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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오페라극장 만들자"는 '문화 대통령'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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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제 상황에서 "오페라극장 만들자"는 '문화 대통령'이 등장했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㉕]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 프랑수아 미테랑 上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시리즈 모아보기)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⑯ 들어가는 글 유럽의 사회민주당으로부터,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바로가기)

⑰ 키어 하디 上 민주노동당에서 영국 노동당을 봤다 (☞바로가기)

⑱ 키어 하디 下 민주노동당의 첫걸음..."50년 후엔 진보가 집권할 것" (☞바로가기)

⑲ 켄 리빙스턴 上 영국의 '빨갱이 켄', 지금의 런던을 만들다 (☞바로가기)

⑳ 켄 리빙스턴 下 "한국의 '레미제라블'은 치러지지 않는 장례식장에 있다" (☞바로가기)

㉑ 빌리 브란트 上 독일의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었다 (☞바로가기)

㉒ 빌리 브란트 下 "파독간호사, 파독광부라 하지 말고 '애국자'라 해야 합니다" (☞바로가기)

㉓ 장 조레스 上 국회로 간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그리고 노회찬 (☞바로가기)

㉔ 장 조레스 下 진실과 정의 앞에 선 '삼성 X파일 사건' (☞바로가기)

'문화인' 노회찬, 프랑스의 '문화 대통령' 미테랑과 조우하다 :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나라"

▲노회찬재단 2022년 달력('노회찬의 꿈: 다시, 꿈꾸다') 1월 콘티. (그림: 동화작가 염은비)
2010년 김어준은 노회찬과 인터뷰를 마친 뒤 「만남, 그 후」에 이렇게 적었다. 
"몇 년 전 그를 만나 이렇게 물었었다. 정치를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으냐고. 한 마디로 와 닿게 대답해 달라고. 그는 삶의 보편적 질을 언급하며 이렇게 답했었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 연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브라보. 진보적 결의와 인문학적 소양의 그 절묘한 동거. 이미 어린 시절 정치적 출가를 한 그가, 사욕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그렇게 오랜 세월 지켜내면서도 동시에 경쾌하고 발랄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유형의 진보 정치인이다." (김어준, 「회찬씨, 농담도 잘하셔」,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그것은 프랑스의 '문화 대통령' 미테랑의 약속이자 '문화인' 노회찬의 약속이기도 했다.

'문화 대통령' 미테랑과 '문화강국 프랑스' : "샹제 라 비(Changer la vie, 삶을 바꾸자)"

▲미테랑의 타계를 보도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지의 표지(1996.1.22.)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1916.10.26.~1996.1.8.)은 프랑스 공화국의 제21대 대통령이자 사회당 소속의 첫 번째 대통령으로, 역대 프랑스 대통령 가운데 제일 오래 집권한 인물(1981~1995)이기도 하다.

사회당을 이끌며 정권을 획득하고, 재선을 통해 14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러면서 사형제도 폐지, 사회개혁, 유럽통합에의 기여 등 많은 업적을 이룩한 현대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치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었따. 또 그 이면에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면모는 그의 건축과 예술, 문화, 국력을 바라보는 종합적인 식견이다. (「진정한 빠리의 산책가–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 <유로포커스>, 2006.1.9.)

'샹제 라 비'(Changer la vie, 삶을 바꾸자)를 구호로 한 그의 정책 가운데 특히 문화 분야에서의 치적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미테랑은 수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정작 자신은 '문화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문화 정치는 프랑스의 발명품이다"로 장 미셸 지앙 교수의 책 <문화는 정치다: 왜 프랑스는 문화정치를 발명했는가?>(목수정 옮김, 동녘, 2011)는 문화정치가 가장 활발했던 미테랑 집권 시기의 문화실험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며 문화의 정치적인 힘을 역설하고 있다. 문화복지에 중점을 둔 '제2의 르네상스 정책'을 발표하면서 미테랑은 이렇게 밝혔다.
"문화는 곧 생활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은 누구나가 문화적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국민 1인당 GNP를 높이기보다는 문화적인 소양과 수혜를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어서 미테랑은 프랑스 국민 개개인에게 외국어 한 가지 하기, 농구·골프 등 스포츠 특기 갖기, 바이올린·피아노 등 악기 하나를 연주하는 음악 특기 등을 가져야 한다고 독려했다. 아울러 국민들이 이 세 가지 기능을 익힐 수 있도록 지원시책을 과감히 펼쳤다. 

