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노회찬, 영국에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보며 '최형기'를 떠올리다 : "더 이상 의지할 곳도, 안내자도, 피신처도 없는 이 비참한 사람들.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 사이에 쭉 있어 왔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단체관람 시키다
1870년 9월 5일 프랑스 파리 북역 앞은 군중들로 북적였다. 콧수염을 기른 노신사가 기차에서 내려 모습을 드러내자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나는 떠날 때 돌아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돌아왔습니다."
군중들은 '빅토르 위고 만세'를 외치며 화답했다.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체포령이 떨어졌던 빅토르 위고가 19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날이었다. 19년 동안의 망명생활, 소설 속 장발장의 옥살이 기간이 19년이란 것이 의미심장하다. 가난하고 탄압받으며 배척당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인 <레 미제라블>은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친위쿠데타에 저항하던 빅토르 위고의 걸작이다. 19세기 걸작으로 꼽히는 <레 미제라블> 속의 프랑스 파리는 낭만의 도시가 아니라 굶주림의 도시였다. '가난'을 주제로 한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위고는 당시의 통념("가난 앞에서 품위가 떨어지고 비천해지지 않을 만큼 강인한 영혼은 많지 않다. 보통 서민들은 믿기 힘들 만큼 어리석다")을 깨고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도 가치 있는 시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인간의 본보기'로 주인공 장발장을 그려냈다.
※ "단테가 시에서 지옥을 그려냈다면, 나는 현실을 가지고 지옥을 만들어내려 했다." "더 이상 의지할 곳도, 안내자도, 피신처도 없는 이 비참한 사람들.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 사이에 쭉 있어 왔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대하 역사소설이다. 제목인 '레 미제라블'은 '비참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며, 한국에서는 <장발장>으로 소개됐다. 프랑스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1832년에 있었던 프랑스 6월봉기를 소재로 하였다. 민중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사회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사회소설로 분류되기도 하나, 실제로는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실천적인 해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역사상 가장 긴 소설 중 하나로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역대 가장 긴 소설 25위에 해당된다고 한다(국내 번역본 기준으로는 민음사판 <레 미제라블>은 5권 분량의 쪽 수는 2,556쪽이다). 어쩌면 이 방대한 분량 덕분에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생활상 등을 알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지니기도 한다. 프랑스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이라고 하는데, 분량이 분량인지라 프랑스인들도 원전을 모두 읽은 사람은 드물고 축약본의 형태로 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1971년 10월 21일까지 기록된 부산중학교 시절 노회찬의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가 구입한 책의 제목들이 적혀 있다. 두 번째 줄 '빅톨 우고의 <레‧미제라블>'은 1968년 12월 8일로 기록돼 있다. 초량국민학교 졸업(69.2.7)을 앞둔 초등 6학년의 어린 노회찬은 어떤 마음으로 소설을 읽었을까? 25년이 흐른 뒤 1996년 노회찬은 옥스퍼드대 코리안포럼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온 뒤 뮤지컬 <레 미제라블> 공연을 봤다. 2010년 1월 출간된 <진보의 재탄생>(꾸리에)에서 노회찬은 김어준과 1996년 영국 방문을 회상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페라는 요새 잘 안 봐요. 너무 비싸서. 요즘 뮤지컬에 맛을 들여서. <레 미제라블>이라고 지금도 너무 좋아해요. 음악적으로도 훌륭하고. 진보적 시각에서 다뤄서 너무 감동적이더라고요. 영국에 96년도 처음 갔을 때 초연한 극장이 있어요. 쎄인트 앤소니 팔레스에 가서 싼 암표 구해서 보고."
노회찬이 찾아간 런던의 팰리스 극장(Palace Theatre)은 좌석수 1400개의 붉은 벽돌 건물로 1985년부터 19년간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상영했다. 팰리스 극장에서 상영된 유명한 뮤지컬로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Jesus Christ Superstar),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등이 있다. 민중당 학생 조직에서 활동했던 양난주는 당시 런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노회찬이 런던에서 며칠 지내면서 신세를 졌다. 양난주는 이렇게 기억했다.
