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시민들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을 가로지르는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 환호했다. 1961년 8월 13일 만들어진 베를린 장벽(Die Berliner Mauer)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이 28년 만에 다시 열렸다.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가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맞은편에서 기다리던 동독의 한스 모드로프 총리와 역사적인 악수를 나눴다.
모드로프 총리는 독일 전역에 생중계된 연설에서 "전쟁의 불타는 악취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평화의 문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양권모, 「브란덴부르크 문」, <경향신문>, 2014.3.23.)
1956년생 노회찬은 실향민 2세다. 부모님 모두 고향이 함경남도로, 한국전쟁이 터지자 두 분 모두 1·4후퇴 때 거제도로 피난을 왔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린 직후 인민노련 사건으로 체포(1989.12.23.), 구속(12.25.)된 노회찬은 감옥 안에서 독일이 통일(1990.10.3.)되는 과정과 함께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다. 노회찬이 청주교도소에서 '고향을 잃은 부모님'께 보낸 편지 가운데는 분단과 통일과 관련해 말씀드리는 구절이 적혀 있기도 했다.
"분단으로 인한 비극이 대체로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고 겪은 고통과 불행도 결코 그 개개인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역사의 큰 부담을 당대의 힘없는 개개인들이 다 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나운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만 잘못된 정치와 역사적 파행이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다니 새삼 올바른 정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40년 동안이나 굳은 마음이지만 팔이 안으로 굽듯이, 봄이 되면 얼음이 녹듯이 잘 풀리리라 봅니다." (1991년 8월 6일)
"오늘 아침엔 예기치 않게 자그마한 국화 화분 하나를 선사받았습니다. (…) 국화는 원래 어둠 속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에 개화를 늦추기 위해 온실에선 밤에도 형광등을 켜놓기도 한답니다. 이제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감방 안에 들어왔으니 저 국화는 천천히 꽃을 피우며 이 가을이 깊도록 품위를 자랑하겠지요. (…)
올해도 갇혀서 아버님 생신을 맞게 되었습니다. 부디 몸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셔서 통일된 조국을 보시고 금강산에도 다시 가보시고 또 번창한 자손들의 생활도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1991년 10월 1일)
"아버님 어머님께서 건강을 계속 유지하고 계신 동안 고향방문, 가족상봉이 이뤄지고 금강산, 백두산, 개마고원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역사란 무수한 전진과 후퇴 속에서도 끝내 발전하기 마련이지만 수십년간 엉켜 있던 분단문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려웠던 과거, 고통스러웠던 지난 세월을 옛 얘기하듯 지낼 시간이 멀지 않은 지금 더욱 건강하시고 더욱 젊은 마음으로 생활하실 것을 어머님 생신을 앞두고 불효자가 감옥 안에서 기원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통일의 그날까지 만수무강 하십시오." (1991년 12월 14일)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10년 10월 4일 노회찬은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오늘은 독일이 통일된 지 20년이 되는 날이고 10.4남북정상선언이 이뤄진지 3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 6.15남측위원회와 노무현재단 및 야4당이 주최하는 10.4선언 3주년 기념식이 각각 있습니다. 기념만 있고 추진은 없습니다."
