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나는 고발한다. (J'accuse…!)" : '진보적 인문주의자' 장 조레스와 '드레퓌스 사건'
장 조레스가 프랑스인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사람'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이며, 신학, 가정, 국가 모두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지, 사람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그건 부정해야 할 사상이요, 족쇄요, 끔찍한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사회주의와 자유>, 1898)고 비판한, '사회주의는 계급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길'을 닦은 진보적인 인문주의자였다. 드레퓌스 사건을 마주한 조레스의 태도는 그것을 잘 보여줬다.
1898년 1월 13일 프랑스의 일간지 <로로르> 1면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글쓴이는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 에밀 졸라(Émile Zola)였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J'accuse…!)>라는 공개서한을 써서 드레퓌스의 무고함과 무죄를 주장했다. 본래 이 공개서한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소극적 제목이었는데, 주필인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보다 직설적인 제목으로 바꾸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 '드레퓌스(Dreyfus Affair) 사건'이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후, 프랑스의 포병대위 드레퓌스에 대한 간첩 조작사건으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건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는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만들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만들었다. 그의 간첩혐의는 프랑스 사회가 양분된 정치적인 스캔들이었다.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가 양분되어 격렬하게 투쟁했다. 유대계 프랑스 장교인 드레퓌스는 1894년 군사정보를 독일측에 통보했다는 혐의로 군적과 계급이 박탈되고, 종신형에 처해져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악마의 섬'(Ile du Diable)에 유배됐다. 2년 뒤 무죄를 증명하는 유리한 증거가 발견되고 진범이 밝혀졌지만 엄청난 파장을 두려워한 군 당국은 덮어버렸다. 이에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시작으로 정치투쟁으로 확대됐고 1906년 최고재판소에 의해 무죄로 확정돼 사건이 종결됐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나는 고발한다>를 외친 에밀 졸라의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한 것은 진보적 인문주의자인 조레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졸라에 대한 졸속 기소는 거짓이고 비열하다"는 하원 연설 이후 조레스는 의회 내 드레퓌스 진영의 리더가 됐다. 그는 법정에서 "에밀 졸라는 조국에 대한 고귀한 봉사로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 군부와 가톨릭교회가 왜 졸라를 증오하는지, 왜 그를 기소하는지 잘 알고 있다"며 이렇게 증언한다.
"그들은 기적에 대한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해석을 견지해 온 사람, 그 인간성을 기소했다. 비참한 프롤레타리아의 향상을 제시한 <제르미날>의 인간성을,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조국에 온갖 혼란을 일으키는 이 불성실하고 오만한 무책임으로부터 군 수뇌부를 구하게 될 사람을 기소했다. 이렇게 그들은 이분을 기소하고 몰아낼 수 있겠지만, 이 자리에서 이분 앞에 우리 모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 나라 모든 자유시민의 뜻임을 나는 확신한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진실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과, '극단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사회를 어떻게 광기로 몰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많은 혼란을 겪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 국민 전체가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는 오늘날 '똘레랑스(tolérence)의 프랑스'를 만들었다.
※영화 <빠삐용>(Papillon), 노회찬과 드레퓌스
2004년 정운영과의 인터뷰를 보면 영화 <빠삐용>이 나온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정운영 : 두고두고 생각나는 영화는 무엇이고, 배우로는 누가 있습니까?
노회찬 : 감옥에서 본 탈옥 영화 <빠삐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희랍인 조르바>의 앤서니 퀸을 매력적인 배우로 생각합니다.
노회찬에게 잊혀지지 않는 영화 <빠삐용>을 보면, 드레퓌스가 유배된 '악마의 섬'이 나온다. 수차례의 탈옥과 재수감을 거쳐 빠삐용이 마지막 수형지로 머물렀던, 악마의 섬, 망망대해가 보이는 절벽위의 바위에 걸터앉은 빠삐용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그 때 나이든 수형자가 다가온다. 그리고 빠삐용에게 도전적으로 묻는다.
"당신 누구야? 당신이 누구길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그 자리는 드레퓌스 대위님의 자리란 말야!"