"레 미제라블 뮤지컬 표를 사가지고 오셨어요. 그때까지 뮤지컬은 꿈도 못 꾸고 저녁마다 주재원 자녀들 과외해서 먹고 살던 시기였는데 대표님 덕분에 처음으로 런던에서 뮤지컬을 보았어요. 그걸 보시고 엄청 감동하시던 게 떠올라요. 가시고 나서 남겨두신 편지봉투를 봤어요. 편지와 100달러가 들어있었어요. 생각도 못했는데 생활비에 보태라고 남겨주고 가셔서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
※ 노회찬의 영국 방문 얼마 전인 1996년 1월 25일자 중앙일보를 보면, 영국의 뮤지컬을 소개한 「<세계의 대중문화현장> 런던-브로드웨이 제치고 뮤지컬 1번지」라는 기사가 있었다. 준비성이 철저한 노회찬이 이 기사를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든다.
"런던은 공연예술의 메카다. 연극, 무용, 그리고 비틀스를 탄생시킨 대중음악 등 주옥같은 공연들이 매일 런던의 밤무대를 수놓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 뮤지컬이다. 영국뮤지컬은 유쾌하되 저속하지 않고, 진지하되 지루하지 않다. (…) 그렇다면 영국의 뮤지컬은 어떻게, 어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좋을까. 런던에 도착, 뮤지컬을 보기 위해 공연극장에 전화를 걸면 '6개월치 예약이 밀려있다'는 대답을 듣기 십상이다. 실제로 주말 좌석을 정식으로 예약하려면 6개월 전부터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실망은 금물이다. 관광객들을 위해 그 주, 심지어 당일표까지 즉석에서 판매하는 「박스오피스」가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 박스오피스는 여행객들이 몰리는 나이트브리지. 코벤트 가든 등에도 있지만 뮤지컬 극장들이 밀집해 있는 레이스터 스퀘어 주변에 가장 많다. (…) 현재 런던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는 뮤지컬은 대략 5~6편. <레 미제라블>(팰리스극장, 434-0909)을 빼고는 △<캐츠>(뉴런던, 405-0072)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아폴로빅토리아, 416-6054) △<오페라의 유령>(허메저스티스, 494-5400) △<미스 사이공>(드루리레인, 494-5000) △<선셋대로>(아델피, 344-0055) 모두 웨버의 작품이다."
2005년 국회 법사위 유럽 출장 때 노회찬이 마르크스 무덤에 장미꽃 헌화를 한 뒤 찾은 곳도 런던의 뮤지컬 극장이었다.
"그 다음에 국회의원 때 갔는데 같이 간 사람들이 귀족들이 가는 골프장 가면서, 난 안 간다 하니까 그러면서 내가 조건 건 게 골프장 간 거 가지고 문제 안 삼을 테니까 저녁에는 내가 가자는 대로 가자. 그래서 <레미제라블> 단체관람 시켰어요. 낮에는 그쪽에서 미안하니까 자동차, 기사, 외교관 붙여 주더라구. 나보고 어딜 갈 거냐. 유명한 백화점 갈 거냐 하는데 쇼핑할 돈도 없고. 외교관 데리고 하이게이트 묘지에 가서 맑스 무덤에 장미꽃 바치고.
저녁에 <레미제라블> 보러갔는데 난 두 번 봤는데도 너무 재미있는데 이 사람들 골프 치고 오니까 코 골고 조는 거야." (「김어준과의 대화: 회찬 씨, 농담도 잘하셔」,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노회찬과 국회 법사위원들이 <레미제라블>을 본 곳은 퀸즈 극장(Queens Theatre)으로 추정된다. 2005년 런던에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상영한 곳이기 때문이다.
