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연재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두번째 인물은 레닌이다. 이 연재는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청주교도소 수감시절 노회찬은 부모님께 부친 편지에서 '고르바쵸프의 실각', '쏘연방의 해체', '공산당의 붕괴' 등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은 생선 얘기나 할 정도로 한가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제 신문은 강경대 군 살해 전경들에게 2-3년의 가벼운 형이 선고되고 (이것 역시 2심에서 얼마나 더 깎일지 모르지요) 박노해에게 사형이 구형된 국내 소식과 함께 고르바쵸프가 실각했다는 국외 소식을 싣고 있었습니다. 가히 세계는 世紀末的인 격동의 파도를 타고 있으며 나라 안은 不義가 자신을 감추지도 않고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고르바쵸프의 실각 소식은 특히 충격적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최근의 소련사정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기도 합니다. 초기에 고르비가 들고 나왔던 개혁이란 깃발은 1, 2년 전부터 그 개혁으로 인한 위기와 혼란이 가중되는 속에서 노선과 방향을 상실해버렸으며 좌우, 강온 양파의 대립 한 가운데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온 것이 최근의 실정이지요. 개혁이 긍정적인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와중에서 빚어지는 무정부상태 같은 혼란은 개혁은 고사하고 소련이라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사회를 해체시키는 듯한 위기를 가중시켜온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번 쿠데타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그랬듯이 개인과 소집단의 권력욕에 의해 빚어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위기와 혼란이 잦아들 것이라는 낙관도 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미국이야 본래 그런 나라이지만 이 기회에 옐친 등을 부추겨 궁극적으로는 소련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주로 관심을 갖고 있지요. 다수 소련 국민들과는 또다른 이해관계를 갖는 것이 서방국가들이니까요. 우리나라야 물론 형님 눈치만 보고 있지요. 사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같은 세기말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위한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데 게을러질 수는 없습니다. 두 눈을 더욱 똑바로 뜨고 이를 악물고 주먹을 불끈 쥐고 살아야 한다고 다짐해봅니다. 아버님께 새로 나온 러시아 민요 합창곡 레코드판을 소개드립니다. '소이예뜨 아미코러스 앤드 밴드'(EMI 社)" 1991년 8월 21일 (청주 37신)
"요즘 신문을 보고 있노라면 문자 그대로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쏘연방이 해체되고 공산당이 붕괴하며 연방국가의 脫사회주의化가 가속화될 것 같습니다. 이런 변화가 조만간 한반도까지 미쳐 남북관계, 통일문제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습니다. 불과 2, 3년 전엔 꿈도 꾸기 힘들었던 일들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아직 건재한 것처럼 보이는 중국·북한의 운명이 몇 년 안에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든 실정입니다. 신문들이 흥분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근 역사에서 군부세력의 반동적인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침묵과 기회주의적인 변신으로 민중을 배반했던 언론과 저명인사들이 옐친과 소련 국민들의 저항을 민주주의를 위한 영웅적 항쟁으로 소리높여 칭송하는 있는 것은 참으로 후안무치한 작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르바쵸프와 옐친에게 격려와 위로의 전문을 보낸 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지요." 1991년 8월 28일 (청주 38신)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인민노련은 '한국사회주의노동당(한사노) 창준위'(1991.12.15.)를 거쳐 '한국노동당 창준위'(1992.1.19.), 통합민중당의 길을 걸었다. 이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와 '진보정치연합'을 거쳐 1997년 '국민승리21'과 2000년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독자적인 합법 진보정당운동을 거슬러 가다보면 인민노련과 '신노선'(문건 이름은 '회사의 노동자정당 건설전략에 대해 재고를 요청함', 1991.9.29.)을 만나게 된다. 신노선의 핵심은 '레닌주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비합법 전위정당론과 혁명론의 폐기였다. '신노선'의 운동사적 의미에 대해 노회찬은 훗날 "변혁주의 노선과의 결별이자 전면적인 합법정당 노선"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회고한다.
"1980년대를 지배해온 것은 혁명만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1987년 6월항쟁으로 군사독재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헌법 개정으로 권력을 국민의 손으로 창출하게 되었다. 선거를 통한 권력 창출이 보장된 이상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주장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여기에 소련 등 국가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면서 이른바 사회주의 혁명론도 설득력과 함께 하기 힘든 것처럼 현실의 근거를 상실하였다. 활동노선과 전략의 근본적 재검토가 시급했다. 신노선은 불가피했다." 노회찬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무너져 내린 소련을 찾아가다 : "망할 만하니까 망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될 때 노회찬과 이진경은 청주교도소에 있었다. 감옥에 있던 이들에게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은 충격이었다. 이진경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데 작은 차이를 드러내는 것보다는 같이 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중요했죠. 위기 국면이라는 걸 모두 느꼈습니다.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같이 해야 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개인적으로는 특히 노회찬 선배에 대해 인간적 신뢰를 갖게 됐습니다. (…) 91년 청주교도소에 노회찬 의원이랑 같이 있는 동안 소련이 망했죠. 우린 사회주의로 잡혀 갔는데 사회주의가 붕괴됐다니까 우리 앞날은 어떻게 될까 답답해서 계속 신문을 뒤져봤어요. 그러다가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마르크스주의 안에선 사회주의 붕괴를 이해할 방법이 없으니까 마르크스주의 바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노회찬은 이렇게 회상했다.