'악마의 섬'을 배경으로 한, 역사 속의 실존인물인 드레피스와 빠삐용(앙리 샤리에르)은 약 45년의 시차가 있었다. 그런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 대위의 이름이 튀어 나온 것은 아마 그곳의 죄수들이 그 유명한 사람, 드레퓌스 대위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노회찬, "프랑스 국민과 돌아가신 에밀 졸라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2005년 9월 29일 광주고검에 대한 국회 법사위의 국정감사장. 이른바 '삼성 X파일'을 통해 '삼성 떡값'의 전달책으로 지목 받아온 홍석조 광주고검장의 용퇴를 요구하는 의원들과 홍석조 사이에서 설전이 오가던 중에 주성영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의 홍석조 광주고검장에 대한 옹호성 발언이 논란이 됐다. 주성영은 김상희 법무부 차관에게 사퇴를 종용했다는 자신의 사례를 들며 "우리 고검장께서는 프랑스 드레퓌스 대위 사건을 알고 계시죠?"라고 홍 고검장에게 질의를 던졌다. 이어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가져야할 덕목으로 지적한 게 있다"며 "고검장께서는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물은 뒤 "개인의 곤혹스러움과 개인적인 곤경을 인내로서 이기고 근거도 없는 의혹으로 몰아넣고 있는 세력을 용서하고 끝까지 검사로서의 직위를 지켜낼 것을 약속할 수 있습니까"라고 감쌌다. 주성영의 발언에 대해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질타했다.
"조금 전에 법사위원 한 분이 홍석조 광주고검장의 사건과 관련해서 드레퓌스 사건을 언급하면서 억울한 누명을 쓴 한 예로 적용한 것에 대해 드레퓌스 사건을 적극 변호했던 에밀 졸라와 프랑스 국민에게 제가 사과드립니다. 연결시킬 사례를 연결시켜야지 말도 안 되는 사례를 적용시킨 것에 대해 프랑스 국민과 돌아가신 에밀 졸라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그에 앞서 2005년 5월 6일 여야 국회의원 113명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노회찬이 함께 한 것은 당연했다. 그 배경은 5월 3일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사망·상해·실종 사건과 그밖에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과 조작의혹 사건"을 진실규명 대상으로 규정했으나,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제외"하도록 해 지난 1992년 강기훈 씨가 징역 3년의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이 사건은 조사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노회찬 등 서명 의원들은 "(유서대필 조작으로) 김기설의 분신은 숭고한 의미를 빼앗겼고,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던 강기훈이라는 청년에게는 죽어가는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준 반인륜의 천형과 패륜아로서의 굴레만이 남게 됐다"며 "우리의 이성과 양심은 참으로 오랜 동안 어둠의 동굴에 갇히게 됐다"고 회고했다.
또 "아직도 그 당시 사건에 관여했던 인사들은 검찰 등 권력기관의 주요 직책에 있지만, 지금까지 반인륜적, 반인권적 유서대필 사건의 진상은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강성준, 「"유서대필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국회의원 113명 진상규명 요구 서명 동참」, 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하루소식> 2806호, 2005.5.6.)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1991년 노태우 정권 때 일어났다. 당시 정권의 실정에 항의하는 분신이 잇따르는 가운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가 분신한 이후, 그의 친구인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처벌됐다. 강기훈은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1994년 만기 출소했다. '사건' 당시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노회찬은 부모님께 부친 편지(1991.5.11.)에서 안타까움과 분노의 심정을 피력했다.
"꽃이 열매를 남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특히 요즘 같은 계절에는 생명의 소멸이 또 다른 생명의 창조로 이어지는 상징적 例를 보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기만 합니다. 살구는 벌써 홍조를 띠기 시작했고 복숭아와 딸기도 빠르게 커 가고 있습니다. 다섯 명의 죽음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화려한 젊음들이 꽃처럼 피고 졌지만 그들은 그냥 가버린 것이 아니라 크고 알찬 열매들을 우리 속에 남기고 갔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도 있지만 이들의 죽음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끝까지 살아 싸우고 싸워서 이길 것을 강력히 부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시대의 흐름과 민중들의 바람을 따라가지 못해 낙오하는 무리도 눈에 띄는군요. 최근 물의를 빚은 김동길이나 김지하의 경우는 단순히 낙오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편으로 넘어가 총구를 거꾸로 겨누는 상태이지요. 마치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멈추려는 사마귀의 허망한 노력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건 발생 16년 만인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2012년 재심이 개시됐으며, 2015년 5월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강기훈 유서대필은 조작이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24년 만에 비로소 완전히 누명을 벗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2012년 간암 판정마저 받은 강기훈은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지탱해야 했다. 재심 공판이 열린 2014년 1월 16일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 강기훈은 최후진술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누구에게 욕을 해야 할 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면서 사건의 책임자들인 '강신욱, 신상규, 송명석, 안종택, 남기춘, 임철, 곽상도, 윤석만, 박경순, 노원욱, 임대화, 부구욱, 박만호, 전재기, 정구영, 김기춘'의 이름을 읊었다.