2017년 노회찬이 원내대표로 있는 정의당의 이정미 대표는 「대한민국 구체제를 넘어 촛불혁명의 전진과 승리를 이룹시다」는 제목의 국회 본회의 비교섭단체 대표연설(2017. 9. 11.)에서 독일의 빌리 브란트 수상을 호명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 거대한 변화의 시작. 대한민국은 318일 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다시는 아무것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위대한 정치인, 빌리 브란트 수상이 자신의 마지막 자서전에 썼던 말입니다.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그가,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보면서 이 말을 남겼습니다. 촛불을 경험한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은 87년 민주화 이후 30년 만에 '시스템 체인지'가 진행 중입니다. 이 거대한 변화의 주역은 이번에도 시민들입니다. 시민들은 정권이 몰락하고 대통령이 구속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봐야했습니다. 그러면서 느꼈습니다. 우리는 왜 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는가. 우리는 왜 대한민국이 이렇게 무너져 내릴 때까지 놔뒀는가. 시민들은 촛불정국에서 집단적인 학습을 통해, 가치관의 대규모 이동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거대한 변화는 그 크기와 방향, 성격을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거대한 변화는 모두가 다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질서정연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겪고 나면 대한민국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2017년 체제를 단단하게 만들 것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정치인"이라고 이정미가 호명한 빌리 브란트, 그는 누구일까?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라'고 외친 '민주사회주의와 평화의 정치가'." <역사비평> 편집위원회가 엮은 <지도자들: 성공과 실패의 역사에서 찾는 리더의 조건>(역사비평사, 2013)에서 빌리 브란트에 대해 한 말이다. '살아있는 유럽의 동상', '현대 유럽의 거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17살에 독일사회민주당에 가입한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 재임 1969~1974)는 독일의 통일과 유럽의 평화를 이끈 '평화와 양심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는 1992년 사망 할 때까지 31년간 서독 연방의회 의원이었고, 1957년부터 9년간 서베를린 시장, 1966년부터 3년간 외무부장관, 1969년부터 5년간 서독 총리를 역임했다. 브란트는 1972년 총선에서 사민당에 압도적 승리를 안겨주며 2차 임기에 들어갔으나, 1974년 측근(귄터 귀욤)의 간첩 스캔들로 총리직을 사임하고 당으로 복귀했다. 빌리 브란트(이하 브란트)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독일 통일의 기초가 된, 동독을 비롯한 공산국가를 향한 '동방정책'(Ostpolitik)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기념탑 앞에서의 무릎 꿇은 사과의 장면이 그것이다.
브란트와 노회찬의 "평화(와 통일)를 향한 발걸음"…브란트,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최후의 무리수"
브란트는 냉전 종식과 독일 통일을 이끈 '비전의 정치가'로,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브란트는 1969년 10월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의 연립정부 하에서 서독의 4대 총리로 취임하면서 동유럽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동방정책'을 시작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구상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알려져 있다. "한반도 비핵화·평화협정 체결·남북 경제 벨트 구축" 등 평화·번영 프로세스 제시한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쾨르버 선언, 2017.7.6)도 기본적으로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1969년 10월 28일 총리 취임 연설에서 브란트는 '동방정책'의 출발점이 되는 핵심 구상을 밝혔다. '동독을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으로 '서독이 독일을 대표한다'는 과거 아데나워 정부의 서방정책을 뒤집는 것이었다.
"독일문제(2차 대전과 히틀러 정권으로 인하여 야기된 문제)는 궁극적으로 유럽의 평화 질서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실질적 정치 과제는 분단된 독일 관계가 현재의 경직된 상태에서 완화되도록 함으로써 민족의 단일성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들의 평화와 유럽의 평화를 위한 공동의 과제와 공동의 책임이 있습니다.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된 지 2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독일 민족이 계속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생활해나가는 것을 막고, 이웃을 넘어 서로가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독일의 관심사일 뿐 아니라 유럽의 평화와 동서관계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 비록 독일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더라도 서로에게는 외국이 아닙니다. 그 상호관계는 오로지 특별한 성격의 관계일 수 있습니다."
브란트는 1971년 12월 긴장완화와 평화구축의 성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남긴 연설에서 브란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제가 제 원칙을 분명히 강조해야 할 시점입니다. 그것은 전쟁이 정치 목표로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단지 제한되어야 할 뿐 아니라 제거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어떠한 국민적 이해도 평화에 대한 집단적 책임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최후의 무리수입니다. 비록 이것을 아직 일반적 관점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지만, 저는 평화를 추구하는 정책이야말로 이 시대의 참된 현실정치라고 생각합니다. (…) 평화를 조직하는 데 반대하는 강력한 세력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인간을 퇴보시킬 수 있는 야만주의를 목격했습니다. 어떠한 종교도, 어떠한 이념도, 어떠한 영광스러운 문화적 진보도 인간의 마음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폭발해 민족과 국가를 재앙에 빠뜨리고야 마는, 그러한 증오의 가능성을 확실하게 없앨 수 없습니다. (…) 바라건대 전쟁을 감행할 권력을 지닌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할 이성의 통제력을 지니길 기원합니다."