미테랑의 문화복지 시책에 빈부와 세대, 지역을 아우르는 모든 국민이 동조해 그가 염두에 뒀던 서민복지를 크게 능가하는 국민적인 호응을 얻어냈다. 미테랑은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문화 대통령'으로 각인됐다. (채희걸, 「농촌주민들에게 문화공간을 만들어주자」, 농촌여성신문, 2015.10.16.)

'문화 대통령' 미테랑의 약속은 구체적이고 쉬웠다. 그의 약속은 삶의 질 향상을 이야기했다. 예를 들면 1주일에 한 번꼴로 가족 외식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건 경제적 약속이다. 또 외국어와 악기, 스포츠 하나 정도는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겠다고 한다. 이것은 문화적 약속에 속한다. 집 밖에서 잘못하면 남의 집 아이라도 나무랄 수 있으며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게 강하며 독선을 초월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도덕적 약속이다. 

물론 프랑스와 우리의 문화적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추상적이고 선전적인 구호보다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약속이 흥미롭다. (박창호, 「부산을 위한 시장의 리더십」, <부산일보>, 2006.6.30.)

1981년 프랑스 제5공화정 최초로 사회당이 대선에서 승리를 거뒀다. 미테랑이 집권한 1981년 프랑스의 경제상황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기업들은 과잉설비투자로 적자에 허덕였고 국민은 높은 실업률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프랑스 국민은 좌파 대통령 미테랑이 특유의 비전과 카리스마로 이 같은 시름들을 한 방에 날려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미테랑이 집권하자마자 치켜든 것은 오페라극장 건립이었다. 그는 일반 시민들이 값싼 입장료를 내고 오페라 관람을 즐길 수 있는 현대식 극장이 시급하다며 1982년 대통령령으로 "바스티유에 오페라극장을 짓는다. 상징적 집회 장소인 바스티유에 대중을 향해 열린 예술의 장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미테랑의 계획은 대다수 국민은 물론 좌파 지지층에서까지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유인즉슨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사치스럽게 오페라 타령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테랑은 관련 예산의 수립과 집행을 직접 챙기는 열의를 보였다. 

프랑스 혁명 발발 200주년이 되던 1989년, 오페라 바스티유 극장(Opera Bastille)이 문을 열었다. 오페라 바스티유는 당시 파리의 유일한 오페라극장이었던 팔레 가르니에(Palais Garnier)의 입장료 1천500프랑을 절반 이하인 670프랑으로 내렸다.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오페라 공연에 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문화대통령을 보고 싶다」, 광주일보, 2007.10.31.)

▲'오페라 바스티유' 극장과 '7월의 기둥(꼭대기의 조각품은 '자유의 날개'를 묘사), Opéra Bastille and the Colonne de Juillet (출처: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프랑스 파리하면 대체로 문화예술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런데 파리가 그냥 문화예술의 중심도시가 된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문화강국 프랑스'를 기치로 1980년대부터 진행된 미테랑 프로젝트, '그랑 프로제'(Grands Projets)가 있었다. 프랑스의 문화는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고, 시민들에게 문화강국이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오페라 바스티유는 루브르 박물관 광장의 피라미드, 라 데팡스의 신개선문, 프랑스 국립도서관, 빌레트 과학예술공원 등과 함께, 파리를 세계 최고의 문화예술도시로 만들기 위한 기념비적인 건축 사업 '그랑 프로제'의 대표작이다. 

원래 기차역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바스티유 오페라 주변에는 갤러리와 영화관, 공연장들이 생겨났다. 예술 애호가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바스티유 일대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오페라 바스티유는 공연 외에도 청소년과 시민들을 위한 무료 강좌, 배우들과의 백스테이지 대화, 무용 시범, 각종 전시회 등을 주최하며 문화 흐름을 주도했다. (「[세계 공연장 순례] 파리 오페라 바스티유」, 중앙일보, 2007.10.9.)

미테랑의 발상이 뜬구름에 머물지 않고 결실을 맺기까지에는 문화에 대한 그의 남다른 신념과 열정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했던 문학청년 미테랑은 문화 엘리트주의 타파를 국정운영의 우선순위로 삼았다.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그랑 프로제'를 국가주도형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배짱도 "국가경쟁력은 모두 문화에서 나온다"는 소신에서 비롯됐다. (「문화대통령을 보고 싶다」, 광주일보, 2007.10.31.)

