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연재의 '파트 1'에서 다룰 '혁명 그리고 정치'에서, 그 첫번째 인물은 칼 마르크스다. 이 연재물은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
"재판장님! '전쟁을 겪은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본인도 16살 되던 해까지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으뜸가는 진리로 알던 순진한 소년이었습니다. (…중략…)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 그 소년은 30대 중반의 장년이 되어 국가보안법에 의해 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이기도 한 자유민주주의가 유린되던 현장에서 이 길로 들어선 지 십수년 만에 여전히 자유민주주의를 농락하는 자들에 의해 체포 기소되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가했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된 것입니다. (중략)
재판장님! 지금으로부터 수백만 년 전 네 발로 생활하던 인류의 조상이 두 발로 걷는 데는 수만 년이 걸렸을 것입니다. 숱한 고통과 좌절이 뒤따랐을 것이며 때로는 목숨까지 요구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두 팔이 걷는 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인류의 문명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성장하는 노동운동 속에서 새롭게 발현하는 사회주의 운동은 수백만 년 전의 인간의 노력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은 모순된 현실이 배태한 자연스런 요구이며 현실을 극복코자 하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더 나은 문명을 창조할 확신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계속 네 발로 기어다닐 것을 강요하는 어떠한 시도도 막을 수 없는 역사 발전의 필연인 것입니다." 노회찬 (<사멸해 가는 역사의 유물에 의해 산 인간이 심판 받을 수 없다>, <선진노동자의 이름으로: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를 향한 민중민주주의 진영의 사상과 실천>)
위 인용문은 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된 노회찬이 남긴 법정투쟁기록 가운데 나오는 글이다. 노회찬에게 '전쟁 같은 경험'은 두 번이었다. 첫 번째 경험은 10대 때인 1972년 10월유신이었다. 고교생 노회찬에게 10월 유신 선포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유신독재는 그를 반독재 민주투사로 이끌었다.
"유신이 일어난 날, 그 날이 내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유경순, 봄날의 박씨, 2015)
두 번째는 20대 때 경험한 '80년 5월 광주'의 충격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학생·지식인들의 저항만으로는 저 폭압적인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중의 힘에 기반을 둔 혁명 말고는 독재 타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노회찬·구영식, 비아북, 2014)
이 두 번의 전쟁 같은 경험은 20대 청년 노회찬을 '혁명가의 길'로 이끌었다. 용접공에서 노동현장으로 '존재 이전'을 한 노동운동가 노회찬은, 이후 인민노련 사건으로 2년 4개월 동안의 감옥생활을 했다. 출옥 뒤엔 민주화의 물결과 소·동구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속에서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가의 길을 선택했다. 2004년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예정된 수순입니다. 한편으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과 노동운동의 성장, 다른 한편으론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지배력 확장 등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대중운동'과 합법적 '정당운동'이란 양 날개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이 지체된 정치운동의 세력화를 추진함에 따라 민주노동당 창당도 이뤄진 것입니다. 1987년 이래 진보정당운동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당면 과제라 판단했고, 1992년 출소 이래 이 운동에 전념했습니다." 노회찬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정운영, 랜덤하우스중앙, 2004)
훗날 노회찬은 영화감독 변영주와의 대화에서 민주노동당 창당에 대해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고난의 세월 끝에 당은 창당됐는데, 저는 진심으로 너무 기뻤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이었냐면, 제 인생의 목표의 반은 이루어졌다, 반이나 이루어졌다. 창당을 한 것만으로도." 노회찬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노회찬·김어준·진중권 외, 꾸리에, 2010)
'대중의 힘에 기반을 둔 혁명'을 꿈꿨던 시절, 노회찬이 마주친 사람들 가운데는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호치민, 저우언라이, 로자 룩셈부르크, 안토니오 그람시, 체 게바라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레닌, 호치민, 저우언라이 등 세 사람은 노회찬이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꼽은 인물들이기도 하다.
(1) 노회찬, 칼 마르크스와 조우하다 :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Quo Vadis, Marx?', 'Quo Vadis, 진보?'
