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돗물 불소화 저지와 한미 FTA 반대 운동
2004년 영남대 교수직을 버리고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김종철은 2005년부터 수돗물 불소화 반대와 한미FTA 반대 투쟁을 집요하게 벌인다. 수돗물 불소화란 불소가 충치 예방에 좋다는 이유로 1945년 미국에서 시작된 사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81년 진해부터 단계적으로 지역을 확대하다가 2005년에는 아예 법제화를 시도했다. 김종철은 1994년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해 1998년 <녹색평론> 42호(9/10월호)부터는 정면으로 문제제기하면서 이후 2005년까지 끈질기게 반대운동을 이어갔다. 설사 충치 예방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불소를 수돗물에 넣어 모든 사람에게 강제적으로 마시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 김종철의 핵심 주장이었다. 김종철의 외로운 투쟁으로 수돗물 불소화 사업은 2018년 강원도 영월군을 마지막으로 완전 중단됐다. 현실 문제에 개입해 거둔 최초의, 작지만 의미 있는 승리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작지 않았다. 하승수의 전언에 따르면 김종철은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녹색평론>에 매진하려던 참인데 이것(수돗물 불소화 반대) 때문에 도저히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녹색평론>이 그만큼 문제제기를 했는데 왜 과학자나 시민운동가들이 바통을 이어받아서 활동하지 않느냐'는 한탄도 했다고 한다. 외로운 투쟁이었다.(<녹색평론> 174호 2020년 9/10월호, 20~21쪽) 2006년부터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 FTA 반대 투쟁에 본격 나섰다. 2008년까지 <녹색평론>의 거의 매호에 반대 기사를 게재했고 송기호, 우석훈, 홍기빈 등 관련 전문가들의 한미 FTA 반대 저서를 출간했다. 또 2006년 9월에는 <녹색평론> 독자들을 규합해 '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 독자모임 준비위원회' 모임을 이화여대에서 갖기도 했다. 김종철이 한미 FTA에 강력 반대한 이유는 경제적 이해득실 때문이 아니었다. 민중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즉 민주주의가 자본의 이해관계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녹색평론> 90호(2006년 9/10월호) 머리말 '한미 FTA와 민주주의의 위기, 93호(2007년 3/4월호) 머리말 '한미 FTA, 경제성장, 민주주의', 그리고 2007년 7월 4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그들의 '믿음'이 민주주의를 죽이고 있다" 등에 그의 논점이 잘 드러나 있다.2008년, 김종철 사상의 전환기
2008년 5월 <녹색평론> 100호를 맞아 김종철은 <녹색평론 서문집-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김종철 평론집-땅의 옹호> <녹색평론선집 2> 등 세 권의 책을 펴내면서 자신의 사상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됐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의 광우병 소고기 수입에 대한 반발로 전국에서 중고등학생이 대거 참여한 촛불집회가 벌어졌을 때였다. 김종철은 5월 21일부터 6월 11일까지 대구, 원주, 군포, 서울, 부산, 제주, 광주 등에서 시국강연회를 가지며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해 적극 발언하기 시작했다. 2008년 5월 19일, <녹색평론> 100호 기념으로 <프레시안>과 가진 인터뷰에서 '지난 2년여간 <녹색평론>이 한미FTA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면서 일부 독자로부터 항의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김종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2008년 가을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녹색평론>은 103호(2008년 11/12월호)를 마지막으로 2008년 11월 17년간의 대구시대를 마감하고 사무실을 서울로 옮겼다. 이후 김종철은 현대 금융제도의 작동원리를 탐구하면서 1996년 지역화폐에서 시작된 문제의식을 기본소득으로 확장하는 한편 은행의 공공화, 또는 신용의 사회화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신용의 사회화란 현대 경제생활의 핵심인 돈(신용)의 창조를 지금처럼 민간은행에 맡길 것이 아니라 지역이나 중앙정부가 맡아 공공의 복리에 복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현재 미국 등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대화폐이론(MMT : Modern Monetary Theory)과 맞닿아 있는 이론이다. 서울로 올라온 지 약 10개월 후인 2009년 9월부터 2011년 초까지 약 1년 반 동안 <녹색평론>에는 기본소득과 화폐제도에 관한 글들이 집중적으로 실렸다. 108호(2009년 9/10월호)에 세키 히로노의 '왜 기본소득과 신용의 사회화가 필요한가' 등 '삶을 위한 경제' 특집이 실렸고, 이후 '기본소득과 농업을 기본을 기축으로 한 지역자급경제제도'(109호), '통화제도 개혁을 통한 기본소득 보장' 특집(111호), '돈의 신화를 벗긴다'(112호),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기본소득과 새로운 삶의 방식'(113호) '돈을 근원적으로 묻는다'(114호), '돈과 자유-배당경제학에 대하여'(115호), '근대 조세국가의 위기와 기본소득'(116호, 2011년 1/2월호) 등이 실렸다.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2011년에는 주로 핵문제가 다뤄지지만, 2012년부터는 다시 '자유무역을 넘어 기본소득으로'(122호, 2012년 1/2월호)를 시작으로 '금융위기, 민주주의, 기본소득' 특집(125호, 2012년 7/8월호), '모두에게 존엄과 자유를-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좌담(131호, 2013년 7/8월호), '시민권으로서의 소득'(133호, 2013년 11/12월호), '기본소득 쟁점과 제언' 특집(135호, 2014년 3/4월호) 등 기본소득 관련 기사는 2014년까지 이어진다.문화에서 민주주의로
이렇게 볼 때 2008년은 김종철 사상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녹색평론> 창간 이후 약 10년 간격으로 그가 낸 세 권의 책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99년에 낸 책 <간디의 물레>의 부제는 '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였고, 2008년 저서 <땅의 옹호>의 부제는 '공생공락의 삶을 위하여', 그리고 2019년의 마지막 저서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부제는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였다. '문화'에서 '민주주의'로의 변화가 눈에 띄는데,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핵심 과제가 '내면의 개안(開眼)'에서 '사회제도의 개선'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내면의 개안'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민중의 주체적 삶을 위해서는 사회제도, 즉 집단적 삶의 방식도 바뀌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적 생활수단을 보장하는(즉 생활수단 마련을 위해 노예적 삶을 감수하지 않게 하는) 기본소득, 기본소득의 재원 확보를 위한 신용의 사회화,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보를 김종철은 자기 나름의 해법으로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아나키스트 김종철이 녹색당에 참여한 이유
실제로 김종철은 2011년 11월 <녹색평론> 창간 20주년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자신이 2008년 말 서울로 근거지를 옮긴 데 대해 "그간의 숙성 기간을 거쳐서 제대로 싸워보자, 이런 마음가짐"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이전까지 국가와 자본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아나키스트적 사고에 젖어 있었던 자신이 2011년 녹색당 참여를 결심하게 된 것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그리고 결정적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보면서 중앙정치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자신의 비전을 제시했다. 성장시대의 종언, 기본소득, 은행의 공공화,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김종철의 비전은 대략 2012년 무렵이면 그 얼개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비전은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3장 '성장시대의 종언과 기본소득'에 펼쳐져 있다. 앞으로 두 회에 걸쳐 '성장시대의 종언', 그리고 '기본소득과 은행의 공공화'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은 앞으로 1~2회 연재한 후 끝내고, 이후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로 이어갈 계획입니다. <녹색평론>이나 김종철 선생에 얽힌 일화나 추억, <녹색평론>을 통해 배웠거나 느끼고 깨달은 바가 있으신 분은 [email protected]으로 글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연재를 통해 보다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생각과 느낌을 서로 나눠 가지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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