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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에서 영국 노동당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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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에서 영국 노동당을 봤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⑰]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 키어 하디 上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시리즈 바로가기)

part 2 

⑯ 들어가는 글 (☞바로가기)

주대환-이재영의 지상 논쟁: 영국 노동당과 민주노동당, 키어 하디와 노회찬 : "하디는 노회찬처럼 하지 않았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시절 당원들과 함께. 앞줄 왼쪽끝 파란색 웃옷을 입고 등지고 앉은 이가 '진보정당의 영원한 정책실장' 이재영 ⓒ노회찬재단
인민노련,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시절부터 민주노동당 등 합법 진보정당에 이르기까지 노회찬의 '꽤 오랜 동지'였던 이재영과 주대환. 2008년 두 사람이 <레디앙>을 통해 지상 논쟁을 벌였다. 아니, 논쟁이라기보다는 주대환의 <레디앙> 기고글에 대한 이재영의 비판과 반박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 이 과정에서 보통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인 영국사람 키어 하디와 함께 노회찬이 등장한다. 주대환은 인터넷 진보언론매체인 <레디앙>에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2008.9.2.)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어 "영국노동당을 만든 케어 하디는 노회찬처럼 하지 않았다"는 「주대환, 구좌파와 전쟁 각오, 동지들에 미안, '대한민국 좌파'하자, 야권재편 필연」라는 인터뷰 기사(2008.9.15.)가 <레디앙>에 게재됐다. 인터뷰의 내용을 추려보면 이랬다.
"이번에 내가 한 것은 민주화 과도기 20년 동안 대립해온 두 입장, 비판적 지지파와 독자후보(정당)파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 것이며, 노동조합을 근거로 '노동당'을 만들어서 '자유당'을 넘어서겠다는 전략의 폐기다. (…) 2000년의 '노동당' 꿈은 이미 깨어졌다.  (…) 나는 이제 남은 인생을, 곧 사라질 그 무엇이 아니라 영국의 페이비안 협회처럼 100년을 갈 그 무엇인가를 만드는 데 바치고 싶다. '사회민주주의연대'는 정당들의 흥망과 이합집산을 초월하여 100년을 갈 것이다.

노회찬은 정말 훌륭한 동지이고, 유능한 대중 정치인이고 스타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선수에게도 코치가 필요하다. 그라운드 바깥에서 보는 풍경은 좀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영국노동당을 만든 케어 하디는 노회찬처럼 하지 않았다. 더 많이 인내하고 양보했다. 누구에게? 무엇을? 노동조합 간부들의 부족함과 근시안과 보수성을 인내하고, 그들의 별로 맞지 않는 의견과 권력욕에 양보했다. (…) 짧은 인생, 정직하게 살자고 말하고 싶다." (「(인터뷰) 주대환, 구좌파와 전쟁 각오, 동지들에 미안, '대한민국 좌파'하자, 야권재편 필연」, <레디앙>, 2008.9.15.)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서 당선한 노회찬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민노련 멤버들이 주축을 이룬 한사노(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준비위)와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 동지들과 함께. 노회찬 왼쪽에 있는 이가 주대환. 암투병 중이던 이재영은 함께 자리하지 못했다. ⓒ노회찬재단
이재영은 칼럼을 통해 주대환의 논지를 반박했다. 먼저,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 좌파의 진로」에 대한 비판이다.
"주대환의 논지는, 'NL파와 PD파,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구좌파인데, 대한민국은 꽤 훌륭하게 발전한 나라이므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같은 구좌파는 현실에서 성공할 수 없다. 페이비언이며 뉴레프트인 자신은 영국노동당을 따라 사민주의를 실현하려 한다. 하지만 분당 사태로 진보정당이 후퇴했으므로 사민주의자들은 구여권과 연합해야 한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NL과 PD가 '구좌파'적이라는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하지만, 진보신당 계열의 사람들에게 그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폭력혁명'에 대한 양심고백은 김세균 교수나 오세철 교수, '노동자의 힘'이나 사회주의노동자연합에게 들어야 하는 것이지 자신과 함께 20년 가까이 신노선을 밟아온 노회찬 같은 이들에게 물을 일이 아니다.
(…)
주대환은, 한국 진보정당의 살 길이 영국노동당처럼 되는 데 있는데, 영국노동당스럽지 못해 민주노동당이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민주노동당은 너무 빨리 영국노동당처럼 돼서 실패했다. 영국에서 당권의 압도적 다수를 장악한 노조 지도부가 대의원을 지명하고 블록투표를 지시했던 것처럼, 민주노총의 국민파와 중앙파는 노동 할당을 '묻지마 투표'에 동원했다. 미국, 일본처럼 전투적 노조운동과 반정치주의에 경도돼있던 한국 노조운동은 1997년을 전후한 시기부터는 영국처럼 조합주의적 이익의 당 관철에 나섰고, 민주노동당 의결, 집행 단위에서 결정된 당론은 연맹 위원장의 '항의전화'나 의원실을 방문한 노조 '민원단'에 의해 훼손되기 일쑤였다.