1981년 11월 3일 브란트의 연설은 여전히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평화가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평화가 없으면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노회찬, "전쟁은 선택지가 아니다"
"사실 누가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해야 하는데 人間事(인간사)가 그리 쉽게 풀리진 않는 모양입니다. 분단으로 인한 비극이 대체로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당하고 겪은 고통과 불행도 결코 그 개개인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역사의 큰 부담을 당대의 힘없는 개개인들이 다 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나운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만 잘못된 정치와 역사적 파행이 이토록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다니 새삼 올바른 정치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40년 동안이나 굳은 마음이지만 팔이 안으로 굽듯이, 봄이 되면 얼음이 녹듯이 잘 풀리리라 봅니다." (1991년 8월 6일 청주교도소에서 부산 부모님께 부친 편지)
생전에 분단 문제를 극복하고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해 노력해온 노회찬은 아이러니하게도 분단 '덕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노회찬에게 평화와 통일이란 정치 문제 이전에 가족 문제였다. 노회찬의 부모님 두 분 다 함경남도가 고향이다. 1.4후퇴 때 흥남을 떠나 거제를 거쳐 부산에 정착한다. 실향민 2세대인 노회찬은 그래서 이산가족 상봉 소식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아프다. (황성기, 「[서울광장] 이산가족 노회찬의 유감」, <서울Pn>, 2017.7.22.)
한반도 평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에 대한 비판과 공격에 노회찬은 주저하지 않았다. 노회찬은 오랫동안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주한미군의 제대로 된 역할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의 문제였다. 전략적 유연성이란 미국이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세계 어디서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외주둔 미군을 유연하게 배치하려는 전략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 <매일노동뉴스> 정용상 기자는 「노회찬, 진보적 폭로정치의 전형을 보여주다」(2005.9.22.)는 기사를 통해 이렇게 보도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첫해인 2004년을 통틀어 신문과 방송에 가장 많이 나온 당 정치인은 노회찬 의원이었다(2005년도 그렇다). 그 시작은 용산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문제에 대한 폭로였다. (…) 노회찬 의원의 폭로전의 결정판은 11월 30일 '주한미군 지역역할 수행 대비책'이라는 정부문서를 공개한 것이다. 이 문서는 미 2사단의 평택 이전이 주한미군의 광역기동군화, 동북아 신속기동군화를 위한 것으로, 기존 한반도에만 국한되던 주한미군의 역할이 주변 분쟁까지 확장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평화운동 진영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주장이 정부 공식문서로 확인됐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 노회찬 의원의 연이은 폭로는 미국 정부까지 나서게 만들었다. 12월7일 미 국방부 대변인은 한국정부에 '우회적 유감'을 표명했다. 이는 진보진영이 정보전을 통해 미국정부를 움직인 최초의 사건이었다."
2004년 12월 6일 노회찬은 보도자료를 통해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합의된 것이 없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면, 미국 측에 이 뜻을 명확히 전달하고 지역역할 확대를 용인치 않을 국민의 뜻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2006년 1월에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존중하되 미국은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주한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였다. 20대 국회에서도 노회찬(정의당 원내대표)은 한반도 평화를 가로막아온 자유한국당을 질타했다. 노회찬은 자유한국당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짚었다. 그것은 바로 '평화' 그 자체였다.