※ 참고로, 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은 박근혜 정부 대통령 비서살장을 지낸 김기춘이었고다. 강신욱 당시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지내고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역임했다. 2021년 "아들 화천대유 퇴직금 논란"과 관련해 언론의 조명을 받은 곽상도 국민의 힘 20대 국회의원은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때 담당 수사검사로 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은 "저는 당사자로서 재판을 받았지만 제 주변에서도 91년도의 기억을 갖고 똑같이 아파하고 똑같이 괴로워하고 삶이 비틀린 수많은 사람들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아픔이 오늘의 판결을 통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게 제 마음이고 제 바람입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2015년 5월 30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누가 그를 모함했나?-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24년의 진실>에 나온 주치의 강용주는 제작진에게 강기훈이 암으로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며, "6개월이 될 수도 있고 1년이 될 수도 있는 마지막 불꽃같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자신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 우리 사회가, 국가가 '정말 미안하다. 우리가 잘못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라는 말을 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황서연 기자, 「'그것이 알고 싶다' 강기훈, 암 투병 중 "국가.사회적 차원 사과 필요해"」, <티브이 데일리>, 2015.5.31.)
노회찬과 '삼성X파일 사건': "나를 기소하라", "나도 기소하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불의와 거짓에 맞서 싸운 것이라면, 노회찬의 의원직 상실을 가져온 한국의 '삼성X파일 사건'도 비슷한 맥락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노회찬의 오랜 길동무이자 변호인이었던 박갑주 변호사는 '삼성X파일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삼성 엑스파일 사건'은 그와 같은 노회찬의 '이중적 의미의 법조인 삶'—'다년간 법무부의 보호와 관찰 아래 고락을 함께 한 법조인', '국회 법사위 소속 국회의원으로 법조권력의 감시자'(필자 주)—의 상징적 사건이다. 그것은 2004년 17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겨우 1년이 지난 2005년 8월부터 시작되어,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노원병에서 재선됐지만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다시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선으로 당선되어 2018년 여름 생을 마감하기까지 정치 인생 14년 전체에 걸쳐 정치인으로서 그의 운명에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05년 8월 18일 떡값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오늘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떡값검사 7인의 실명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그 사실을 미리 보도자료에 담아 배포했다. 면책특권 범위 안이니 밖이니 말들이 무성하다. 나를 기소하고 싶은가? 기소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우리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내용은 알리는 것이 도리다. 나라와 국민에게 도움 되고 옳은 일이라면, 법의 잣대에 개의치 않고 나는 한다. 나의 오늘 행동이 공익에 반한다면, 국민이 알 필요도 없는 내용을 공개하고 부당하게 사리(私利)를 추구했다면, 스스로 면책특권을 포기할 것이다. 나 스스로 나의 손목에 수갑을 채울 것이다. (…)
옳다면 해야 한다. 다시 또 이런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나의 행동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나를 기소하려면 하라」, 2005.8.18.)
2007년 5월 21일 서울중앙지검이 명예훼손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노회찬을 기소하자,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은 옥중편지를 인터넷 언론 <레디앙>에 보냈다. (김성환, 「노회찬과 함께 나를 기소하라」, <레다앙>, 2007.5.23.)
김성환은 무노조 경영을 철칙이자 금과옥조로 해온 삼성과의 15년간 싸움을 이끈 장본인이자 산 증인으로, 엠네스티 국제사면위원회 양심수에 선정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의 옥중편지 일부를 소개한다.
"검찰의 떡값 실명 공개한 노회찬 의원의 기소를 환영한다. 노회찬과 함께 기소되는 영광을, 기소인 연판장을 돌리자."