▲1982년에 열린 첫 '페트 드 라 뮈지크'(La Fête de la Musique) (Ⓒ rtl.fr)
'문화 대중화'를 꿈꾼 미테랑의 야망은 '환상의 콤비' 자크 랑(Jack Lang) 문화장관을 통해 꽃을 피웠다. 미테랑은 자크 랑에게 "모든 프랑스인이 만들고 창조하는 능력을 배양하고, 그들의 재능을 자유로이 표현하며, 그들이 선택한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임무를 맡겼다. 14년의 임기 중에 자크 랑을 12년 동안 문화부장관 자리에 앉혀 전통과 관습에 절은 파리의 묵은 때를 벗겨냈다. 1982년 시작된, 1년에 단 한 번 열지만 프랑스 어느 곳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음악 축제인 '페트 드 라 뮈지크'는 그 결정판이었다. 500만 명의 프랑스인이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안다는 사실에 착안한 자크 랑은 이들이 카페, 공원, 광장 등 나라 전체에서 마음껏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거리음악축제를 기획했다. 유명 가수 없이 시민들 모두가 관객이자 주인공이 된다.  축제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오늘날 '페트 드 라 뮈지크'는 열린 음악축제의 모델로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 1997년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노회찬의 '마음의 스승' 신영복은 「끊임없는 해방이 예술입니다」는 글에서 '예술의 도시' 파리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파리가 예술의 도시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습니다.  (…)  파리가 예술의 도시라는 명성을 누리게 되는 것은 이처럼 언제나 기존의 관습과 관성을 일상적으로 뛰어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파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惰性)이라는 사실입니다. 타성은 우리가 그것이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견고한 무쇠방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예술의 중심축이 프랑스로부터 뉴욕이나 밀라노로 옮겨갔다고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이를 수긍하지 않습니다. 부르주아의 물질주의적 현실관에 포위되지 않은 예술, 특히 예술의 해방적 의미와 창조적 속성이 포기되지 않는 한, 파리는 그 중심의 이동을 수긍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영복, <더불어숲 2: 새로운 세기의 길목에서 띄우는 신영복의 해외엽서>, 중앙M&B, 1998)

미테랑과 '빠리의 망명객' 홍세화, '똘레랑스'(tolérance)와 화이부동(和而不同)

미테랑의 대통령 집권기간(1981~1995)은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의 프랑스 망명생활 기간(1979~1999)과 상당히 겹치기도 한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 1995)는 홍세화가 프랑스에서의 택시기사 생활 경험과 프랑스 사회에 대한 소개, 본인의 성장기와 한국 사회의 과제를 담은 책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가지 까먹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책이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른바 '남민전의 투사', '정치 난민' 홍세화의 자전적 에세이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이다. (노정태,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똘레랑스'의 혁명투사로!」, <프레시안>, 2013.7.5.)

노회찬의 길동무 홍세화는 1979년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귀국하지 못한 채 파리에 남아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9년에 귀국한 뒤 2002년에 영구 귀국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망명객 홍세화가 겪은 프랑스 사회는 사회 저변에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뿌리내리고 있는 똘레랑스의 사회였다. 홍세화가 파리의 거리와 골목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던 똘레랑스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당신이 존중받고 싶으면 우선 남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이 책이 한국에서 화제의 문제작이 된 것은 홍세화가 똘레랑스(tolérance)라는 말로 한국 사회의 폭력과 억압과 '힘의 논리'를 비판했다는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독재와 군사주의, 흑백논리와 획일주의, 왕따 문화로 점철되어 온 우리 사회에서 '똘레랑스'는 그야말로 필요하고도 절실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를 힘으로 억누르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입에 재갈을 물리는 사회를 향해 홍세화는 톨레랑스를 외치고 전파하고 실천해왔다. 홍세화는 흔히 '관용'으로 알려진 똘레랑스의 뜻을 다시 정리하면서 동양의 '화이부동'과 연결짓기도 한다. 
"간단하게 줄인다면 '관용'보다는 '용인'입니다. 아랫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기보다 종교나 사상이 달라도 그 '차이' 자체를 다른 그대로 '참고 받아들인다'는 정신 자세입니다."

