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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분당,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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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분당,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⑫]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 안토니오 그람시 上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① 혁명 그리고 정치

마르크스 上 "대한민국의 진보, 어디로 가시나이까"...노회찬, 마르크스를 만나다(☞바로가기)

마르크스 下 "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바로가기)

레닌 上 레닌의 '불꽃' 만난 노회찬, 한국사회 논쟁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레닌 下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바로가기)

호찌민 上 "씩식한 군인이 돼 베트공 없애겠다"던 노회찬 어린이, 어쩌다? (☞바로가기)

호찌민 下 "정적들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가기)

저우언라이 上 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와 이어지다 (☞바로가기)

저우언라이 下 "민주노동당의 '주은래' 노회찬의 꿈" (☞바로가기)

룩셈부르크 上 '잠들지 않는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를 만나다 (☞바로가기)

룩셈부르크 下 로자 룩셈부르크의 '츠비츠비', 그리고 노회찬의 '잘 놀다 간다' (☞바로가기)

ⓒ연합뉴스

노회찬, "생각하는, 고민하는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와 이어지다 : "지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 "가장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가장 혁명적일 수 있었다"

2004년 어느 날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을 출간하기 위해 노회찬과 인터뷰를 한 정운영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이어 안토니오 그람시를 바로 불러내 묻는다.

정운영 : 로자와는 여러 모로 비교되는 안토니오 그람시 얘기도 어디선가 하셨지요?

노회찬 : 그들은 모두 생각하는 사회주의자였고 고민하는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저질러질 수 있는 야만과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빼어납니다. 특히 그람시는 러시아혁명이 '교과서'로 강조되고 통용되던 당시 풍조 속에서 그것을 예외적 현상을 담은 '참고서' 정도로 보고, 진짜 '교과서적 상황'에 대해 고민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안토니오 그람시, 누구? : '왜 자본주의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는가?'

▲안토니오 그람시
▲안토니오 그람시의 대표 저작 <옥중수고>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22.~1937.4.27.)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이자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한 혁명가로,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스트 정권에 대항한 정치인이자 사상가이다. 사르디니아 섬 출신의 촌사람 그람시는 자동차의 도시 토리노에서 활동하다가 공산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되지만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면서 1926년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에도 불구하고) 체포, 11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옥사했다.

주요 저서로는 <옥중수고(Quaderni del carcere)>가 있으며, 헤게모니, 시민사회, 수동혁명, 기동전·진지전, 유기적 지식인, 역사적 블록 등의 개념을 창안하거나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중수고>가 널리 읽히기 시작한 것은 <옥중수고 선집>(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1971)이란 제목으로 영어로 출간된 1970년대 이후였다. 이 책과 함께 서구사회에선 '그람시 르네상스'가 일어났다(김호기,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 수고'…실패한 혁명가, 사상가로 승리하다」, <경향신문>, 2016.6.22.).