1996년 5월 30일 노회찬(당시 진보정치연합 강서지부 위원장, 한국노동정책정보센터 대표)은 영국 옥스퍼드대 초청으로 <코리안포럼>에 참석했다. 신청한 지 4년 만에 여권이 나온 뒤 첫 외국 나들이였다. 포럼에서 노회찬은 '진보정당 건설과 한국의 노동운동'을 주제로 발표했다. 진보정당도 없던 당시 한국의 처지에 노회찬은 희망에 대해 계획처럼 얘기했다. 발표를 마치고 며칠이 지난 뒤 노회찬은 딘 거리(Dean Street) 28번지에 있는 마르크스의 집을 찾아서 런던의 중심지인 소호(Soho) 지역을 혼자 헤맸다. 사유재산 폐지와 생산수단 국유화를 주장하며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상했던 마르크스가, 유럽을 유랑하다 1849년 영국으로 건너와 정착한 집이었다. 세상을 뜰 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런던에서 보낸 마르크스는 대영박물관 도서관 원형 열람실을 오가며 <자본론> 등을 저술했다.
※ '영문학의 여신이 대영박물관 열람실에 군림했다'는 말이 있듯이 찰스 디킨스(1812~1870), 토머스 칼라일(1795~1881), 토머스 하디(1840~1928), 버지니아 울프(1882~1941),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조지 버나드 쇼(1856~1950), H. G. 웰스(1866~1946) 등은 물론 19세기 영국의 가장 위대한 수상이라 간주되는 글래드스턴(1809~1898)도 그곳을 즐겨 찾았다. 뿐만 아니라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간디, 그리고 마르크스, 레닌 등 대륙에서 온 혁명가들도 대영박물관 도서관의 원형 천장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중략)
딱히 갈 곳 없던 해외 망명객들에게 대영박물관 열람실은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마르크스는 40년을 거의 매일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출근(?)하였다. 문이 열리기 전에 미리 와서 기다리다 입장한 첫 번째 사람이었고 문을 닫을 때까지 가장 늦게 남아 있었다. 때로 도서관 측은 마르크스를 강제로 쫓아내야 했다. 책과 담배에 파묻혀 살던 마르크스는 때로는 열람실에서 실신하기도 했는데 도서관 측이 들것으로 실어 날랐다. 그는 매일 똑같은 좌석에 앉아 집필했는데, 확인되지는 않지만 좌석 번호가 G7이었다고 한다. (박지향, <영국_영국국립도서관>, 박지향, <도서관으로 문명을 읽다>, 정병설 외, 한길사, 2016 )
"한 손에는 지도를, 다른 한 손에는 'Dean Street 28'이라 적힌 쪽지를 들고 한참을 찾아다녔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던 무렵 살던 집 주소였다. 결국 집은 찾았는데 사진에서 본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중략) 건물 1층이 레스토랑이기에 문을 열고 들어가 지배인을 찾았다. 마르크스가 살던 집이 근처 어디인지 아느냐고 물으니 바로 이 집이라고 했다. (중략) 방문 기념으로 건물 전체를 사진에 담기 위해 길 건너편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초점을 잡는데 그제야 1층 레스토랑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Quo Vadis. 사진을 찍다 말고 한참 동안 간판을 바라보았다. 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탄압받던 로마에서 도망치던 베드로가 갑자기 나타난 예수에게 물었다는 유명한 말이다. 이제 그 말이 1층 레스토랑의 간판이 되어 3층의 마르크스에게 묻고 있다. Quo Vadis, Marx? 소련 등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노회찬, 비아북, 2014)
노회찬은 런던의 '마르크스 기념도서관 및 노동자학교'도 찾아갔다. 1933년에 설립된 이 도서관은 당시 마르크스주의 서적 자료가 나치에 의해 전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 공산당과 좌익 진보인사가 설립한 곳으로,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의 독립기관으로 많은 진귀한 사료를 소장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얼굴 아래 쓰여 있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너희가 얻을 것은 전 세계이고, 잃을 것은 오직 쇠사슬뿐이다."
