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그람시와 노회찬, 길동무 손호철을 통해 이어지다 : "그 뒤에 숨겨진 고독과 고뇌라는 맥락 속에서…"
2019년 7월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노회찬재단과 5당 싱크탱크가 「노회찬과 한국정치: 현실진단과 미래비전」이라는 제목으로 '고 노회찬 의원 서거 1주기 추모학술토론회'를 공동 주최했다. 인사말과 축사에 이어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정의당 부설 정의정책연구소 이사장의 기조발제와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의 발표,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여영국 정의당 국회의원,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의 토론이 이어졌다. 손호철은 검정색 양복 재킷 안에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름이 새겨진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왔다. 손호철은 자신의 저서 <물속에 쓴 이름들 : 마키아벨리에서 그람시까지, 손호철의 이탈리아 사상기행>(이매진, 2020)에서 그람시에 대해 파시즘이라는 반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다간 '시대의 반항아'이자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꿨고, 불멸의 대작을 남긴 거인'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런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고 기조발제를 한 데는 뭔가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손호철은 노회찬을 "조봉암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진보정치인"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촌철살인과 불판교체론 등을 소개했다. 이어 "(민주노동당의 노회찬이 국회에 입성한)2004년 4월 15일은 5·16 쿠데타에 의해 사라졌던 한국의 원내 진보정당이 43년 만에 부활한 날"이라며 "비례대표 마지막 한 석, 299명의 국회의원 중 299번째 의원을 놓고 벌어진 혈투에서 결국 민주노동당이 앞서면서 김종필을 꺾고 노회찬 의원이 금배지를 달게 됐다.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한국정치의 강시'의 숨통을 끊은 사람이 바로 노회찬 의원"이라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노회찬을 정치권의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라고 평가했다. 한국정치의 주류세력인 보수독재 세력과 비주류인 자유주의세력, 그리고 '비주류의 비주류인' 진보세력 중에서도 계급 문제를 강조한 좌파는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였다는 것이다(유하라 기자, 「싸우던 여야, 한자리 모여 "'노회찬 정신' 이어가자": 손호철 "정치인의 진정한 추모는 한계까지도 드러내어 계승하는 것"」, <레디앙>, 2019.7.16.).
※ 손호철의 <물속에 쓴 이름들: 마키아벨리에서 그람시까지, 손호철의 이탈리아 사상기행>(이매진, 2020) 곳곳에는 저자의 고민이 짙게 묻어있다.
"지난날 좌파들은 국민이 '피아트의 이익이 이탈리아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은 보수 언론과 교육 등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허위의식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람시는 그런 현실이 단순한 허위의식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이 '피아트의 발전이 이탈리아의 발전'이라고 믿는 데에는, 우리 식으로 말해 '삼성의 발전이 대한민국의 발전'이라고 믿는 데에는, 그럴 만한 '객관적' 이유와 '물적 기반'이 있다는 독창적인 발상이었다. 삼성이 잘돼야 노동자들이 살아가고, 협력 업체, 동네 식당, 술집 등 여러 이해관계자들도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망하면 일자리를 잃고 생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삼성 노동자들은 물론 관련 업체 노동자들에게는 삼성이 망하지 않는 상황이 '자기의 이익'이 되는 셈이다."
1주기 추모학술토론회를 마치고 십 여일이 지난 뒤 손호철은 「노회찬이 그립다」는 글을 한 언론사에 기고했다.
"진보정당의 불모지에서 이만큼이라도 진보정당이 자리잡게 된 데에 가장 기여한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하지만 한 정치인에 대한 진정한 추모는 '우상화'가 아니라 한계까지도 드러냄으로써 계승해야 하는 그의 정신을 실현하고 그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알리고 역사에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민주노동당 탈당과 진보신당 창당, 재탈당과 통합진보당 창당, 재분열과 정의당 창당 등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당신이 택했던 다양한 고뇌어린 정치적 선택에 대해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이는 진보정치에 있어서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절충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줄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2019.7.30.)
