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나라가 가난할 때 가족을 위해 조국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간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감동이며 잊을 수 없는 조국 근대화의 역사이다. 박경란 씨의 글로 21명의 파독 간호사들의 삶을 역은 <나는 파독 간호사입니다>(2016.11, 도서출판 정한책방)가 그때 그 시절의 고통과 서러움을 지금은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묘사해 증언해 준다."
이 글은 배병휴 이코노미톡 회장이 <월간 경제풍월>(209호, 2017년 1월호)에 실은 기사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의 간호사 및 광부들은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통해 서독으로 파견됐다. 당시 빌리 브란트는 서베를린 시장이었다(1957~1966). 1973년 11월 독일 사민당 브란트 정부는 '외국인 노동자 모집금지법'(Anwer bestop)을 국회에서 통과시켰으나 한국과 필리핀에서 취업하는 간호요원들에 한해서는 취업허가를 주었다.
파독 광부․간호사의 규모는 광부의 경우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6명, 간호요원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총 1만1057명이었다.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총 10만1530천 달러로, 1965~1967년의 송금액의 경우 총수출액 대비 각각 1.6%, 1.9%, 1.8%였다. 이는 가득률이 100%인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파독 광부․간호사들 가운데 약 60%는 독일에 잔류하거나 유럽, 북미 등 제3국으로 재이주해 일부 재외한인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기여했다. (진실화해위원회, 「파독 광부.간호사의 한국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960년대부터 한국인에게 독일은 '키다리 아저씨' 이미지였다. 최근 인기몰이 중인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이런 한독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은 당시 세계 최빈국 한국에게 돈을 빌려주고, 돈 벌 기회를 준 고마운 나라였다. 63년과 66년 광부 8000여명과 간호사 1만여 명이 차례로 독일로 건너가, 75년까지 송금한 1억153만달러는 경제성장에 톡톡히 기여했다." (「'선망' 독일의 민낯」, 한국일보, 2014.12.27.)
광부․간호사 파독은 독일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1960년경 서독은 완전고용상태에 도달했고 정치적인 이유로 1961년에는 동독으로부터 노동력 유입이 중단됐다. 그 결과 병원의 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인력과 탄광의 노동인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독일정부는 남부 및 동부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일부 지역 그리고 일본, 한국 등지에서 ʻ단기방문 노동자(Gastarbeiter)ʼ 제도로 노동력을 유입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려 했다.
2004년 4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 중앙당사에 뜻밖의 손님 두 분이 방문했다. 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 오복자 위원장과 장광렬 사무국장이었다. 이들은 133인의 '민주노동당 의회진출과 한국 정치개혁을 바라는 유럽동포 지지선언'을 발표한 뒤 당원들의 특별당비와 후원금을 합친 '2200유로 전달식'을 가졌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중앙선대본부장은 유럽·미주등에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재외동포들의 성원을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이번 총선에서 좋은 결과를 내 강력한 진보야당으로서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70년대에 독일로 이민을 간 이후 계속 간호보조사 일을 해오고 있는 오복자 위원장은 "프랑크푸르트, 루르 등 탄광지대와 베를린, 함부르크에 지구당의 각 지회가 있으며 지회 모임을 통해 당의 강령이나 정책을 토론하고 동포사회에 민주노동당을 홍보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독일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상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두 딸을 대학교육을 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가장 먼저 실현돼야 할 민주노동당의 공약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2017년 9월 27일 서울 성북구 독일대사관저. 50여 년 전의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행사가 열렸다. 한국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양동양 회장은 "대한민국 정부는 파독 광부, 간호사에 대해 예우가 없다"는 쓴소리를 했고, 윤행자 재독한인간호사협회 회장은 "대한민국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역사로 남겨서, 후세에 남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면서 재독 한인 광부·간호사 출신 중에 생활 형편이 넉넉지 못해 고국을 찾고 싶어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정부의 지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회찬 정의당 20대 국회 원내대표는 "조국을 위해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들을 하는 데 있어 깊이 상의를 해서 실현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며칠 뒤인 2017년 10월 5일 노회찬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기획전시 중인 <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독일로 간 한국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전했다.