"안기부 도청 테이프 녹취록에 나타난 떡값검사 이름을 술안주로 삼았던, 글의 재료로 삼은 모든 국민들 스스로 나를 기소하라는 양심선언을 하고 연판장을 만들자. 그리고 이번 재판에 동참해 검찰에 힘을 실어주자. 그 떡값검사 실명 공개 고소인 연판장에 노회찬과 함께 삼성 재벌에 의해 구속돼 국제 엠네스티 양심수로 선정된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성환의 이름이 기록된다면 그만한 영광이 없을 것이다."
'나는 고발한다'로 졸라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의 고소로 재판에서 1년 징역형과 3000 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은 졸라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뒤 결국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898년 반드레퓌스파들은 조레스에게 "생디카의 노예, 조국 없는 유태인들, 배신자 드레퓌스를 변호한 졸라를 옹호했다"며 그가 가는 곳마다 "졸라 타도", "조레스 타도"를 외치며 집요하게 공격했다. 결국 선거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조레스는 의원직을 잃게 된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이런 문장을 끝을 맺는다.
"그대 안에서 진실과 정의는 어김없이 잠 깨는 새벽을 맞을 것이며, 언제나 영웅적으로 떨쳐 일어날 것이다."
삼성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던 날(2013.2.14.) 노회찬은 '국회를 떠나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을 맺는다.
"(…)시대착오적 궤변으로 대법원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보호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저는 묻습니다. 지금 한국의 사법부에 정의가 있는가? 양심이 있는가? 사법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저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그런 거대 권력의 비리에 맞서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대법원 판결은 최종심이 아닙니다. 국민의 심판, 역사의 판결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오늘 대법원은 저에게 유죄를 선고했지만 국민의 심판대 앞에선 대법원이 뇌물을 주고받은 자들과 함께 피고석에 서게 될 것입니다.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오늘의 사법부에 정의가 바로 설 때 한국의 민주주의도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오늘 국회를 떠납니다. 다시 국민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애국',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 "사회주의자에게도 조국은 큰 의미를 가진다"
조레스에게 사회주의 원칙은 바로 '인간'이며, 따라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익과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에게서 폭력은 부정되며 반전평화가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된다. 그가 공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이며 사회주의자인 이유이다. (배성인, 「조레스의 '인본주의적 사회주의'」, <월간 워커스>, 20j 호, 2016.7.28.)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슬슬 감돌던 시기 조레스는 반전평화론으로 인해 '친독일파'로 찍혀 애국주의자들의 표적이 된다. 개혁주의 노선을 프랑스 사회주의의 주류로 올려놓고 나서도, 노동계급과 농민을 비롯한 대중의 칭송을 받고도, 고립과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잔잔한 구름이 폭풍우를 품고 있듯 자본주의는 그 안에 전쟁을 잉태하고 있다." 1905년 조레스가 예고한 말이었다. (막스 갈로, 「프롤로그: 조레스를 기억하다」, 막스 갈로, 노서경 옮김, <장 조레스 그의 삶>, 당대, 2009)
1907년 8월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제2차 인터내셔널 대회는 계속된 분과위 토의 끝에 국제긴장으로 전쟁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사태에 대면하여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은 전쟁에 반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로부터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 전야까지 2차 인터내셔널은 전쟁을 억지하려는 사회주의 본연의 뜻을 거듭 표명하고 미완이지만 이 뜻을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그런 유럽 반전평화운동의 지도자는 바로 조레스였다. (노서경, 「조레스의 반전(反戰)과 프롤레타리아: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회에 주목하여」,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마르크스주의 연구>, 11권 3호, 2014)
조레스는 프랑스혁명의 전통을 중시하며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자에게도 조국이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애국자였다. 다만 그에게 애국은 반전평화였고, 자유와 평등의 한 수단이었기에, 그의 애국심은 애국주의와 부닥친다. 그리하여 1914년 7월,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덮쳐온다. (김수민, 「부당하게 고통 받는 '한 인간'을 위한 사회주의: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지도자, <장 조레스 그의 삶>」, <오마이뉴스>, 2009.11.13.)