"노회찬을 평가함에 있어서 대중적 진보정치인이라는 측면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고독과 고뇌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평가해 달라"고 당부하던, 1주기 추모학술토론회 현장에서 손호철의 빨간색 티셔츠를 보면서 불현듯 2004년 정운영-노회찬 인터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정운영 : 어디서인가 빨강이든 파랑이든 색깔을 진하게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노 의원 본인의 색깔은 어떻게 되는 것 같으세요?
노회찬 : 저는 빨간색 아닙니까?
정운영 : 빨간색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습니까?
노회찬 : 글쎄요. 제가 색깔에 깊지는 못한데, 우아한 빨간색이 되고 싶은데요. 허허.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 참조) '빨간색', '빨갱이'의 의미
오늘날 붉은 깃발은 흔히 공산주의, 좌파, 혁명, 노동자를 상징한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 볼셰비키와 중국 공산당 등이 붉은색을 상징으로 삼은 탓이다. 그들의 군대는 '적군'과 '홍군'으로 불렸다. 하지만 사실 빨강은 각 나라의 국기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색이다. 전 세계 80%의 국기에 빨간색이 포함돼 있다. 현대의 토템이라 할 수 있는 국기에 빨강이 이처럼 널리 사용되는 것은, 국가를 세우고 독립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는 '헌신', '용기', '저항'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 사실 빨강은 계급과 계층을 떠나 누구나 좋아하는 색이었다. 정해진 이유가 있어 좋아했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색이었기 때문에 저마다 나름의 이유를 붙였다고 해야 더 맞을 듯하다(이웅 기자, 「인류가 가장 사랑한 색 '빨강', 그 은폐된 역사: 신간 <빨강의 문화사>」, 연합뉴스, 2017.7.16.).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세상에 나온 소설가 채만식은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을 통틀어 일컫는 '빨갱이'를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1940년대의 남부 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찬,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도 XXX과 XXXX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채만식, <도야지>, 창비사, <문장> 27호, 1948.10.)
그람시의 '서발턴'과 노회찬의 '6411 투명인간들'
서발턴(subaltern)이라는 말은 원래 영어권에서 군대 내의 하급 사관 혹은 낮은 서열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서발턴이라는 용어를 사회의 하층 계급을 지칭하는 이론적, 전략적 개념으로 만든 인물은 그람시였다.
그람시가 서발턴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감옥에 있을 때 검열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왔다. 그람시가 마르크스주의를 '일원론'으로, 레닌과 트로츠키를 '일리치'와 '브론스키'로 썼듯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 대신 서발턴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서발턴이 단순히 검열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 그람시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개념임이 밝혀졌다(이정훈, 「Antonio Gramsci(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와 "서발턴" 개념」, <블로그 Hermeneutic>, 2012.11.21.).