"50여 년 전 독일로 파견된 한국 간호사와 광산노동자들의 이야기는 한 측면만 부각된 채, 정통성이 부족한 군사정권의 홍보수단으로만 이용된 측면이 컸습니다. 그러나 지금 역사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독일로 간 한국간호사들의 이야기>는 그간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한 여러 사실들을 일깨워 줍니다.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은 느낌입니다. 남은 추석연휴 기간 중 시간과 여건이 되시는 분들께 강추합니다. 지난 9월 27일 서울 성북구 독일대사관저에서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날 윤행자 재독한인간호사협회 회장의 연설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파독간호사로 일하다가 이제 40년째 독일에서 살고 있는 윤회장은 독일노동자와 비슷한 노동조건을 보장해준 독일국민에게 보답하는 심정으로 지금도 독일에 온 이주노동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면서 40여 년 전 자신들이 독일로부터 받았던 대접을 생각해서라도 한국사회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처우에 더 노력하길 당부한다는 말씀을 절절하게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기억 될 감동적이고 훌륭한 전시회를 마련해주신 송인호 서울역사박물관장님 등 관계자 여러분 이희영 대구대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독일대사관저의 행사가 있기 몇 달 전 6월 6일 현충일 추념식을 보며 '애국이란 무엇일까요?'를 물은 노회찬은 페이스북에 <노회찬의 난중일기>를 올렸다. 이어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를 불러낸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전문>이 교과서에 실리길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2017년 6월 6일 오늘은 현충일. 곡해되고 오염되기까지 한 <애국>의 개념이 대한민국 국가원수에 의해 건강하게 복원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현충일 추념>사에서 '애국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모든 것'이라 규정하면서 6-70년대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며 일했던 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언급했다.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 불렸던 그 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고 그것이 애국이다'면서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린다'고 했다. 정녕 이것이 애국이라면 그 나라는 분명 '나라다운 나라'일 것이다. 오늘 발표된 '현충일 추념사 전문'이 교과서에 실리길 희망한다. 자라나는 수많은 후세들이 제대로 된 애국을 말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노회찬이 교과서에 실리길 희망한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전문>에는 파독 광부와 파독 간호사는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의 여공들과 함께 '애국자'로 등장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조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은 독립과 호국의 전장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여러분과 함께 기억하고자 합니다. 1달러의 외화가 아쉬웠던 시절, 이역만리 낯선 땅 독일에서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 돼준 분들이 계셨습니다. 뜨거운 막장에서 탄가루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석탄을 캔 파독광부, 병원의 온갖 궂은일까지 견뎌낸 파독간호사, 그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조국경제에 디딤돌을 놓았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 천장이 낮아 허리조차 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에도 감사드립니다. 재봉틀을 돌리며 눈이 침침해지고, 실밥을 뜯으며 손끝이 갈라진 그 분들입니다.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 불렸던 그 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제는 노인이 돼 가난했던 조국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 분들께 저는 오늘,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립니다. (…) 국가를 위해 헌신한 한분 한분이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는 그 자체로 온전히 대한민국입니다. 독립운동가의 품속에 있던 태극기가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던 수많은 능선위에서 펄럭였습니다. 파독광부·간호사를 환송하던 태극기가 5.18과 6월 항쟁의 민주주의 현장을 지켰습니다. 서해 바다를 지킨 용사들과 그 유가족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애국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그 모두가 애국자였습니다."