※ 2015년 5월 현재 런던에서 최장기 공연 기록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터리 연극 <쥐덫>이 차지하고 있다. 자그마치 60여 년째 공연하고 있어 기네스북에 올랐다. 반면, 뮤지컬로 가장 오랫동안 공연을 지속한 작품은 <레 미제라블>로 29년째 공연 중이다(초연은 팔레스 극장에서 시작했지만 지난 2004년부터는 인근의 퀸스 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80년대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4대 뮤지컬(Big 4)이라 불렸던 <오페라의 유령>, <캣츠>, <미스 사이공> 그리고 <레 미제라블>은 모두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됐는데, 이 중 2015년 현재 아직도 런던에서 공연 중인 작품은 <레 미제라블>과 <오페라의 유령>(허 머제스티스 극장)이다.
아바의 음악으로 만들어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맘마미아!>와 영화를 무대로 탈바꿈한 '찰리와 초콜릿 공장', 역시 영국산 성장영화로 인기를 누렸던 것을 무대화한 <빌리 엘리어트> 등은 지금도 인기를 누리고 있는 대표적인 웨스트엔드산 뮤지컬들이다. 원종원 뮤지컬 평론가 (「영어권 공연가 산책-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매일경제>, 2015.5.27.)
2005년이라면 켄 리빙스턴이 런던시장을 할 때였다. 리빙스턴은 '런던 대변신(Totally London)' 프로젝트를 통해 낡고 오래된 도시 런던을 관광 메카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런던은 도시 자체는 크지만 피카딜리 서커스나 트라팔가 광장, 버킹엄 궁, 대영박물관 등이 모두 근거리에 밀집해 있어 하루면 이 관광지들을 다 돌게 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리빙스턴은 관광객들의 런던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뮤지컬 도시 런던의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홍보하고 서더크, 사우스뱅크 등 런던의 동쪽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했다. (<주간동아>, 2008.4.2.)
메이데이(May day), '붉은 켄'과 '최형기'
뮤지컬 <레 미제라블> 공연을 두 번 보면서, 그리고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면서 노회찬은 19년 옥살이를 한 장발장(Jean Valjean)과 그를 뒤쫓는 자베르(Javert) 형사를 만난다. 소설 <장길산> 속의 '최형기'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아마도 감회가 남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17세기 숙종 때 광대 출신 의적 '장길산'은 서른두 살의 황석영이 10년(1974.7.11.~1984..7.5.) 동안 <한국일보>에 2,092회에 걸쳐 연재했던 대하 장편소설의 제목이다(1984년 현암사에서 전 10권으로 완간). <한국일보>에 연재될 때부터 시작해 노회찬이 스무 번 가까이 감명 깊게 읽었다는 황석영의 <장길산>에는 마치 장발장을 쫓는 자베르 경감처럼 장길산을 쫓던 좌포도청의 포도종사관 '최형기'란 인물이 등장한다. 최형기는 노회찬이 1980년대 노동운동을 하면서 사용하던 가명으로, "수배생활을 하던 나의 처지를 풍자하기 위해 최형기라는 이름을 썼다"고 한다.
"장길산 잡으러 다니는 포도대장 최형기인데, 마치 장발장을 잡아넣으려고 끝까지 괴롭히는 자베르 경시 비슷하지요. 제가 수배되었기 때문에 저를 잡으러 다니는 인물 중에 제일 징그러웠던 사람으로 최형기가 떠올랐고, 그래서 최형기라고 썼지요."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산업재해로 몇 달을 쉬던 중 집필한 노회찬의 최초 단독 저서 <노동자와 노동절>(석탑, 1985)의 저자 이름도 최형기로 돼 있다. 노회찬의 <노동자와 노동절>은 "노동절을 통해 노동운동을 조명한 한국 최초의 책"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의 노동절에 관한 이야기 속에는 앞서간 사람들의 소중한 경험이 담겨 있다. 또 해마다 노동절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노회찬을 뒤늦게 알게 된 사람들은, 노동운동가로서의 그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해방 노동해방'으로 압축되는 노회찬의 삶과 꿈, 철학에는 노동운동가로서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 <노동자와 노동절>의 머리말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맺고 있다.