※ 손호철(서강대 교수, 정치학)은 묻는다.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 저작 중 아직도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책은 무엇일까? 그리곤 답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정확한 번역은 <옥중수고 선집>)이다. 물론 레닌의 <국가와 혁명>도 공산주의 혁명과 많은 공산주의 국가의 이념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레닌의 경우 1980년대 말 소련·동구의 몰락 후 그 영향력이 급속히 약해졌다. 하지만 그람시는 그렇지 않다. 특히 주목할 것은 그 영향력이 결코 좌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시민사회 개념이나, 헤게모니·포드주의 같은 주류이론에서 많이 쓰는 개념을 빚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점에서 현대 마르크스주의 저서 중 '최고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손호철 (「'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 ⑦ 옥중수고」, <중앙선데이>, 제49호, 2008.2.16.)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한 그람시는 토리노의 노동자들을 이끌며 당내 좌파 세력을 결집시켰다. 대학 중퇴 후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 토리노 지국에 입사했는데 당시 토리노 지국장은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1921년 톨리아티와 함께 이탈리아 공산당(Italian Communist Party : PCl))을 창당한 그람시는 활발하게 반파시스트 운동을 벌였다. 그람시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한 이유는 사회당이 투쟁정신을 잃어버린 채 적당히 자본가, 지배계급과 타협하는 어용정당이 되어간다는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무솔리니와 1934년 이탈리아 '국가파시스트당' 본부 사진. 건물 벽면을 장식한 SI는 이탈리아어로 YES 즉 투표할 때 YES로 투표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국가파시스트당(PNF: Partito Nazionale Fascista, 1921~1943 이탈리아 왕국의 집권당)을 창당한 무솔리니는 국가파시스트당 외의 모든 당의 정당 활동을 금지시키고 1926년 빠르게 세를 확대하던 공산당 리더인 그람시 등 주요 활동가 대부분을 투옥시켜버렸다. "우리는 이 자가 20년 동안 두뇌를 쓰지 못하게 해야 된다"라는 수석 검사의 말과 함께 그람시는 20년 4개월 5일 형을 선고받았다. 로맹 롤랑을 비롯한 유럽 지식인들은 '그람시가 무솔리니의 감옥에 갇혔다'고 비판하며, 그람시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람시는 옥중에서 오히려 두뇌를 더 활발하게 쓰면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벌였다. 대표작인 <옥중수고> 초고는 대학노트 32권에, 2848페이지에 달했다. 20년 4개월 5일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그람시는 1937년 건강 악화 속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 다음날 오후 비바람이 몰아치는 시간에 장의행렬은 떠났다. 뒤따르는 것은 차 한 대뿐, 처형 타티아나 슈히트와 동생 카를로가 탔다. 그람시가 숨을 거두기 불과 며칠 전 무솔리니는 그의 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확실시된 뒤에야 그람시의 석방을 발표했다. 무솔리니는 그람시의 사망이 완전히 확인되고서도 며칠 뒤에야 그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무엇이 그토록 못마땅했던, 아니 두려웠던 것일까?
▲이탈리아 남단 투리(Turi)의 감옥에서 <옥중수고>를 쓴 그람시를 기념하기 위해 감옥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그람시 얼굴에 써놓은 혐오낙서가 2019년 당시 이탈리아 경제위기, 아프리카 난민의 대량 유입 등으로 부상한 우익포퓰리즘의 세 확장을 증언해주고 있다. Ⓒ손호철
2차 세계대전 동안 이탈리아 공산당은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무솔리니의 패퇴에 기여했다. 그 뒤 이탈리아 공산당은 다른 반파시스트 정당과 함께 전후 내각에 참여했다. 1980년대 말부터 소련과 동유럽의 현존 사회주의 국가체제가 붕괴되고 결국 이탈리아 공산당은 다른 좌파들을 재편하면서 이름을 '좌파민주당'(Partito Democratico della Sinistra, PDS)으로 변경하면서 1991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내 좌파 세력들은 1991년 '공산재건당'을 창당했다. 20세기 말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해체되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미미해졌다. 이는 단지 혁명의 실패였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혁명에 의해 무너진다는 마르크스의 통찰이 부정당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왜 혁명이 실패했을까?'라는 질문과 더불어 '왜 자본주의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강하게 제기된 것이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그람시에게 이 질문은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람시가 가진 문제의식의 핵심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구 사회는 낙후한 러시아와 다르며, 러시아 혁명 같은 무장봉기(기동전)와는 다른 혁명 전략(진지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람시가 주목한 것은 '헤게모니', '시민사회'였다. 즉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대해 단지 물리적인 강압만을 구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오히려 지배계급은 자신의 지배체계와 원리에 대해 피지배계급의 '동의'를 얻어내 이들의 불만을 잠재운다는 것이었다. 즉 헤게모니 하에서 지배계급의 지배를 강화하는 요소들은 상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에 피지배계급은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를 지지하게 된다. 따라서 피지배계급의 불만이 체제 자체를 향하지 못하고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람시의 입장은 자연스레 '대항 헤게모니'를 조직할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문화적 요소인 '헤게모니'에 의해 지배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데, 의식의 변화로 대항 헤게모니를 만든다면 지배체제가 더는 상식으로 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이런 '의식의 변화'를 전쟁에서의 '진지전'에 비교한다. 이전의 혁명 개념이 전쟁에서의 갑작스런 '기동전'과 같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갈아엎는 것이었다면, 의식의 변화를 통한 혁명의 유도는 진지를 확보하듯 천천히 이뤄질 것이었다(박치현 기자, 「상식을 가장한 지배계급의 책략을 폭로하다: [연재]고전이 말하는 평등 ④<옥중수고>-안토니오 그람시」, 대학신문, 2014.11.16.).

