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과의 끈끈한 유대
<녹색평론>이 다른 잡지들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독자들과의 유대가 끈끈하다는 점이다. 바로 지역별 독자모임이다. 최초의 독자모임 광고는 1996년 3월 <녹색평론> 3/4월호(27호)에 실린 대구경북지역 독자모임 광고였다. 이후 1998년 9/10월호(42호)에 전북 독자모임, 1999년 3/4월호(45호)에 부산독자모임 광고가 나갔으며 그 다음 호(46호)부터 현재와 같은 형태로 각 지역 독자모임 광고가 <녹색평론> 뒷부분에 실리고 있다. 지역 독자모임은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등 최대 50여 개에 이르렀다.(☞ 바로 가기 : ) 창간 10주년을 맞은 2001년에는 독자들의 요청으로 창간 기념호를 낸 다음인 12월 8일 '녹색평론 창간 10주년 기념 모임'을 대구 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독자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가졌다. 또 창간 20주년인 2011년에는 창간 기념호의 머리기사로 전국 각지 독자 대표들의 좌담이 실렸다.(<녹색평론> 20주년 기념호 121호, 2011년 11/12월호) 그러나 <녹색평론>의 독자 구성은 "<사상계>처럼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잡지를 만들고 싶다"는 당초 김종철의 바람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녹색평론> 100호 기념 좌담에서 소설가 공선옥이 "80년대 운동권 사람들이 <녹색평론> 때문에 새로운 길을 만나 지금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그러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라고 말한 데 대해 김종철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것이다. 김종철에 따르면 <녹색평론>의 주요 독자들은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 가정주부, 종교인들, 다양한 시민운동 내지 주민운동 조직과 활동가들이다. 교사들이나 언론이나 출판 종사자들, 대학교수나 대학생들 가운데 상당 수 독자들이 있으나 아직 소수이고, 전반적으로 소위 잘나가는 사람들이나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녹색평론>이 주창하는 생태사상이 한국 지식계의 주류로 진입하지는 못했다는 냉철한 자기 분석이다. 이어 그는 <녹색평론>의 지향은 단순한 환경운동이 아니라 "삶의 근본 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는 농적(農的) 생활방식의 회복"인데 "그런 관점에 공감하고 찬동하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는 아직 극소수"이고 그런 점에서 "<녹색평론>은 아직도 이 사회의 변방에 있는 아주 조그만 목소리에 불과하다"고 냉정한 자기 평가를 내렸다.<녹색평론> 필자들은 어떻게 발굴됐나
물론 김종철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동지, 우군, 필자를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예컨대 생전에 일체의 글이나 저서를 남기지 않았던 장일순 선생의 말씀을 모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녹색평론> 덕분이었다. 김종철은 1992년 가을 병중의 무위당을 만나 그 대담기록을 <녹색평론> 7호에 머리기사로 실었고, 1994년 5월 22일 그의 별세에 즈음해서는 그의 강연 녹음을 정리한 글과 두 편의 추모 글을 <녹색평론> 17호(1994년 7/8월호)에 실었으며, 1997년 5월 3주기를 맞아 무위당의 말씀들을 모아 책으로 묶어냈다. 이에 앞서 1996년 12월에는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펴내 그의 존재를 널리 알렸으며, 같은 해 7월에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를 번역 출간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책은 스웨덴의 언어학자 노르베리-호지가 인도 히말라야 고원의 '작은 티베트'로 불리는 라다크에 16년간 머물면서 1000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생태공동체를 유지했던 이곳이 서구식 개발로 무너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현장르포로 출간 3년도 안 돼 13쇄를 찍을 정도로 반향이 컸다.김종철의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가 국내 필자들을 발굴한 주요 방법 중 하나는 신문, 잡지 등 국내 간행물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것이었다. 그날 처음 만난 건국대 윤병선 교수는 자신이 <녹색평론> 필자로 스카우트 된 것은 <프레시안>에 실린 '누가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는가?'라는 글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프레시안>은 2006년 11월 미국의 좌파 평론잡지인 <먼슬리 리뷰>에 실린 윤 교수의 영문 기사를 발견하고, 그에게서 한글 원고를 받아 게재한 적이 있는데 이를 본 김종철이 그에게 농업 관련 기고를 부탁했고 이후 단골 필자가 됐다는 것이었다.(☞ 바로 가기 : [먼슬리 리뷰] 초국적 농기업의 위협 (1), (2)) <녹색평론>의 주요 필자 중 하나였던 박승옥도 2004년 한국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비판한 글을 <프레시안>에 기고했다가 김종철의 눈에 띄어 필자 겸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1998년 4월부터 2008년 말 <녹색평론>이 대구시대를 마감하고 서울로 거점을 옮기기까지 10년 이상 <녹색평론> 편집장을 역임한 변홍철도 한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가 김종철에게 발탁된 케이스다.(하단의 '김종철 선생님과의 첫 만남' 참조) 초대 편집장이었던 장길섭은 1993년 3월까지 9호를 만든 다음 농사꾼으로 변신했고, 이후 편집장은 자주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대구를 떠나기 전인 2008년 5월, <녹색평론> 100호를 맞아 <김종철 평론집-땅의 옹호> <녹색평론 서문집-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녹색평론선집 2> 등 세 권의 단행본이 한꺼번에 출간될 수 있었던 데는 변홍철 편집장이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 선생님과의 첫 만남 / 변홍철
