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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들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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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들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⑦]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 호치민 下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마르크스 上 "대한민국의 진보, 어디로 가시나이까"...노회찬, 마르크스를 만나다(☞바로가기)

마르크스 下 "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바로가기)

레닌 上 레닌의 '불꽃' 만난 노회찬, 한국사회 논쟁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레닌 下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바로가기)

호치민 上 "씩씩한 군인이 돼 베트콩 없애겠다"던 노회찬 어린이, 어쩌다? (☞바로가기)

'적' 또는 '경쟁 상대'로부터도 존경받은 인물 : 호치민과 노회찬의 공통점은?

호치민과 노회찬의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두 사람 모두 적 또는 경쟁 상대로부터도 존경받거나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1969년 9월 2일, 호치민이 79년의 생을 마감했다. 삶을 마감할 때 그는 승리자였다. 1969년 9월 8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10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호찌민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호치민은 살아서는 민족해방전선과 독립을 원하는 남과 북의 모든 베트남 인민에게 큰아버지이자 통일의 상징이자 실질적 지도자였다. 그는 죽어서도 베트남 인민의 정신적 지주이자 희망이었다. 어떤 지도자도 자신의 조국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데 있어 호치민보다 헌신한 사람이 없었다.
▲<타임>지 표지(1969.9.12.) 갈무리
호치민. 그는 '적'에게서도 존경을 받는 그런 인물이었다. <타임>지(1969.9.12.)는 그의 얼굴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 그리곤 미국이 가장 먼저 타도해야 할 적으로 몰았던 호치민에게 다음과 같은 고별사를 바쳤다.
"호치민은 외세에서 해방된 통일 베트남의 건설에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고통받는 그의 1천9백만 인민은 이런 미래상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한 그의 헌신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박호(호 아저씨)'인 그를 이해했다. 남베트남인도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현재 살아있는 민족 지도자 가운데에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뉴욕 타임즈>는 전 세계의 찬사를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조사를 썼다.
"그의 가장 심하게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조차 체구가 작고 허약한 호 아저씨에 대한 숭배와 존경의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호치민의 전기 작가 찰스 펜(Charles Fenn)은 이렇게 썼다.
"그의 지도력에 대한 찬사는 전 세계적이었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적들조차 그의 사망했을 때 보여준 조의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사이공은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문상하기 위해 완전 철시하였다. 티우 남베트남 대통령조차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타임지> 표지(1975.5.12.) 갈무리
1975년 5월 12일 베트남 전쟁이 종전되던 날, 전 세계의 외신들은 일제히 베트남 전쟁의 끝을 보도했다. 표지인물은 호치민의 얼굴로 가득 채워졌다.  그 가운데 <타임>지는 호치민의 초상화와 함께 통일된 베트남의 전체 지도를 붉은색으로 표현했으며 수도인 사이공에 호치민의 이름을 적었다. 사이공에 호치민의 이름을 넣음으로써 베트남 전쟁이 호치민에 의해 끝났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2018년 7월 23일 노회찬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입구부터 지하 2층 빈소까지 추모행렬이 이어졌다. 발인 전까지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총 조문객 38,700여명이었다. 전국 각지에도 빈소가 차려져 떠나는 노회찬을 배웅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의 조문객들(2018.7.24.) ⓒ연합뉴스
경쟁 정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당 차원의 논평을 통해 그를 추모했다. 1주기를 맞아 노회찬재단이 모아낸 <그리운 사람 노회찬>(2019.7.18.)에 수록된 추모 글 가운데 몇 개를 골라 소개한다.
"노회찬 의원은 우리니라 진보정치의 상징으로서 정치인이기 이전에 시대정신을 꿰뚫는 정세분석가이자 촌철살인의 대가였다. 또한 척박했던 90년대 초부터 진보정치의 희망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던 진보정당 역사의 산증인이었고, 뛰어난 대중성을 바탕으로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아왔다.

노회찬 의원이 지향했던 진보와 민주주의 가치들은 후배 정치인들이 그 뜻을 이어받을 것이다." (7.23. 더불어민주당)

"확고한 정치철학과 소신으로 진보정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셨던 고 노회찬 의원의 충격적인 비보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진보정치의 상징으로 서민과 노동자를 위한 의정활동에 모범을 보여주셨고, 정치개혁에도 앞장서 오셨다. 