러시아와 서구의 차이를 주목한 그람시와 그의 진지전에 대해 손호철은 이렇게 요약했다.

"러시아는 국가가 과대 성장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던 반면 시민사회는 미성숙하고 약했다. 따라서 국가의 물리력을 기동전으로 무력화하자 그 체제는 무너졌다. 그러나 서구는 시민사회가 발달해 국가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 때문에 국가의 물리력을 무장투쟁으로 무력화하더라도 학교·교회·보수단체 등 시민사회에 산재한 자본주의의 참호들이 버티고 있어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사회 속에 다양한 진보적 조직(진지)들을 만들어 교육과 문화·선전 등을 통해 대항 헤게모니를 확대해 나가는 장기간의 진지전을 펴 나가야 한다." 손호철 (「'좋은 책 선정위원회'가 고른 新고전 ⑦ 옥중수고」, <중앙선데이>, 제49호, 2008.2.16.)

한편 주세페 피오리의 <그람시: 한 혁명가의 생애와 사상>(두레, 1991)을 번역해 한국에 소개한 신지평은 「역자 후기」를 통해 그람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그런 다방면의 활동을 일관해서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인간 속에 흐르고 있는 것은 꺼지지 않는 반역의 불길 속에 줄기차게 불태워 온 혁명가의 혼이었던 것이다. 그 영혼의 편력을 외면하고서는 혁명사상가, 이론가로서의 그의 위치를 역사 속에 정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그의 사업이 마르크스주의 운동사와 이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그의 생활이 마치 성자전과 같은 혁명가열전, 순교자열전의 짤막한 한 편을 형성하는 데 그치고 말 것이다."
"혁명가도 또한 사람의 자식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리고 이 말은 왕왕 혁명가로 자칭하거나 타칭되는 사람이 그 신조에 걸맞지 않은 약점이나 모순을 드러내는 데 조소하는 듯이 느껴진다. 그람시 또한 약점과 모순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 ) 그는 신체장애인인 동시에 차별받는 남부인이라는 이중의 짐을 어린 시절부터 견뎌야 했으며 러시아혁명과 파시즘이라는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가끔은 방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교조 아래서도 안주할 수 없었던 그의 영혼의 행로는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좌우로부터의 가혹한 조리틀림 속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톨리아티가 이 비극적 시대를 살아내고 그람시가 파시스트의 옥중에서 죽어야 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가장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가장 혁명적일 수 있었다는 것이 그람시라는 인물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당으로부터도, 아내로부터도 버림받고 가혹한 옥살이의 조건을 견뎌야 했던 10여 년간에 그가 집념 하나로 써 모았던 3000페이지의 노트는 너무나 허약한 육체와 지나치게 신경이 과민했던 이 혁명가의, 자신과 세계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의지력의 처절함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지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 그람시와 '진보적 낙관주의자' 노회찬 :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가르침을, 극한까지 실천해야 하는 삶이었을 것"

▲지성의 비관, 의지의 낙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 1980년대 말, 90년대 초 소련과 동유럽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전후해 이른바 '운동권'에서 꽤 유행했던 말이었다.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맞서 감옥에서 싸운 그람시는 동생 카를로에게 보낸 편지에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적었다.
"나 자신의 마음 상태는 이 두 가지 감정을 모두 종합하고 그것들을 넘어서고 있지. 나의 지성은 비관주의적이지만 나의 의지는 낙관주의적이란다. 어떤 상황이건 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는데 내가 비축해놓은 의지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단다. 나는 절대로 환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는 일도 없어. 나는 언제나 끝없는 인내심으로 무장되어 있단다. 그건 수동적이고 활력없는 인내심이 아니라 끈기있는 노력과 결합된 참을성이야." 1929년 12월 19일 투리에서 너의 안토니오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Pessimisme de l'intelligence, mais optimisme de la volonté)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쓴 사람은 그람시 석방운동에 앞장선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이라고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롤랑은 '안토니오 그람시: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내면서 이 말을 썼다. 그람시가 좌우명으로 삼았던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는 1933년 5월 29일 글에서도 되풀이돼 등장한다. 1933년을 경과하면서 결핵, 동맥경화, 척추가리에즈 등 여러 병마로 인한 육체의 고통은 그를 옥죄기 시작했다.