서발턴 개념을 선호하게 만든 그람시의 고유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은 이탈리아의 특수한 상황 및 '헤게모니' 개념과 관련된 것이었다. 20세기 초의 이탈리아는 특유의 '남북문제', 즉 자본주의적 공업화와 이른바 '선진적'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성장하고 있던 북부와, 반봉건적 농업구조 및 이른바 '후진적' 농민들이 온존하고 있던 남부의 격차라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북부와 남부의 "불균등한 사회경제적 발전만이 아니라 불균등한 문화적, 정치적 발전의 문제들"을 재사유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그람시의 서발턴 집단들이란 고대 최하층민에서 프랑스 대혁명기의 부르주아까지 포괄하는 통시적인 이름으로 다양한 종속 집단 전체를 포괄하는, 즉 고대 이래 한 사회에서 헤게모니 집단을 제외한 나머지 종속 집단을 가리키는 통시적이고 포괄적인 용어였다. 그람시는 사회경제적으로는 종속되어 있을지라도 정치적, 문화적으로는 자율적이었던 서발턴 집단을 통해 계급 범주가 아닌, 보다 복합적인 범주의 역사 주체를 찾아냈던 것이다.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 노회찬은 진보정의당 당대표 취임사(2012.10.21.), 그리고 당대표 퇴임 고별사(2013.7.21.)에서 '6411번 버스'를 통해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투명인간들'을 불러냈다. 그리고는 진보정당의 현주소를 진단한 뒤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노회찬은 묻고 답했다. 노회찬이 호명한 '투명인간들'과 그람시의 '서발턴'은 그 문제의식과 맥락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노회찬의 떠남을 계기로 꽤 널리 알려진 '6411 연설'의 몇 대목을 소개한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 … 강물은 아래로 흘러 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 … 우리가 바라는 모든 투명인간들의 당으로 이 진보정의당을 세우는데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넣겠습니다. (…) 진보정의당의 앞길에는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철로는 놓여 있지 않습니다. 진보정의당의 앞길에는 이정표도 신작로도 없습니다.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선 우리는 더 바뀌고 더 채워야 합니다. 우리는 혁신의 주체이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혁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할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 다가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람시와 노회찬과 축구
그람시, "야외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고 품위있는 활동이 축구"
노회찬, "'노동자 3대 조직'이 '노동자 정당', '노동조합', '축구클럽'"
2010년 "한국 사회에서 '진보의 아이콘'으로 통하는"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서형욱 MBC 축구해설위원과 월드컵과 축구 관련 인터뷰하면서 하면서 잠깐 스쳐지나가듯 그람시를 불러냈다.
"그람시 같은 사람들도 '야외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활동이 축구'라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서형욱, 「노회찬 "월드컵은 우리 모두의 축제"」, <네이버 스포츠>, 2010.4.16.)
※ 참고로 그람시는 1918년 8월 27일 「축구와 스코포네」라는 글에서 (우리나라 고스톱과 거의 흡사한) 스코포네(scopone) 카드놀이와 비교하면서 축구에 대해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축구 경기를 관찰하자. 이것은 개인주의적 사회의 모형이다. 이것은 이니셔티브를 요구하지만, 이니셔티브는 법의 작동 범위 안에 마무른다. 개인들은 위계적으로 분화되는데, 그들의 과거 경력보다는 특정한 역량에 근거하여 분화된다. 움직임, 경쟁, 갈등이 있으나 그들은 불문 규칙에 의해 규율된다. 공정한 경기라는 규칙은 심판의 존재로 인해 계속 환기된다. 야외 경기장, 자유롭게 순환하는 공기, 건강한 폐, 강한 근육은 언제나 행동을 자극한다. … 스포츠를 하는 국가들은 '공정한 경기'의 개념을 정치에서도 운영한다."
노회찬을 인터뷰하기에 앞서 서형욱은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스포츠가 이른바 '3S' 정책의 부품처럼 인식된 시절이 있었다. 프로 스포츠의 활성화가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분산시키려는 독재 정권의 시도로 받아들여지던 때, 진보 진영에서는 스포츠를 즐기는 행위에 고운 시선을 보낼 수 없었다. (… )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시대는 바뀌었다. 2002년의 뜨거운 광장 문화를 통해 월드컵의 환희를 맛본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스포츠의 사회 통합 기능에 모두가 진지하게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최근 진보신당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국축구대표팀의 유니폼 색깔인 '퓨처 레드'를 당의 색깔로 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생활 속의 진보'를 추구하는 진보신당이, 과거라면 응당 기피했을 '빨간색'과 '축구'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예사로운 변화가 아니다."
서형욱 :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정치하는 분들은 스포츠에 대한 선호도를 드러내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영국 만해도 총리가 어떤 팀 팬인지, 미국 대통령도 어느 종목 어느 팀의 팬인지 얘기들이 있잖아요. 한국에서는 골수 야구팬으로 알려진 정운찬 국무총리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게 한국 사회에서 스포츠가 차지하는 위상이라고 생각해요. 별로 관심들이 없는 거죠. 정치하는 사람들은 취미로 프로 스포츠 현장에 가는 일도 많지 않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너무 바빠서?
