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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맨 먼저 고통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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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맨 먼저 고통받는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③]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 마르크스 下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연재의 '파트 1'에서 다룰 '혁명 그리고 정치'에서, 그 첫번째 인물은 칼 마르크스다. 연재물은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 영화 <노회찬 6411> 스틸컷.

'마르크스', 1980년대 '광주세대'의 교과서이자 손에 쥔 무기

이른바 대학사회의 '학생운동권'이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직접적인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은 대체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였다. 노회찬도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로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게 된 것은 20대 때였다. (※마르크스는 여러 저작을 통해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했다. 하지만 스스로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사용했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희망을 무참히 꺾어버렸다. 80년 5월 광주의 충격과 분노와, 새로운 세상의 설계도와 집행 매뉴얼로 여겨졌던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가 주는 유토피아적 전망의 결합은 그 시대 많은 청년들을 움직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광주시민들의 외침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 올바르고 참된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 마르크스와 <공산당선언> 및 <자본론> 초판. ⓒ민청련동지회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들이 은밀하게 나돌기 시작한 것은 1984년이었다. 

"1980년대는 군부독재의 폭압 통치가 마지막 기승을 부린 시대였다. 그에 맞서 학생운동권의 이론적, 실천적 대응 양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기도 했다. 1984년부터 마르크스와 레닌 원전들이 은밀하게 나돌기 시작했다. <자본론>과 같은 마르크스 원전은 워낙 방대해서 쉽사리 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롯한 레닌 저작들은 팸플릿 형태로 실제 운동에 필요한 실천적 내용을 담고 있어 학생운동권에 빠르게 확산됐다." (「박찬수의 NL 현대사 (7) NL과 주사파-2:민족주의, 거대한 블랙홀」, <한겨레>, 2016.7.23.)

그보다 3년 앞서 1981년 여름 스물다섯의 노회찬은 배낭에 마르크스, 레닌 원전 등 사회과학 서적 수십 권을 담고 전북 고창 선운사 참당암으로 향했다.

"한 달 동안 노회찬은 전기불도 없던 참당암 나한전에서 성찰을 거듭한 끝에 73년 유신독재반대 박정희 타도 유인물 제작, 살포를 시작으로 몸 담았던 10여년에 걸친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 농민이 주인되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일생을 투신키로 결단했다." (<매일노동뉴스>, 2004.4.7.)

▲1981년 여름, 참당암에서 한 달을 보낸 직후의 노회찬. ⓒ노회찬재단
"인생의 진로를 결정한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성찰하고 또 성찰했습니다. 과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진지한 고민을 계속했던 노회찬은, 참당암에서의 한 달을 뒤로 하고 전기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민중의 바다로 나아갔다. <노회찬 평전>을 집필 중인 이광호는 이렇게 정리한다.
"1980년대 공장 이전 대학생들은 '광주세대'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은 광주를 보면서 학생운동만 가지고는 독재 정권에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노동자계급이 투쟁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믿게 됐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구조의 분석과 변혁을 위한 사회과학적 인식이 필요했다. 반독재 정치 민주화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한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 변혁적 노동운동의 목표가 됐다.

그들이 당시 접하게 된 마르크스의 경제이론과 레닌의 당 이론은 매혹적면서 윤리적이었고, 또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필연성까지 담보하고 있었다. 그들은 스펀지에 물 스며들 듯 이론을 빨아들였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그들의 교과서였고, 손에 쥔 무기였다." 이광호

공장 이전 1세대인 노회찬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 운동권 대학생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가는 것을 '존재 이전'이라고 했다. '위장취업'을 그렇게 철학적으로(사실은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 계층이 운동을 실천하는 방식이었던 존재 이전 규모는 상당했다. 구해근 미국 하와이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책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세계 역사상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 대량으로 노동현장에 가서 노동자가 되는 사례는 없었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노회찬 (구영식, 「노회찬이 뻔뻔할 수 없는 이유」, <한겨레21>, 2018.7.31.)