"이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제가 볼 때는 평화예요. (…) 남북 간에 늘 군사적으로 긴장되어 있고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도 몰라야 자기들이 그나마 살 틈이 생기는데 그런 게 평화로, 대화로 하면 그렇잖아요. 핵무기 달라고 (미국 가서) 구걸하고 다니고 이랬는데 평화 시절이 오면 골치 아프잖아요. 그러니까 자신들이 서식하고 번성할 기회가 점점 적어지는 거죠. 북한은 핑계인 것이고 자신들이 궁색하게 되는 처지, 불우한 처지가 원망스러운 거죠. (…)
지금 한반도와 대한민국에서 없어져야 할 것이 두 개입니다. 한반도에서는 핵무기가 없어져야 하고, 대한민국에서는 자유한국당이 없어져야 합니다."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2018.1.24.)
노회찬의 유고집 <우리가 꿈꾸는 나라>(창비 펴냄, 2018)에는, '전쟁은 선택지가 아니다'는 제목의 글이 수록돼 있다. "엄밀히 말해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전쟁 또는 평화뿐입니다"로 시작하는 노회찬의 글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평화란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 멀리서 오지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빠르고 편한 지름길은 없습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누구도, 보수라 할지라도 전쟁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보수가 아닙니다. 가짜지요. 극우라면 모를까 건강한 보수라면 절대 전쟁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보수든 진보든 평화와 안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컨대 유럽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의견이 갈리는 문제는 경제나 복지입니다. 전쟁도 불사하자는 주장은 나라를 망가뜨리자는 것일 뿐 보수라는 이름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합니다. 평화란 의견이 갈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빌리 브란트의 '세기의 사죄'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Warschauer Kniefall),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으나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브란트와 관련해 떠오르는 두 번째 장면은 찬비가 내리는 1970년 12월 7일 폴란드를 방문하여 서독의 총리로서 무릎을 꿇은 흑백사진이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게토(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란드 이름으로는 오시비엥침)의 봉기 희생자 기념탑―이 기념탑은 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의 유대인 강제거주지에서 봉기한 5만6000 명의 유대인이 체포되고 그 가운데 7천 명가량이 트레블린카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었다―을 찾은 브란트는, 헌화를 한 뒤 한 걸음 물러난 후 돌연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약 30초간 양손을 맞잡고 머리를 숙였다. 바로 '세기의 사죄'라는 유대인 기념탑 앞의 참회였다.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였고,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온 브란트. 자신의 조국에게 빚을 지지도 않았고, 사과할 필요도 없었던 브란트가 무릎 꿇은 것이었다. 당시 언론들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으나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범국가 독일 총리의 진심 어린 사죄였고, 이 사죄는 전 세계를 한 장의 사진으로 감동시켰다. 추모비 앞에 헌화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갑작스러운 영감에 따라 무릎을 꿇었을 뿐이라는 그의 직관에 따른 행동과 솔직함이 세계를 감동시킨 것이었다. 독일 사민당은 이날의 광경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흐린 날씨였다.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 봉기 희생자 기념제단에 도착하였다. 텔레비전 카메라가 모든 걸음을 따라갔다. 브란트 총리가 꽃다발을 올렸다. 그리고는 총리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런 행동으로 바로 옆의 수행자들도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나중에 브란트 총리는 측근인 에곤 바르에게 꽃다발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브란트의 사죄 이후, 의심 섞인 눈초리로 서독을 주시하던 유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계는 독일을 용서했고, 독일은 다시 인류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나는 독일보다 독일 총리를 더 신뢰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2차 세계대전 전승 4개국이 '동·서독 현안은 독일 내부 문제'라는 내용의 베를린 협정을 1972년 체결했다. 돌발적으로 보이는 브란트의 사과와 화해의 제스처는 동구 유럽의 여러 나라에도 신뢰를 주었다. 1970년 브란트는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브란트가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지 꼭 19년 만에, 동방정책이 설계된 지 26년 만에 독일은 통일되었다.