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사건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지도자 장 조레스의 암살이었다. 조레스는 1914년 7월 31일 우익 프랑스 청년에게 암살당했는데, 그의 암살은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과 함께 1차 세계 대전을 촉발시킨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막스 갈로, 노서경 옮김, <장 조레스 그의 삶>, 당대, 2009)
그가 암살당하자 유럽대륙에서 반전의 목소리는 자취를 감춰버렸고,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휴머니스트 노회찬, 반전평화주의자 노회찬 : "우리가 만난 정치인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정치인..."
노회찬 사후 세 번의 앵커 브리핑으로 그를 추모한 jtbc 손석희 사장은 tbs 특집 다큐 <함께 꾸는 꿈, 노회찬>에서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따뜻한 사람, 휴머니스트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게 가장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는 정치적 입장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를 떠나서 '따뜻한 사람이었다…'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그냥 한마디로 휴머니스트가 되겠죠."
노회찬이 떠난 뒤 그를 떠올리며 국회 환경노동조합 김영숙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노회찬 의원님은 음지에서 일하던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우해줬습니다. 우리가 만난 정치인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정치인이셨습니다."
노회찬은 휴머니스트였다. 아니,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소망했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 좋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칭호는 휴머니스트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크다." (정치와평화연구소의 컴퓨터통신, <P&P 정치뉴스>와의 인터뷰, 1995.11.3.)
<경향신문>과의 인터뷰(2011.1.17.)에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만 잘사는 삶이면 되나요. 개인의 삶이 우선돼야 하는 것은 사실이죠. 그렇지만 다들 형편이 어려운데 나만 잘 산다고 과연 내가 기쁠 것이냐. 그렇지 않죠. 그런 점에서 저는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고, 이것이 제 가치관인 휴머니즘의 바탕입니다."
변영주 감독과의 인터뷰에선 이렇게 밝혔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또 어떤 마음과 자세로 세상을 바라봐야 되고 인간관계를 맺어나가야 되는가. 사회적 존재로 처음 출발할 때가 휴머니즘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다른 것은 다 왔다가도 가고, 마치 계절에 따라서 옷이 바뀌는 것처럼 달라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거는 휴머니즘이고요."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한편 노회찬은 '애국과 애국심'을 마치 보수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남북 간의 군사적 대결과 한반도의 긴장을 조장하는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한국의 '얼치기 보수'의 박제된 애국심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20세기의 세계사적 갈등 속에서 배웠듯, 자기 나라가 살기 위해 다른 나라를 희생시키는 애국에는 여전히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함께 잘살 수 있는 애국이어야 하고, 애국이란 이름하에 자신들의 권력욕을 합리화시키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진정한 애국은 그 사회 공동체가 자부심을 갖고 갈등 없이 잘살게 만드는 것이다.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애국이다."
"국민들이 자기 나라에 자부심을 갖는 순간 애국심은 저절로 나온다. 애국심은 강요하거나 교육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은 누구의 역할인가? 그건 정치인들의 역할이다.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이 정치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노회찬의 유고집 <우리가 꿈꾸는 나라>(창비, 2018)의 「전쟁은 선택지가 아니다」를 보면 반전평화주의자 노회찬을 드러내는 글귀가 눈에 띈다.
"저는 그 누구도, 보수라 할지라도 전쟁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보수가 아닙니다. 가짜지요. 극우라면 모를까 건강한 보수라면 절대 전쟁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보수든 진보든 평화와 안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컨대 유럽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의견이 갈리는 문제는 경제나 복지입니다. 전쟁도 불사하자는 주장은 나라를 망가뜨리자는 것일 뿐 보수라는 이름으로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기억했으면 합니다. 평화란 의견이 갈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닫는 글: 조레스의 '크나큰 다수'와 노회찬의 '거대한 소수' :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한… "
1914년 7월 31일 저녁, 파리 몽마르트르 부근 신문사 거리의 식당에서 장 조레스는 극우 민족주의자인 암살자의 흉탄에 맞아 곧 사망한다. 향년 55세. 벨기에 브뤼셀의 인터내셔널 사무국에서 전쟁 억지를 위한 대중 연설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조레스의 피살 소식에 카르모의 광부들은 말을 잃고 오열했다. 그곳의 광부들은 오랫동안 조레스를 지지한 유권자이자 그의 친구였다. 이들이 "우리 조레스, 크나큰 조레스"라고 부른 그 사람은 10년이 지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24년 11월 23일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장됐다. 썰렁한 날씨에 파리 북부와 동부의 노동자들이 행진에 나섰고 카르모의 광부들은 1914년에 이어 다시 이장 운구를 선도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조레스'였다. (노서경, 「해제: 사회주의 정치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음식천국 노회찬>(일빛, 2021)의 작가 이인우는 필자 후기('왜 우리는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일까?')에 이렇게 적었다.
