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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현실 정치에 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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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현실 정치에 뛰어들다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 ⑨ 2008년, 김종철 사상의 전환기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항하여 5월 9일 영남대는 '미국과 세계평화' 포럼을 개최했다. 김종철 제안으로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이승렬)가 주최한 이 모임에는 염무웅, 정현백, 오다 마코토, 더글라스 러미스 등이 참여해 발언했고, 그 내용은 <녹색평론> 70호(2003년 5/6월호)에 실렸다. 2003년 9월에는 보다 야심 찬 기획인 '21세기 사상강좌'가 시작됐다. 김종철은 '대학 교수로서 대학에 기여하는 마지막 봉사'라는 각오로 이 사상강좌를 기획했다. 그는 '지금은 위기의 시대이다'라는 제목의 개최사에서 "우리에게 가장 긴급히 필요한 것은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진 새로운 대안을 구상할 수 있는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가능하게 하는 사상의 힘"이며, 이 연속강좌를 통해 "21세기를 살아가는 데 진실로 필요한 지혜와 힘을 주는 믿을 만한 사상적 지도가 마련"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녹색평론사와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공동 주최로 열린 이 사상강좌에는 전 독일 그린피스 의장 볼프강 작스,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등 주로 해외의 저명한 생태사상가들이 초청됐는데, 아마도 김종철은 이들과 한국 시민, 지식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생태 사상 및 운동에 관련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녹색평론>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대학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사상운동의 바람을 일으키려던 김종철의 구상은 행사 비용 문제로 영남대 측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오히려 2004년 그가 대학을 떠나는 계기가 된다. 당초 10회 예정으로 매회 1000만 원 자금 지원을 약속했던 영남대 측은 1회 일본의 환경사회학자 토다 키요시, 2회 볼프강 작스 이후 자금 지원을 중단했고, 3회(2003년 12월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4회(2004년 4월 인도 출신의 생태운동가 사티쉬 쿠마르)는 <녹색평론> 독자,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이어진 후 중도에 끝나고 말았다.
▲ 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

수돗물 불소화 저지와 한미 FTA 반대 운동

2004년 영남대 교수직을 버리고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김종철은 2005년부터 수돗물 불소화 반대와 한미FTA 반대 투쟁을 집요하게 벌인다. 수돗물 불소화란 불소가 충치 예방에 좋다는 이유로 1945년 미국에서 시작된 사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81년 진해부터 단계적으로 지역을 확대하다가 2005년에는 아예 법제화를 시도했다. 김종철은 1994년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해 1998년 <녹색평론> 42호(9/10월호)부터는 정면으로 문제제기하면서 이후 2005년까지 끈질기게 반대운동을 이어갔다. 설사 충치 예방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불소를 수돗물에 넣어 모든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마시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 김종철의 핵심 주장이었다. 김종철의 외로운 투쟁으로 수돗물 불소화 사업은 2018년 강원도 영월군을 마지막으로 완전 중단됐다. 현실 문제에 개입해 거둔 최초의, 작지만 의미 있는 승리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작지 않았다. 하승수의 전언에 따르면 김종철은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녹색평론>에 매진하려던 참인데 이것(수돗물 불소화 반대) 때문에 도저히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녹색평론>이 그만큼 문제제기를 했는데 왜 과학자나 시민운동가들이 바통을 이어받아서 활동하지 않느냐'는 한탄도 했다고 한다. 외로운 투쟁이었다.(<녹색평론> 174호 2020년 9/10월호, 20~21쪽) 2006년부터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 FTA 반대 투쟁에 본격 나섰다. 2008년까지 <녹색평론>의 거의 매호에 반대 기사를 게재했고 송기호, 우석훈, 홍기빈 등 관련 전문가들의 한미 FTA 반대 저서를 출간했다. 또 2006년 9월에는 <녹색평론> 독자들을 규합해 '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 독자모임 준비위원회' 모임을 이화여대에서 갖기도 했다. 김종철이 한미 FTA에 강력 반대한 이유는 경제적 이해득실 때문이 아니었다. 민중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즉 민주주의가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녹색평론> 90호(2006년 9/10월호) 머리말 '한미 FTA와 민주주의의 위기, 93호(2007년 3/4월호) 머리말 '한미 FTA, 경제성장, 민주주의', 그리고 2007년 7월 4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그들의 '믿음'이 민주주의를 죽이고 있다" 등에 그의 논점이 잘 드러나 있다.