"감옥에 이진경 씨와 같이 있었는데, 둘이 약속을 했어요. 야, 우리 진짜 가보자. 우리가 이상적인 사회로 굳게 믿었던, 결코 복제판을 만들자고 했던 건 아니지만 우호적인 생각을 했던 것 또한 사실 아니냐, 우리가 생각했던 이상들이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것이든, 왜곡되었던 것이든, 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떤 부작용들이 생겨 낳는지에 대해서 현장으로 가보자, 그 친구는 91년도에 출소했고 나는 92년도에 출소했는데, 바로 가려고 했는데 여권을 안 주더라고요. 그래서 결국엔 96년도에 같이 갔어요. 현장 다 봤어요. 저는 망할 만하니까 망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그러면서도 그 사회가 추구했던 여러 소중한 가치들이 함께 떠밀려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갖고 있었는데 정반대편의 생각 하나는, 시간이 갈수록 우리가 생각했던 만큼 안 되는 것 가지고서 절망하는 경우들도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솔직히 제가 이 길을 처음 떠날 때 생각했던 것보다는 굉장히 잘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것예요." 노회찬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128~129쪽)
1991년 먼저 출소한 이진경은 노회찬과 함께 가기 위해 옛 소련 여행을 가지 않았다. 1992년 출소한 노회찬은 1996년이 돼서야 이진경, 베를린에 있던 고교 동창 이원섭 등과 함께 체코를 방문했다. "그런데 사회주의에 관한 얘기를 나눈 기억은 없고, 체코 맥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기억만 나네요." 이진경은 몇 달 뒤 모스크바에서 만나기로 하고 노회찬과 헤어졌다.
둘은 몇 달 뒤 다시 만났다. 모스크바에서 1주일, 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이 바뀐 레닌그라드에서 3~4일 돌아다녔다. 이진경은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거의 기억이 없어요. 연금 제도 박살나서 길거리에 나온 노인들이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좌판을 벌여 놓은 모습, 지하철 승객의 지치고 거친 표정, 이런 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시장, 길거리를 많이 다녔어요. 회찬이 형은 건축과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유명한 건축물을 많이 보러 다녔죠"라고 했다. 방문 1년 전쯤인 1995년 8월 16일 러시아 당국은 '공산주의 잔재의 청산작업'으로 크렘린궁에 있던 레닌의 동상을 철거해 레닌이 말년을 보냈던 모스크바 교외로 이전했다. 하지만 '동상'과 '광장'의 나라 러시아답게, 노회찬과 이진경은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레닌과 혁명을 상징하는 동상들을 자주 마주치지 않았을까 싶다. 2주 동안 돌아다니며 두 사람이 마주쳤을 법한 레닌의 동상과 러시아의 풍경은, 노회찬의 오랜 길동무이자 '글쓰는 사진작가'인 이상엽의 <레닌이 있는 풍경: 9,938km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난 아득한 여행>(산책자, 2007) 속 '인썸니아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자본의 바람, 모스크바'에 비슷한 모습으로 담겨 있을 것 같다.
2009년 4월 9일 노회찬의 <난중일기> 「MBC는 함락되는가?」에서 '레닌그라드'는 가수 윤도현의 <깃발>과 함께 잠깐 나온다.