현실에서의 고뇌는 모두 내려놓으시고 영면에 드시길 바란다. 고인이 못다 이룬 정치발전에 대한 신념은 여야 정당이 그 뜻을 이어 함께 발전시켜 가겠다." (7.23. 자유한국당)

그를 기리는 다른 정당 소속 정치인들의 추모도 줄을 이었다.
"오늘 아침, 비보를 접하고 머리가 한 순간에 하얘졌습니다. (…) 빈소로 달려가는 길입니다. 저에게 노회찬 의원은 '유연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진보가 얼마나 온유하고 품이 넓은지 보여주셨던 분입니다. 노동자가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나라, 진보가 가치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을 바꿀 구체적 힘이 되는 정치, 무던히 애를 쓰지만 결코 쉽지 않은 우리 세대의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걸 남은 우리한테만 맡기고 저렇게 가버리시는지... 정말 비통합니다. (7.23.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한 정치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사람 냄새 훈훈하게 풍기는 분이였습니다. 우리 정치에도 강한 인상과 맑은 기상을 남기신 분입니다.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목숨을 끊겠다는 결심을 말릴 수 있었다는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7.24.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

"내 눈에 비친 그는 제대로 된 진보 정치인이었다. 심지는 굳건했지만 사고는 건전했다. 비판을 하되 적대적이 아니었고, 물러서지 않았지만 상대를 모욕하지는 않았다. '깨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그는 지혜로웠지만 자신에게는 약지 못했다. 어리석었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안타깝다. 기성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깊은 빚을 진 심경이리라. 그러나 애도만으로 그치기엔 그의 죽음이 남긴 울림이 너무 크다.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게 있다. 어떤 형태의 정치자금이든 그로부터 자유로운, 흠결 없는 정치인이 몇이나 될까. 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덮이고 또 세월 속에 묻혀버린다면 이 나라 정치는 희망이 없다. 

(…) 당신이 죽음보다 깊은 고뇌의 심연에서 망명지처럼 선택했을 마지막 결단을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군요. 당신은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7.26. 김형오 전 국회의장, <뉴시스>)

"노회찬 의원께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저희는 노 의원께 빚을 졌습니다. 노 의원께서 꿈꾸신 정치를 흉내내지도 못했습니다. 노 의원의 매너에 스민 인간에 대한 배려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노의원의 익살에 감춰진 고독을 알지 못했습니다. 몇 달 전 노 의원을 붙잡고 막걸리 몇 잔 더 마셨어야 했는데, 그것도 못했습니다." (7.26. 이낙연 국무총리, 조문 후 SNS 글)

"오늘 노회찬 선배를 보냅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빛나는 정치인, 가장 깊은 분노를 가장 아픔답고 즐겁게 달랬던 정치인. 제가 사랑하고 본받고 싶은 정치인을 우리 가슴에 묻습니다. 그가 남겨 놓은 길 끝까지 가겠습니다." (7.27. 이재명 경기도지사)

▲국회 영결식장에서 줄지어 애도를 표하는 국회 청소노동자들(2018.7.27.) ⓒ민주노총
▲7월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현관 앞. 고 노회찬 의원 국회 영결식이 국회장으로 치러지고 있다. ⓒ정의당
7월 27일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국회 앞 잔디밭에서 국회장(葬)으로 영결식이 엄수됐다. 작업복을 입은 국회 청소노동자 20여 명이 일렬로 늘어서서 고인의 가는 길을 추모하는 가운데, 문희상 국회의장은 영결사를 통해 노회찬을 기렸다.
"노회찬 의원님.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만류에도 거대 권력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남긴 메시지서도 노동자의 삶을 함께 아파했고 사회적 약자의 승리를 함께 기뻐했습니다. 정치의 본질이 못 가진 자 없는 자 슬픈 자 억압받는 자 편에 늘 서야 한다 생각했던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 노 의원님. 당신의 삶은 많은 이들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 보장된 주류의 편안한 삶 대신 민주주의와 노동현장에서 온몸을 던져 투쟁하셨습니다.  낡은 구두 오래된 셔츠 넥타이가 말해주는 대중 정치인의 검소함과 청렴함은 젊은 세대에 귀감이 되었습니다. 한국 정치사에 진보정치와 생활정치의 깃발을 세워 사회적 약자와 노동자 서민의 버팀목이 되어 주셨습니다. (…)
노회찬 의원님! 이제 평생을 짊어지셨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영원한 평안을 누리십시오. 당신이 한국정치사에 남긴 발자취와 정신은 우리 국회와 대한민국 역사 속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호치민과 노회찬

