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 박사(그동안 너무 많은 직책을 맡았기 때문에 그냥 '박사'로 표기한다)의 정치 행보를 지켜보며 한때 공자를 떠올린 적이 있다. 공자는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실현할 제후를 찾아 14년 동안 주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이른바 '주유천하'(周遊天地)다. 김 박사 역시 성격이 다른 여러 정권을 넘나들고, 여와 야를 횡단하는 특이한 정치궤적을 이어왔다. '출사'(出仕)에 크게 성공하지 못한 공자와는 달리 청와대 경제수석, 거대 양당 비상대책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섭렵했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5차례나 지내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남겼다. 공자가 현실 정치에서 실현하고자 한 이상은 인(仁)에 기반한 도덕 정치였다. 세상의 혼란이 '인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힘의 통치가 아닌 인치와 덕치를 통해 난세를 바로잡으려 했다. 김 박사의 트레이드마크는 '경제민주화'다. 그는 "어느 특정 경제 세력이 나라를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균형과 조화를 통한 사회의 안정"을 주장한다. 이를 두고 "경제 주체 간의 세력균형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입장"(권도혁·강정인, '경제민주화 담론에 대한 정치사상적 고찰')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어쨌든 경제민주화는 '정치인 김종인'이 끈질기게 추구해온 이상이자, 그의 현란한 정치궤적을 정당화해주는 명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김 박사를 공자에 비유하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밀려온다. 공자는 천하를 주유했으나 결국 무도한 정치 세계에 대한 실망감을 안고 말년에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치에서 일절 손을 떼고 학문과 교육, 집필에만 힘을 쏟았다. 그런데 김 박사는 나이가 들어가도 정치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의 평생 화두인 경제민주화를 향한 '이상 실현의 정치'는 어느 틈에 실종되고, 노회한 정치인으로서 킹 메이커의 위력을 과시하는 '게임의 정치'를 하고 있다. 김 박사는 며칠 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자리에서 "내년 대선은 이재명 민주당 후보 대 윤석열 후보의 경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 최종 대선후보 결정을 코앞에 두고 누가 봐도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었다. "홍준표 후보가 무섭게 추격하니 제동을 걸었다"는 등의 분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김 박사와 홍준표 후보의 악연(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관련 구속 등)을 생각하면 그가 홍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윤 후보를 돕는 것은 그가 꿈꿔온 경제민주화나 보수의 개혁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국민의힘은 지난해 9월 초 새 당명으로 재출범하면서 '새로운 보수'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당 강령 제1조 1항에 '기본소득을 통해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선언을 명기했고, 사회적 약자 배려, 노동 존중 등 기존 정책과는 다른 내용을 정강정책에 많이 담았다. 김종인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의 강력한 드라이브 결과다. 하지만 지금 국민의힘은 보수 혁신은커녕 오히려 '보수 뒷걸음질'이 확연하다. 신보수의 깃발이 퇴색한 데는 윤석열 전 총장의 '공'이 크다. 그는 사회적 약자 배려나 노동 존중 등 보수의 새로운 사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런데도 당내 유력주자인 윤 후보 쪽으로 의원들의 줄서기가 이어지니 새로운 정강정책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다. 김 박사가 굳이 '국민의힘 멘토'를 자처한다면 홍준표 후보가 아니더라도 다른 보수개혁적 후보를 밀어야 옳다. 김 박사는 박근혜 대선 후보의 '일등 책사'로 경제민주화 공약을 설계했으나 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경제민주화 공약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그는 용도폐기됐다. 김 박사는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박 전 대통령을 평했다. 그렇다면 지금 윤석열 전 총장은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김 박사는 "(윤 전 총장이) 사물을 보는 자체가 정확하다"고 말했다. '전두환 옹호 발언'을 비롯한 그의 숱한 '망언과 실언' 시리즈를 보면서도 과연 그런 평가가 나올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은 윤 전 총장이 사물을 보는 눈 자체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고 여기고 있다. 김 박사는 회고록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경제민주화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박근혜는 일단 문제를 일으킬 조건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가족과 친인척 문제는 걱정하지 않고 재벌이 유혹하는 손길만 차단하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이야기다. 김 박사는 삼성이 "대통령의 최측근 최순실"을 정확히 찾아내 "원포인트 뇌물"을 준 것을 지적하며, 삼성을 비롯한 재벌의 뛰어난 정보력과 로비 능력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했다. '재벌의 유혹'과 '가족·친인척 문제'에서 윤 전 총장은 어떤가. 그의 부인 김건희씨는 이미 불투명한 재산 형성 과정을 놓고 삼성 등 재벌과의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남편이 유력한 검찰총장 후보로 떠오르면서 김씨의 회사 '코바나컨텐츠'가 기획한 전시공연에는 삼성, LG, GS 등 대기업과 은행 등의 협찬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협찬 기업들 중에는 환경 오염과 채용 비리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기업도 상당수 있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김건희씨와 삼성의 관계다. 김씨를 전시공연 업계의 떠오르는 스타로 만든 '마크 로스코' 전시회에 협찬을 한 기업이 바로 삼성이다. 심지어 김씨 소유의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아파트에 삼성전자가 비정상적인 조건으로 전세권 등기 설정을 한 사실도 밝혀졌다. 삼성의 뛰어난 정보력과 로비 능력은 이미 김건희씨를 향해 빛을 발하기 시작한 셈이다. 김종인 박사가 회고록에서 했던 말을 윤석열 전 총장에 대입해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일단 문제를 일으킬 조건이 너무나 차고 넘친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재벌이 유혹하는 손길 차단은 물 건너가고 가족과 친인척 문제부터 크게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훗날 '회고록'을 쓰지 않고 지금 '현장 르포'를 써도 이런 기술에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떠돌이 시절 공자의 초라한 모습을 '상가지구'(喪家之狗)라고 표현했다. 난세에 태어나 여러 나라를 떠돌았으나 결국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이루지 못해 지친 모습을 '상갓집 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공자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 아니다. 한 위대한 인간이 가졌던 염원과 포부, 굴욕과 좌절을 통해 우리는 공자의 인간적인 진면목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김종인 박사의 요즘 모습을 보면서도 '상가지구'라는 말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 말에는 공자의 아우라는 없다. 이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허욕과 자기과시의 초라함이다. 베이징대 중문과 교수인 리링 같은 학자는 '상'(喪)을 '잃어버리다' '상실하다'는 동사로 해석해 '상가지구'를 "집 잃은 개"라고 해석한다. 어떤 해석을 따르더라도 무방하다. 지금 김종인 박사는 평생 추구해온 '경제민주화'라는 '이상의 집'을 잃어버린 채 정치적 영향력 과시란 먹이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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