'동백림 사건'의 희생자 윤이상, 그리고 브란트와 노회찬 : "권력이란 이렇게 쓰여야 한다"
"(동백림 사건) 당시 정신적, 육체적으로 워낙 심한 악형을 당해 아직도 가끔 악몽을 꿀 정도다.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이 평생토록 나를 좀먹고 있다. 지금도 그때 얻은 당뇨병과 신장병 등과 함께 그 병발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인간을 완전히 파괴시키고 내팽개치는 정권의 비인간성이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는 음악 애호가이며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어 나와는 수십 년 지기로 지내고 있다. 또 故 빌리 브란트 전 총리도 여러 가지 많은 도움을 줬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독일 정부도 동백림사건과 관련, 나의 석방에 백방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은혜를 베푼 나라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 이후 25년간 고국을 등지고 살아온 윤이상이 <연합뉴스>와의 인터뷰(1994.9.1.)에서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억은?', '오랜 독일 체제 기간 중 도움을 준 독일인은?'이라는 질문에 대해 답한 것이다. 독일에서 최초 출판된 <윤이상, 상처 입은 용>(1977)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과, <생의 한가운데> 등으로 유명한 루이제 린저의 대담집이다. '상처 입은 용' 윤이상은 "생전 한반도의 휴전선 남쪽을 제외하고는 세계 음악계에서 현존하는 5대 현대음악가로 인정받은 위대한 음악가"로 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례에 걸쳐 박정희정권의 중앙정보부(중정, 부장 김형욱)는 '동베를린(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공작단' 사건,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공안사건으로 알려진 이른바 '동백림 사건을 발표했다. 중정이 밝힌 사건 개요는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을 비롯한 교수 예술인 의사 공무원 광부 등 194명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행위를 하거나 평양을 방문하고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중정은 당시 사건관련자 중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하는 등 66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1967년 12월 3일 선거공판에서 법원은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해 조영수·정규명에게는 사형, 정하룡·강빈구·윤이상·어준에게는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40년이 흐른 2006년 11월 26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부정총선 규탄시위 등을 무력화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중정을 통해 피의자들의 단순 대북접촉 및 동조행위까지도 국가보안법과 형법상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해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어 위원회는, 정부는 △해외거주 관련자들에 대한 불법 연행 △조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간첩죄의 무리한 적용과 범죄 사실의 확대·과장 등의 잘못에 대해 이 사건 관련자들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에 앞서 2006년 3월 30일 1967~73년 동백림사건, 1975년 주한미군 철수와 긴급조치 9호 등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외교문서들이 공개됐다. 이 가운데 동백림사건 관련 외교문서만도 총 14권, 4421쪽에 달했다. (이영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한-서독, 동백림 관련자 감형 '비밀합의'-[외교문서 공개] ① 무리한 간첩죄 적용 동백림사건」,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06.3.31.)
외교문서 공개를 통해 새로 밝혀진 사실들은 당시 서독 정부가 한국 정부에 대한원조중단 등의 압력을 통해 사건관련자들의 감형을 집요하게 요청했으며, 결국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특사의 방한을 계기로 양국 정부가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은 관련자들의 석방과 감형에 합의했다는 점 등이다.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에 대해 서독 정부와 베를린 필하모니를 이끌던 상임지휘자 카라얀 등 예술인들이 진정서를 통해 석방을 직간접적으로 촉구한 사실도 드러났다. 독일 정부의 외교적 압력에도 윤이상 등에 대한 검찰 구형과 재항소심 판결(1968.12.)에서 중형이 선고되자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은 최후의 수단으로 1968년 12월 12일 브란트 외상을 통해 외무부의 파울 프랑크 제1정치국장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특사로 보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시 김영주 주독대사는 한국 정부에 "독일 측으로서는 이번 특사파견을 본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최후 기회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보고했다. 1969년 1월 17일 작성된 <독일 특사와의 교섭결과 및 현안 타결> 문서에 따르면. 윤이상 등 4명은 형 확정 후(사형 포함) 늦어도 1971년 말까지 석방한다는데 합의했고, 양국은 또 석방된 이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독일에 돌아갈 수 있다는 데 서명했다. 2년 뒤 석방된 윤이상은 훗날 동백림사건에 대해 "인간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분노의 사건"이며 "이를 극복하고 소화시키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5년 11월 3일 조계사에서 한국이 낳은 세계적 현대 작곡가인 윤이상 선생(1917-1995)의 10주기 추모식 및 음악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각계 인사들과 일반 신자 2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도 참석해서 함께 추모했다. 이날 같은 시각 북한의 대표적 사찰인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보현사에서도 윤이상 10주기 추모식이 거행됐다. 부인 이수자 여사는 서면 인사말을 통해 "10년 전 그의 장례식에는 가까운 독일 친구와 가족,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플루트 곡의 연주와 스님의 독경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언의 영결식이었다"면서 "10주기를 맞는 오늘 강산이 변한 것 말고도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지난 세월을 돌이켰다. 2010년 6월 2일 지방선거 날.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은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윤이상평화재단(이사장 신계륜) 후원모임에 참석했다. 노회찬은 통일을 염원하던 윤 선생의 바람과 달리 경색된 남북한 상황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 밝은데, 윤이상 선생의 가치가 더욱 더 빛나는 것은 지금이 전보다 어두워졌기 때문인 것 같다."
