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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지배,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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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의 지배, '앵글로색슨 자본주의'의 정체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 ⑫ 기본소득과 신용의 사회화 (2)

은행화폐와 신용의 사유화 vs. 정부화폐와 신용의 사회화

'이자가 붙은 은행 빚' 형태의 은행화폐가 맹목적 경제성장을 강요하고 서민들의 삶을 곤궁하게 만들어 온 것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돈을 빚의 형태로 만들어 내는가? 이자가 붙지 않은 돈을 만들면 되지 않는가?' '이자 수취를 통한 은행의 독점적 이익을 방지하기 위해 은행의 이자 수입을 공공의 목적에 사용하거나, 은행 대출을 무이자로 할 수는 없는가?' 앞의 문제의식을 은행화폐에서 공공화폐로의 전환, 뒤는 은행의 공공화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이제까지 민간 금융세력이 독점하면서 사적 이익 추구의 발판으로 삼아온 화폐와 신용에 대한 통제를 사회 즉 정부에 되돌려 주자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화폐제도개혁 운동가인 리처드 쿡은 2009년 "은행업자들이 화폐창조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최악의 민영화"이며 "부채를 기초로 한 이 통화제도는 그 희생자인 사회가 죽어서야 행전이 끝날 것이다. 지금 세계가 죽어가고 있다"고 절규했는데,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존 금융제도를 혁파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녹색평론> 111호 40쪽)

잉글랜드은행 창립, 신용 사유화의 시초

화폐 창조 권력을 둘러싼 민권 대 금권의 대립, 시민.사회.정부 대 금융세력 간의 대립은 1694년 영국의 민간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 창립에서 시작됐고, 300년이 지난 지금도 화폐 및 신용에 대한 통제권은 민간 금융가들의 수중에 장악돼 있다. 1694년 영국의 윌리엄 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민간 은행가들로부터 120만 파운드를 빌리는 대가로 잉글랜드은행 설립을 인가하고 민간 은행가들에게 화폐발행권을 넘겨주었다. 잉글랜드은행 설립은 근대 금융제도의 효시이며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도 영국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 잉글랜드은행 설립의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로마시대 이래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시대까지만 해도 정부가 갖고 있었던 화폐발행권을 민간에 이양했다. 이는 정부재정을 위한 자금도 정부의 화폐 발행이 아니라 민간 금융업자들에게 돈을 빌려(국채 발행) 충당하는 것이다. 즉 공공 목적의 재정 사용을 위해 온 국민이 민간 금융업자에게 이자를 지불하는 셈이다. 둘째, 현재와 같은 은행화폐 관행이 정착됐다. 즉 부분지급준비제도에 의해 '무(無)에서 돈을 창조'하고, 이 대출금에 '이자가 붙은 은행 빚'으로서의 은행화폐가 대세가 된 것이다. 원래 유럽에서도 중세까지 이자놀이(usury)는 사형까지도 받을 수 있는 중대범죄였다. 대부분의 주요 종교에서 돈의 유일한 정당한 목적은 실제의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지, 돈으로 돈을 증식한다는 것은 도둑질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현재의 이슬람은행은 이자 증식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유럽에서 '무(無)에서 돈을 창조'하는 부분지급준비제도와 이자놀이가 허용된 것은 신대륙 발견과 원격 무역, 산업혁명 등으로 떼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무궁무진했던 반면 자본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카리브해 지역에서의 사탕과 담배 농장 경영,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에 의한 공장제 공업 발달 등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었는데, 이같은 사업을 위해서는 장기간 막대한 투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까지 유럽은 자본 부족 상태였으며 경제 팽창을 위한 신용 공급을 위해 은행 화폐가 용인됐던 것이다.
▲ 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최형락)

민권 대 금권의 대결, 미국의 경우

반면 미국의 경우는 건국 당시부터 20세기 초까지 민권 대 금권, 정부화폐 대 은행화폐의 대결이 이어졌다. 폴 그리뇽에 따르면 1776년의 혁명 이래 미국의 역사는 주로 유럽 국제은행가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거대한 투쟁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투쟁은 1913년에 시민의 패배로 종결됐다. 그해 연방준비제도법에 서명함으로써 국제 은행카르텔이 미국의 통화를 지배하도록 허용한 윌슨은 대통령 퇴임 후 "나는 속아 넘어가서 나라를 배반하였다"면서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고 한다.