※ 이 건물은 1738년 처음 지어졌으며 1872년까지 가난한 노동자들의 자녀를 위한 '웰시 자선학교'로 사용되었다. 이 학교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 후에는 1892년까지 '런던 애국자클럽'의 건물로 사용되었다. 그 이후 '사회민주주의재단'이 자신의 기관지인 <정의>를 출판하는 '21세기 출판사' 건물로 1922년까지 사용되었다. 이 출판사 시절에 윌리엄 모리스가 주요한 재정후원자였으며, 이 출판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마르크스의 실천과 이론>, 김장민, e퍼플, 2021)
<오마이뉴스>의 구영식 기자는 마르크스의 글귀를 인용하며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현재를 진단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정치적 팸플릿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년)에서 "인간은 그들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그들이 즐거이 원하는 대로 그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인간은 그들 스스로가 선택한 환경 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직접 마주치고 과거로부터 주어지고 전수된 그러한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든다"고 적었다. 낡은 과거는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고, 조금씩 남아서 인간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데 제약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창당하고 원내에 진출한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이 언명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2007년 일심회 사건을 계기로 민주노동당이 분당했고, 지난 2012년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의혹과 폭력 사태로 통합진보당이 분열하면서 현재는 '통합진보당-진보정의당(현 정의당)-진보신당(현 노동당)-녹색당(현 녹색당 더하기)'이라는 '진보정당 다당제 시대'를 맞이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 음모 의혹 사건까지 터졌다. 노 전 대표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전진해온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이 이제 임계점에 다다른 느낌마저 든다." 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노회찬, 비아북, 2014)
1996년의 영국 방문을 회상하며, 2014년의 노회찬은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의 머리말에 이렇게 적었다.
"그해 가을, 새로운 진보정당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1997년 대선을 독자후보로 치르고 1999년 창당준비위원회를 거쳐 2000년 1월, 마침내 민주노동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정당득표율 13%로 10석의 의석을 만들었다. 당시 MBC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의 27%, 30대의 24%, 40대의 21%가 정당투표에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였다. 창당 4년 만에 이룬 엄청난 쾌거였다. 돌아보면 첫 원내 진출일인 그날보다 더 화려한 날은 없었던 것 같다. 다시 10년이 지난 2014년. 화려했던 그날의 당은 세 조각이 나 있다. 그 중 하나는 존폐가 걸린 재판을 받고 있으며, 지지율은 모두 합해도 5%를 넘지 않은 상태로 떨어져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Quo Vadis, 진보?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이 책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준비된 답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없는 길을 찾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노회찬, 마르크스 무덤을 찾아가다
첫 방문 후 9년이 지난 2005년, 3월 국회 법사위원 시절 유럽 출장 중에 노회찬(당시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영국 런던의 마르크스 무덤을 찾아갔다. 2007년 노회찬은 딴지일보의 김어준 총수와 인터뷰(<[2007년 일망타진] 노회찬을 만나다>, 2007.4.20.)에서 그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어준 : 스키장은 가보셨어요?
노회찬 : 스키장은 갔죠. 우리가 진보정치연합 할 때에도 수련회 같은 걸 갖다가 여름에 스키장에 가면은 싸거든, 그래가지고. (웃음)
김어준 : 눈 있을 때 스키장에 가셔야죠... 하하하
노회찬 : 못 가죠... 우리 젊었을 때는 그게 고급스포츠였죠. 요즘에야 일반적으로 많이 가는데.
김어준 : 골프?
노회찬 : 골프장은 갔었죠. 굉장히 유명한 골프장도 갔는데 미국에 국회의원들이랑 같이 가가지고.
김어준 : 치셨나요?
노회찬 : 아니요, 그 사람들이 유명한 데니까 사진 한 번 찍어야 된다고.(폭소) 거기 골프장 모자도 하나 사 가지고... 골프 치라는 유혹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재작년(인터뷰 원문에는 작년으로 표기, 오타 바로잡음: 필자)에, 한 가지만 말씀 드리면 제가 법사위에서 유럽 출장을 갔는데, 마침 마지막 전날인가 시간이 비어 가지고 다들 골프 치러 가더라구. 저를 혼자 놔두고 가기가 그렇잖아요. 골프장 가자고 그러길래, 안치는 사람 억지로 치게 하지 마시고, 뭐 내가 문제제기 안할 테니까 저 없이 치시라고 해 놓고 저는 대사관 직원을 하나 붙여 주길래 맑스의 묘지에 가자.. 해서 맑스 묘지에 갔었습니다.