"'서로 화평하면서 획일화하지 않는다'는 화이부동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권력의 강제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똘레랑스입니다." (「홍세화의 더 깊어진 '톨레랑스'」, 한겨레, 2006.11.24.)

▲<진보정치> 73호(2002.1.25.~1.31.) 기사 갈무리
화이부동(和而不同)은 노회찬의 '마음의 스승' 신영복이 강조한 삶의 철학이기도 했다. 2002년 1월 17일 오후 연세대 신인문대 대강의실, 500여명의 청중들이 모여 북새통을 이뤘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위원장이 '노동자 철학'에 대해 신년 강연을 해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해 하기로 했어요." 노회찬 민주노동당 부대표 겸 서울시당위원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하지 않던 강연을 하기로 결국 수락한 것이다. 신영복은 '일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실천'이란 주제로 90분 동안 노동자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연대의 변증법인 '물의 철학'("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낮은 곳으로 흘러가서 결국 바다로 간다. 가장 낮지만 가장 큰물이 바다다.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과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한 사람의 실천과 사상은 따뜻한 가슴에 뿌리내린 것이어야 한다. 머리로 하지 말고 가슴으로 일하라. 다른 이를 감싸고 애정있게 보듬어라")에 대해 강조한 뒤, "지배와 흡수를 뜻하는 획일성의 동(同)이 아니라 공존과 다양성을 전제로 한 화(和)의 논리로, 운동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 행할 때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할 것"이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기 위해' "작심하고 말한" 노회찬의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4)의 3부 제목은 「화이부동(和而不同) 부동이화(不同而和)」다. 노회찬은 "혁명의 시대는 끝났고 우리는 독자적 정치세력화로 나아갔다"는 글귀로 3부를 시작한 뒤 이렇게 적었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진보 자신이다. 지금 진보정당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진보'다. 부족한 진보를 훈장과 족보로 가릴 수는 없다. 세상을 진보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진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진보가 진보하기 위해서, 노회찬은 화이부동과 부동이화의 정신과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부동이화는 '나와 다른 의견이라도 경청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미덕'을 뜻한다.

'문화인 노회찬'의 약속

'독서광 노회찬.' '첼로를 연주한 정치인 노회찬.' '영화를 사랑한 정치인 노회찬.' '문화인 노회찬'의 문화적 감수성은 문학과 예술, 음악을 사랑하고 즐겼던 부모님의 영향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쌓아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와 문학을 사랑한 도서관 사서 출신의 아버지와 교사이던 어머니는 함경도 출신으로 전쟁 통에 월남한 피난민이었다. 부산 초량동 산동네에 다섯 가족이 세들어 사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오페라 공연이 있으면 빼먹지 않고 갈 정도로 예술을 사랑했다고 한다.
▲ 2015년 정의당 당대표 후보 출마 홍보용 포스터 Ⓒ노회찬재단
2016년 한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문화라고 생각해요. 문화는 여유 있는 사람만이 향유하는 사치가 아니에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려야죠."

"문화적 가치로 고급과 저급을 나누는 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모나리자 같은 그림이 비싸도 보는 건 저렴해야죠. 비싸다고 다 좋은 게 아니에요. 아니 마약은 얼마나 비싸." (배지현, 「[인터뷰]'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를 만나다」, <Story of Seoul>)