2008년, 김종철 사상의 전환기

2008년 5월 <녹색평론> 100호를 맞아 김종철은 <녹색평론 서문집-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김종철 평론집-땅의 옹호> <녹색평론선집 2> 등 세 권의 책을 펴내면서 자신의 사상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됐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소고기 수입에 대한 반발로 전국에서 중고등학생이 대거 참여한 촛불집회가 벌어졌을 때였다. 김종철은 5월 21일부터 6월 11일까지 대구, 원주, 군포, 서울, 부산, 제주, 광주 등에서 시국강연회를 가지며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해 적극 발언하기 시작했다. 2008년 5월 19일, <녹색평론> 100호 기념으로 <프레시안>과 가진 인터뷰에서 '지난 2년여간 <녹색평론>이 한미FTA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면서 일부 독자로부터 항의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김종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녹색평론>을 처음 창간하고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화의 광풍이 몰아쳤다. 한미 FTA도 그 연장선상 중의 하나일 텐데…. 그러다보니 <녹색평론> 초창기의 좀 낭만적인 분위기가 많이 사라진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초기에는 생태 영성이라든지, 자연 현상의 신비로움이든지, 종교적인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녹색평론>의 오랜 독자 중에는 그런 글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차라리 그런 쪽으로 갔으면 지금보다 장사는 잘 됐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은 그런 얘기가 우리의 다급한 현실에서는 너무 한가로운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늘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관련 기사 : <프레시안> 2008년 5월 19일 자 [인터뷰] "청계천 촛불, '정직한 반항' 또 '희망의 근거'")

2008년 가을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녹색평론>은 103호(2008년 11/12월호)를 마지막으로 2008년 11월 17년간의 대구시대를 마감하고 사무실을 서울로 옮겼다. 이후 김종철은 현대 금융제도의 작동원리를 탐구하면서 1996년 지역화폐에서 시작된 문제의식을 기본소득으로 확장하는 한편 은행의 공공화, 또는 신용의 사회화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신용의 사회화란 현대 경제생활의 핵심인 돈(신용)의 창조를 지금처럼 민간은행에 맡길 것이 아니라 지역이나 중앙정부가 맡아 공공의 복리에 복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현재 미국 등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대화폐이론(MMT : Modern Monetary Theory)과 맞닿아 있는 이론이다. 서울로 올라온 지 약 10개월 후인 2009년 9월부터 2011년 초까지 약 1년 반 동안 <녹색평론>에는 기본소득과 화폐제도에 관한 글들이 집중적으로 실렸다. 108호(2009년 9/10월호)에 세키 히로노의 '왜 기본소득과 신용의 사회화가 필요한가' 등 '삶을 위한 경제' 특집이 실렸고, 이후 '기본소득과 농업을 기본을 기축으로 한 지역자급경제제도'(109호), '통화제도 개혁을 통한 기본소득 보장' 특집(111호), '돈의 신화를 벗긴다'(112호),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기본소득과 새로운 삶의 방식'(113호) '돈을 근원적으로 묻는다'(114호), '돈과 자유-배당경제학에 대하여'(115호), '근대 조세국가의 위기와 기본소득'(116호, 2011년 1/2월호) 등이 실렸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2011년에는 주로 핵문제가 다뤄지지만, 2012년부터는 다시 '자유무역을 넘어 기본소득으로'(122호, 2012년 1/2월호)를 시작으로 '금융위기, 민주주의, 기본소득' 특집(125호, 2012년 7/8월호), '모두에게 존엄과 자유를-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좌담(131호, 2013년 7/8월호), '시민권으로서의 소득'(133호, 2013년 11/12월호), '기본소득 쟁점과 제언' 특집(135호, 2014년 3/4월호) 등 기본소득 관련 기사는 2014년까지 이어진다.
▲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가 실린 109호와 '성장시대의 종언'이 실린 125호 <녹색평론> 표지. ⓒ녹색평론사
특히 김종철은 '경제성장은 민주주의의 적이다'(109호, 2009년 11/12월호), '성장시대의 종언'(125호, 2012년 7/8월호) 등의 글을 통해 경제성장 자체를 부정하는 한편 경제성장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을 펴기 시작한다. 나아가 2015년부터는 '제비뽑기 정치' '아테네식 민주정치의 부활)(140호, 2015년 1/2월호), '원점에서 생각하는 민주정치'(141호, 2015년 3/4월호), '기본소득과 민주주의'(144호, 2015년 9/10월호) 등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와 기본소득 간의 관계를 다루기 시작했고, 촛불시위 이후인 2017년에는 시민의회 등 직접민주주의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기본소득과 은행의 공공화가 가능하려면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 민주주의가 확보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였을 것이다.