런던 북부 하이게이트 묘지에 있는 마르크스 무덤에 간 노회찬은 붉은 장미를 헌화했다. 마르크스의 묘비에는 음각 금장으로 이런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첫 번째 묘비명은 <공산당선언>의 경구이고, 두 번째 묘비명은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부록에 수록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마지막 열한 번째 글귀다. 이 글귀는 독일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교 본 건물을 들어서는 방문자를 맞이하기도 한다.
Workers of all lands, unite.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고입 재수 시절 마르크스와의 첫 조우
"Quo Vadis, Marx?" 노회찬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5.5.~1883.3.14.)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한편으론 '원조 중의 원조 빨갱이'로 오랫동안 악명을 널리 떨쳤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론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이자 공산주의 혁명의 주창자로 어디선가 들어봤을 익숙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생전에 그는 해박한 사회이론가이자 혁명적 노동운동가, 집요하리만치 사실에 천착하는 언론인이었고, 죽어서는 20세기 내내 지구의 절반을 붉게 물들였던 공산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마르크스, 그는 정말 '공산주의의 아버지'일까>, 한겨레, 2018.5.7.)
칼 마르크스는 2005년 영국의 방송사 BBC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꼽혔다.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독일인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1849년 영국으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1883년 런던에서 국적이 없는 상태로 유언도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망할 당시 그는 파산 상태였고 그의 영향력은 약해져 있었다. 65년의 인생 가운데 반 이상을 살았던 나라에서 그의 죽음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장례식에는 11명의 조객만이 함께 했다. 추조사는 그의 평생 동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1.28.~1895.8.5.)가 낭독했다.
"3월 14일 오후 2시 45분,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겨우 2분 동안 혼자 남겨져 있던 사이, 우리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는 안락의자에 앉은 채 평화롭게, 영원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쓸쓸히 운명한 마르크스와 노회찬의 첫 마주침은 현재까지의 기록을 보면 아마도 1972년 고입 재수 시절 책을 통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고입 재수 시절 정음사 문고판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을 사들고 실망했다."
노회찬이 말한 정음사 문고판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의 정확한 제목은 '카알‧맑스의 <경제학비판서설>'이다. 현재 노회찬재단 <노회찬의 서재, 봄>의 '어린 시절 책장'에는 고이즈미 신조(山泉信三)의 <마르크스 사후 백년>(삼성문화재단, 1973)이라는 문고판도 소장돼 있다.
재수 생활이 거의 끝나가는 1972년 11월 초 부산중학교 친구 김봉룡에게 보낸 노회찬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도 처음, 아니 이곳의 초기엔 시간도 많아 '마르크스주의'니 무슨 정치니 무슨 개똥(?)이니 하며 읽었지만, 읽을 땐 그것에 도취되어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그 책을 쓴 것처럼 생각하고 작자의 사상이 나의 사상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하는 어설픈 자기 과대망상증에 걸려 기형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으나 시간이 지난 후 돌이켜 생각하며 '허무'를 깨닫기도 했다. 이럴 때 정신적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수필은 큰 위안이 되었다."