노회찬 : 여전히 정치인들은 사회체육으로서의 스포츠가 아니라 엘리트 체육에만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태릉선수촌이나 올림픽 이런 데는 기를 쓰고 가려고 하는데 직접 즐기는 건 골프 외에는 별로 없죠. 이번 남아공 월드컵 때도 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평소에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거나 스포츠를 즐기는 국민들 속에 함께 들어가거나... 이런 대목에서는 문제의식이 낮지 않나 싶습니다. 단지 바빠서 그렇다고 보지는 않아요. 외국 나가서도 보면 골프를 치면 쳤지, 그 지역 축구 경기를 보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한국에서 축구장에 갈 때도 좋은 자리에 앉지 말고, 맥주캔 하나 들고 관중석에서 다 같이 어울려 함께 응원하는 걸 많이 경험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서형욱 : '노회찬'하면 서민 이미지입니다. 축구도 그렇죠. 그런데 요즘 축구는 자본에 잠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원래 노동자들이 만든 클럽들도 미국의 투기자본에게 넘어가는 일이 많아지고 있죠. 그 과정에서 수익을 얻기 위해 입장료를 끌어올리다보니 서민 계층에게 축구장 문턱이 더 높아지고 있어요. 팬들의 즐거움보다 업주들의 수익을 높이는 데에 집중하게 되는 거죠.
노회찬 : 저도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입니다. 축구의 기원을 따지면, 현대 축구가 영국 상류사회에서 시작이 되기는 했지만 대중화된 것은 노동조합들의 클럽 축구가 활성화되면서부터였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FC바르셀로나, AC밀란 같은 클럽들도 주요 공업도시들을 기반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런 곳에서 노동 운동이 활성화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죠. 당시에는 이른바 '노동자 3대 조직'이 '노동자 정당', '노동조합', '축구클럽' 이렇게 셋이었지요.
당시 이론가들, 이를테면 그람시 같은 사람들도 '야외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활동이 축구'라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체 게바라도 골키퍼를 했었구요. 축구 대중화에서 노동자의 역할이 컸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거죠. 그런데 대중화된 축구가 돈벌이가 된다 싶으니까 대기업이나 재벌들이 끼어들고 점점 큰 손들에 의해 좌우되기 시작하고 있어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제적으로 막을 수야 없겠지만, 영리 추구를 최선의 목적으로 삼는 재벌이 축구를 장악하게 된다면 축구의 건실한 발전에 장애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맨체스터 지역 팬들이 글레이저 가문의 맨유에 대항해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를 만든 것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런 사회 축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어릴 때 비록 아마추어지만 흙먼지 풀풀 날리는 곳에서 축구를 경험했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대표급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제 자리로 돌아온 뒤에 그런 축구를 즐기는 경험이 연계가 될 때 훌륭한 선수들도 더 많이 나오고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축구가 특정 기업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서형욱 : 요즘 트위터 이용자들과 교류를 많이 하시는데요, 얼마 전에 정부의 트위터 선거운동 규제와 관련해서 축구의 '어드밴티지룰'을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올 초에 발간된 <진보의 재탄생>의 여는 글을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로 맺기도 했고요. 축구가 자주 인용되는 것 같은데 따로 준비를 하시는 건가요?
노회찬 : 어떤 표현이든 따로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미리 준비하면, 그 말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집중이 안 되고 토론이 안 돼요. 축구 표현도 비슷해요. 어드밴티지 룰은 제가 평소부터 가장 감동적인 규칙, 그리고 굉장히 합리적인 규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어드밴티지 룰을 적용하지 않으면 반칙을 범한 쪽이 결과적으로 이득을 보는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죠. 트위터 관련해서도 규제가 답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표현이 나온 것이죠.