2017년 9월 14일 노회찬 정의당 20대 국회 원내대표는 '윤이상 선생 탄생 100주년 고봉인 첼로 연주회'에 참석한 뒤 트위터에 이런 글귀를 적었다. 이 연주회는 그가 간 마지막 음악회였다고 한다.
"고봉인 연주회. 금호아트홀입니다. 오랜만에 귀가 호강하네요. 낮에 들었던 말 안 되는 소리들을 깨끗이 씻어주네요."
2018년 5월 9일 노회찬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1주년 기념으로 대통령 부부에게 책 두 권을 선물했다. 문 대통령에게는 "평화와 번영의 길목에서 <조난자들>을 안아주십시오"라는 글과 함께 탈북민들의 모습을 솔직하게 담은 주승현의 <조난자들>을, 김정숙 여사에게는 "통영의 동백나무 너무 고맙습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아버지의 유품을 들고 아버지의 삶을 찾아 나선 아들의 이야기인 <아버지를 찾아서-통영으로 떠난 시간여정>(김창희 지음)을 선물했다. (※ 지은이 김창희는 노회찬의 고교 동창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 나눈 친구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아버지는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지역에서 내려와 통영에 정착했던 월남인이다.) 1년 전인 2017년 김정숙 여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문 대통령과 함께 독일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통영에서 가지고 간 동백나무 한 그루를 윤이상 묘지에 심었다. (이 동백나무는 2018년 2월 윤이상의 유해가 통영국제음악당으로 이장될 때 함께 옮겨와 통영 윤이상 하우스 정원에 심어져 있다).
김정숙 여사는 이때 "윤 선생이 살아생전 일본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 왔다가 정작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이야기에 저도 울었다"며 "이번에 통영에서 동백나무를 가져왔는데 선생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인우, 「노회찬이 사랑한 '마음의 고향'-통영 맛집들에서」, <음식천국 노회찬>, 일빛, 2021)
당시 국내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보수적인 여론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일갈했다.
"대한민국이 윤이상 선생께 최소한의 예의를 표한 것 같아 기쁘다. 권력이란 이렇게 쓰여야 한다."
닫는 글 :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
1989년 10월 24일 <시사저널> 초청으로 국제사회주의연맹(SI)의장이자 서방세계와 제3세계를 잇는 남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브란트가 한국을 방문했다.
10월 26일 브란트는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주최한 환영리셉션 인사말을 통해 "자유는 제도 이상의 무엇"이라는 자신의 소신을 강조하면서 "한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발전뿐만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 발전과 안정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에 앞서 김대중 총재는 환영사를 통해 "브란트 의장은 유신독재 이후 우리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외국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라며 지난 1980년 자신의 사형선고 때에도 구명운동을 한 인사라고 회고했다. (<동아일보>, 1989.10.27.)