훗날 변영주 감독과의 대화에서 노회찬은 '인생의 전환점'에 대해 말하며 마르크스주의를 불러온다. 이때의 독서와 사유는 노회찬의 인생관과 세계관 형성에 바탕이 됐다.
"다음으로 큰 전환의 계기를 맞았던 것은 이른바 맑스주의를 공부하면서부터였지요. 그때는 20대였는데 역사와 개인에 대해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스스로 다행스럽게,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위 혁명가들을 볼 때 깊이 공감하면서도 비판적으로 거리두기를 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 실천에 대해 감동해서 닮고 싶었지만, 인간적 역사적 한계도 함께 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러니까 레닌의 한계도 보이고, 스탈린의 문제도 보이고, 트로츠키는 어떤 유형의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그런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 거기서 얻은 지혜 같은 게 있다면, 그건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판단이지요. 그 후로는 사람을 대하는 법이나 감정이 굉장히 많이 편해졌어요. 벽 같은 것, 원한 같은 것, 시간이 지나도 이런 것이 남지 않더라고요." 노회찬 (「변영주, 노회찬에게 묻다」, 노회찬, <진보의 재탄생> 133~134쪽, 꾸리에, 2010)

<인민노련>과 마르크스주의

1988년 10월 2일 노회찬 등이 주도한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활동의 전환점이 되는 제2차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핵심 내용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강령제정 준비를 결정함으로써, 조직원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따른 사상적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는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를 위해 대의원대회에서는 1988년 10월부터 1989년 9월까지 네 가지 사업 계획에 집중하기로 했다. 첫째, 노조운동에서의 지도력을 확립하고 대공장 분회를 집중적으로 건설하는 것. 둘째, 조직원의 교양사업을 강화하고 훈련을 체계화하기 위한 정치학교를 설립해 마르크스·레닌의 원전을 학습하고 혁명운동의 전략전술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교양하며 선전가를 배양하는 것. 셋째,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치사상 유파를 형성하는 것. 넷째, 전국노운협, 민중정당, 전국민족민주운동협의회 등과 함께 정치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간다는 것.

활동방향의 전환은 조직원 확보방식과 교육방식에 빠르게 반영되어 나타났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치안본부는 인민노련 조직원의 사회주의 이념학습 과정에 대해 아래와 같은 <표>로 정리해 발표했다.

▲<인민노련 사건의 전말>, 치안본부, 1989.11.15. 작성
책을 통한 마르크스와의 만남은 노회찬의 '슬기로운 감옥생활' 속에서도 이뤄졌다. 예컨대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91년 면회를 온 김문수와 노회찬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역사유물론 교과서에 보면 '역사와 개인' 같은 항목이 있잖아요. 역사를 개인 중심으로 봐서 그렇게 되는 거죠. 민중당이 해산되고 난 뒤 제가 감옥에 있던 91년도에 김문수 씨가 면회를 왔어요. 와서는 '무슨 책 읽느냐'고 묻길래, '북한판 마르크스 선집 12권짜리가 있어서 여유 있게 보고 있다'고 했더니, 김문수 씨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엘빈 토플러 얘기를 하면서 자기가 '토플러 책 몇 권을 넣겠다, 그런 걸 봐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노회찬 (<퍼슨웹> 인터뷰, 2003.1.1.)

노회찬은 2년 4개월의 '슬기로운 감옥생활'을 위해 원예와 운동, 그리고 독서를 꾸준히 했다. 현재 재단에 소장 중인 150여 권의 감옥 반입도서 가운데 상당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등에 관련된 책이다. 노회찬과 서울구치소와 청주교도소 수감생활을 함께 한 사회학자 이진경(서울과학기술대 교수)은 훗날 노회찬의 독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노회찬 의원과는 개인적인 연이 있습니다. 구치소에서도 같이 있었고 징역 생활도 청주에서 같이 했지요. '삶을 위한 철학 수업' 강연할 때 항상 드는 예인데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이란 자유를 제한하는 구속의 공간이죠. 그래서 누구나 닫힌 방의 숨막히는 공간에서 나오려 애쓰는데 그래도 그 당시 구치소는 정치범이 너무 많아(300명 이상) 징역 생활이 좀 '트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노회찬 씨는 인사라도 하려 찾아가보면 문을 잠가놓고 있는 겁니다. 하여 문을 따달라고 할까요 물어보면 그러지 말라고, 자기가 일부러 부탁해서 잠근 거라는 겁니다.