그에 앞서 2010년 출간된 <진보의 재탄생>(꾸리에)의 여는글(「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 다시, 꿈꾸기 위하여」)에 노회찬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대학 서열과 학력 차별이 없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교육받을 수 있는 나라, 지방에서 태어나도 그곳에서 교육받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는 나라,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나라,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는 나라. 토마스 모어는 고작 하루 노동시간을 여섯 시간으로 줄여놓고 그 섬을 존재하지 않는 섬, 유토피아라 불렀지만 나는 그보다 더 거창한 꿈을 꾸지만 단지 꿈이라 여기지 않고 있다."
▲2010년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노회찬의 공약집 <노회찬의 약속> 중 '모여라 천만인 오케스트라' (ⓒ노회찬재단)
2010년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한 노회찬, 공약집 <노회찬의 약속>에는 '모여라, 천만인 오케스트라'라는 제목 아래,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서울. 그래서 천만인이 제각각의 삶으로 위풍당당해지는 서울"의 문화예술정책 청사진의 내용을 이렇게 담고 있었다.
"원래 하이서울 페스티발은 시민참여헝 축제로 구상된 것입니다. 하지만 매년 열리는 하이서울 페스티발 어디에 시민들의 참여가 있죠? 시민들은 서울시와 기획사가 내놓은 공연을 보기만 할 뿐입니다.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공연비용은 2010년 기준으로 하루에 1500만 원꼴입니다. 그 정도라면 일년 동안 지역의 조그마한 어린이 오케스트라 30곳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재원입니다."
"우선 지금처럼 시설 중심의 예술가 지원정책에서 '생활지원형 사업'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과 지역의 소규모 예술교육이 병행되어야 하는 거죠.  한 예로 '우리 동네 예술가' 사업을 제안합니다. 미술가에겐 '동네 아뜨리에'를 만들어주고, 사진작가에겐 '동네 사진관'을 만들어 드립니다. 연극가와 음악가에겐 지역 문화센터의 공연장을 활용할 수 있게 해드리는 거죠. 그리고 공공문화시설의 '요금상한제'를 실시할 것입니다.  작년에 독일을 다녀온 친구는 유명한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를 단 8유로에 보고 왔습니다. 시민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는 공공문화시설은 시장과 구청장의 액세서리에 불과합니다."

노동과 여가

미테랑과 '주 39시간 노동, 5주 유급휴가'와 바캉스(vacance). 1936년 프랑스 사회당 주도의 인민전선 정부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2주간의 유급휴가와 주당 40시간 노동을 규정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노‧사‧정이 이뤄낸 '마티뇽 합의'(L'Accord Matignon)의 결과이자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도입된 획기적인 제도였다.  당시 실시된 2주의 유급 휴가제도는 사회당의 집권 후 노동계의 집단 투쟁으로 얻어낸 사실로 기록되고 있다. 유급휴가의 보장은 프랑스인들의 여가생활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 뒤 유급휴가는 1956년 3주로 늘어났고, 68혁명을 통해 1969년 드골 대통령이 물러난 뒤 4주로 늘어났으며 1981년 미테랑이 집권하면서 5주 유급휴가가 법제화됐다.

'주 39시간 노동, 5주 유급휴가(주말 포함)'는 미테랑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이었다. 법정 노동시간은 노동법전(Code du travail)에도 명시되어 있다. 이 법령의 도입으로 인해 프랑스는 전통적인 휴가 패턴이 완전히 붕괴되고 새로운 형태의 여가문화가 정착되면서 처음으로 '바캉스(Vacances)'라는 개념 및 용어가 사용되었고 국민 여가 활동과 문화 대중화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김희수.정광민, 「노동시간 단축이 관광시장에 미치는 영향과 과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정책연구>, 2019년 11월호)

※ 바캉스(vacance)는 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영어로 방학·휴가를 뜻하는 vacation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바캉스(Les vacances)의 사전적 정의는 '노동자들이 업무를 중단하고 많은 인원이 이동하는 법적으로 보장된 기간'이다. '비우다'라는 뜻의 라틴어 바카레(vacare)에서 유래한 단어로, 곧 '중단'과 '비움'이 프랑스의 휴가 문화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81년 대통령에 선출되자 미테랑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여가시간을 관리하기 위해 '자유시간부(여가담당부)'를 신설했다. 관련 임무는 기존에 관광, 청소년, 스포츠 관련 부서가 담당하던 것이었으며, 이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하나의 독립된 부서로 만든 것이다. 이 부서는 1984년까지 3년간만 존재하였다. 이때, 연간 5주 동안의 유급휴가를 법제화한 동시에 국민들의 여가생활 확대에 대한 실질적 지원책으로 체크바캉스(Chèques-vacances) 제도를 신설했다. 체크바캉스는 근로자의 여가 비용 부담 완화, 저소득층과 소외 계층의 여가 불평등 제거 등 자국민의 국내관광을 촉진하는 정책 수단으로 도입돼 오늘날 프랑스 여행문화, 여가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노회찬, '8+8+8 서울만들기' 공약: '일'과 '쉼'의 공존