문화에서 민주주의로

이렇게 볼 때 2008년은 김종철 사상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녹색평론> 창간 이후 약 10년 간격으로 그가 낸 세 권의 책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99년에 낸 책 <간디의 물레>의 부제는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였고, 2008년 저서 <땅의 옹호>의 부제는 '공생공락의 삶을 위하여', 그리고 2019년의 마지막 저서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부제는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였다. '문화'에서 '민주주의'로의 변화가 눈에 띄는데,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핵심 과제가 '내면의 개안(開眼)'에서 '사회제도의 개선'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내면의 개안'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중의 주체적 삶을 위해서는 사회제도, 즉 집단적 삶의 방식도 바뀌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적 생활수단을 보장하는(즉 생활수단 마련을 위해 노예적 삶을 감수하지 않게 하는) 기본소득, 기본소득의 재원 확보를 위한 신용의 사회화,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보를 김종철은 자기 나름의 해법으로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 김종철이 녹색당에 참여한 이유

실제로 김종철은 2011년 11월 <녹색평론> 창간 20주년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자신이 2008년 말 서울로 근거지를 옮긴 데 대해 "그간의 숙성 기간을 거쳐서 제대로 싸워보자, 이런 마음가짐"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전까지 국가와 자본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아나키스트적 사고에 젖어 있었던 자신이 2011년 녹색당 참여를 결심하게 된 것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보면서 중앙정치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지역 화폐 얘기를 할 때만 하더라도 은행의 공공화 같은 금융 제도까지 고민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지역 화폐 운동, 협동조합 운동 등을 통해서 지역에서 대안 공동체가 만들어지면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 되리라는 전망을 소박하게 가졌을 뿐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전형적인 아나키스트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셈입니다.

사실 2~3년 전까지는 녹색당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겼어요. 중앙 정치에 관여하는 것보다 더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금융 문제, 에너지 문제 등을 고민하면서 점점 중앙과 지역의 관계를 깊이 숙고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녹색당 참여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관련 기사 : <프레시안> 2011년 11월 15일 자 [<녹색평론> 20년 : 1991-2011] "모든 시민에게 100만 원씩! 세상이 안 바뀌나 보자!")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자신의 비전을 제시했다.
"실제로 금융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모색이 세계 곳곳에서 나오고 있어요.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왜 이런 고민을 소개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한국에서는 고작해야 국경을 넘나드는 금융 거래에 세금을 매기는 토빈세 정도가 알려져 있습니다만 세계적으로는 훨씬 더 근본적인 대안이 다각도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은행을 공공화하는 거예요.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에 미국에서 그런 움직임이 있어요. 은행의 공공화는 중요합니다. 지금 민간 은행이 돈놀이를 통해서 얻는 막대한 이익은 전부 주주에게 귀속이 됩니다. 즉, 공적 이익이 사적 이익으로 전유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서민은 빚지고, 중소기업은 망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공공 은행에서는 은행 업무를 통해서 생기는 막대한 이익을 전부 공익 자금으로 만들 수 있어요. 바로 이런 공익 자금으로 뭘 할 수 있을까요? 바로 기본 소득 같은 획기적인 복지 실험을 할 수 있어요. 기본 소득은 모든 시민에게 재산 상태, 취업 의사에 상관없이 무조건 일률적으로 일정한 돈을 나눠주자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이 기본 소득 제도를 주장하는 이들이 꽤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그 재원을 세금으로 제한합니다. 세금과 연계된 기본 소득 제도는 성공하기 어려워요. 당장 세금을 올리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더 많은 세금을 거둬서 기본 소득 제도를 하자는 발생에 과연 누가 호응할지 미지수입니다. 반면에 공공 은행에서 마련한 재원으로는 세금을 올리지 않고도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어요."(☞ 관련 기사 : <프레시안> 2011년 11월 15일 자 [<녹색평론> 20년 : 1991-2011] "모든 시민에게 100만 원씩! 세상이 안 바뀌나 보자!")

성장시대의 종언, 기본소득, 은행의 공공화,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김종철의 비전은 대략 2012년 무렵이면 그 얼개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비전은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3장 '성장시대의 종언과 기본소득'에 펼쳐져 있다. 앞으로 두 회에 걸쳐 '성장시대의 종언', 그리고 '기본소득과 은행의 공공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은 앞으로 1~2회 연재한 후 끝내고, 이후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로 이어갈 계획입니다. <녹색평론>이나 김종철 선생에 얽힌 일화나 추억, <녹색평론>을 통해 배웠거나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으신 분은 [email protected]으로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를 통해 보다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생각과 느낌을 서로 나눠 가지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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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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