"벚꽃 한창인 춘사월 여의도. 포연이 자욱하다. MBC를 함락하려는 'MB씨'의 공세가 연일 속되고 있다. 이 전투는 MB씨의 MBC 장악야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선천적 지지결핍증으로 판명 난 MB씨는 방송장악을 통해 민심을 교란시켜야만 지지결핍에 따른 수명 단축이나 조로화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MBC는 과연 MB씨에 의해 함락될 것인가? MBC 식구들이 MBC가 국민을 위한 공영방송임을 진정으로 확신한다면, 국민들이 MBC를 국민의 방송으로 계속 아낀다면, 야당들이 끝까지 국민의 편에 선다면 MBC는 지켜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독일군에 맞서 870일간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끝내 레닌그라드를 지켜낸 시민들처럼. 가수 윤도현이 <깃발>에서 외쳐 부른다. 맞서 싸워 두 주먹 쥐고 깃발 들어쓰러지거나 넘어져도 깃발 들어쓰러진 담장 아래에도 꽃이 피네무너진 지붕 위에도 해가 뜨네"
※ 노회찬에게 음악은 고교 시절뿐 아니라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였다. "이 세상에 맛이 없는 음식은 없다. 맛의 차이는 있지만 맛이 없는 음식, 버려야 될 음식은 없다. 음악도 그래요. 들으면 안 되는 음악은 없다고 봐요"라는 노회찬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베토벤의 '운명'과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좋아했고, 쇼스타코비치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도 즐겨 들었다. 모두 서사가 있는 대작들이다. 쇼스타코비치는 "나에게 있어서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디어는 항상 악보 작업에 선행한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15개의 교향곡들 가운데에서 이러한 언급이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비교적 많은 편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가 대표적이다. 1941년 나치의 침공을 받아 포위된 도시 레닌그라드에서 이 작품을 작곡했던 그는 "잠시 쉬는 동안 화가 나서 거리에 나가면 내가 이 도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된다"라고 회상했다.
모스크바 크렘린광장 근처 '무명용사의 묘도 '노회찬의 회상 속의 한 자락을 차지했다.
"여름 소나기처럼 내리는 굵은 가을비 속에 마석모란공원묘지와 국립현충원을 참배했다. 어제 창당대회에서 선출된 당 지도부와 대선후보의 첫 공식일정이다. (…) 모스크바를 처음 방문했을 때 둘러본 곳 중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크렘린광장에 꺼지지 않는 불이 피어오르는 무명용사의 묘였다. 갓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들이 혼인신고를 마치면 관습처럼 방문하는 곳이기도 했다. 종전기념일에 프랑스 대통령이 무릎 꿇고 참배하는 파리의 무명용사묘도 개선문 바로 앞에 있었다.
국립현충원은 원래 6.25전몰장병을 위한 국군묘지로 출발했다. 그래서 지금도 안장된 영령의 80%는 6.25전사자라고 한다. 그러나 현충원엔 무명용사의 묘로 상징화된 곳이 없다. 그래서인가? 대선후보들이 어느 유명인의 묘를 참배하느냐를 두고 과도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노회찬 (「어머니의 모습을 한 아버지의 아바타」, <난중일기>, 2012.10.22.)
노회찬이 떠난 2018년 7월 23일,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본명 박태호)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감옥에서 함께 겪었던 사회주의의 붕괴를 가서 직접 눈으로 보자고 갔던 모스크바, 그 모스크바에서 정신 나가도록 함께 마셨던, 뻬쩨르부르그행 기차표를 날려버렸던 그 보드카의 취기가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다음날의 아주 힘든 그 숙취마저 그 취기를 따라 밀려들어옵니다.
덧없는 초혼의 외침이라도 외치고 싶은 미치게 더운 여름날입니다." 이진경
닫는 글.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이 가장 잘 실현되는 것이 사민주의"
"민주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인류의 오랜 지혜와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의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인류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다." 민주노동당 강령
강령기초와 제정 작업, 그리고 통과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던 민주노동당 강령,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대회에서 통과된 당강령('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향하여')의 전문 가운데 '우리가 만들 세상'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짧은 문구를 합의하기 위해 몇날며칠을 강령제정위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씨름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14년 어느날 구영식이 묻고 노회찬이 답한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4)에서 두 사람은 '진보의 세속화'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는 레닌주의자와 함께 트로츠키주의자·혁명적 민주주의자·사회주의자·사민주의자·자유주의자도 등장했다. 노회찬은 "나는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이 가장 잘 실현되는 것이 사민주의라고 본다"며 "사민주의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구영식 : 그 전에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말을 쓰기도 했고, 당 강령에는 사회주의적 가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노회찬 : 그렇다.
구영식 : 거기에서 이제 사민주의로 이동한 셈인데, 그러한 이동도 노회찬식 세속화 전략의 한 부분인가.
노회찬 : 나는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이 가장 잘 실현되는 것이 사민주의라고 본다. 이 이상으로 진도 나간 체제가 있는가? 현실 사회주의국가보다 노동권이 더 많이 보장되고 있는 곳이 사민주의국가다. 사민주의가 사회주의적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완결태는 아니겠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이 가장 앞서 있는 체제이기 때문에 지향점으로 삼았다.
구영식 : '사민주의는 개량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데.
노회찬 : 그렇다. 사민주의는 개량주의이다. 혁명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혁명노선이 아니라 개량노선이다. 이제 이념적으로 NL도 PD도 버리고 사민주의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옛날 족보를 가지고 NL과 PD로 나뉘어 계속 싸울 수는 없다.