"최근까지 나는 말하자면 지성에 있어서의 비관주의자, 의지에 있어서의 낙관주의자였다. 즉, 내가 놓여 있는 상태(일반적인 의미, 구체적으로는 내 범적 입장에 대해서도, 직접적 건강상태에 대해서도)를 개선하는 데 지극히 불리한 조건들 모두를 명철하게 투시하면서도 이성적으로 노력하고 인내와 예지를 갖추어 드물게 있는 유리한 요소를 빠짐없이 조직하고 수많은 불리한 요소의 독을 빼도록 노력함으로써 어느 정도 나은 성과를 얻고 적어도 육체를 연명시켜 차츰 쇠잔해가는 생명력의 치명적인 소모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지금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어떤 구체적인 탈출구도 발견할 수 없고 발휘할 수 있는 힘도 믿을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주세페 피오리, <그람시: 한 혁명가의 생애와 사상>, 두레, 1991, 364쪽)

▲ '노회찬체'로 쓴 "나는 진보의 미래를 낙관한다". 정의당 의정부시위원회가 노회찬 서거 3주기(2021.7.23.)를 앞두고 만든 온라인 홍보물
노회찬의 지인들은 그를 '진보적 낙관주의자'였다고 말한다. 노회찬도 트위터에 스스로가 '역사적 낙관주의'의 바탕 위에 서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순간순간을 보면 역사가 후퇴할 때도 물론 있지요. 그러나 지그재그로 발전하는 것이 역사라고 알고 있습니다. 역사적 낙관주의! 저는 늘 이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그래야 어려운 조건도 이겨낼 수 있으니까요. 물방울이 끝내 바위를 뚫는 자연의 섭리를 되새깁니다. 힘냅시다.^^" (2009.12.14. 노회찬 트위터 글) 2008년 민주노동당 탈당에 즈음하여 노회찬은 <CBS 노컷뉴스>와의 인터뷰(2008.2.21.)에서 '총선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기대하고 계신가?'는 물음에, 새로 창당할 진보정당을 '마라톤 선수'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저희들은 100m 단거리 선수가 아니고 마라톤 선수다. 총선은 마라톤 선수에게 한 100m 지점에 있는 과정인데 겸허한 마음으로 심판을 받겠다. 지금 저희들이 민주노동당을 환골탈태 시키려 했던 그 노력에 대해서 그리고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나서는 방향설정에 관해서 국민들에게 저희들은 마음을 비우고 평가를 받을 생각이고 그 평가를 소중하게 이후에 당을 만들어 나가는데 자양분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기 때문에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는다. 또 그 결과에 따라서 이후의 진로가 크게 영향받지는 않을 것이다. 100m 정도 달렸는데 마라톤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나?"
"진보가 진보답지 않으면 보수를 이길 수 없다"는 노회찬은 진보의 미래에 대한 낙관의 배경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는 이 사회가 점점 더 진보를 필요로 하는 사회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의 우월성뿐만이 아니라 계속 스스로를 감시하고 파괴하고 부정하면서 스스로를 혁신하는 진보의 속성 때문이다. 진보는 때로 길을 잃어 방황하고 우를 범하거나 실책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고유의 특성을 내재하고 있다. 때문에 진보의 미래를 낙관한다." (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289쪽)

2018년 7월 노회찬이 떠나고 한 달쯤 뒤 필명 '트윈스키드'는 "좋아했던 정치인과 이별하는 저 나름의 방법으로, 그의 삶을 정리해보고 싶었다"면서,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그람시의 경구를 인용하면서 노회찬의 삶을 이렇게 조망한다.
"국회의원 당선 이전 노회찬의 삶은 '진보정당 건설'의 목표로 요약됩니다. 나노급으로 존재감이 미미하지만, 어쨌든 한국정치에서 이제 진보정당은 엄연한 상수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변수도 아닌 아예 상상조차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즉 진보정당이란 '누구나 그런 게 있다고 알긴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는 닿을 수 없는 판타지'였던 겁니다. 군부독재, 불완전한 민주화, 3김 정치, 지역주의 등으로 점철된 1980~90년대에 진보정당의 성공은 낙숫물로 바위를 뚫는 일과 같았습니다.