"기숙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으로 책을 보아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야간 일 끝내고 돌아와 지친 몸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노동자들에게 이 조그마한 책자가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영국의 '기업살인법'과 노회찬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대처는 영국이 오늘날 직면한 모든 문제에 책임이 있다." 켄 리빙스턴
2013년 4월 '철(鐵)의 여인'으로 불리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전 영국 수상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물론 전 세계가 한때 시끄러웠다. 3연임하면서 집권하던 당시 그녀가 추진한 정책들로 인해 영국인을 넘어 수많은 세계인들의 삶과 풍경을 극단적으로 바꾼 '대처리즘'으로 통칭되는 신자유주의의 기획자였기 때문이다. '대처리즘'은 마거릿 대처가 총리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펼쳐진 사회경제정책의 총칭이다. 그 핵심골자는 정부 재정지출의 삭감, 작은 정부, 공기업의 사영화(민영화), 자본에 대한 규제 완화와 경쟁의 촉진, 노동조합의 권한 대폭 축소 등으로 압축된다. 그래서였을까. 대처의 퇴임 당시인 1990년도에는 영국 어린이 중 28%가 빈곤선 아래에 놓이게 됐다. 영국의 <가디언(Gadian)>지는 대처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사설을 통해 "마거릿 대처의 유산은 인간 정신을 파괴한 사회 분열, 이기심, 탐욕"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대처의 사망 소식에 영국의 세계적인 좌파 영화감독 켄 로치(Ken Loach)는 위트 있는 일격을 날렸다.
"마거릿 대처는 현대 영국 총리들 중 가장 분열적이고 가장 파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대량 해고, 공장 폐쇄, 공동체 파괴 - 이게 그녀의 유산입니다. 그녀는 싸움꾼이었고, 그녀의 적은 영국 노동계층이었습니다. 그녀의 승리는 정치적으로 부패한 노동당 지도자와 노조 지도자들의 지원에 힘입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엉망진창인 이유는 그녀가 시작한 정책들 때문입니다. 다른 총리들도 그녀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토니 블레어는 잘 알려진 경우죠. 대처는 거리 공연 악사였고, 블레어는 원숭이였습니다. 대처가 남아공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고문자, 살인자 피노체트와 차를 함께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떻게 그녀를 기려야 하냐고요? 그녀의 장례식을 민영화합시다. 경쟁 입찰에 붙여 최저가에 낙찰시킵시다. 그녀는 그런 걸 원했을 듯합니다." (<위키트리> 2013.4.9.)
<인디펜던트>의 칼럼니스트 오웬 존스도 칼럼을 통해 "대처리즘은 지금도 우리를 파괴시키는 국가적 재난"이라고 규정했다. 리빙스턴은 "대처는 200만~300만명을 내쫓아 산업을 살리겠다고 했던 인물로, 대처와 대처리즘은 영국이 오늘날 직면한 모든 문제의 근원이자 출발점"이라고 비판했다. 대처에 대한 비판 가운데 하나는 제3차 집권기(1987-1990) 때에 유난히 잦았던 재해도 있었다. 기업살인법(The Corporate Manslaughter and Homicide Act) 제정으로 이어진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사건'(1987), '킹즈 크로스 지하철역 화재 사건'(1988), '보잉 737 여객기 추락 사건'(1988) 등이 대표적이었다. 대처 총리 집권 하반기에 발생한 이와 같은 일련의 대형 사고는 대처 정부가 그간 추진해왔었던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와 민영화 정책의 결과라는 점에서 사회적 비판이 고조되었다.
한편, 많은 노동자와 시민이 사망했는데도, 진상 조사 과정에서 당연히 책임이 큰 것으로 밝혀진 기업이 제대로 법의 심판을 받지 않자 영국의 사법 체계에 대한 국민의 실망도 커졌다. 죄를 저지른 것이 명백한 기업을 처벌할 수단이 없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드러난 것이다. (이상윤, 「기업살인법 제정으로 이어진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사건」, <프레시안>, 2014.6.2.)