1948년 12월 10일에 유엔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됐다. 선언의 제23조의 1항은 '모든 사람은 일, 직업의 자유로운 선택, 정당하고 유리한 노동 조건, 그리고 실업에 대한 보호의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24조는 '모든 사람은 노동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하여 휴식과 여가의 권리를 가진다'며 휴식과 여가의 권리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노동권과 휴식권을 잇달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진보신당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의 '8+8+8 서울만들기' 공약 갈무리
노회찬은 노동의 중요성과 함께 '쉼'의 중요성도 줄곧 강조했다. 120주년 노동절을 맞아 발표(2010.4.30.)한 노회찬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의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수면을 보장하는 '8+8+8 서울만들기'" 공약은 그것의 집약이었다.  노회찬은 이를 위해 △공공부문 노동시간 상한제 △노동시간 단축 기업 지원 △환경미화노동자 샤워시설 제공 △판매노동자 앉을 권리 보장 △건물청소 노동자 휴게공간 마련 △장기이동 건설노동자를 위한 쾌적한 숙소 마련 △식당 아줌마에게 쉼터 제공 △'직장인 문화의 날개'프로젝트 실시 등을 제시했다. 노회찬은 "'노회찬의 8+8+8제안'은 서울시민들의 노동과 휴식, 여가, 수면, 건강을 위한 약속"이라며 "바로 내일 세계노동절을 맞아 이제 서울시민들도 인간다운 삶을 위해 실천해야 할 때로, 노회찬이 앞장서서 이러한 서울을 만들어내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노회찬은 문화예술 지원과 관련해 이렇게 밝혔다. 

"점심시간 혹은 퇴근시간 이후, 직장인들의 문화예술 향유를 지원하기 위해 '직장인 문화의 날개' 프로젝트를 실시하는 등 문화예술교육 서비스를 지원할 것이다. 5~10인 이내의 특정 장르에 대한 동호회 혹은 모둠이 구성되면 원하는 시간대에 문화예술교육 강사를 파견해 지원하고, 악기를 지원해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겠다." (달고나, 「노회찬, '8+8+8 서울만들기' 공약: "노동시간 단축부터 악기 지원까지"」, <레디앙>, 2010.4.30.)

한편 그에 앞서 정부 차원에서 '노 홀리데이', '노 새터데이' 등을 강조하던 이명박 정부 하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노회찬의 길동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학 교수는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렇게 밝혔다.
"노동과 휴식을 한 쌍의 동일한 가치로 볼 줄 알아야 주말근무, 야근, 비정규직 노동, 출산휴가, 생리휴가 등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할 수 있고, 인간화된 사회를 실현하는 길이 열린다. 아무리 일할 권리가 소중하더라도 쉴 권리가 없다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다." "세계인권선언 23조에서 '일할 권리'를 규정한 후 바로 다음 조항에서 '쉴 권리'를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는 하루 8시간 노동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와 그 궤적을 같이한다. 

휴식과 여가를 사치로 여기는 순간 인간은 돈벌이 기계로 전락한다. 휴식은 시장사회의 공세로부터 인간성을 지켜주는 극히 중요한 보호장치다." (「'노 홀리데이'는 반인권선언」, 2008.3.14.)

▲진보신당 <2010년 6.2지방선거 공약자료집> 표지 갈무리
조효제의 이 짧은 글은 당시 진보신당 정책위원회(의장: 조현연)가 중심이 돼 만든 <2010년 6.2지방선거 공약자료집>의 기조를 잡는데 섬광 같은 힌트를 줬다. 노회찬이 당대표로 있던 진보신당의 2010년 지방선거 공약자료집의 제목은 '휴休 한국사회, 행복한 복지혁명'으로, '진보적 지방자치 7대 비전'의 첫 번째 비전은 "일과 쉼이 공존하는 휴(休) 한국사회"였다.
"심각한 일중독 사회인 우리 사회에서 일벌레라는 말은 일종의 칭찬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런 우리 사회에서 '쉴 권리' 운운하면 배부른 소리, 세상모르는 허튼 소리라고 손가락질 받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한 인권학자가 지적했듯이, 아무리 일할 권리가 소중하더라도 쉴 권리가 없다면 그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일할 권리'를 규정한 「세계인권선언」 23조 바로 다음 조항에서 '쉴 권리'를 언급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단축, 편안한 노후 안전망의 구축, 귀농‧귀촌 지원, 문화사회 실현 등 진보신당이 그리는 행복한 삶이란 일중독, 일벌레의 삶이 아니라, 일과 쉼이 함께 어우러져 공존하는 삶입니다."