※ 1997년 아우슈비츠를 찾은, 노회찬의 '마음의 스승' 신영복은 이렇게 적고 있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곳에서 통곡하였고 지금도 유대인 다음으로 가장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독일인입니다. 독일 학생들에게는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의 오지에 있는 아우슈비츠는 아무래도 세상에서 너무 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당사자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아우슈비츠는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산한다는 것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단죄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사죄는 '은폐(隱蔽)의 합의(合議)'입니다. 책임짐으로써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청산입니다. (…)
아우슈비츠는 단지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찬미하고 있는 모든 '번영의 피라미드'에 바쳐진 잔혹한 희생의 흔적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죄 없는 용서와 책임 없는 사죄는 은폐의 합의입니다」, <더불어숲 1: 새로운 세기의 길목에서 띄우는 신영복의 해외엽서>, 중앙M&B, 1998)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 VS. 한국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라"고 밝힌 브란트. 권위주의의 타파와 나치 청산을 목적으로 일어난 '서독 68운동'의 와중에서, 1969년 총선 승리로 전후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룬 사민당과 브란트는 정말로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했다. 민주주의가 과감하게 실험된 곳은 무엇보다도 학교였다.
"초.중.고 학교에서는 민주주의자를 길러내는 것이 최고의 교육목표가 되었고, 반권위주의 교육, 비판교육, 저항권 교육 등 정치교육이 정착되었으며, (…) 그 결과 독일은 과거청산, 복지국가, 동방정책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나라'가 되었고, 독일인은 성숙한 민주의식을 가진 신독일인으로 거듭났다. 브란트의 담대한 민주주의 실험이 서구 민주주의의 모범국 독일을 탄생시킨 것이다.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 거리에서, 교정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젊은 날을 보낸 우리 세대에게 민주주의는 '쟁취'의 대상이었지, '감행'의 대상은 아니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독재와 싸워서 되찾을 '제도'로 알았지, 일상의 삶을 변화시킬 '행위'로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광장에선 민주주의의 투사였지만, 일상에선 민주주의자가 아니었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 「민주주의를 감행하자」, 한겨레, 2017.11.6.)
그 연장에서 독일의 교육자, 정치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치열한 토론 끝에 정치교육의 원칙에 대해 합의했다. 강제성의 금지(관점의 다양성), 논쟁성의 유지(이견의 정당성), 정치성 행위 능력 강화(차이에 대한 존중과 관용) 등 3대 원칙의 '보이텔스바흐 합의'(1976)가 그것이다. 이 협약은 본래 학교 정치교육의 지침으로 만들어졌으나 모든 공교육 영역으로 확대 적용되어 독일 정치교육의 헌법으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유럽연합 국가들에서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보이텔스바희 협약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을 골자로 한다. 첫째, 주입 또는 교화 금지 원칙이다. 사회적 쟁점사항에 대해 학생이 잘 모르는 상태에서 교사가 무엇이 바람직한 견해인지를 알려주거나 강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학생 스스로 독립적인 판단을 하도록 지원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둘째, 논쟁 원칙이다.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은 학교에서도 논쟁을 통해 학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주입금지 원칙을 실천하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견해, 특히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의견을 균형 있게 제시하고 또한 이에 대해 토의와 토론을 하지 않으면 슬그머니 주입과 교화로 변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정치적 행위능력 강화 원칙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스스로 정치적 입장을 결정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정치 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를 탐색해 보고, 또한 자신들이 그런 정치 상황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다양한 수단과 방안을 탐색할 수 있어야 한다.
'보이텔스바흐 합의'가 있었던 1976년, 대한민국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통해 동학농민혁명을 임진왜란처럼 '동학란'으로 배우고, 분단국가에서 국민의 정치적 자유의 대폭 제한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한강의 기적'을 위해 개발독재는 불가피한 것으로, 나아가 '사회윤리와 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행위를 대상으로, 퇴폐풍조 단속'이라는 이름으로 "머리 길다고 잡고, 치마 짧다고 잡고" 했던 우스꽝스런 풍경을 볼 수 있던, 이것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주입식으로 배우던 시절이었다. 40년 여년이 흐른 2014년 2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역사교육의 편향성 논란을 언급하며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 많은 사실 오류와 이념적 편향성 논란이 있는 내용은 이런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에 근거한 균형 잡힌 역사 교과서 개발 등 제도 개선책을 마련해주기를 바란다"고 지시했다. 2015년 10월 12일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장관 황우여)는 2017학년도부터 중·고교 역사교과서의 국정 전환을 발표하고 행정예고를 했다.