1997년 5월 총선에서 대처와 존 메이저의 보수당은 노동당에 패배하여 정권을 잃었다. 노동당 집권 후 처음 열린 1997년 10월 전당대회에서 이후 내무부 장관이 된 잭 스트로는 기업에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2003년 노동당 정부가 기업살인법 법률 초안을 제안한 이후 여러 번의 논의와 수정을 거쳐 영국의 이른바 '기업살인법'이 2007년 의회를 통과하고 2008년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노회찬, "이윤보다 목숨이 중요합니다."
19대 국회 때인 2012년 11월경 노회찬은 영국의 '기업살인법'을 검토했다. 이미 노동자들과 진보적 의료 단체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산업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데 한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에 노회찬은 '한국형 기업살인법' 제정을 2013년도 사업 계획에 포함시켰지만, 2013년 2월 14일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명단 공개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계획을 추진하지 못했다. (박창규, 「노회찬의 정치의제와 법안, 무엇을 남겼나?」, 노회찬재단, 제2회 노회찬포럼 자료집, 2019.6.11.)
2016년 6월 20대 국회로 돌아온 노회찬은 인재 사고 등 기업의 안전 불감증이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2년이 지났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 문제가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었으며, 하청업체 소속 19세 노동자가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사망한 '구의역 사고'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노회찬 정의당 20대 국회 원내대표는 세월호 유가족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연대, 민주노총과 함께 법안을 준비했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2017년 4월 12일 국회 정론관에서 이들과 법안,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안' (약칭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발의 기자회견을 했다(발의일은 4월 14일). 노회찬은 입법 취지를 밝히며 영국 등의 '기업살인법'을 예로 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재해 사고는 성과를 위해 사람의 안전을 소홀히 하는 기업의 조직문화와 제도가 낳은 결과다. 현행법에 따르면, 재해가 일어나도 경영책임자를 형법상 업무상과실치사죄로 처벌하기 어렵다. 기업의 조직구조 때문에, 경영자의 과실을 입증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중대 재해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기업의 안전관리의무를 명확히 규정하고, 이를 위반한 때에는 경영자와 기업에게 무거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입법이 필수적이다.
(…)
"안전의무를 소홀히 해 얻는 이익보다, 재해를 일으켰을 때 받는 불이익이 적다면, 기업의 철저한 안전관리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 영국과 캐나다, 호주 등은 일찍이 이같은 현실을 반영해 '기업살인법'을 도입했다."
노회찬이 대표발의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관련해 2017년 9월 19일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에는 "법인에 독자적 범죄능력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양벌규정이 있는 경우에 한해 법안을 처벌하도록 한 현행법 입법 태도 등을 고려해서 판단할 사안"이라는 평가가 적혀 있다. 그러나 기업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 등으로 이후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었으며, 결국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2021년 1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약칭 중대재해법)'이 통과됐다. 재석의원 266명 중 찬성 164명, 반대 44명, 기권 58명. 멀게는 2006년 영국 기업살인법의 국내 소개, 가깝게는 2017년 노회찬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최초 발의 등 십수년에 걸친 법 제정 운동의 성과이기는 했다. 하지만 법안 통과에 대해 노회찬은 아마도 다시 한 번 이렇게 개탄했을 것이다. "벌칙이 완화되면 통과가 돼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곤 외쳤을 것이다. "이윤보다 목숨이 중요합니다." 애초 법제정을 위해 국민동의청원에 10만 명 넘게 서명에 참여했고 정의당(강은미 의원), 더불어민주당(박주민 의원 등), 나아가 국민의힘(임이자 의원)까지 법률안을 발의했다. 국민의 70% 이상이 법률 제정에 동의했다. 하지만 국회 법사위의 법률안 심의과정에서 정부 부처와 경제단체의 주장에 밀려 수정을 거듭한 끝에 법률의 이름마저 바뀌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서 기업이 빠진 '중대재해처벌법'으로 변경된 것이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21대 국회 들어 정의당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2020.6.11.)한 후 본회의를 통과(2021.1.8.)할 때까지 소요된 기간은 212일이었다. 노회찬이 2017년 4월 14일 '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책임자 처벌법(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발의한 때부터 따지면 1366일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공청회는 단 한 번 열렸을 뿐이다. 앞서 노회찬이 발의한 재해처벌법은 20대 국회 내내 단 한 번도 논의되지 못했다. 깊은 숙고와 치열한 논의를 했다기에는 낯부끄러운 기록이다. 이미 있는 법을 개정하는 것이 아닌 새로 법을 만드는 제정법인데다, 기업과 산업현장에 미치는 영향이 큰 법안임을 감안하면 지나친 졸속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헤럴드경제>, 2021.1.15.)