베트남의 '국부'격인 호치민이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애독하고 소장했다는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한국에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1988년 시인 고은이 <한겨레>에 실은 「손문과 호지명과 김구」라는 글(1988.11.4.)에는 호치민이 <목민심서>를 지은 정약용의 기일까지 알아내 제사를 지냈다는 흥미로운 내용도 들어 있었다.
"호지명의 일생에는 조국해방을 위한 싸움 말고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 커다란 혁명과 도덕의 일치는 이윽고 남북베트남 통일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의 젊은 날, 청말의 실학, 조선의 실학과 함께 베트남의 유학에도 실학이 일어났다. 그래서 호지명 총각은 조선의 정약용이 남긴 <목민심서>를 읽고 받은 감동으로 정약용의 기일을 알아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공직자의 도리를 기술한 <목민심서>를 호치민 전 주석이 생전 침대 한 편에 놓고 읽었다거나 공무원들에게 일독을 권했다는 얘기와 함께 그의 관 속에 목민심서가 부장돼 있다는 얘기 등이 1990년대 이래 국내 베스트셀러 저서와 유명인사의 발언에 숱하게 소개됐다(「[팩트체크] 베트남 國父의 '목민심서 사랑' 사실일까?」, 연합뉴스, 2019.12.7.). 문재인 대통령은 베트남 호치민 시에서 열린 '호치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 개막식에 "베트남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호치민 주석의 애독서가 조선 시대 유학자 정약용 선생이 쓴 목민심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는 축하 영상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송필경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대표는 "노회찬이 가장 존경하는 호치민은?"이라며 묻고 이렇게 적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전쟁을 이겨내고 혁명을 이루어냈다. 그는 '혁명의 4대 덕행' 즉 근면, 절약, 청렴, 정직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그는 귀국 후 박보 동굴에서 혁명을 꿈꿀 때 그의 베개 옆에는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항상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는 48권 16책으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호치민이 베트남 밀림에서 게릴라전을 지도하면서 베갯머리에 두고 늘 참고할 정도로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호치민박물관은 베트남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으로, 호치민 유물 보존 및 전시와 호치민 관련 연구 및 교육 등을 담당하는 곳이다. 박물관은 "소장한 유품 12만 점 가운데 <목민심서>는 없다"고 2006년 공식 답변했다. 다산 정약용을 연구하는 '사단법인 다산연구소'의 박석무 이사장도 2019년 "호치민 주석의 목민심서 탐독 이야기는 근거가 전무합니다. 국제 레닌학교 시절, 박헌영과 호치민 주석의 목민심서 일화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며 공식 입장을 밝혔다.
▲다산 정약용 초상화와 <목민심서> ⓒ경기 남양주시청
노회찬이 초선 국회의원으로 맹활약하던 17대 국회(2004~2008) 당시 국회의원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묻자 백범 김구, 충무공 이순신, 도산 안창호에 이어 다산 정약용이 4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리고 링컨, 간디, 문익환, 장준하, 세종대왕 등이 뒤를 이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 4위'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조선시대 실학을 집대성한 조선 최고의 사상가다.  2012년에는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여 '2012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18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했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뒤 천주교 선교활동을 주도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의 자형이고,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긴 정약전은 둘째 형, 천주교교리연구회장인 정약종은 셋째 형이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에 따르면, 정약용은 평등하고 청렴한 경제(공렴, 公廉)으로써 불평등하고 부패한 경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부자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손부익빈(損富益貧)으로써 소득불평등 문제를 풀어가고자 했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을(4대 궁인: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 노약자, 어린이, 초상을 당한 사람, 질병을 앓은 환우, 재난피해자) 사회와 국가에서 배려하는 애민(愛民)사상으로써 조선이 복지국가가 되기를 바랐다.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정약용. 그는 500 여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그 가운데서도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가 대표적인 저서로 꼽힌다. <목민심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의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교훈이 될 만한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저술한 책이다. 노회찬이 홀연히 떠난 뒤 다산 정약용과 그의 <목민심서>를 노회찬과 함께 호명하는 글들이 있었다. 몇몇을 소개하면 이렇다.
"한국 진보정치의 아이콘이었고 노동운동을 통해 민초들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던ㅡ행동하는 양심이었던 그가 자신의 목숨을 내 던지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 봉건사회 조선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조선의 정치인이자 지식인이었던 다산의 <목민심서>를 노회찬 의원의 영정 앞에 올려놓고 한없이 울고 싶다. (…) 더 이상 다시는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갖지는 못하나 죽음으로 신념을 굽히지 않은 노 의원과 18년 강진 유배생활 속에서 500여 권의 저작을 남긴 다산이 왜 내 눈에는 닮아 보일까?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인들은 '목민심서'의 내용 중에 4편 '애민(愛民)'을 가장 좋아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노인을 봉양하며 어린이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며, 상(喪)을 당한 이를 보살피고, 병든 이를 돌보며, 재난을 구제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나가신 노회찬 의원님과 정약용 선생님은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김희배 가톨릭관동대 교수의 블로그 글 (「어느 한 정치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2018.7.28.)