민주노동당에게, 상가임대차보호법과 이자제한법에 대한 반대 압력을 가한 것은 임대업주나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라, 주택담보 확보가 어려워지지 않을까 우려한 은행 노조와 이자수익 감소를 걱정한 제2금융권 노조였다."  (「주대환의 대부분은 옳지 않다」, <레디앙>, 2008.9.24.)

이어 「(인터뷰) 주대환, 구좌파와 전쟁 각오, 동지들에 미안, '대한민국 좌파'하자, 야권재편 필연」에 대해서는 이렇게 비판했다.
"'노동당 노선'에 따라 노회찬이 권영길에게 양보해야 했다는 주장이 옳지 않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육체노동자가 공직의 70% 이상을 차지했던 영국노동당의 창당 정신에 따라 파리 특파원이 용접공에게 양보해야 했다. 그런 신분주의대로라면 광부인 키어 하디가 영국노동당의 당수였던 것처럼 금속 노동자 문성현이 민주노동당 대표직에 무혈 입성하도록 논술강사 주대환은 경선 불출마했어야 했다. 

노회찬더러는 '노동조합 간부들의 권력욕에 양보'하라면서, '100년 전 영국의 노동조합의 간부들보다 훨씬 훌륭한 민주노총 간부'인 문성현에게 주대환이 양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주대환의 대부분은 옳지 않다」, <레디앙>, 2008.9.24.)

영국 노동당, 키어 하디는 누구? : '독자정치세력화의 길'을 닦은, 영국 노동당 창당의 주역

▲독립노동당의 뿌리를 영국 노동당으로 이어간 키어 하디(1909년)
주대환-이재영의 논쟁 아닌 논쟁에서 몇 차례 등장하는 영국 노동당의 키어 하디(케어 하디)는 누구일까? 제임스 키어 하디(James Keir Hardie, 1856.8.15.~1915.9.26.)는 스코틀랜드의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지도자였으며, 이른바 '독자정치세력화' 노선을 표방한 독립노동당(ILP) 출신의 국회의원이자 영국 노동당 창당의 주역인 인물이다.
※ 2020년 4월 제러미 코빈의 뒤를 이어 영국 노동당 당수가 된, 왕실 검찰청장 출신의 키어 스타머(Keir Starmer, 1962.9.2.~). 노동당의 강성 지지자였던 그의 부모는 노동당 최초의 하원 의원인 키어 하디의 이름을 본떠 자식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856년 8월 스코틀랜드의 광산 마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유복자로 태어난 키어 하디(하디)는 몇 가지 직업을 거친 후 10살 때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던 광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하디는 사려 깊으면서도 반항적인 광부로 성장했다. 그리고 헌신적인 노조활동의 자연스럽게 광부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파업 등 투쟁의 과정에서 하디는 국가를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며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당시 영국의 정치상황을 보면 1867년 차티스트 운동의 결과로 선거법이 개정됐다. 도시에 거주하는 성인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졌다. 형식적으로는 노동자 남성도 정치참여가 보장됐지만, 의회는 유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자유당과 보수당이 지배하고 있었다. 일부 보수적인 노조의 대표가 자유당의 후원을 받으며 자유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인 출세나 명성에 집착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디는 기존 정당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노동자 대표만이 진정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정치에 빗댄다면 '비판적 지지'가 아니라 '독자정치세력화' 노선을 추구한 것이다. 하디는 영국정치사에서 노동자당의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정당인 '스코틀랜드(스캇) 노동당'(Scots Labour Pairty)을 창당했다. 1891년 총선거에서 하디는 런던에서 가장 빈곤한 노동자 밀집지역인 사우스웨스트햄의 노동자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노동자의 평상복 차림으로 노동자들에 둘러싸여 의회에 입장한 하디의 첫 의회연설은 실업 구제에 관한 것이었다. 핵심은 8시간 노동법이었다. 노동시간의 법적 규제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늘려 실업자를 구제하는 방안이었다. 그에게 이것은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지양하고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넓혀간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했다. 하디는 영국정치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첫 노동자 국회의원이었다. (최재희, 「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노동사회>, 1999년 2월호, 통권 30호)