교육부 발표 당일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민족문제연구소 등 466개 역사‧시민 단체로 구성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는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며 정부의 국정화 시도 철회를 촉구했다. 이들은 "국가 주도의 단일한 교과서 즉 국정교과서는, 국가가 필요 이상의 강력한 통제권과 감독권을 갖고 있어 헌법이 강조하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위배된다.
뿐만 아니라, '폭 넓게 교과서가 채택되어 교사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유엔의 역사교육 권고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학생들의 사고력을 획일화·정형화시키는 교과서 국정화가 다원성·다양성을 추구하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한다는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서어리 기자, 「10월 12일, 역사 쿠데타 선포하는 날」, <프레시안>, 2015.10.12.)
전국 60개 대학 역사 전공 학생들과 졸업생들도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규탄 및 철회 요구 역사학도 긴급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역사 교과서 서술이란 정권의 일방적인 지침과 통제로부터 벗어난, 집필자들의 양심과 자율에 따라야 마땅하다. 현행 교과서 검정제도는 바로 과거 국정 교과서 체제가 남겼던 역사 왜곡과 일방적 서술 등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국정화 전환 결정에 대해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에선 동아시아 역사 왜곡의 주범으로 비판받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하지 못할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비난이 확산되었다. 오랫동안 일본의 교과서에 대한 정부 개입 반대운동에 참여해온 퇴직 고교 교사 스즈키 도시오는 한국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결정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문에 한숨부터 내쉬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역시 한국은 제멋대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국가구나, 그런 인식이 일본 사회에 확산되지 않을까요?" (「국정교과서, 아베가 웃는다」, 한겨레, 2015.10.14.)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노회찬의 '1인 시위': "대한민국이 유일사상 체제냐, 아니지 않나"
2015년 11월 2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노회찬은 친일·독재 미화 논란을 낳은 "교학사 교과서가 한 건도 (일선 학교에서) 채택되지 않았다고 국정화를 하는 것은 선거에서 떨어진 사람이 쿠데타를 한다는 것과 똑같다"며 정부와 여당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교학사가 채택이 안 되면 그런 역사의식에 국민 다수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에 정부 여당이 반성을 (먼저) 해야 한다. 왜 균형을 정부가 잡으려고 하느냐. '올바른 교과서'라 하는데 올바르다 아니다를 판단할 능력과 자격은 국민에게 있다."
"대한민국이 유일사상 체제냐, 아니지 않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모든 권력이 대통령 머릿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지금 정부가 자신의 법적 권한으로 입법 예고를 하고 국정화 고시를 하더라도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지금 여론을 보면 (국정화 예고가) 엎질러진 물이 되는 게 아니라 엎질러진 휘발유가 되는 것이다."
('현행 검·인정 교과서 집필진이 정부 주문을 받아들이지 않아 국정화가 불가피하다'는 새누리당 주장에 대해) "8종도 제대로 검정을 못 하는 국가기관이라면 지금 장관직에서 내려와야 하고 대통령에서 내려와야 한다. 식품의약안전처에서는 수만 가지의 식품과 약품에 대해서 검증하고 있다. 시중에 불량 족발이 나돈다고 해서 정부가 직접 족발을 만들어서야 하겠나."
"(국정화 반대) 국민을 용공 세력으로 모는 것은 전형적인 친일 잔당들, 독재 잔당들의 얘기들이다. 스스로 친일을 옹호할 수는 없고, 독재를 옹호할 수도 없으니까 북한을 갖다가 끄집어내서 뒤집어쓰게 하고 있는 것 아니냐."