"나는 가장 불행한 사람의 하나다. 나는 부지중에 내 나라를 망쳤다. 한 위대한 산업국가가 자신의 신용시스템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우리의 신용제도는 집중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국가의 성장과 우리의 모든 활동은 몇몇 소수인의 손에 장악돼 있다. 우리는 문명세계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지배되고, 가장 완전히 통제되는 정부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자유로운 의견에 의한 정부도, 다수의 의견과 투표에 의한 정부도 아니라, 소그룹의 지배자의 의견과 강박에 의해 움직이는 정부가 되었다."

애당초 미국을 탄생시킨 독립혁명이 통화주권을 둘러싼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의 건국 시조 중 한 명인 벤자민 프랭클린은 "식민지인들이 (영국의) 조지 3세와 국제은행가들의 손아귀를 벗어나 자신들의 돈을 발행할 항구적인 힘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 아메리카혁명전쟁의 주된 이유였다"고 밝혔다. 식민지 시기 미국은 공공화폐(지역화폐) 발행을 통해 번영과 평화를 누렸으나 1764년 이를 시기한 영국의 금융업자들이 의회에 압력을 넣어 식민지의 독자적인 화폐발행을 금지시킴으로써 1년만에 통화량이 반감되고 실업자가 늘어나며 경기 침체가 10년간 계속되면서 결국 독립전쟁에 나서게 됐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는 인지세법이나 수입 차(茶)에 대한 과세가 독립전쟁의 원인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나 실상은 가혹한 통화 압제였던 셈이다. 프랭클린은 "영국의 금융업자들이 식민지의 빈곤을 초래하지 않았더라면 식민지는 차와 같은 물품에 과해지는 소소한 세금 부담쯤은 쾌락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독립전쟁의 진정한 원인이 은폐된 것은 미국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금권세력의 압력 때문일 것이다. 독립 이후에도 민간 금융세력에 대한 미국 정치인들의 반감과 경계는 계속 이어졌다. 예컨대 3대 대통령(1801-1809년) 제퍼슨은 "나는 은행제도는 우리들의 자유에 대해서 상비군보다도 위험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중략) 통화 발행권은 은행으로부터 되돌려 받아 그 정당한 보유자인 국민에게 반환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민중의 대통령으로 알려진 앤드류 잭슨(1829-1837년)은 "만일 국민이 우리의 통화와 금융제도의 이 엄청난 부정을 알게 된다면 곧바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두 대통령은 금융가들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중앙은행들인 제1합중국은행과 제2합중국은행을 각각 해산시켰는데 제퍼슨은 중앙은행에의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균형 예산을 유지할 수 있었고, 잭슨은 국가 부채를 완전히 갚을 수 있었다.

링컨과 정부화폐

특히 링컨은 미국 역사상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전쟁(1861-65년)을 민간 금융업자들로부터의 차입 없이, 즉 은행화폐가 아닌 정부화폐 발행만으로 치러냈다. 당시 연방정부는 거액의 전쟁자금을 신속히 확보해야 했는데, 뉴욕의 은행업자들은 자그마치 27-36%라는 고리대 수준의 이자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링컨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4억 5천만 달러의 정부화폐를 발행했다. 이 정부지폐는 다른 지폐와 구별하기 위해 뒷면을 녹색 잉크로 인쇄했기 때문에 '그린백'으로 불렸는데, 링컨은 이 이자 없는 정부화폐를 사용하여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린백'의 발행은 정부가 이자 지불의 의무가 있는 은행화폐를 빌릴 필요가 원래부터 없다는 점을 입증했다. 1960년대 미 하원 은행통화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라이트 패트먼 의원의 추산에 따르면 만일 당시 링컨 행정부가 민간은행에 연 5% 이자의 국채를 팔아 전쟁자금을 조달했을 경우, 100여년이 지난 1964년까지 23억 달러를 지불하든가 원금의 약 5배를 차입해야 했다고 한다. 링컨은 전쟁 후에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비용을 조달하고 일반 국민의 소비에 필요한 모든 통화와 은행예금을 정부는 스스로 발행.유통시켜야 한다. 통화를 만들고 발행하는 특전은 정부가 가진 하나의 특권일 뿐만 아니라, 최대의 건설적인 기회이다. 이 원리를 도입함으로써 납세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이자를 절약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돈은 인간의 주인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하인이 되는 것이다."(빌 토튼,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 83~84쪽)

링컨의 시도는 대의정부의 통화발행이야말로 경제적 민주주의의 열쇠임을 말해주고 있다. 반면 영국의 금융세력은 링컨의 통화정책을 다음과 같이 저주했다.

