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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주은래' 노회찬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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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주은래' 노회찬의 꿈"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⑨]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 저우언라이 下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마르크스 上 "대한민국의 진보, 어디로 가시나이까"...노회찬, 마르크스를 만나다(☞바로가기)

마르크스 下 "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바로가기)

레닌 上 레닌의 '불꽃' 만난 노회찬, 한국사회 논쟁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레닌 下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바로가기)

호찌민 上 "씩식한 군인이 돼 베트공 없애겠다"던 노회찬 어린이, 어쩌다? (☞바로가기)

호찌민 下 "정적들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가기)

저우언라이 上 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와 이어지다 (☞바로가기)

ⓒ연합뉴스

민주노동당의 '주은래' 노회찬의 꿈 : "할 일도 많고 갈 길은 멀다", "조직이 시키면 합니다"

▲<월간 말>의 2004년 5월호(통권 215호)
노회찬이 처음 국회에 입성한 17대 총선 직후, <월간 말>의 2004년 5월호(통권 215호)에는 노회찬의 인터뷰가 실렸다.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중앙선대본부장으로 선거를 진두지휘해 큰 성과를 이룬 그였다. 인터뷰의 제목은 「민주노동당의 '주은래' 노회찬의 꿈」.  박권일 기자가 진행한 인터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내가 대머리 아저씨를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탄핵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3월 중순,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선 채 TV토론을 보던 사람들은 한 토론자의 '신들린 개인기'에 그만 넋을 잃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절묘한 풍자와 비유, 거기다 싱글싱글 넉살 좋은 표정까지. 딱딱하고 때론 짜증만 불러일으키던 정치토론을 이렇게 확 바꿔놓은 사람은,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사무총장이었다. 일단 '발동'이 걸리자 그 뒤부턴 파죽지세. 한 달간 각종 토론에서 날고 긴다던 기성 정당의 선수들이 '짚단 베이듯' 쓰러졌다. '대체 노회찬이 누구냐'가 총선정국의 화두 중 하나가 됐을 정도다. 팬클럽도 생겼다. 팬클럽 이름은 '리얼(real) 노사모'란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노회찬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4월 15일 총선에서 노회찬 씨는 '노회찬 국회보내기 운동'을 시작한 팬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고 당당히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됐다. '스타탄생'이다." 박권일 (민주노동당의 '주은래' 노회찬의 꿈, <월간 말>, 2004년 5월호)

진보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정치지도자로서 노회찬이 닮고 싶어하는 모델은 호치민과 주은래(저우언라이, 저우)였다. 박권일이 보기에 호치민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우는 좀 의외였다. '영원한 2인자'라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노회찬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권영길 대표체제 하에서 사무총장을 지낸 자신의 처지와도 무관치 않은 듯했다.
"맞습니다. 그래도 모택동이 있으니까 주은래가 2인자인 것이죠. 참모 역할도 중요한 겁니다. 특히 진보정치인들은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돼야 해요. 참모도 하고, 대중정치도 하고, 정책을 스스로 개발하기 위해 부단히 공부도 해야 합니다."
내친 김에 박 기자는 노회찬에게 "'포스트 권영길'의 대표주자로 본격적으로 나서야 할 때 아닌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일순 노회찬의 표정이 변했다.

"나는 개인의 권력의지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솔직하지 못하고 올바르지도 않아요. 조직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대선 주자로 나서겠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직에서 시키면 합니다."

"제도권 정당이 되어 당의 관료화가 가속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는 이어지는 질문에 노회찬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그 부분에서 생각이 아주 다른데, 당은 좀 더 관료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정당의 문제는 직업활동가로서 책임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주어진 일 잘하는 게 일차적으로 중요한데 많은 이들이 개인활동과 공적활동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밤에 술 먹으면서 혁명을 논하다가 아침에 2시간 지각해 놓고 미안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아마추어적이란 소리입니다."
※ '노회찬은 누구인가'를 물으며 박권일 기자는 이런 내용도 함께 실었다.
그는 … 15년간 한국 진보정당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해 왔다. 그는 대중선동능력과 조직실무, 그리고 이론적 토양의 3박자를 갖추었다고 평가받는다. 상황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정치감각은 진보정치인들 중 군계일학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감각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게 아니라 나름의 비결이 있다.

"어떤 일 끝났을 때 대개 그냥 잊어먹잖아요. 그런데 나는 바둑을 복기하듯 맨 처음에 어떻게 판단했나, 왜 그렇게 판단했나를 꼭 검증해봅니다. 정세분석을 그런 식으로 많이 했습니다. 그걸 자꾸 하다보면 정세예측력이 굉장히 높아져요. 그걸 안 하면 그때그때 판단이 잘했든 못했든 되풀이해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어쩌다 잘한 판단도 우연으로 끝나버립니다."