"기자가 '진보는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하면서 '진보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진보에 부족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현실성, 현실적 힘'이라고 일갈했다. 진보에 도덕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지만 도덕은 진보정당이 추구할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런데 진보세력의 도덕적 결함에는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도 하나의 현실이니까 인정해야 한다. 부정이나 비리의 경우 진보세력에는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이쪽도 저쪽도 돈 봉투를 받았으면 똑같은 죄인데 이쪽에서 받으면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억울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높은 것을 요구하니까 그에 맞춰서 더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 이 말에서 비로소 그가 여느 정치인들처럼 뻔뻔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와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온 한 동지는 장례식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돈 받은 사실을 유서에는 쓸 수 있을지언정 주변 사람들에게는 직접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은 평생의 목표로 '공렴(公廉)'이라는 대원칙을 삼았다. 다산은 공정하고 공평한 공무집행에 청렴이라는 도덕성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 때만 목민관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노회찬 의원은 드루킹 일당에게 두 번에 걸쳐 4000만원을 받았지만 그 돈을 부정하게 쓰거나 사욕을 취하기 위하여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산 '공렴'의 공직자였다." 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공렴(公廉)의 표상···정약용, 한익상 그리고 노회찬」, <아시아엔>, 2018.8.1.)

"헌법학자로서 늘 화두를 갖고 있었다. '국민이 주권자인데, 왜 국민은 항상 '을'로 살고 있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뽑힌 사람들이 국민을 '을'로 본다는 것이다. 감히 국민을 '개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기들끼리 주먹질 하고 도끼질은 해도, 국민투표로 국민의 뜻을 묻자는 말은 하지 않는다.  (…) 국회의원들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와 같은 목민관들도 있다. 돌아가신 노회찬과 같은 분들이다. 이런 '좋은 국회의원'이 너무 적은 것이 문제다.

해결 가능성은 있나? 있다! 간단하다! 선거시장이 독점시장이어서 의외로 쉽다!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으니, 국민이 절대 '갑'이다. 국민이 좋은 투표를 하면 된다." 황도수 건국대 교수·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더 이상 '개돼지' 취급받지 않을 국회의원 투표 요령」, <법률방송뉴스>, 2020.2.18.)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노회찬을 그리며 정약용과 그의 목민심서를 함께 호명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으로 본다. 선거를 하면서 노회찬이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2018년 7월 23일 노회찬은 국민 여러분께 남긴 마지막 글에서 스스로 그것을 인정했다.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이처럼 노회찬은 경공모로부터 4000만원을 받은 것을 인정했으며,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은 이 돈을 '뇌물'로 인식했다. 어쩌면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통념상 '불법 정치후원금'은 '뇌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식과 통념 아래서 법적인 접근, 즉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는 것, 따라서 "뇌물은 아니었다"는 것은 주목받지 못한다. "그 구체적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노 의원의 비극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가장 깨끗한 정치인조차도 돈을 필요로 하는 한국정치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비극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금전만능의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진보정당조차도 돈을 필요로 하는 우리 정치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는 손호철(서강대 명예교수, 정치학)의 추모의 글도 울림을 줄 수는 없었다. 노회찬의 '어리석은 선택, 부끄러운 판단'의 실체는 '뇌물 수뢰'가 아니었다. 정치후원금에 대해 마땅히 밟아야할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잘못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돈을 주고받을 관계가 아니다. 그 쪽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는 부인(2018.7.4.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그의 잘못이었다.
▲JTBC <뉴스룸>(2019.4.4.) 손석희 앵커의 「노회찬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화면 갈무리
"노회찬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 (…)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비리를 지닌 사람들의 행태를 떠올린다면 (…) 우리는 세상을 등진 그의 행위를 미화할 수는 없지만 (…)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은 존중해줄 수 있다는 것(…)"
JTBC <뉴스룸>(2019.4.4.)의 손석희 앵커가 "앞과 뒤가 같은 사람이고,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었던 동갑내기 노회찬에게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며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호치민과 노회찬>의 기록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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