미테랑의 <외규장각 의궤> 반환과 노회찬의 <조선왕조실록> 환수

미테랑, "TGV를 선택하면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겠다"
▲1993년 9월 미테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 (출처: 대통령기록관)
1993년 9월 14일 미테랑이 프랑스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주요 목적은 떼제베(TGV, Train à Grande Vitesse)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서였다. 김영삼과 미테랑, 두 대통령 사이에 이런 이야기들이 오갔다. 

김영삼 : 우리 국민은 외규장각 도서를 우리나라에서 보게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188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탈취해간 고문서들이 돌아올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우리 정부 또한 외규장각 고문서를 돌려받기 위해 1989년부터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심사숙고하는 표정으로 미테랑이 대답했다.

미테랑 :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은 (…) 이번에 응한 것 (…). 우선 상징적인 의미로 외규장각 고문서 중 두 권을 한국 측에 미리 반환할 방침입니다."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 기록관>)

다음 날인 9월 15일, 미테랑 대통령은 청와대로 김영삼 대통령을 방문해 외규장각 고문서 중 한 권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鑑儀軌)」 상권을 직접 전달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던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가 1975년에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의궤를 발견해 세상에 알린지 18년만의 일이었다. 물론 중국 태평성대의 상징인 요순 시절부터 내려오던 일화인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공짜는 아니었다. "TGV를 한국이 선택하면 프랑스는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겠다"는 것으로, TGV는 한국 고속철도 KTX의 모델이 되어 한국 땅을 달리게 됐다.

현재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다.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재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재로 등록할 수도 없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재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의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회찬, "왕조의 500년 역사를 기록한 블랙박스" <조선왕조실록> 환수에 힘을 싣다

2006년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조선왕조실록> 환수추진위원으로 활동했다. 노회찬은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2>(리더스북, 2009)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왕조의 500년 역사를 기록한 블랙박스"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지난해 3월 나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반환을 위해 한국 협상단 대표로 도쿄대학을 방문했다. 일본이 약탈한 왕조실록 환수를 위해 종교계와 국회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결국 서울대 기증이라는 깔끔하지 못한 방법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북관대첩비가 반환운동 30년 만에 되돌아온 것을 생각해 보면 조선왕조실록을 반환운동 3개월 만에 되찾은 것은 쾌거였다."
▲노회찬이 쓴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과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표지
사실 노회찬과 <조선왕조실록>의 인연은 꽤 깊다.
"인민노련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할 때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어, 그래'하는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 99편의 이야기를 골라 1997년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으로 펴낸다.  노회찬이 '스타' 정치인으로 부상한 후 책을 찾은 이들이 많아지자 오랜 친구인 일빛출판사 이성우 대표의 권유 속에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일빛, 2004)으로 재출간된다. 첫판의 제목이 '어, 그래?'인 까닭은 상식을 뒤엎는 조선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담았기 때문이다.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는 출간 3주 만에 인문과학 베스트셀러 순위 4위에 올랐으며(경향신문 1997년 2월 28일) 당시 3만 부나 팔려 나갔다." (경향신문 1997년 2월 28일)

<조선왕조실록>의 의의에 대해 노회찬은 "비행기의 블랙박스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서 물론 "왕과 조정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밑바닥 삶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조선 왕조 오백 년의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조선 왕조의 블랙박스인 <조선왕조실록>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노회찬, 「글머리에-조선 시대의 블랙 박스를 열며」,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 일빛, 2004)