서형욱 : 끝으로, '나의 월드컵' 공식 질문을 드립니다. 노회찬에게 월드컵이란? (웃음)
노회찬 : 월드컵은 4년마다 하는 게 아니라 4년 내내 진행되는 축제라고 생각해요. 본선 대회는 4년에 한 번이지만, 그 전부터 진행되는 예선전도 재미있고, 또 4년 내내 늘 기다리게 되잖아요. 그리고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고 더 많은 경기를 하게 되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지만, 너무 우리 팀의 성적에만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모두 다 사람이잖아요.
예를 들어 왕년의 펠레 같은 사람들, 우리와는 관계가 없지만 뛰는 거 보면서 기쁘잖아요. 마라톤이나 100미터 1위하는 선수들 보면, 각 나라뿐만 아니라 '인간'을 대표해서 기록을 세우는 거잖아요. 같은 인간으로서 기쁘거든요. 인간을 대표해서 인간의 한계를 계속 깨주는... 정말 대단하죠. 그런 데에서 감동을 함께 느끼는 게 스포츠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축구도, 월드컵도 그렇게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닫는글: 인간적 고뇌와 부모님께 보낸 편지글
"그 뒤에 숨겨진 고독과 고뇌라는 맥락 속에서…." 앞서 손호철이 당부한 말이었다. 그람시와 노회찬의 '인간적' 고독과 고뇌, 그것은 어머니께, 부모님께 부친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서 어느 정도는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편지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오늘의 기록이야기 <그람시와 노회찬> 편을 마친다. 그람시가 세상을 떠난 2주 뒤인 1937년 5월 16일 부친 프란체스코 그람시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 니노(안토니오 그람시)가 1928년 5월 10일 재판 전날 밤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되풀이해서 읽고 있었다.
"어떤 판결이 내려지더라도 결코 놀라지 말도록 부탁드립니다. 저 자신이 마음 차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는 정치범으로 구류돼 있고 정치범으로 형을 선고받은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는 것을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부끄러울 까닭이 없습니다. 이 일을 잘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알아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구류도 형벌도 저 자신이 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고 감옥은 물론이고 목숨이라도 바칠 작정으로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마음 차분히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것 이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번 일로 당신에게 준 슬픔에 대해 얼마나 당신을 위로해 드리고 싶어 하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주시도록 힘껏 어머니를 껴안고 싶은 겁니다. 저는 이렇게밖에는 사는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라는 거지요. 정말 쓰라린 것입니다. 자식들이 인간으로서의 명예와 위엄을 지키자면 더러는 어머니에게 큰 슬픔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만기출소를 며칠 앞둔 1992년 3월 25일 노회찬은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부모가 자식에게 함께 살자고 요구하는 것은 人之常情이며 자식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는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모님의 염려와 희망 모두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지금 저의 처지에서 부산에 내려가 산다는 것은 제가 그동안 젊음과 정열을 바쳐가며 노력해왔던 일, 바로 저의 직업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가족과 화목하게, 오래오래 동고동락하며 생활하는 것은 그 실현 여부를 떠나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희망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바로 부산에 내려와 살자는 말씀을 들으며 다른 한편으론 큰 아픔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 아버님, 어머님! 인간이 인간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을 근절시켜 모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 - 그런 사회운동, 정치운동을 펼치는 것이 바로 저의 직업입니다. (…) 훗날 후손들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했으나 이 나라와 민중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남겨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모님의 이해와 격려는 제가 이 세상에서 뜻을 펴고 또 사회에 기여하는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저 역시 자식된 도리를 다하면서 또 저의 직분을 다하는데 진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猛將 아래 弱卒 없듯이 강한 부모 밑에 약한 자식 없을 것입니다. 보다 강하게 이 험한 세파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타의에 의해 강제된 징역생활이었지만 인생에 유익한 시간으로 활용함으로써 결국 승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지원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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