닫는 글 : "그 울음은 동병상련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2013년 영국 영화 <레 미제라블>이 국내에서 개봉됐다. 장발장 역은 휴 잭맨이, 자베르 역은 러셀 크로우가 맡았다. 바리케이트 위에서 시민들이 'Do you hear the people sing?'(민중의 노래)을 다함께 부르는 장면은 전율을 흐르게 하는데 충분했다. 2013년 1월 3일 노회찬(진보정의당 공동대표, 19대 국회의원)은 당 최고위원회 모두발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프랑스의 <레 미제라블>은 영화관에 가면 볼 수 있는데, 한국의 '레 미제라블'은 지금 추위에 떨면서 철탑 위에서, 굴뚝 위에서, 그리고 치러지지 않는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삼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한국의 '레 미제라블'을 조속히 만나기 바란다. 박근혜 당선인이 한국의 '레 미제라블'들을 만나는데 저와 진보정의당이 주선할 용의도 있다. 지금 혹한에 떨고 있는 분들이 먼저 국민행복 시대를 맞이하게 되길 바란다. (…) 오늘 보도를 보니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예산안 심의가 끝나자마자 일부 예결위원들이 중남미와 아프리카로 예산시스템 연구를 위해서 출장을 갔다. 지금 국회의원들이 가야할 곳은 중남미나 아프리카가 아니라 바로 정치가 잘못돼서 벼랑 끝으로 내몰린 분들이 있는 곳, 철탑이나 굴뚝이다. 새누리당의 황우여 대표, 민주통합당의 박기춘 원내대표, 진보정의당의 조준호 대표와 제가 대신 철탑과 굴뚝을 올라가고 거기 있는 분들이 내려오게 하면 문제는 금방 해결될 것 같다."
영국에서 본 두 번의 뮤지컬을 떠올리며 영화를 봤을 노회찬은, 구영식 <오마이뉴스> 기자와 영화 <레 미제라블>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구영식 기자, 「노회찬이 본 설국열차, 6년 전 미공개 인터뷰: [노회찬 1주기] '남궁민수의 세계'를 품었던 사람, 그를 기억하며」, <오마이뉴스>, 2019.7.25.)
구영식 : 지난 2012년 대선이 끝난 이후 <레 미제라블>과 <설국열차>가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모았다. 혁명에 관한 영화들이 올 상반기와 하반기에 흥행몰이를 한 것이다.
노회찬 : <레 미제라블>은 그 자체로서도 굉장히 작품성이 높아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모을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나 영화는 지난 대선에서 좌절한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그
런데 <레 미제라블>은 민중의 관점에서 보면 좌절이다. 시민혁명으로 시민들이 자유를 얻었지만 나중에 반동이 계속 나오는 과정이 있었다. 바리케이드가 졌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사람도 루이 보나파르트였다. 완전히 희극이 비극이 됐다. 이것이 시민혁명을 일으켜서 민주화했는데 결국에 MB정권,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것에 좌절한 상황과 같아 위로받는 것 같다. <레 미제라블>을 보면서 우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 울음은 동병상련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
구영식 : 두 영화의 흥행에는 대중들의 어떤 열망이 투영돼 있는 것 같다.