2016년 11월 16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 야 3당은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중단 및 폐기 촉구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 등 3당 원내대표가 대표 발의했고, 3당 소속 의원 전원(162명)이 찬성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결의안에서 "이번 역사교과서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 아래 졸속적으로 추진됐고, 진행과정 또한 위법했다"며 "무엇보다 이른바 비선실세인 최순실이 개입한 상황에서 국정교과서 추진 역시 국민적 신뢰를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정화 추진을 중단하고, 기존의 검정교과서 체제가 2017년 1학기부터 적용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며 "또 국정화 추진 과정에서 최순실이 개입했는지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6월 11월 23일 노회찬(정의당 20대 국회 원내대표)은 정의당 상무위 회의에서 국정역사교과서에 대해 이렇게 일갈했다.
"역사에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상반된 주장이 가능한 것이 역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교과서는 획일화된 관점만을 요구하고 있다.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이러한 국정교과서를 다시 추진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진정한 획일화 대통령이라고 할 것이다. 세계에서 국정역사교과서를 쓰는 나라는 북한과 그리스 정도에 불과하다. 1992년 헌법재판소 역시 국정교과서보다는 검인정 교과서, 자유발행 교과서가 헌법 정신에 부합하다고 발표한 바 있다. (…) 이렇듯 역사를 획일화한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도 옳지 않고 친일세력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도 옳지 않은 '국정교과서'는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2016년 12월 20일 오전 정의당 의원총회에서도 노회찬은 이렇게 질타했다.
"변화를 바라는 민심의 가장 중요한 희망 중 하나가 바로 국정역사교과서 철회입니다. 국정역사교과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키워왔던 악취 나는 두 개의 꽃, 즉 '획일화'와 '국정화'의 귀결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국민들에게 일방적인 역사의식을 심어주겠다는 반민주적 망상의 귀결이 바로 국정역사교과서인 것입니다. 이러한 반민주적 행태를 중단하는 것이 황교안 대행 체제가 민심을 떠받드는 첫 번째 사례가 돼야 합니다. 또한 국정역사교과서의 교육과정 적용은 원래 2018년부터 다른 과목과 함께 적용하기로 한 것을 박근혜 정부가 느닷없이 고시를 바꿔 2017년부터 적용하기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당시에도 이것이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무리하게 적용시기를 앞당긴 졸속결정이었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황교안 권한대행은 촛불항쟁의 요구와 더불어 이 사업이 애초부터 무리하게 추진되었던 점 등을 감안하여 국정역사교과서의 철회 또는 최소한 2017년 적용유예 방침 등을 확실히 밝힐 것을 촉구합니다."
의원총회를 마친 뒤 노회찬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철회를 위한 전국 시도교육감·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네트워크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 뒤 노회찬은 광화문광장에서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과 함께 국정교과서 철회 촉구 1인 시위를 하며 이렇게 밝혔다.
"정권교체 이전에 가장 확실하게 변화시켜야 할 우선순위 제1호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폐지다."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인 와중에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려는 교육부의 행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권에서도 이 무리한 강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정의당이 앞서서 국정교과서 철회 촉구에 나섰고, 그 시작이 바로 노회찬의 1인 시위였다.
※국정교과서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서부터 검정제 교과서를 쓰고 있었다. '교과서 검정제'는 국가와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민간 출판사들이 교과서를 만들고, 각 학교에서 교과서를 채택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그에 반해 '교과서 국정제'는 교육부 장관이 저작권자로, 국가에서 채택한 교과서 1종으로만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 검정교과서를 사용하던 우리나라는 1973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방안'에 따라 국정화가 되었다. 1974년부터 국사 과목은 국가에서 만든 한 가지의 교과서만 사용했다. 80년대 이후 교과서는 다시 차츰 검정교과서로 바뀌어나갔고 2003년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새로 만들며 검정화를 채택했다. 점차 모든 교과서를 검정교과서로 바꿔나가는 움직임에 갑자기 제동을 건 것은 박근혜 정부였다.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로 국정교과서 제작이 기획되었고 2015년 진짜로 시행할 움직임이 보이자 전국적으로 여러 단체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고 나섰다. 국정역사교과서 방침이 공식 폐지된 것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7년 5월 3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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