이유를 물으니 구속되기 전엔 보고 싶은 책이 많아도 시간이 없어 못 보았길래 구속되면서는, 이젠 책 좀 실컷 봐야지 했답니다. 그러나 징역이 트여있는 덕에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책을 제대로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일부러 잠가 놓고, 닫힌 문 앞에서 얼른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진경 (노회찬재단 모아냄, <그리운 사람 노회찬>, 2019)

"칼 마르크스와 프란치스코 교황,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JTBC <썰전> 2018.7.12. 갈무리.
2018년 7월 12일, 노회찬 20대 국회 정의당 원내대표는 JTBC 시사 예능 프로그램 <썰전>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병국 바른미래당 의원, 박형준 동아대 교수와 함께 출연한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내 계파 갈등 조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회찬은 마르크스를 불러왔다.

정병국 : 과거 박근혜 정권이 왜 무너지고 탄핵을 왜 당했나. 결국 '친박'도 부족해서 '진박', 이렇게 (패권 정치) 하면서 (무너졌다). 그런데 그런 현상을 (민주당이) 똑같이 답습한다. '친문', '진문'. 이제는 '뼈문'까지 나왔다.

박형준 : 이미 민주당 (당대표) 후보들도 '누가 문재인 대통령과 친한가', '누가 문 대통령을 잘 보필할 수 있는가', 이런 경쟁으로 핵심이 간 것이다. 요즘 세 당을 보면서 네 자로 표현을 하자면, 자유한국당은 '백약무효', 바른미래당은 '시계제로'(한 치 앞이 안 보임), 민주당은 '성골감별' 체제로 들어갔다. (민주당) 안에서는 '친문과 비문이 없고 전부 하나'라고 하지만, 선거에서는 결국 투표하는 사람들 마음이다.

노회찬 : '친문이다', '비문이다' 하는 것은 본인들이 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공인기관이 따로 있는 것인가. 묻고 싶은 것이, 그러면 문재인 대통령은 어느 쪽인가. 친문인가, 뼈문인가? 옛날에 (마르크스주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얘기했다. (계파는)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문재인 대통령이 '나는 00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하면 (계파 갈등이) 다 해결되지 않겠나.

노회찬의 언급처럼, 마르크스는 생전 추종자들의 교조화 등으로 자신의 사상이 왜곡되고 변질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스스로 말하길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자본론> 전권을 국내 처음으로 번역·출간했던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 교수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당시에도 얼마나 사이비 마르크스주의가 횡행했는지 보여주는 얘기다. 그의 생각을 단선적으로 이해하고, 경제적 하부토대가 세상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기계적 유물론이 판쳤다. 오죽했으면 마르크스 본인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부인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졌겠는가?" 김수행 (<조선일보>, 2007.11.8.)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 표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이후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를 강조하고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는 등의 직설적인 발언으로 일각에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보수진영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대표적 발언으로, 교황이 2013년 11월 26일 발표한 권고문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이 있다. 5만자로 이뤄진 이 권고문에서 교황은 교회 개혁을 주창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교황은 이후에도 "권고문에서 말한 내용은 모두 기존 교회 교리에 들어있는 것"이라며 비유를 통해 다시 한 번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강조했다.

"과거에는 유리잔이 가득 차면 흘러넘쳐 가난한 자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유리잔이 가득 차면 마술처럼 유리잔이 더 커져버린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에게는 결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 2013)

교황은 "하느님은 모든 형태의 노예적 삶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신다"며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고, 평화를 촉진하는 것이야말로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한 구성적 요소"라고 했다. 또한 배제와 불평등의 사회를 비판하며 "오늘날은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으며,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고 있다"고 했다. 특별히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평화를 위해 특별한 열정을 지녀야 한다"고 촉구한 교황은, "문 밖에서 백성들이 굶주릴 때, 예수께선 끊임없이 '어서 저들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라'고 가르치셨다"면서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고도 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교황의 끊임없는 비판에 대해 CNN은 "그간 사제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경제적 불평등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라고 요구해온 많은 진보적인 가톨릭 신자들을 감동시켰다"고 봤다. 2013년 12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때 아닌 색깔론의 중심에 섰다. 교황은 이에 대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며  "하지만 난 내 인생에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그 만남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라 불려도) 화가 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노회찬은 진중권, 유시민과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이를 언급했다.