(…)
 스스로 장단점을 평가해달라고 했더니 쑥스러워하면서 "뭐 장점이라면 진보정치를 대중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점일까요. 단점은 모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걱정이에요"라고 말한다. 노회찬은 자신을 '조직형 인간'이라 평한다. 글자 그대로 '당이 시키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극단적인 경우 옛날 김두한 씨처럼 국회에 똥이라도 퍼부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아, 당이 그렇게 결정하면 해야죠. 재래식 변소가 드물어서 똥 구하는 게 힘들지, 뿌리는 게 대숩니까"라며 넉살이다.
2004년 9월 30일 오후 6시 30분 신라호텔의 다이너스티홀. 17대 국회 민주노동당 초선의원 노회찬은 '중국 건국 55주년 기념리셉션'에 권영길, 조승수 의원과 함께 참석했다.
"민주노동당원 중에는 천안문 사태, 티베트 사태 등을 들어 중국정부와 중국공산당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갖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당이 중국공산당 혹은 중국정부와 관계를 갖는 데 대한 거부반응도 적지 않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사정이다. 

그러나 외교는 사교가 아니다. 정치는 국민을 상대로 하는 것이지 운동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집권까지 나아가려는 당이라면 주변 강대국과 대화채널을 구축하기 위한 장기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할 일도 많고 갈 길은 멀다." (<노회찬의 난중일기>, 2004.9.30.)

▲<최후의 결전> 유튜브(Варшавянка Warszawianka Varshavianka 1905-1917) 화면 갈무리.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한 석정(石正) 윤세주가 번안 작사한 <조선의용군가> 유튜브 화면 갈무리.
같은 날 아침 노회찬은 '어제 구운 CD'를 틀고 출근길에 올랐다. 많고 많은 노래 중에 <최후의 결전>을 들었다는 것이 뭔지 모르게 의미심장하다. 오후에 가야 하는 중국 건국 55주년 행사 참석을 앞두고, 혹시 중국 공산당 공농홍군의 368일간 1만km 대장정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 아니었을까. (※ '최후의 결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스페인 내전을 영화화한 켄 로치Ken Loach 감독의 'Land and Freedom'을 통해서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것은 'A Las Barricadas'라는 제목으로 스페인 내전 당시 인민전선의 민병대원들이 부르는 스페인어 버전이다.)

"가을에 듣기 위해 2개의 CD를 구워 하나는 동생에게 선물했다. 가을엔 역시 장중한 곡이 좋다. 첫 곡은 <최후의 결전Varshavianka>. 20세기 초 <인터내셔널가>와 함께 가장 많이 불려졌던 노래다. 우리나라에선 항일무장투쟁 시기 '최후의 결전'이란 제목으로 독립군들이 불렀고, 스페인내전 당시엔 '바리케이트를 향해'란 이름으로 민병대원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이다. 70%의 긴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곡이다." (<노회찬의 난중일기>, 2004.9.30.)

중국 대장정 답사길에 오르다 :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우다'