노회찬은 그 목표를 필생의 업으로 삼은 운동가였습니다. 흔히 노회찬을 '노동운동가에서 진보정당의 스타정치인이 된 사람'으로 설명하지만, 여기에는 결코 순탄치 않았던 절망과 재도전의 무한 루프가 숨어있습니다. 아마 그람시의 '이성으로 비관해도 의지로 낙관하라'는 가르침을, 극한까지 실천해야 하는 삶이었을 겁니다." (MLBPARK, 「진보정치 운동가 노회찬의 삶」, 2018.8.29.)

'위기'의 진보에 대하여 :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만약 지배계급이 합의를 상실하여, 즉 더 이상 '지도'하지 못하고 오로지 억압만을 행사함으로써 '지배'한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위대한 대중들이 그들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분리되고 과거에 믿었던 것들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 기간이야말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는 때다."-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중에서
▲진보정치연구소 주관 '위기의 민주노동당, 무엇을 할 것인가?' 토론회(2005.11.10.)
2005년 11월 10일 오후 국회 헌정기념관.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가 주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울산북구를 포함한 10.26 재선거 참패, 지도부 총사퇴 등으로 뒤숭숭한 민주노동당이 비상대책위를 구성해 가까스로 몸을 추스른 뒤 첫 삽을 뜬 토론회의 주제는 '위기의 민주노동당,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토론회에서 제기된 당 내외 인사들의 날선 비판에는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뛰어넘는 전체 진보 진영에 대한 위기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발제를 맡은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민주노동당 지지율 변화 추이 분석을 통해 위기의 정체를 짚었다. 그는 "민주노동당이 스스로 노동계와는 다른 정당 조직이라거나, 열린우리당이나 노무현 대통령과는 완전 다른 노선이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심각한 맹점"이라고 주장하면서, 지지도 하락 이유를 노동계라는 외부 요인에서 찾았다. 홍형식은 "민주노동당은 2004년 8월, 2005년 2월, 2005년 11월, 이렇게 3차례의 지지도 추락을 겪었다"면서 "이 시기는 LG칼텍스 파업 및 귀족노동자 논쟁, 민주노총 폭력사태 및 기아자동차 채용비리, 강승규 전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비리혐의사건 및 민주노총 지도부 사퇴 등 노동계의 문제가 터졌을 때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홍형식은 "민주성은 독선과 독단으로, 반부패·도덕성은 부패로,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는 비정규직·하청노동자 착취로, 서민 대변은 노동귀족 대변으로 인식되고 있다"면서 "(민주노동당의 지지율 하락은) 새로운 신생정당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수준이 아니라 일종의 배신감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정용상 기자,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는 코미디가 됐다": 진보정치연구소 토론회, 당 위기진단 열띤 토론」, <매일노동뉴스>, 2005.11.11.).