노회찬 : 그렇다. 두 영화가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변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좌절과 기쁨 등을 다루고 있다. 억압, 고통 등에서 해방되고 싶은 동병상련이 있다. 두 영화는 집단, 사회가 더 나아지려는 몸부림 속에서 겪는 한계, 좌절, 진척 등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레 미제라블>을 장발장 개인의 인생사로 보는 것이 가장 협소하게 보는 것이다. 아무 의미가 없고, 사람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룬 오늘의 성취도 <레 미제라블>의 바리케이드에 모인 학생들부터 민중들까지처럼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애환 속에서 나왔다. 오늘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대선 패배에서 확인했다. 제가 볼 때는 <레 미제라블> 등장인물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는 자신과, 자신과 유사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눈물이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프리랜서 기자인 하성태는 노회찬을 '영화의 친구'라고 칭하며 그를 추모하는 글을 올렸다.
"그가 언급하고 시사회에 참석했던 영화들의 면면은 인간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그의 관심사가 어디로 뻗어있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
노회찬이 응원했던 영화들의 면면은 그의 폭넓은 관심사는 물론 그가 한국사회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또 어떤 철학을 지녔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외화부터 독립영화, 상업영화를 가리지 않은 노회찬의 영화사랑은 그를 '영화의 친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 한국영화계는 그렇게 앞선 '영화광 정치인'을, '영화의 친구'를 잃었다. 더없이 진지했고, 한없이 유쾌했으며, 사춘기 시절부터 영화를 아끼고 사랑했다던 노회찬을.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영화를 사랑했던 노회찬 원내대표가 생전 응원했던 영화들」, <오마이뉴스>, 2018.7.26.)
사춘기 시절부터 영화를 아끼고 사랑한 '영화의 친구', '영화광 정치인' 노회찬에게 영화란 어떤 의미일까?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예술의 종착역으로서의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으니, 정치를 안 했으면 영화를 했을지도 모르죠"
"저는 기본적으로 영화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순수예술처럼 소수들만 향유하다가 사회가 민주화되고 경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고급한 예술을 즐기는 방향으로 변해온 거죠. 예술 자체의 콘텐츠가 대중화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들이 피카소를 보고, 더 많은 사람이 베토벤을 듣게 된 것처럼 말이죠."
17대 총선을 며칠 앞둔 2004년 4월 7일 박찬욱, 봉준호 감독, 오지혜 배우 등 민주노동당 지지선언을 한 226명 영화인을 총선홍보대사로 위촉하면서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겸 중앙선대본부장은 이런 인사말을 남기기도 했다.
"견우와 직녀는 일년 중 칠월칠석 하루만 만나지만 영화계와 진보정치는 오늘을 계기로 일년열두 달 만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영화라면 그 꿈을 실현시키는 것은 진보정치이고 민주노동당입니다."
그런 노회찬의 삶을 다룬 다큐영화 <노회찬 6411>(감독 민환기)이 2021년 10월 14일 개봉됐다. 노회찬재단(이사장 조돈문)과 영화사 '명필름'(대표 심재명, 이은)과 제작사 '시네마6411'(대표 최낙용)이 함께 제작한 첫 번째 다큐멘터리 영화다. 민환기 감독은 "다큐를 만드는 내내 '내가 이 영화를 만들 자격이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최대한 객관적인 태도와 영웅화하지 않는 관점으로 인간 노회찬의 삶을 기록하려 했다"며, 영화를 통해 "인간이라는 불안한 존재에 대해 지치지 않는 존중과 믿음을 거두지 않은 노회찬이 드러났으면 좋겠다"며 개인적인 바람을 밝히기도 했다. 이어 "<노회찬 6411>이 촌철살인의 언어를 사용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대중정치인 노회찬을 단순히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영화이길 바란다"며 "이 영화를 통해 공감과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노회찬 6411>을 보면서 사람들이 웃고 또 운다고 한다. 이들의 웃음과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노회찬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눈물"은 아니었을까.노회찬의 꿈을 통해, 노회찬과 함께 꿈꿨던 것을 통해, 내가 그리고 우리가, 우리 시대가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라며 오늘의 기록이야기 <켄 리빙스턴과 노회찬> 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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