▲2015년 11월 제1차 중국 대장정 답사길에 함께 노회찬 전 의원. 대장정 출발지 징강산(井崗山)에서 일행과 함께. ⓒ한국문명교류연구소 
2015년 11월 노회찬은 고교 친구인 장석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이사장과 함께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의 '중국대장정 1구간 학술답사' 길에 올랐다. (※ 이어진 중국 대장정 2구간 학술답사 일정은 2016년 5월, 3구간은 2016년 10월, 4구간은 2017년 10월이었다.)
▲100위안권 중국 지폐 앞면. 순서대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리우샤오치, 주더.
▲100위안권 중국 지폐 뒷면. 장시성의 혁명 유적지, 징강산 오지봉.
대장정 1구간 학술답사의 출발지는 징강산(井崗山)이었다. "도시를 버리고 농촌을 중심으로 투쟁해야 한다." 마오가 저우, 리우샤오치(刘少奇), 주더(李先念) 등과 함께 1927년 12월 노동자와 농민 1000여 명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들어간 곳이 바로 장시성(湖北省)의 징강산이다. 마오가 유격활동을 전개하면서 공농홍군(약칭 홍군)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나간 근거지도 징강산이었다. 징강산 투쟁은 대장정과 중국 혁명 승리 '신화'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징강산 혁명역사박물관 입구에서 ⓒ한국문명교류연구소
답사팀이 대장정 1차 답사를 시작하면서 찾아간 곳은 징강산 혁명역사박물관이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전시실 입구 조형물의, '성성지화 가이료원(星辰之火 可以燎原)', 즉 '작은 불씨가 들판을 태우다'는 글귀였다. 이어 '적진아퇴 적주아요 적피아타 적퇴아추(敵進我退 敵駐我擾 敵疲打了 敵退我追)'라는, 마오 유격전술의 상징 16자도 눈길을 끌었다. "적이 전진하면 아군은 후퇴, 머무르면 교란, 지치면 공격, 후퇴하면 추격한다"는 뜻으로 <손자병법>이 그 바탕이다. 대장정 답사팀을 이끈 정수일 선생은 훗날 노회찬재단 소식지에 당시를 회고하며 심경을 적었다.
"꼭 5년 전 11월, '중국 대장정 답사'의 귀로에서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그와의 마지막이자 가장 긴 면대면 대화는 서로의 생각을 구김없이 주고받은 잊을 수 없는 대화였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그 '6411번 버스정신'으로 옮겼다. 이 대목에서 대화의 핵심은 민들레로 상징되는 투명인간에 관한 공유인식이었다. 노 의원은 그 버스의 소외된 승객들인 투명인간들이 겪고 있는 고달픈 일상과 명색이 '진보당'이라고 하면서도 그들을 보듬기는커녕 그들의 곁에 다가서지도 않은, 그래서 구경은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은' 투명정당의 꼬락서니가 되고만 현실에 대한 뼈저린 자성, 그리고 '더 낮은 곳'에 내려가 그들과 함께 명실상부한 진보적 민중정당을 만들겠다는 결연한 의지 등을 그토록 명쾌하고 차분하게 설파하는 것이었다. (…)
노 의원 서거 첫돌을 맞아 모란공원에서 거행된 추모식에서 숱한 민들레들을 실어나르던 그 초록색 '6411번 버스' 조형물과 눈길이 마주쳤을 때, 홀연히 1년 전 이역에서 부음에 접하자 메모노트에 남긴 절규가 북받쳤다. '이 바보 같은 사람, 죽다니, 살아서 이겨야하지! 죽음은 지는 거야! 이 못난 사람아, 비통하도다!!!'

그렇다, 노회찬은 '위대한 바보요, 못난 사람'이다," 정수일 (「문화인 노회찬: 민들레 단상(斷想)」,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20호, 2020.12.)

※ 대장정 답사 길에 함께 오른 오랜 친구 장석 시인도 손호철 교수의 책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이매진, 2008)를 떠올리며 '길 위의 인연'에 대해 돌아본 글을 재단 소식지에 올렸다.
"… 카타니아의 벨리니 극장 앞 카페에서 손호철 선생은 얼마 전 펴낸 쿠바 여행기인 <카미노 데 쿠바>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작년 여름, 여정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노 의원의 비보를 접했다고 했다. 그가 이 말을 꺼낸 것은 점심을 했던 식당에서 오랜 세월 고인의 동지이자 조언자였던 선생에게, 나는 노회찬의 친구라고 소개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몸집이 참 크고 장수처럼 보이는 정치학자 손호철 교수는 코코아를 주문해 마시며, 쿠바 여행에 정말 가고 싶어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고인과 마음으로 온 여정을 함께 했었노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때 내내 맑고 푸르던 시칠리아 항구도시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포도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돌아오자마자 책을 사서 펼쳐 보니 글머리에 고인에 대한 사랑의 헌사가 놓여 있다. 불현듯 몇 해 전 손 교수의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라는 책을 참고서 삼아 몇 차례에 걸쳐 고인과 중국 홍군의 대장정 루트를 답사했던 추억이 밀려온다. 이러한 길 위의 인연이 이어지고 있구나." 장석 (「문화인 노회찬-시詩투성이 그의 길」, 노회찬재단, <소식지> 창간준비호, 2019.4.25.)

닫는 글: '따뜻한 사람'