진보정당은 처음 나왔을 때보다 국민들에게 굉장히 친숙한 존재가 됐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더 솔직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사 온 지 오래됐는데 아직도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으면 이상하지 않은가. 더 책임 있는 세력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 안에는 트로츠키주의자도 있고, 혁명적 민주주의자도 있고, 사회주의자도 있고, 사민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공통점은 스웨덴 등과 같은 사민주의 복지국가를 만들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집권해서 만들려고 하는 사회는 이런 정도의 사회라는 것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도리다. 그것이 또 진보의 혁신이다.
진보의 이미지가 이렇게 망가지고 오해가 겹쳐 있는 상황에서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정체성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사민주의 역사를 보면 좀 개량주의적인 측면이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하는 것이 사민주의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개량주의 비판) 때문에 내부 논란을 키울 필요는 없다. 진보라는 말로 우리를 설명하는 데 우리도 지쳤고 듣는 국민도 지쳤다. 설명이 안 된다.
구영식 : 그런데 여전히 사민주의를 현실과 타협하는 전략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노회찬 : 그렇지 않다. 일반적인 시각이 아니고 운동권 유지들 중에 그런 경향이 남아 있다. (웃음) 민주노총 활동가라거나 당내 일부 정파 활동가들에게 그런 경향이 있다. 오랫동안 들어왔던 과거 혁명론 차원에서, 레닌주의에서 사민주의를 보는 견해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일부 노동운동세력들도 그렇다.
노동운동의 자주적인 권리를 제일 많이 보장하는 것이 사민주의인데도, 머릿속에 노동해방, 혁명 등이 가득 차 있는 분들이 사민주의를 비판한다. 그런 분들도 최대강령으로서 인류사회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의 문제와, 현실에서 정치적으로 무엇을 약속할 것인가의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앞으로 이해하지 않을까 싶다.
구영식 : 80년대 운동권은 '정당'이라는 수단보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 등 '가장 급진적이고 강력한 이론'에서 투쟁의 무기를 찾았던 것 같다.
노회찬 : 그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판의식 없이 북한을 추종한 데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소련은 망했지만 북한은 망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운동권이 굉장히 교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총파업 만능주의에다 이상한 노동자주의까지 가지고 있었다. 지고지선의 방식을 통해 사회가 변혁된다는 생디칼리슴이 있었다. 그것이 반정치, 반정당으로 이어졌다.
구영식 : 80년대에 운동진영은 변혁론, 변혁노선에 치중했고, 정당이나 민주주의 제도에는 관심이 적었던 것 같다. 시대적 한계라는 것이 분명하게 있긴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노회찬 : 운동의 관성과 실사구시 정신의 부족이라고 본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조건과 상황이 바뀌면 과학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나는 레닌이 그때 한국에 있었다면, 그가 제일 먼저 (노선을) 바꾸었을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레닌, 레닌' 하는 사람들은 안 바뀌겠지만."
"늘 공부하는 실사구시형"이어서 레닌을 존경한다는 노회찬. 사실 노회찬은 특정 이념에 대한 완고한 고수보다는 '실사구시'를 강조했다. 경기고 시절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선 이래 노회찬의 삶의 여정에서 등장하는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나 특히 '정치'를 선택한 뒤 포착되는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특정의 '이념적 지향'도, 그의 존재의 이유인 '휴머니즘'과 진보의 기본원리인 '실사구시'라는 용광로 안에서 녹여져야 하는 것이었다.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시절 '한국적 사회민주주의'를 제시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또 어떤 마음과 자세로 세상을 바라봐야 되고 인간관계를 맺어나가야 되는가. 사회적 존재로 처음 출발할 때가 휴머니즘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다른 것은 다 왔다가도 가고, 마치 계절에 따라서 옷이 바뀌는 것처럼 달라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거는 휴머니즘이고요." (…)
"진보의 기본원리는 실사구시라는 생각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가 이상은 있지만 실시구시가 없다면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사구시가 생명이라고 봐요. 우린 제대로 실사구시하고 있는가. 그 관점에서 끊임없이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과 현실을 이상에 가깝게 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점검을 해야 되고 방법론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 나와야 돼요." 노회찬 (변영주 감독과의 인터뷰,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노회찬이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다시 한 번 '존재 이전'을 하게 된 것은 이처럼 조건과 상황의 변화에 대한 과학적 판단, 즉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이상에 가깝게 가려는 실천적 노력 속에서 나온 새로운 방법론적 시도였던 것이다. 노회찬의 '실사구시'와 일맥상통하는, 노회찬의 마지막 정치적 거처였던 정의당 신강령의 마지막 글귀를 소개하며 오늘의 기록이야기 <레닌과 노회찬> 편을 닫는다.
"좋은 미래는 저절로 오지 않을 것이며, 이상은 항상 멀리 떨어져 보일 것이다. 하지만 희망의 힘이 크다고 믿는 우리는 낙관주의자들이다. 정치가 행복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행복해질 수 있고, (…) 자신한다." 노회찬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