오호 통재(嗚呼 痛哉)!"(<녹색평론> 9호 1993년 3/4월호 머리말 전문.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57~58쪽)
▲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는 <녹색평론> 창간호부터 100호까지 김종철 편집인이 <녹색평론>에 쓴 서문을 모은 책이다. ⓒ녹색평론사

독자들과의 끈끈한 유대

<녹색평론>이 다른 잡지들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독자들과의 유대가 끈끈하다는 점이다. 바로 지역별 독자모임이다. 최초의 독자모임 광고는 1996년 3월 <녹색평론> 3/4월호(27호)에 실린 대구경북지역 독자모임 광고였다. 이후 1998년 9/10월호(42호)에 전북 독자모임, 1999년 3/4월호(45호)에 부산독자모임 광고가 나갔으며 그 다음 호(46호)부터 현재와 같은 형태로 각 지역 독자모임 광고가 <녹색평론> 뒷부분에 실리고 있다. 지역 독자모임은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등 최대 50여 개에 이르렀다.(☞ 바로 가기 : ) 창간 10주년을 맞은 2001년에는 독자들의 요청으로 창간 기념호를 낸 다음인 12월 8일 '녹색평론 창간 10주년 기념 모임'을 대구 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독자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가졌다. 또 창간 20주년인 2011년에는 창간 기념호의 머리기사로 전국 각지 독자 대표들의 좌담이 실렸다.(<녹색평론> 20주년 기념호 121호, 2011년 11/12월호) 그러나 <녹색평론>의 독자 구성은 "<사상계>처럼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 싶다"는 당초 김종철의 바람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녹색평론> 100호 기념 좌담에서 소설가 공선옥이 "80년대 운동권 사람들이 <녹색평론> 때문에 새로운 길을 만나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그러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라고 말한 데 대해 김종철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것이다.
"내 기분하고는 영 다른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군요. 지식인들은 지금까지도 별로 <녹색평론> 안 읽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몇몇 사람들은 열심이지만. <녹색평론>이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열렬하게 동참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략) 내 느낌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말씀 같아요. 오히려 농민들이나 생활하는 일반 시민들이 호음을 많이 해줬죠. 실은 <녹색평론> 시작할 때 원래 의도가 지식인 잡지를 만들려는 것이었지요. 그게 잡지 제목에 드러나 있잖아요. 나는 본래 양심적 지식인이라면 자기의 개인적 문제에만 매달리지 않고 사회 전체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제대로 된 정보에 접하기만 하면 <녹색평론>의 취지에 쉽게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제가 잘못 짚었던 거죠."(<녹색평론> 100호, 2008년 5/6월호, 8~9쪽)
김종철에 따르면 <녹색평론>의 주요 독자들은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 가정주부, 종교인들, 다양한 시민운동 내지 주민운동 조직과 활동가들이다. 교사들이나 언론이나 출판 종사자들, 대학교수나 대학생들 가운데 상당 수 독자들이 있으나 아직 소수이고, 전반적으로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나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녹색평론>이 주창하는 생태사상이 한국 지식계의 주류로 진입하지는 못했다는 냉철한 자기 분석이다. 이어 그는 <녹색평론>의 지향은 단순한 환경운동이 아니라 "삶의 근본 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는 농적(農的) 생활방식의 회복"인데 "그런 관점에 공감하고 찬동하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는 아직 극소수"이고 그런 점에서 "<녹색평론>은 아직도 이 사회의 변방에 있는 아주 조그만 목소리에 불과하다"고 냉정한 자기 평가를 내렸다.
▲김종철 ⓒ프레시안(손문상)

<녹색평론> 필자들은 어떻게 발굴됐나

물론 김종철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 우군, 필자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예컨대 생전에 일체의 글이나 저서를 남기지 않았던 장일순 선생의 말씀을 모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녹색평론> 덕분이었다. 김종철은 1992년 가을 병중의 무위당을 만나 그 대담기록을 <녹색평론> 7호에 머리기사로 실었고, 1994년 5월 22일 그의 별세에 즈음해서는 그의 강연 녹음을 정리한 글과 두 편의 추모 글을 <녹색평론> 17호(1994년 7/8월호)에 실었으며, 1997년 5월 3주기를 맞아 무위당의 말씀들을 모아 책으로 묶어냈다. 이에 앞서 1996년 12월에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펴내 그의 존재를 널리 알렸으며, 같은 해 7월에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번역 출간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책은 스웨덴의 언어학자 노르베리-호지가 인도 히말라야 고원의 '작은 티베트'로 불리는 라다크에 16년간 머물면서 1000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생태공동체를 유지했던 이곳이 서구식 개발로 무너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현장르포로 출간 3년도 안 돼 13쇄를 찍을 정도로 반향이 컸다.