1997년 겨울 불교 잡지 <불광>에 짧은 글을 기고했습니다. 새해 맞는 소회를 이야기하는 특집이었는데, IMF 환란 앞에서 우리 삶을 성찰하고,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회심이 필요하다, 봄이 오면 텃밭 농사든 상자 농사든 땅을 일구고 다른 삶을 살아 보고 싶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무렵 저는 선배가 운영하는 마포의 작은 출판사에서 초보 편집자로 일하며, 서울 귀농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친구들과 <녹색평론>을 읽는 작은 독서 모임을 꾸려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는 나중에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이 된 후배 이계삼 선생, 일리치 읽기 모임에서 활동하며 최근 김종철 선생님 1주기 모임에서 실무적으로 일한 정형철 선생 등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전에, 저는 1992년 초,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대구의 한 서점에서 처음 <녹색평론>을 우연히 접했습니다. 창간호를 서점에 서서 읽고는 번개를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휴가 마치고 부대에 돌아가 정기구독 신청을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부대로 책이 오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이따금 면회를 오던 지인 앞으로 구독 신청을 해 그 친구가 몇 호씩 잡지를 모아 전해 주곤 했습니다. 제대하고 복학해서 후배들에게 "이런 잡지가 있더라" 하고 소개하고 한두 명씩 독자를 늘리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하고 직장 생활 하면서도 가끔씩 만나 <녹색평론>에서 다룬 주제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모임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그때 교사가 되려는 친구들 중심으로 <녹색평론>에서 다루었던 작은학교와 대안교육 관련 주제들에 다들 큰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1998년 신년호 <불광>에 실린 그 작은 글을 김종철 선생님이 우연히 보시고, 저한테 먼저 전화를 주셨습니다. 1998년 초 봄, 마포의 썰렁한 출판사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선생님 전화를 받았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글 내용이야 유치한 수준이었을 것이 뻔한데, 글쓴이 소개에 제가 대구에서 자랐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하고 적은 것이 선생님 눈에 띄었던지, 아무튼 그 며칠 뒤에 서울 오실 일이 있으니 밥이나 같이 먹자 하셨습니다. 어찌나 반갑고 황송하던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며칠 뒤에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나, 선생님 사 주신 우럭탕을 먹었는데, 평소 흠모하던 선생님 말씀 듣느라 밥은 어떻게 먹었는지 하나도 기억에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면서 저는 평소 늘 갖고 있던 생각, 기회가 되면 서울을 떠나 시골로 가서 살고 싶다, 서울 생활이 안 맞는 것 같다 하는 얘기도 했는데, 선생님은 대뜸 대구로 와서 <녹색평론>에서 같이 일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정말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런 제안을 받고 보니 비로소 제가 해야 할 일이 정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같이 독서 모임 하던 친구들도 다들 마치 제 일처럼 좋아하고, 출판사 선배도 흔쾌히 찬성을 해 주고 해서 1998년 4월,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대구로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녹색평론> 1998년 5~6월호부터 2008년 11~12월호까지를 편집하고 제작하는 실무를 맡아 일했습니다. 선생님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지만, 무엇보다 잡지에 실린 작은 글 한 편 보시고는 그렇게 먼저 연락을 주시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시던 선생님 모습이 저한테는 가장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은 앞으로 2~3회 연재한 후 끝내고, 이후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로 이어갈 계획입니다. <녹색평론>이나 김종철 선생에 얽힌 일화나 추억, <녹색평론>을 통해 배웠거나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으신 분은 [email protected]으로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를 통해 보다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생각과 느낌을 서로 나눠 가지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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