▲실크 모자와 프록코트로 가득한 의회장, 역사상 첫 노동당 의원이었던 하디는 트위드 모자와 검은 라운지 수트를 착용한 채 등원했다. 그의 복장은 곧 노동당 의원의 유니폼으로 채택되었다(무능의 욕망, 「헨리 풀 1872-1913」, <brunch>, 2020.2.27.).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하디는 새로운 전국정당의 결성에 몰두했다. 그 결과 1893년 '독립노동당'(ILP)을 창당했다. 그는 노동자정당의 건설에 기존 노동조합의 지지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노조는 자금·인원,·조직의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하디는 당명에 '사회주의'를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주의에 거부감을 가진 노조를 배려했고, '노동'이란 명칭을 통해 당의 입장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사회주의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선언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독립'은 계급기반이 다른 기존 정당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은 노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노조는 참여를 거부했고 하디를 포함해 1895년 총선에 나선 독립노동당의 모든 후보들은 패배했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사회문제의 본질이며 사업장 안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뭔가 계기가 필요했다.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1900년 '태프 베일(Taff-Vale) 철도파업 사건'이었다. 노조 인정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으킨 태프 베일 철도회사 노동자들이 회사와 합의 후 현장으로 복귀했지만, 회사는 노조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상원은 2만3000 파운드의 배상을 결정하며 회사의 손을 들어준 판결을 내렸다. 1870년 노조법 개혁 이후 수십 년간 유지되어온 당연한 권리인 파업권은 사실상 부인됐다. 노조의 모든 일상행위도 손해배상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됐다. 노조 기금은 배상금으로 바닥날 수밖에 없었고 파업권은 완전히 무력화됐다. 영국 자본가들의 완전한 승리요 노동자 권리의 종말을 알리는 판결이었다. 판결을 본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1900년 2월 27일 독립노동당을 비롯해 사회민주동맹, 페이비언 협회, 65개의 노동조합이 참가해 '노동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 LRC)를 발족시켰다. 

언론인 출신인 램지 맥도날드 위원장은 전국의 노조에 LRC 가입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의회에서 노동정당이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은 억울함을 가슴속 가득 담고 있던 노동자들을 움직였다. 태프-베일 판결 이후 몇 개월 만에 LRC에 가입한 조합원 수는 10만 명이 넘었고 1년 후에는 20만이 넘었다. 1903년에는 85만 명의 당원을 거느린 거대 정당이 됐다. (박흥수, 「손해배상 소송, 영국 정치를 뒤흔들다」, <프레시안>, 2014.4.6.)

노동대표위원회는 창당 6년 만인 1906년, 총선에서 29석을 얻으며 '노동당'(Labour Party)이라고 개칭했다. 하디는 의장으로 선출됐다. 1906년의 총선은 노동운동의 정치화에 새로운 전기를 만든 선거였다. 혁명과 무장봉기를 주장하던 완고한 사회주의 집단과 한줌의 기득권에 집착하던 보수적인 노조 사이에서 양자의 공통점을 찾아내 연결하고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사회진보와 인간해방의 선봉에 세우고자 했던 하디의 소망이 다소나마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최재희, 「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노동사회>, 통권 30호, 1999년 2월호)

하디는 파업투쟁과 의회투쟁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었다.
"의회활동은 혁명적인 반면, 직접투쟁은 완화제일 뿐이다. (…) 자유당과 보수당에 대항하는 총파업은 시대적 요구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파업은 성공할 때조차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 손실 없이 성과만 거둘 수 있는 파업행태는 정치투쟁 즉 노동당을 통한 의회투쟁 뿐이다."
영국 노동당은 1914년, 노조 조직률 25%에 400만 명의 조합원을 배경으로 하는 거대 정당으로 거듭났다. 보수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영국 노동당이 놀라운 성장을 거듭할수록 자유당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시 만난 이재영과 노회찬과 주대환 : 함께 걸었던 '독자 정치세력화의 길', "누가 그의 청춘이 짧다고 말하는가?"

▲국회의원회관 527-1호 '이재영추모사업회' 발족식(2013.3.20.). 노회찬(진보정의당 대표), 주대환(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과 함께, 김기준(민주통합당 국회의원), 김혜경(진보신당 고문), 이광호(레디앙 미디어 대표), 장상환(경상대 교수) 등이 공동대표를 맡고 사무국장은 김정진(변호사)이 맡음. (ⓒ 이재영추모사업회)
노회찬은 통합진보당으로, 주대환은 민주통합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얼마 뒤, 2012년 암투병 중이던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은 이렇게 밝혔다.
"이제 한 시대가 끝났다. 군부독재가 잉태한 학생운동 리더들, 그들의 노동 현장 이전, 그들의 신노선, 그들의 민주노동당이 문을 닫았다. 그들의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투항했다.