이에 대해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가 사고치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만 해야 되냐"며 "과도하게 외적인 요인을 강조한 것 같다"고 반박했다. 노회찬은 "현 노무현 정부 들어서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이 대대적인 '귀족노동자 이데올로기 공세'가 있었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이 설득력 있게 저항하지 못했던 것은 문제였지만 그것에서 당의 위기가 온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면서 "노동계 비리 문제가 아니었다고 해도, 지지율 추락은 지속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내부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어 "이번 울산북구 재선거 패배를 보면서 오히려 고맙다는 역설적인 생각을 했다"며 "선거에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당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위기를 현실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위기는 지지율 하락 때문이 아니라 진보정당으로서 질적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대근 경향신문 국제부장도 "선거에 졌기 때문에 위기가 아니라 재선거 패배 이후에야 위기라고 인식했다는 현 상황이 더 위기"라고 꼬집었다. 불과 1년 반 만에 폭락한 지지율, 그 이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위기들에 대한 분석은 분석하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식 정치행위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위기는 열린우리당과의 차별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위기를 불러왔다"면서 "신보수와 구보수의 이데올로기 구조에 열린우리당은 개혁좌파로, 민주노동당은 수구좌파로 비쳐졌다"고 말했다. 이대근은 "민주노동당이 자기 장점을 다 놓치고, 정쟁하는 작은 정당이 돼 버렸다"면서 "장기적인 사업보다 뉴스 타보려는 욕심에 빠졌고 그 사이에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는 코미디가 됐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의 독도 파병 주장을 거론하며 이대근은 "어느 좌파정당이 민족적 감정이 대립하는 문제에 당의 주요 슬로건을 내세우냐. 그건 극우 파시스트 정당이나 하는 것"이며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민주노동당 스스로 내세운 노선이나 색깔을 잃어버렸다"고 꼬집었다 손호철은 "급진성 때문에 민주노동당 지지율 하락이 온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진보정당의 지지세력들은 양극화로 삶 자체가 벼랑 끝에 내몰려 있다. 위기는 지지율 하락 때문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당으로서 정체성, 질적·정책적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손호철은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와 부동산 파동 등 민주노동당에게 '유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의 활동은 보이지 않았다"면서 "관념적 급진성에 묻혀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2004년 17대 총선 이후 1년 반의 기간 동안 민주노동당의 활동에 대해 노회찬은 이런 평가를 내렸다.
"선택과 집중보다 절충과 타협이 지배했던 기간이었다. 내부적 정치적 갈등의 봉합, 정파갈등의 문제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모든 주제를 두고 싸우다 보니, 시작만 했지 실제 해낸 것은 없다. 게릴라전을 해야 할 상황에서 진지전을 했고, 진지와 전선은 너무 떨어져 있었다. 서민들의 마음을 되찾는 일에 당이 실패한다면 어떤 다른 개혁도 당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대안과 새로운 유형을 제시하는 의정활동의 추진하며 대중과 결합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노회찬의 「새로운 정파질서를 위하여」(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149호, 2003.9.29.) 갈무리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와 관련해 참석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온 말은 당의 소통과 의사결정을 지배하고 있는 정파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것이었다.이대근은 "과거 노선투쟁의 유산으로 파벌을 구성해서 미래의 민주노동당을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한 만큼 해체해야 한다"면서 정파 문제를 꼬집었다. 또한 "지도력이 너무 집중돼서 문제인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문제"라면서, 당직공직 겸직금지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노회찬은 "비대위 활동기간이 2개월이 안 된다"면서 "한건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는 투기적 발상을 버리고, 현재의 위기의 원인에 대한 공감대를 확대하는 것이 비대위의 주요 사업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비대위는 '해결사'가 아니라, '공감대'를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진보정치연구소 부소장이었던 조현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교수도 몇 달 뒤 2006년 5.31 지방선거 결과를 노회찬의 평가와 비슷한 맥락에서 진단한 뒤, '21세기형 혁명가'로 거듭날 대안으로 살아 숨쉬는 이념의 발전과 좋은 정치리더십의 창출 등 두 가지를 던졌다.
"원내 진출 이후 민주노동당은 모든 걸 다 잘해야 한다는 '슈퍼맨 콤플렉스'의 덫에 걸려 선택과 집중에 실패했다. 또 이번 선거에서 근거 부재의 과도한 목표 설정은 접어두더라도 기성의 언어를 흉내낸 진보개혁 세력 대표주자 교체론과, 광신적 반공주의와 한 짝인 맹목적 애국주의의 동영상 홍보는 방향을 잃은 선거 전략과 기획의 부재를 상징한다. 그것은 상생하는 보수와의 차별화를 통한 영향력 확장 가능성을 스스로 닫은 것이자,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진보정당다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풀어야할 숙제 가운데) 하나는 진보진영의 오랜 고질병이자 과거 운동의 잘못된 유산인 20세기형 낡은 정파구도의 전복을 통해 진보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지지의 사회적 기반을 확장하는 일이다. 정파 사이 파멸적 대결구도는 전체 진보진영을 수직적으로 분획시킨 내부 갈등의 핵심이자 대중적 신뢰의 확장을 가로막고 있는 질곡의 근원이다. 어떤 사상이나 노선이 생명력 있는 대안의 무기가 될 여지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을 통해 각 시대가 제기하는 문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느냐, 대중들의 삶에 깊고 넓게 밀착하여 집합적 열정과 호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참여를 독려해낼 수 있느냐 하는 능력에 달렸다. 이런 점에서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정파들의 자기 성찰적 혁신이나 발전적 해소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진보가 풀어야 할 다른 하나의 숙제는 '확신성의 딜레마'다. 과거의 시간과 경험을 기초로 현실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수와는 달리, 잘못된 현실을 바꾸려는 진보의 눈은 필연적으로 미래에 두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있어야 할 유토피아'로서 새로운 미래를 '지금/여기서' 구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진보 쪽에 미래란 불확정적일 수밖에 없다. 불확실한 내일을 말하면서, 오랫동안 체화되어 온 일상의 환상과 거짓에서 벗어나기 위한 집합행동을 이끌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딜레마를 해결해야 하는 기제로서 살아 숨쉬는 이념의 발전은 필수적이며, 좋은 정치 리더십의 창출은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지름길이다." (「'21세기형 혁명가'로 거듭나야」, <한겨레>, 2006.6.8.)