브란트는 재야신당을 추진 중인 장기표 전 전민련 사무처장, 윤정석 전농련 의장·전민련 공동의장, 단병호 지역·업종별노조전국회의 위원장, 박계동 전 전민련 대변인 등을 만나 한국의 노동.농민운동 및 인권 상황에 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브란트의 초청으로 이뤄진 10월 28일 오전 모임에서 참석자들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상황과 세계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국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장기표는 신당 추진의 의미를 설명했으며, 브란트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SI와의 접촉 및 관계를 원한다면 이를 적극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또 브란트는 "정당 결성에 진전이 있으면 SI관계자를 파견, 상호 협력방안을 논의하겠다"고 말하고 "오는 11일 열릴 SI 내부회의에서 신당 추진 인사들이 의견을 피력할 기회는 물론 한국의 노동자.농민 문제의 심각성이 논의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겨레>, 1989.10.29.)
장기표가 추진하던 이른바 '재야신당'은 1년 뒤 '민중당' 창당(1990.11.10.)으로 이어졌고, 1992년 14대 총선(3.24.)을 앞두고 노회찬 계열의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와 통합한 뒤 선거에 참여했다. 하지만 총선 결과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고 정당 득표율도 1.5%를 획득함으로써 정당등록이 취소됐다. 민중당의 등록 취소 이후 장기표는 민중당 해체를 선언하고 새로운 정치적 진로를 모색했다.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등 민중당 당권파는 얼마 안 가서 민자당, 신한국당에 입당했다. 노회찬과 인민노련을 함께 한 정태윤도 이 길에 합류했다. 입당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이러했다.
"과거의 급진적 방법론은 잘못된 것이었다. 한국의 정치현실에서는 독자적인 진보정당 진출은 불가능하다. 진보정치의 개념과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 진보는 상대적 개념이며 지금은 김 대통령(YS)의 개혁이 진보다. 적극적으로 개혁에 동참해서 개혁을 완성시켜야 한다."
노회찬의 정치적 삶의 여정은 이들과는 달랐다. 인민노련 사건으로 연행(1989.12.23.)돼 14대 총선 직후 만기출소(1992.4.1.)한 노회찬은 진보정당추진위(진정추) 결성(1992.4.15.)을 시작으로 줄곧 합법 '진보정당의 설계자‧개척자'의 길을 걸었다. 민주노동당이 창당한 2000년 1월 30일은 창당 한 것만으로도 노회찬의 "인생의 목표의 반이 이루어진 날"이었다.
"1992년 4월 1일 청주교도소를 만기 출소한 이래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을 지배한 것은 '진보정당 건설'이었다. 그 해 4월 민주당 해산과 함께 진보정당은 이제 끝났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갈 때 '진보정당추진위'로 남은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항해를 떠났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고난의 행군'이 수년 간 계속될 때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진보정당 만들기'만 하다가 끝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또 어떠랴. 그러나 1997년 봄부터 모든 일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 후보를 내고 이를 바탕으로 창당한다는 계획은 1999년까지 순조롭게 실현됐고, 마침내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민주노동당의 오늘을 아직 성공이라 부를 순 없다. 그러나 창당 4년 만에 민주노동당이 이룬 성과는 한국 정당사상 유례없는 일이기도 했다. 국회의원 20명에 100억 정도의 자금이 있어야 당을 하나 만들 수 있다는 한국정치의 통념을 깬 것은 바로 민주노동당이었다." (노회찬, 「(후기) 한국정치 최대의 히트 상품」, <힘내라 진달래>, 사회평론, 2004)
2018년 7월 '진보정당의 설계자‧개척자' 노회찬은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인생의 목표의 반"을 이룬 노회찬. 그의 "인생의 목표의 나머지 반"은 2021년 현재까지 이뤄질 기미를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다. 오늘의 기록이야기 <빌리 브란트와 노회찬> 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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