"노회찬에 대한 진정한 발견은 글을 쓰면서부터였다. 발견은 회를 거듭할수록 넓고 깊어졌다. 20188년 7월 27일 그의 영결식 날, 국회 청소노동자들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하던 모습이야말로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민중의 송가였다는 사실을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 사람들은 그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시작한다."
노회찬의 길동무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렇게 회상했다.
"2018년 7월 27일 국회에서 국회 청소 노동자들과 노회찬의 마지막 작별 인사 장면은 그의 바람처럼 서로를 동료로 바라보는 진심과 진심이 통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이 된 '6411번 버스를 아시나요' 역시 사회적 약자를 향한, 또 그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 진심어린 동료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윤철, 「'약자들의 벗', 노회찬」, <노회찬, 함께 꾸는 꿈>, 후마니타스, 2019)
조레스는 '크나큰 다수'라는 말을 즐겨 썼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레스는 사회주의 혁명을 '크나큰 다수'의 '기나긴 혁명'으로 기획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44년 만에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에 대해 한 주간지는 "진보 깃발을 치켜든 '거대한 소수'의 탄생은 현대 정치사에 굵은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계완, '거대한 소수'의 치밀한 승리!, <한겨레21>, 제506호, 2004.4.21.)
2004년 5월 11일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당선자 10명은 <민주노동당 의정연수 대국민 실천선언>에서 이렇게 밝혔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민주노동당은 비록 10석의 의원을 가진 소수정당이지만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많은 노동자·농민 대중조직,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자발적 국민과 함께 '개혁과제 네트워크'를 구성해 진보적 개혁과제를 실현하는 '거대한 소수정당'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 국민여러분이 함께 해 주신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인간적인 사회가 될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보다 빨리, 보다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노회찬은 노동자와 서민 등 거대한 다수의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정치활동과 의정활동을 하는,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의 '거대한 소수' 전략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성공가능성은 확인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실험이 완전히 끝났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전략이나 노선 자체를 폐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실 생각해보면 노회찬의 정치적 삶 자체가 '거대한 소수'와 같았다. 노회찬은 사회 약자들을 대변하고자 했던 '거대한 소수' 정치의 대표였다. 그는 정치인으로 활동한 전 기간에 걸쳐 비록 소수 진보정당 의원이었지만, 노동자, 소상공인, 여성, 장애인 등 사회 곳곳의 '투명인간'들의 잃어버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비를 맞고 함께 우산을 쓰려고 애썼다. 조레스의 '크나큰 다수'와 노회찬의 '거대한 소수', 카르모의 광부들과 국회 청소노동자들로 상징되는 사회 약자들의 삶과 함께, 그들과 함께 하려는 두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으리라고 본다.
2010년 노회찬의 고교 선배이자 오랜 길동무였던 홍세화는 노회찬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우울한 진단으로부터 시작하자. 적어도 향후 20년 안에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다. (…)
살아생전에 진보신당(이나 그 후신이) '제1야당'이 되는 것, 그것은 내가 품고 있는 야무진 꿈 중 하나다. 집권은 아니더라도 국정의 주변부에 머물지 않고 대안과 저항의 든든한 축을 구축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회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홍세화, 노회찬에게 묻다: 진보의 미성숙을 넘어서」,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노회찬과의 만남을 마치고 난 뒤 홍세화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 장 조레스를 호명하며 「만남, 그 후」를 이렇게 정리했다.
"아무리 비관적인 현실이라도, 소수에겐 그래도 탄식보다는 의지가 어울린다 할 것이다. 설사 자본주의의 물신적 가치로 일원화된 사회에서조차도 '사유하는 인간'의 멸종이 선고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 장 조레스가 말했듯이,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진보정치를 향한 실험 역시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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