▲MBC <100분토론>("한국사회 진단과 미래 논쟁": 제2편 '진보가 보는, 한국 진보의 미래'", 2009.5.7.) 화면 갈무리
2009년 5월 7일 MBC <100분토론>("한국사회 진단과 미래 논쟁": 제2편 '진보가 보는, 한국 진보의 미래'")에 노회찬(진보신당 대표)은 패널로 참석했다. 시놉시스는 이렇게 소개했다.
"대선과 총선에서의 잇따른 패배와 내부 분열로 인해 절박한 위기상황에 놓여 있는 진보진영.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처럼 '낡은 것은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대안 부재의 상황에서 과연 진보 진영은 어떤 모색과 노력을 경주할 것인가? 촛불 집회 1년을 맞아 진보진영 내의 열띤 논의가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한국 진보 진영의 과제와 미래를 진지하게 성찰해 본다."
<100분토론>의 패널은 노회찬 외에, 최재천 전 민주당 국회의원,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 연구원장, 홍종학 경원대 경제학과 교수 등이었다. "<100분토론>에서 단연 돋보인 활약을 한 사람은 노회찬이었다"면서 블로거 하민혁은 노회찬의 발언을 이렇게 스케치했다.
"'①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너무 안주하여 새로운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다, ②친북-반북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③촛불집회에 개입된 유일한 조직은 경찰 조직이었다, ④성장-분배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⑤대안이 없는 게 아니고 대안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못한 게 더 문제다' 등의 발언은 진보 위기의 본질과 현실을 정확히 짚은 데서만 나올 수 있는 발언이었다. 서두에서 밝힌 경제민주화의 실패, 민주노총 식 노동운동의 한계, 시민없는 시민운동의 문제 등도 마찬가지다.

현재 진보가 처해 있는 위기를 물과 분리된 물고기의 상황에 비유하며 '작은 웅덩이에서 흙탕물이나 튕기고 있는 물고기에 머물지 말고 더 큰 물을 찾아가는 물고기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마지막 멘트 또한 명확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발언이었다. 토론 내내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견지하면서도 생각을 달리 하는 상대에 대한 배려 또한 잊지 않는 유연함을 보여주었다." (좌충우돌, 「100분토론, 진보가 보는 한국 진보의 미래」, <하민혁의 민주통신>, 2009.5.8.) 

한편 시간이 흘러 많은 우여곡절 끝에 2008년 2월을 거치면서 민주노동당은 분당됐다. 앞서 진단하고 평가한 '위기'를 당 차원에서 극복하지 못한 결과였다. '심상정 비대위 혁신안'이 당대회에서 부결되고, 이틀 뒤 2월 5일 국회 기자회견을 통해 노회찬은 "진보정치의 새로운 길을 떠나고자 한다"며 "2월 3일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노동자, 서민은 없었다. 노동자 서민의 상식에 입각해 당을 운영하라는 소박한 요구는 '동지에 대한 의리' 보다 우선할 수 없다며 묵살됐다. 조직보존 논리에 갇혀 병폐를 묵인해온 과거와 결별하겠다"며 민주노동당 탈당을 선언했다. 민주노동당 분당과 관련해 노회찬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에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분당을 반대했다. 당시 제기된 문제들은 당 안에서 해결해야 하고, 기본적으로 NL과 PD가 당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북한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지만 그것도 당 안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

그러나 현실은 분당을 재촉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그때 일심회 사건 관련자들 문제가 핵심이었다. 조직의 주요 당직자가 조직원들의 인적 사항을 포함한 주요 기밀을 조직 외부(북한)로 유출시켰는데 이를 내부에서 징계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분당했다기보다 그냥 밖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한다. (…) 사실 분당사태의 본질은 리더십의 문제, 정치력의 문제였다. 다양한 생각을 공존하게 하는 노력이나 능력이 서로에게 부족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는데, 그러한 노력이 총체적으로 부족했다. 앞으로 이것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노회찬 (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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