※ 참조) 한편 2005년 3월 23일 서울시 교육청에서 발표한 '독서지도 매뉴얼과 추천도서'에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이 국사과목에 포함됐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마련한 독서지도 매뉴얼과 추천 도서는 중학교 2학년이 고등학생으로 진학하는 2007년부터 '독서활동'을 생활기록부에 기록하고, 2010년 대입 입시 전형자료로 반영됨에 따라 교육당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독서지도 자료이다. 서울시 교육청에서는 노회찬의 조선왕조실록을 소개하면서 "글이 아주 쉬워서 그저 옛 이야기 읽듯 읽어나가면 짧은 시간에도 읽어낼 수 있고, 현대 우리 사회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으며, 읽고 나면 뜬구름 같던 조선왕조가 어느 정도 가깝게 느껴진다"고 소개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일본 도쿄대 방문 환수 협상(2006.3.15.) Ⓒ노회찬재단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백72년 동안의 기록으로 국보 151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史庫本)>은 임진왜란 이후 새로 인쇄한 4종의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하나다. 오대산 사고본은 태백산, 적상산, 강화도 사고본 등 다른 3종의 실록과 함께 보관돼 왔지만 일제강점기 때인 1913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초대 조선총독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2006년 3월 3일 불교역사기념관.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출범 및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노회찬. 왼쪽은 환수위원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노회찬재단
▲2006년 3월 3일 주한일본대사관을 항의 방문한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 위원들 Ⓒ노회찬재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도쿄대에 보관 중이란 사실은 오래전부터 한국사학계에 알려져 있었으나 반환 문제는 좀처럼 공론화되지 못했다. 불교계는 2006년 3월 3일 정념 스님(조계종 월정사 주지)과 철안 스님(서울 봉선사 주지)을 공동 의장으로 하는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본격적인 환수 운동에 나섰다. 환수위는 출범식을 마친 후 조계사를 출발하여 일본대사관 앞까지 거리 행진에 이어 조선왕조실록 환수 요청서를 일본 대사관에 직접 전달했다. 3월 15일 노회찬, 법상 스님(월정사 재무국장), 문만기(환수위 실행위원장) 등 5명이 일본 도쿄대를 방문해 첫 협상을 했다. 환수위 측은 도쿄대에 "조선왕조실록을 이른 시일 안에 되돌려 달라"며 정식으로 반환요청서를 전달했다. 4월 17일 열린 2차 협상에서 도쿄대는 "재산처분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환수에 난색을 표시했다. 이에 대해 환수위는 "1932년 오대산본 27책을 경성제국대학(서울대 전신)에 돌려준 전례가 있다"고 반박했다. 2006년 5월 2일 노회찬과 김원웅(열린우리당) 등 여야 국회의원 28명은 일제가 강탈해 간 조선왕조실록을 되찾기 위한 국회 차원의 지원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조선왕조실록되찾기 국회의원모임'을 발족했다. 이날 모임에서 의원들은 김원웅(열린우리당), 홍문표(한나라당), 이낙연(민주당), 노회찬(민주노동당), 류근찬(국민중심당) 의원을 공동대표로 선출하고 강혜숙(열린우리당) 의원을 간사로 선임했다. 그 와중에 5월 16일 도쿄대 고미야마 히로시(小宮山宏) 총장은 정운찬 서울대 총장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을 서울대에 기증하겠다"고 밝혀 왔다. 서울대는 사전에 도쿄대 부총장으로부터 기증사실을 전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환수위 측에는 언급조차 없었다. 문제는 약탈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과거에 대한 참회의 뜻을 담고 있는 '반환'이 아닌 양국의 대표적인 국립대간의 학술교류 차원에서 추진된 '기증' 방식으로 돌려받는다는 점이다. 서울대 측은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돌려주겠다고 제시한 방식인 '영구 임대'보다는 진일보한 방식이라고 강조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증' 형식은 일본 동경대의 입장을 대변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불교신문, 2006.6.5.)
▲2006년 7월 초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환수에 앞장선 공로로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에게 감사패를 받는 노회찬. 그 옆은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사진 출처: 불교신문, 2008.1.26.)
2006년 7월 7일 결국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일본측 기증, 한국측 환수'라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을 거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에 앞서 노회찬은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으로부터 '조선왕조실록 환수 감사패'를 받았다. 10여 년이 흐른 뒤인 2018년 7월 노회찬의 뜻밖의 부고를 뉴스로 접한 지선 스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고불총림 방장)은 "참담하다. 내가 죽는 것처럼 아팠다"면서 무겁게 입을 뗐다. (「시대 대변한 노회찬 의원…부디 왕생극락하시길」, 법보신문, 2018.7.24.) "노동운동가들은 마음이 순수하다. 잘못이 드러나면 고통이 크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롭다고 한 윤동주 시인의 마음과 같다. 얼마나 괴롭고 아팠겠느냐. 노회찬 의원은 진보정치를 확장시킨 시대를 대변한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고통 벗는 세계에 왕생해 그의 마음처럼 넓고 큰 뜻을 펼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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