진중권 : 일각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아니냐, 공산당 아니냐, 이렇게 비판을 했더라고요. 여기에 교황이 답을 하셨어요. "마르크스주의는 역사가 200년밖에 안 됐다. 우리는 2000년 됐는데, 2000년 된 게 어떻게 200년을 베꼈겠느냐. 거꾸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우리 교회를 베꼈다." 명답이죠.

노회찬 :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이야기 중에 "살인하지 말라"가 기억에 남습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말 아닙니까? 구약시대부터 있었던 교리인데,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죠. 단순히 살인만 하지 말라가 아니라 온갖 형태의 살인, 예컨대 경제적 살인, 노동력 착취, 소득 양극화 같은 것들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재해석한 게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는 거죠. 이번에도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그런 비인간적인 경제모델을 거부하기 바란다"라는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 이야기는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지, 유시민 씨나 제가 했으면 내란선동이죠.

유시민 : 과거에 공소장이 이렇게 시작되잖아요. "자신의 가난과 불행을 사회의 책임인양 망상한 나머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자신의 가난과 불행이 나의 책임만은 아니고 사회의 책임일 수 있다는 것, 내 주위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그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 거 아니에요. 그럼 당장 공안검사들이 빨간 줄 긋고 기소하죠.

닫는 글 : '노동해방‧인간해방'을 향한 신념"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

"(…)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침은 인류의 복지와 자신의 완성이다. 이 두 가지의 이해가 충돌한다거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다른 사람의 완성과 선을 위해서 노력할 때 자신의 완성도 이뤄지게 구성되어 있다. 만약 자신을 위해서만 일한다면 그는 아마 유명한 학자나 훌륭한 현인, 뛰어난 시인이 될 수 있을지언정 완벽한,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될 수가 없다. 역사는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하며 자신을 고귀하게 한 자를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 사람이라는 것은 경험칙을 통해 알 수 있다. 종교는 우리가 따라야 할 이상적인 존재는 인류의 안녕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가르친다, 누가 감히 그러한 판단을 경시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삶에서 인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위치를 선택한다면 어떤 수고도 우릴 굽히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수고는 모두의 이익을 위한 희생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하찮은 이기적 즐거움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이 수백만에게 종속된 것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가 한 일은 조용하지만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며, 우리의 재 위로 고귀한 이들이 뜨거운 눈물을 흘려줄 것이다." 칼 마르크스

이 글은 1835년 만 17세의 마르크스가 "세상일은 포부대로만 되지 않는다"며 김나지움(프리드리히 빌헬름 고등학교) 졸업 논문으로 쓴, <직업 선택에 대한 한 젊은이의 고찰>의 일부이다. '하찮은 이기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만인의 행복에 기여하는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10대 고교생 마르크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때의 마르크스는 "변호사가 돼라, 변호사가 되어야 사회적 지위를 가지며 안정적인 삶을 산다"는 아버지의 권유를 무시하고 대학시절 역사와 철학공부에 심취, 매진했다. 그리고는 잘못된 세상을 전복하기 위해 고난에 찬 혁명가의 길로 나선다.
▲경기고 시절의 노회찬. ⓒ노회찬재단
1973년 만 17세의 노회찬은 당시 최고의 명문고교인 경기고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 해 4월 18일,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수유리 4·19묘지를 찾아가 참배한다. 당시 노회찬과 동행했던 정광필 50+인생학교 학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노회찬이 4.19를 앞두고 수유리 묘소를 참배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19일은 꼴도 보기 싫은 정치인들이 광내는 자리이니 우리는 전날 참배하자 하여) 1973년 4월 18일 수업이 끝난 후 최용석, 오재학, 남궁영, 이종걸, 이범, 장석, 정광필, 노회찬 등이 함께 수유리 묘소를 찾았다." 정광필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60쪽)

2012년 4월 18일 트위터와 1년 뒤인 2013년 4월 19일 페이스북에는 고교 시절 노회찬의 4.19묘역 참배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올라와 있다.

