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모두가 외교적 감각을 가진 외교 국민이 돼서 우리가 태어난 불행한 지정학적 입장을 극복해나가야 될 것입니다." 거의 40년 전인, 1972년 9월 16일 김대중 전 대통령 국회발언이다. 말씀은 이어진다. 이번엔 1987년 9월 인터뷰. "우리는 고도의 외교 민족이 돼야 합니다. 절대로 감정을 가지고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4대국에 둘러싸인 우리가 살아나가려면 외교적 지혜가 뛰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까. 그렇게 하고있을까. '대장동'과 '무속'에 한눈 파느라 그럴 새가 있을까. 지난 봄 출간된 비스마르크를 불러냈다. 비스마르크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가고싶어했다. 어머니가 결사반대했다. 아들이 그곳에서 맥주통에 빠져살까 걱정해서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괴팅겐 대학교. 비스마르크는 괴팅겐에서 '법학과 국가학'으로 등록했는데 실제 어떤 강의를 들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전공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가 빠짐없이 들은 유일한 강의가 있다. 유럽 국가 체계를 다룬 역사학자 아르놀트 헤렌의 강좌였다. "당신은 무슨 공부를 합니까."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외교." 1871년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프랑크푸르트 평화조약이 체결된 이후 비스마르크 외교정책의 최고 목표는 '평화수호'였다. 그래서 그는 '예방전쟁', 곧 적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해서 가하는 선제공격을 철저히 거부했다. 하지만 전쟁을 두려워하진 않았다. "언제라도 전쟁할 각오를 보일 때 우리는 평화를 지킨다. 칼을 뽑을 수 있게 칼집을 풀어둔 사람에게 공격은 쉽지 않다. 벽에 확실하게 걸어둔 연습용 칼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다." 1877년 러시아와 튀르크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스마르크는 키싱겐에서 요양중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외교적 구상을 멈출 순 없었다. 아들 헤르베르트를 불러 받아쓰게 했다. '키싱겐 구술'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기록이다. 그는 가능한 경우들 가운데 자신이 '최악'이라 여기는 것을, 독일을 겨눈 유럽 강대국들의 "결탁이라는 악몽"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가장 중시하는 외교정책의 원칙을 정리했다. "그 어떤 영토의 확보가 아니라 전체적인 정치 상황,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강대국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정치 상황이며, 혹시라도 강대국들이 우리를 겨누고 결탁하는 일만큼은 막아야하는 상황." 그런데 우리는 비스마르크가 가장 염려했던 상황을 겪어야했다. 구한말, 해방 전후가 그러했다.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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