저우언라이와 노회찬.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는다면? 두 사람 모두 '따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우는 죽는 순간까지 인민을 챙겼다. 26년 동안 저우를 이발해온 베이징반점의 이발사 주(朱)씨가 저우 서거 며칠 전 비서에게 총리의 수염을 밀어드려야 할 것 같다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저우는 이때 "주 씨와는 20여 년 동안 사귀었으니 내가 이처럼 병으로 쇠약해진 모습을 보면 필시 가슴 아프게 생각할 것이네. 그러니 오라고 해서는 안 되네. 정중하게 잘 말해주게"라고 말했다. 할 수 없이 그 이발사는 저우가 서거한 이틀 후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면도를 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성우이용원 모습. 2015.7.6. ⓒ노회찬재단
노회찬은 "이발 솜씨가 뛰어나고, 요즘 드물에 칼면도를 할 수 있는 곳. 세상 얘기도 들을 수 있다"면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 성우이용원에서 머리를 깎았다. 노회찬이 떠나고 얼마 뒤. 성우이용원의 이남영 이발사는 20년 넘게 단골손님이자 동생 같았던 노회찬을 두고, 자신을 '노회찬의 20년 지기'라고 소개하며 그를 "누구보다 정 많고 여린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누구보다 인간적인 사람이다. 내 속에 있는데... 인간 대 인간으로 무조건 좋은 사람이다. 돈도 없이 정직하게 살았던 국회의원이었다. 내가 열심히 사니까 자기가 더 좋아했던 사람이다. 서민적인 사람이었다. … 인간적이었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다"는 말로 안타까운 마음을 남겼다.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이발소. 오래 되서 좋은 게 아니라 이발솜씨가 뛰어나 찾게 되는 집"(2015.7.5. 노회찬 페이스북), "이발솜씨도 훌륭하지만 제겐 소중한 힐링공간입니다. 물론 제게도 깎을 머리가 있습니다^^ '90살 이발관, 140살 면도칼, 칠순의 이발사'"(2016.2.11. 트위터)라고 소개한, 세월이 고스란히 배여 있던 성우이용원의 외관과 지붕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서울시 미래유산 문화정책-성우이용원 보수공사'라는 이름 아래 외관을 크게 바꾼 리모델링을 했기 때문이다.
2019년 7월 20일 마석 모란공원. 노회찬 1주기 추모제‧묘비 제막식이 있었다. 유족을 대표해 아내 김지선 선생은 이렇게 인사말을 전했다.
"노회찬은 너무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마음과 신념은 너무 크고 유쾌하고 낙관적이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노회찬이 사는 동안 함께 가는 동지들을 너무너무 사랑했다는 것이다."
2014년 '왜 지금 저우언라이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는 저우의 덕목, 저우가 만들어 놓은 정치윤리의 전통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저우언라이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하소연하고 싶어지는 따뜻한 지도자였다. 저우언라이는 비록 국가지도자 신분이기는 했지만 늘 기회를 만들어 자신을 신분 '밖'에 두고 친구들과 보통 사람처럼 교제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 갑과 을의 위치를 따지지 않고 성심성의껏 보답했다. 때로는 사람들을 초대해 자신의 음식솜씨를 뽐내어 사람들의 흥을 북돋아 주기도 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어려움이 생기거나 격려가 필요할 경우 어김없이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었다." 조경란 (「유머가 있는 따뜻한 공산주의자 신념과 품격을 보여준 이성적 정치가이자 관료: 저우언라이 周恩來」, <주간조선>, 2316호, 2014.7.21.)

먼 길을 떠나던 날, 마지막 고뇌의 순간까지도 노회찬은 정의당 상무위에서 발언할 메모를 남겼다.
"삼성전자 등 반도체사업장에서 백혈병 및 각종 질환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조정합의가 이뤄졌습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이 사안을 사회적으로 공감시키고 그 해결을 앞장서서 이끌어 온 단체인 '반올림'과 수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KTX승무원들 역시 10여년의 복직투쟁을 마감하고 180여명이 코레일 사원으로 입사하게 됐습니다. 입사한 뒤 정규직 전환이라는 말을 믿고 일해 왔는데 자회사로 옮기라는 지시를 듣고 싸움을 시작한지 12년 만입니다. 오랜 기간 투쟁해 온 KTX승무원 노동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노회찬, 함께 꾸는 꿈>(후마니타스, 2019)에 수록된 「함께 꿈을 일구며」는 노회찬재단 설립을 준비해온 열두 명의 실행위원들이 '나에게 노회찬이란?'은 물음에 짧게 답한 글들을 모은 지면이다. 이 가운데 부산 초량동 시절부터 동생의 오랜 친구였던 인민노련 활동가 출신의 임영탁과, 진보정당 활동을 함께 한 길동무 김윤철의 글을 올리며 오늘의 이야기 <호치민과 노회찬> 편을 마친다.

"회찬 형은 영창악기 서병철 동지의 조촐한 추모 행사에 잊지 않고 인천까지 매년 찾으셨습니다. 의원이 되고 난 뒤에도 달라진 건 없으셨습니다. 거절당할까봐 지레 연락을 안 해도 꼬박꼬박 찾아오셨지요. 당연하지만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노회찬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임영탁

"나에게 인간 노회찬은 함께 일하는 후배들을 동료로 대하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을 말없이 함께 나누는 선배이자 동지였다. 정치인 노회찬은 내게 꿈을 주었다. 노회찬 같은 정치인이 국가를 운영하고 민중을 살피며 좋은 나라를 만들어 가는 꿈을. 그 모습을 정말로 보고 싶었다. 노회찬처럼 진심으로 존경하고 믿음을 줄 정치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가 그립다." 김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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