김종필 총리 등 5.16쿠데타세력이 4.19기념식에 설치는 게 못마땅해서 고교시절엔 4월 18일에 친구들과 참배하였습니다. 나중에 그를 제가 낙선시킬 줄 꿈에도 몰랐던 아득한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2012년 4월 18일 노회찬 트위터)

40년 전 오늘 유신체제 하의 암울한 심정으로 수유리 4.19묘지를 찾아 마음을 달랬던 고교 1학년 때의 모습입니다. 오늘 4.19 53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지난 40년의 의미를 반추해 봅니다. 오늘의 민주주의를 이만큼이라도 만들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 앞으로 가야할 길들. 민주주의의 나무는 여전히 피와 땀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2013년 4월 19일 페이스북 글)

같은 해 11월, 노회찬과 정광필은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 1200장을 만들어 밤새 몰래 교실 책상 속에 살포한다. 학교가 발칵 뒤집어졌지만 다행히도 문제는 더 확대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무사할 수 있었다. "자유의 종을 난타하라"로 시작되는 유인물의 제목은 <귀 있는 자 들어라>였다.
ⓒ연합뉴스
2004년 어느날 정운영과 노회찬은 이런 문답을 주고받는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정운영 : 노 의원이 여태껏 살아온 길을 돌아볼 때 과거에 비해 지금 변한 것은 무엇이고, 또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노회찬 : 변하지 않은 것은 목표이고, 변한 것은 방법입니다. 인간해방·노동해방의 신념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은 현실에 다가설수록, 구체화될수록 변하고 있습니다. 학습을 계속하는 이유는 이 변화를 올바르게 끌어내기 위해서지요. 

'노동해방‧인간해방'을 향한 신념, 그것은 마르크스의 세례를 받은 청년 노회찬이 다다른 지점이자 1980년대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5월광주 세대'가 껴안고 간 시대적 화두이기도 했다. 마르크스의 졸업논문을 소개한 '페퍼랜드'라는 이름의 블로거는 블로그 <이글루스>에 이렇게 적는다.

"언제나 항상 곁에 있어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았던 노회찬. 조문을 다녀오고 영결식을 보고 추모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의 부재가 실감나지 않는 것은, 그가 떠난 빈자리를 체감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는 노회찬에게서 인간 마르크스를 본다. 단지 이념적 지향의 유사성 때문이 아니라 암울한 상황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찾는 모습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 때문에." (페퍼랜드, 「노회찬을 보내며」, <이글루스>, 2018.7.28.)

▲손석희 페이스북(위), JTBC <뉴스룸>(아래) 2018.11.27.
노회찬이 떠난 몇 달 뒤인 2018년 11월, <JTBC 뉴스룸>의 앵커 손석희는 마무리 앵커브리핑에서 노회찬을 호명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정치를 하는가." 그리곤 파커 J.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의 한 구절 인용했다.
"매일 새벽 4시 정각, 구로동에서 출발해서 개포동까지 가는 6411번 버스. 그는 주의를 기울여 살피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현실을 끄집어냈습니다. 이른 새벽, 그 버스의 승객들은 조용조용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오래 응시해온 정치인 노회찬은 '존재하되 우리가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정치가 바라봐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보여줬습니다. (…) '정치라는 것이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짜는 것이라는 점을 잊어버릴 때, 우리 가운데 가장 취약한 이들이 맨 먼저 고통을 받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노회찬 6411> 포스터 ⓒ명필름, 노회찬재단
몇 달 뒤, 정광필도 오랜 친구 노회찬을 회상하며 이렇게 되물었다.
"(…) 그럼에도 그가 끝내 진보정당운동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 때문 아니었을까. 그가 6411 새벽버스를 타는 청소노동자, 투명인간들에게 이름을 불러주자 했던 것은 번뜩이는 정치적 감각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일상이 그러했다. 사실 진보정당의 지도부에 있다 보면 정책이나 전략을 고민하기도 버겁다. 그럼에도 그는 늘 현장의 최전선에 동참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끊임없이 만났다.

(…) 그리고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역사적 안목으로 바라보고, 그 이면도 들여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녔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는 모두에게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매번 겪는 패배와 시련 속에서도 긴 호흡으로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면 남 탓하지 않고, 지금 살려야 할 부분과 더 발전시킬 부분, 그리고 포기할 부분이 보인다. 그러면 실패로 인한 좌절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음을 준비하는 여유도 생긴다. 나도 40년 넘게 이 친구랑 어울리면서, 이런 점을 조금씩 배우려 노력했다." (정광필, 「노회찬이 남긴 것」, <매일경제>, 2019.7. 26.)

오늘의 기록이야기 <마르크스와 노회찬> 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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