'실망', '개똥(?)'과 '허무' 등에 비춰볼 때 아직까지는 노회찬은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나 영향을 직접 받지는 않은 것 같다. <노회찬 평전>(2022.6. 출간 예정)을 집필 중인 이광호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노회찬이 재수 시절 마르크스 경제학 책을 읽은 것이 사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반공을 국시로 하던 군사 독재 시대의 학생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배워야 했다. 도덕과 윤리 시간에 유물론, 사적유물론, 변증법, 그리고 헤겔과 마르크스를 배웠다. 대부분 수박 겉핥듯이 넘어갔다. 이런 붉은 사상을 배우는 이유는 오로지 비판하기 위해서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빠요'라는 생각이 학생들의 머릿속에 박히면 그 교육은 성공이었다. 하지만 비판보다 그 사상에 더 관심을 가진 학생도 있었을 터, 중고생이 마르크스 경제학 책을 사서 읽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덧. 반공의식화 교육을 통해 박정희는 '붉은 악마'에 대한 원시적 증오의 감정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면서 국민들을 말 잘 듣는 순한 양으로 길들이고자 했다.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괴뢰군, 때려잡자 김일성'이라는 표어는 사시사철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문구였다. 이처럼 분단 이후 특히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실시된 철저한 반공의식화 교육으로 인해, 우리 국민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철저하게 반공정신으로 무장되었으며, 북한 하면 무찔러야 할 '악마의 무리'를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자동판매기식' 사고를 내면화하게 되었다. (조현연, 「박정희 군사독재와 반공주의, 그리고 '우리 안의 군사문화'」, <기억과 전망>, 2003년 가을호) '반공규율사회'였던 박정희 통치 18년의 시기는 반공을 주제로 한 표어 짓기,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와 웅변대회를 무더기로 열어 정권안보에 악용한 시기였다. 직장이나 학교, 그리고 반상회에서 간첩이나 불순분자를 식별하는 요령을 배우고, 수상하면 즉각 경찰에 신고해야 했다. 이웃이나 친척이라고 신고하지 않으면 불고지죄로 처벌받았다. 불신을 조장하는 각종 안보 표어가 난무하기도 했다. 독재 시절 대표적인 반공 표어 몇 개를 고르면 이렇다.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간첩은 표시 없다 너도나도 살펴보자", "간첩 잡는 아빠 되고 신고하는 엄마 되자",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사회혼란 조장하는 불온문서 신고하자", "한순간의 좌경사상 후손에게 눈물된다", "설마 하는 방심 속에 불순분자 스며든다", "혼란 속에 간첩 오고 북한오판 초래한다"
1973년 12월 17일 경기고 1학년 3반 학생들은 학급 잡지 <한벗> 2호를 발간했다. 노회찬은 실질적인 편집장 일을 맡았다. 공식 편집장은 부반장 정광필이 맡았다. 노회찬은 '누구냐'라는 시 형식의 글과 함께 '雜說'이라는 제목의 재기 넘치는 수필을 실었는데,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름이 헤겔과 김 모 씨(김일성) 이름 옆에서 스치듯 나온다.
헤겔!먼저, 당신의 사진을 보기 전까지 당신을 마르크스 씨와 같이 수염이 가득 난 할아버지로 알아왔던 나를 용서해 주오.처음 당신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단테'의 얼굴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소.날카로운 콧날, 매서운 눈매, 과연 명저가 나올 만한 얼굴이었소.당신의 역사철학을 읽어감에 따라 저 킬리만자로의 눈처럼닿을 수 없는 곳만 같았던 선입감은 사라지게 되고 한 겨울, 난롯가에 둘러 앉아 존경하옵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감명을 받았소. 철학 시간이 있다는 프랑스의 고등학교를 부러워하면서 말이요.
김 모 씨,1500만의 아버지 선생!세상은 당신을 20세기 문제아로 만들었소.Aren't you a solitary man?매직으로 지워진 레닌의 사진이 실린 잡지를 받았을 때 지워진 그 얼굴이 당신의 얼굴로 보였소.
※ 에피소드 하나1979년 3월 노회찬은 고려대에 입학했다. 재수하지 않고 진학한 중학교 친구들보다 4년 늦었다. 방위도 제대했겠다, 입학하면서 '복학생'이 된 셈이었다. 노회찬이 정외과-계열별 모집이었기 때문에 정경대-에 입학하자 어머니는 한편으로는 서운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뻤다. 서운했던 건 서울대 진학 실패 때문이고, 기뻤던 건 정외과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동생 노회건은 <노회찬평전> 이광호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형이 정치하는 학과에 들어가서 안심하셨어요. 경제학과는 마르크스로 가는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