"북아메리카에 기원을 둔 이 악질적인 금융정책이 만약 관행으로 굳어진다면, 그 정부는 자신의 돈을 아무 비용 없이 공급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부채를 청산하고, 이제부터는 부채 없이 지낼 것이다. 앞으로 그들은 상거래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갖게 될 것이고 세계 역사상 전례 없는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계 각처에서 두뇌와 부가 북아메리카로 몰려들게 될 것이다. 이 나라는 파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상의 모든 군주국이 파괴될 것이다."(<런던타임스> 1865년)

<런던타임스>의 이 논평은 금융업자들이 정부화폐의 가치와 잠재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높이 평가했음을 말해준다. 정부화폐가 번영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만일 정부화폐를 허용한다면 금융업자 자신들과 기득권 세력은 망할 수밖에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한 셈이다. 이처럼 정부화폐가 번영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남북전쟁 이후 왜 미국은 정부화폐를 통화제도의 근본으로 삼지 못한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그림자정부' 금융세력의 권력이 정치세력의 힘을 능가할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전쟁 후 은행가들은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해 '그린백'을 회수하려 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했고 1900년에도 '그린백'은 미국에서 유통되는 통화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연방준비제도의 창설, 금융의 지배의 완성

그러나 더 이상 정부화폐의 발행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특히 1873년, 1893년의 공황을 거치면서 은행은 연방정부보다도 강력한 제도가 되었다. 공황은 기본적으로 신용 경색이고 신용 경색을 타개하려면 대규모의 통화를 풀어야 했는데, 연방정부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예컨대 1893년의 공황은 당시 미국 최대의 부호인 J. P. 모건이 사재를 털어 넣음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13년 미국 최대 부호들의 극비 회동에 의해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가 창설됐다. 12개의 지역 연방준비은행과 이를 통괄하는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로 구성된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는 미국 중앙은행제도를 관장하는 '기업체'이다. 12개 지역 연방준비은행은 모두 민간 금융가들의 소유이다. 예컨대 이들 중 최대인 뉴욕연방준비은행의 주주는 런던과 베를린의 로스차일드은행, 암스테르담의 워바그은행 등 국제금융자본가들이며 미국 정부는 단 1주의 주식도 갖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1913년 연방준비은행법 통과 당시 하원의장이었던 찰스 린드버그 2세는 "연방준비은행 시스템은 사적인 것이며, 타인들의 돈을 가지고 최대의 사익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서 이 법률의 통과를 입법부에 의한 최악의 범죄행위라고 규정했다.(<녹색평론> 111호 22쪽) 또한 그 자신이 은행가이기도 했던 하원의원 루이스 맥파든은 연방준비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연방준비은행이 합중국의 정부기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정부기관이 아니다. 스스로의 이익과 외국 고객의 이익을 위해서 합중국 국민을 먹이로 삼는 사적(私的) 신용 독점 기업체이다. 연방준비은행은 외국 증앙은행의 대리인이다. 헨리 포드는 '이들 금융업자들의 목적은 소멸 불가능한 채무를 창조함으로써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방준비제도 이사회가 오만한 신용 독점에 의해 합중국 정부를 강탈해 왔다는 것이 진실이다."(빌 토튼,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 72쪽)

연방준비제도가 정부 기관인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 중 하나는 대통령이 연방준비제도 이사회(FRB) 의장을 지명한다는 사실 때문인데, 이는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5년에 시작된 관례에 불과할 뿐이다. 연방준비제도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금융가들이 관장하는 기구이며, 세계 최대 경제대국 미국의 신용을 통제하는 연방준비제도가 창설됨으로써 금융자본의 세계 지배는 확립됐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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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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