김종철의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가 국내 필자들을 발굴한 주요 방법 중 하나는 신문, 잡지 등 국내 간행물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날 처음 만난 건국대 윤병선 교수는 자신이 <녹색평론> 필자로 스카우트 된 것은 <프레시안>에 실린 '누가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는가?'라는 글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프레시안>은 2006년 11월 미국의 좌파 평론잡지인 <먼슬리 리뷰>에 실린 윤 교수의 영문 기사를 발견하고, 그에게서 한글 원고를 받아 게재한 적이 있는데 이를 본 김종철이 그에게 농업 관련 기고를 부탁했고 이후 단골 필자가 됐다는 것이었다.(☞ 바로 가기 : [먼슬리 리뷰] 초국적 농기업의 위협 (1), (2)) <녹색평론>의 주요 필자 중 하나였던 박승옥도 2004년 한국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비판한 글을 <프레시안>에 기고했다가 김종철의 눈에 띄어 필자 겸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1998년 4월부터 2008년 말 <녹색평론>이 대구시대를 마감하고 서울로 거점을 옮기기까지 10년 이상 <녹색평론> 편집장을 역임한 변홍철도 한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가 김종철에게 발탁된 케이스다.(하단의 '김종철 선생님과의 첫 만남' 참조) 초대 편집장이었던 장길섭은 1993년 3월까지 9호를 만든 다음 농사꾼으로 변신했고, 이후 편집장은 자주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대구를 떠나기 전인 2008년 5월, <녹색평론> 100호를 맞아 <김종철 평론집-땅의 옹호> <녹색평론 서문집-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녹색평론선집 2> 등 세 권의 단행본이 한꺼번에 출간될 수 있었던 데는 변홍철 편집장이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 선생님과의 첫 만남 / 변홍철

1997년 겨울 불교 잡지 <불광>에 짧은 글을 기고했습니다. 새해 맞는 소회를 이야기하는 특집이었는데, IMF 환란 앞에서 우리 삶을 성찰하고,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회심이 필요하다, 봄이 오면 텃밭 농사든 상자 농사든 땅을 일구고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무렵 저는 선배가 운영하는 마포의 작은 출판사에서 초보 편집자로 일하며, 서울 귀농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친구들과 <녹색평론>을 읽는 작은 독서 모임을 꾸려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는 나중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이 된 후배 이계삼 선생, 일리치 읽기 모임에서 활동하며 최근 김종철 선생님 1주기 모임에서 실무적으로 일한 정형철 선생 등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전에, 저는 1992년 초,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대구의 한 서점에서 처음 <녹색평론>을 우연히 접했습니다. 창간호를 서점에 서서 읽고는 번개를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휴가 마치고 부대에 돌아가 정기구독 신청을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대로 책이 오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이따금 면회를 오던 지인 앞으로 구독 신청을 해 그 친구가 몇 호씩 잡지를 모아 전해 주곤 했습니다. 제대하고 복학해서 후배들에게 "이런 잡지가 있더라" 하고 소개하고 한두 명씩 독자를 늘리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하고 직장 생활 하면서도 가끔씩 만나 <녹색평론>에서 다룬 주제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모임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그때 교사가 되려는 친구들 중심으로 <녹색평론>에서 다루었던 작은학교와 대안교육 관련 주제들에 다들 큰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1998년 신년호 <불광>에 실린 그 작은 글을 김종철 선생님이 우연히 보시고, 저한테 먼저 전화를 주셨습니다. 1998년 초 봄, 마포의 썰렁한 출판사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선생님 전화를 받았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글 내용이야 유치한 수준이었을 것이 뻔한데, 글쓴이 소개에 제가 대구에서 자랐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하고 적은 것이 선생님 눈에 띄었던지, 아무튼 그 며칠 뒤에 서울 오실 일이 있으니 밥이나 같이 먹자 하셨습니다. 어찌나 반갑고 황송하던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며칠 뒤에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나, 선생님 사 주신 우럭탕을 먹었는데, 평소 흠모하던 선생님 말씀 듣느라 밥은 어떻게 먹었는지 하나도 기억에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면서 저는 평소 늘 갖고 있던 생각, 기회가 되면 서울을 떠나 시골로 가서 살고 싶다, 서울 생활이 안 맞는 것 같다 하는 얘기도 했는데, 선생님은 대뜸 대구로 와서 <녹색평론>에서 같이 일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런 제안을 받고 보니 비로소 제가 해야 할 일이 정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같이 독서 모임 하던 친구들도 다들 마치 제 일처럼 좋아하고, 출판사 선배도 흔쾌히 찬성을 해 주고 해서 1998년 4월,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대구로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녹색평론> 1998년 5~6월호부터 2008년 11~12월호까지를 편집하고 제작하는 실무를 맡아 일했습니다. 선생님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지만, 무엇보다 잡지에 실린 작은 글 한 편 보시고는 그렇게 먼저 연락을 주시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시던 선생님 모습이 저한테는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은 앞으로 2~3회 연재한 후 끝내고, 이후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로 이어갈 계획입니다. <녹색평론>이나 김종철 선생에 얽힌 일화나 추억, <녹색평론>을 통해 배웠거나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으신 분은 [email protected]으로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를 통해 보다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생각과 느낌을 서로 나눠 가지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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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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