내게 주대환과 노회찬은 과학이었다. 나는 그이들의 권능을 믿고 추종했다. 그 '과학'이 더 이상 과학이기를 거부함으로써 나는 내 시대의 과학으로부터 벗어났다. 다시금 20대 때와 같은 시적(詩的) 혼돈의 시대로 회귀했다. 이태리 시인 잠바티스타 마리노는 '기적이야말로 시인의 목표다'라고 갈파했다. 나는 암흑 속으로 돌진한다." (「노회찬과 주대환을 떠나보내며」, <레디앙>, 2012.3.7.)

같은 해 12월 12일 저녁, 이재영은 '암흑 속으로 돌진하듯' 45년의 삶을 마감했다. 그날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이재영의 빈소를 노회찬과 주대환은 오래도록 지켰다. 이재영이 "기왕에 욕먹으며 어려운 발걸음 뗐으니 국회의원 자리든, 남루하지 않은 삶이든 소망했던 바 성취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던 노회찬은, 다음날 환자복 차림의 이재영과 함께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며 애도사를 남겼다.
"잘 가게, 이재영. 그대 옮기다 만 산 우리에게 넘기고, 무거웠던 삽 다 내려놓고, 이제 좀 쉬게나."
2013년 3월 20일 오후 7시 국회의원회관 간담회실 527-1호 <이재영추모사업회>가 발족, 이재영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사업과 유자녀 학자금 지원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기로 한다. 사업회 공동대표는 이재영에게 '과학이었던'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와 함께, 김기준 국회의원, 김혜경 진보신당 고문, 이광호 레디앙 미디어 대표, 장상환 경상대 교수가 맡았다.
▲이재영 유고집 
2013년 12월 12일 이재영의 1주기 추모행사가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렸다. 1주기를 맞아 추모사업회는 두 권의 유고집을 펴냈다. 진보정치의 알맹이를 채우고 키우며 쓴, "가슴에는 원대한 꿈을 지녔지만 두 발은 땅을 딛고 있던" 이재영의 글들이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와 <비판으로 세상을 사랑하다>(레디앙·해피스토리 펴냄)란 제목으로 묶여 나온 것이다. 책에는 진보정치의 전진과 퇴보를 지켜보며 웃고 울었던 이재영의 꿈과 분노, 아픔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재영의 동무' 노회찬은 <유고집 2>의 발간사(「누가 그의 청춘이 짧다고 말하는가?」)에 이렇게 밝혔다.
"지난 겨울, 우리는 이재영의 주검 앞에서 많이들 눈물을 뿌렸다. 가난과 고생으로 점철된 그의 짧았던 청춘이 서러워서 울었고, 그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지리멸렬함을 면치 못하는 진보정치의 현실이 한스러워 울었고, 이재영 없는 세상에서 무거운 짐을 속수무책으로 마주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미워서 또 울었다.이재영이 땅으로 돌아간 지 1년, 그는 두 권의 책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반갑네, 이재영!' 오랜만에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울고들 있나? 누가 내 청춘이 짧았다고 그래?' 그가 남긴 글들을 읽노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깊은 신념과 넓은 이해와 지칠 줄 모르는 투지가 아니고선 빚어낼 수 없는 뜨겁고 무거운 청춘의 무게를."
이재영의 <유고집 1: 이재영의 눈으로 본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 맨 앞에는, 1996년 4월 진보정치연합 정책부장 이재영이 쓴 「진보정당 건설에 관련된 몇 가지 단상」(<한신> 21호, 한신대)이라는 글 실렸다. 이재영 글의 시작과 중간, 마지막 끝 부분을 옮겨본다.
"혁명의 시대는 갔다. 그것의 필요성 또는 가능성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언어생활에서 '혁명'이라는 어휘가 사라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혁명은 80년대의 영광과 아픔을 되씹는 회고담 문학의 소재로,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은 문화 상품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현재 우리가 상징할 수 있는 가능태는 서구 복지사회모델이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하는 곳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 서구의 진보운동이 상대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투쟁의 과정이 피착취 근로대중의 사회정치적 독자세력화로 귀결되고, 그 성과가 각종의 진보정당으로 집적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불가침의 원리인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는 한 진보정당의 유효함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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