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12시 10분 주한프랑스대사관 오찬모임에 가다. 프랑스와 데스쿠엣 주한프랑스대사가 한불친선의원협회 회장단을 초청한 자리이다. 송영길, 고진화 의원 등 세 사람이 초청됐다. 프랑스 측에선 장뤽 말랭 프랑스문화원장과 두 참사람이 배석했다. 건물 칭찬부터 했다. 1961년 김중업 씨가 설계한 주한 프랑스대사관저는 한국 건축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품이다. 2년 전 권영길 당 대표, 최순영 부대표와 함께 왔을 때도 내가 건물 칭찬을 하자 데스쿠엣 대사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었다. 지금 프랑스의 집권당은 우파인 국민운동연합(UMP)이고 프랑스와 데스쿠엣 대사는 자신의 말대로 우파 정치인이다. 그러나 2년 전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인 것은 그와 대화할 때 마치 민주노동당 당원과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노사문제, 사회복지, 한미관계, 이라크 파병문제, 빈곤문제,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우파정당까지도 열린우리당보다 훨씬 좌파적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개혁정당이라 자부하면서 그래서 어떤 경우엔 보수정당이라는 규정마저도 거부하는 열린우리당이 유럽의 보수정당보다도 훨씬 오른 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이 중도우파로 보이는 것도 그만큼 한국의 정치지형 전반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좌파인플레이션 현상에 다름 아니다."
2005년 5월 6일 노회찬(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의 <난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이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구속된 (공무원노조 원주시지부) 지부장의 부인을 포함한 가족대책위 성원들의 표정도 밝다. 한 해고자는 스무 명이나 해고돼 외롭지 않다며 웃는다. 횡성에서 민주노동당 준비위를 만들고 있다는 할아버지는 결혼한 따님과 사위와 함께 왔는데 모두가 당원이라 하신다. 데리고 온 외손주가 자꾸 나의 머리를 만지며 묻는다. <머리가 왜 벗겨지셨어요?> 옆에 앉은 할아버지 당원이 미안해하신다. 괜찮다며 웃으며 속으로 말했다. <그래 네 머리가 벗겨지기 전에 좋은 세상이 올 거야.> 밤비 속에 새싹이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한국 정치인 중 최초로 '그랑제꼴 시앙스포'에서 강연하다
2008년 11월 18일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공동대표는 프랑스의 정치학 중심 명문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인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에서 강연을 했다. 진보신당은 한국 정치인 사상 최초라고 밝히며, "이 날 강연에서 준비된 강의실이 청중으로 가득 차, 서서 강연을 듣는 사람도 생기는 등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전하기도 했다. 강연 제목은 '오바마 시대 미국과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노회찬은 강연을 통해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개념은 미국과 중국 간의 새로운 갈등과 대립을 초래할 수 있으며, 동북아 평화는 물론 남북관계의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역설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변화가 미국 일방주의 및 군사적 패권주의 포기로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통일 한국의 포지셔닝을 묻는 질문에 대해 "통일 한국은 한미상호군사동맹과 같은 동맹체제가 아닌 주변 강국과의 비동맹, 중립국가의 형태가 바람직할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어 노회찬은 "IMF, 세계은행, GATT로 이어지는 브래튼우즈체제에 기반해 있는 세계경제체제의 재편 시기에, 한국의 외교는 미국의 외교 우산 아래에서 단순히 대북 경쟁에 치중하는 외교 실종을 가져왔다"고 비판하며 "미국 일변도나, 북한과의 경쟁에서 벗어나 유럽, 중국, 남미 등 (한국 외교가) 다변화돼야 하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11월 15일 저녁 파리에 도착한 노회찬, 유성재, 박용진 등 일행은 파리에서 개최된 진보신당 유럽당원모임 회의장으로 갔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에서 모인 당원들과 파리지역에서 거주하는 지지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띤 회의와 토론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날 회의는 유럽지역의 당원의 활동 진로를 모색하면서 새로이 조직을 가다듬고 중앙당에 바라는 사항들을 정리했으며, 아울러 진보신당 당원뿐만 아니라, 지지자들, 그리고 유럽 지역 내 진보적인 한국인들을 아우르기 위한 네트워크 '유로진보넷'의 활성화를 위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교환했다.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을 참배하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다
다음날인 11월 16일 아침 일찍 노회찬 일행과 진보신당 유럽당원들은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Le Mur des Fédérés)을 참배했다. '마지막 피의 일주일'이라 불리는 학살기간 동안 이 벽 앞에서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시민의 자치정부였던 '파리코뮌'(Paris Commune, 1871.3.18.~5.28.)의 147명 시민병사들이 총살됐다. 벽에 수없이 박힌 총알구멍들이 그때의 아픈 역사를 대신 설명하고 있었다. 훗날 레닌이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예행연습'이라고 평한 파리코뮌은 탄생한 지 72일 만에 이렇게 사라졌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파리코뮌 진압 이후에도 계속 생명을 유지했다. 코뮌이 일어난 지 110년 뒤인 1981년 프랑스 사회당의 미테랑 후보가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출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1871.5.21.~28)'라고 간단히 적혀 있는 표지판이 노회찬 일행을 맞아주었다. 노회찬과 일행들은 피처럼 붉은 장미꽃을 헌화했고, 주먹을 쥐고 낮으나 결의에 찬 목소리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간간히 뿌려지는 가랑비가 숙연함을 더해주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은 2010년 홍세화-노회찬의 인터뷰 만남에서 홍세화의 회상을 통해 등장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제 생존의 기록 속에 남아 있는 기억 하나가 상기되네요. 그것은 빠리 시절 존재의 버거움을 느낄 때 간혹 찾던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안의 '코뮌 전사들의 벽'입니다. <망자와의 연대>라는 제목의 글을 쓸 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데, 우리의 의식은 언제부턴가 고통과 죽음의 역사로부터 이탈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대표께서도, 세상이 바뀌려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권력을 장악하기 전부터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우리들 스스로 바뀌고, 권력을 장악한 뒤로는 순식간에 완전히 변모해 버리는 이 상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세상은 바뀌지 않았는데,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만 바뀌는 이 조화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 말이지요."
※ 참조) 홍세화(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무기를 들어요! 시민 여러분, 무기를 들어요!": [작은책] 책이 이끄는 여행…'민중의 함성'과 '코뮌 전사의 벽'」 (<프레시안>, 2017.9.2.)1871년 3월 26일 화요일, 파리 민중들은 투표를 통해 코뮌을 성립시켰다.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지배 체제의 노예의 자리에서 "심판자이면서 저항자, 파트너이면서 자신의 힘의 주체적 행위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 그렇게 "코뮌은 불행한 사람들, 투기에서 배제된 사람들,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 빈민가 사람들과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코뮌 만세! 사회 공화국 만세!… 그렇게 파리 코뮌은 두 달 남짓 존속한 뒤 5월 28일 일요일 아침 몰리에르, 라퐁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최대의 공동묘지 페르 라쉐즈의 동북쪽 벽에서 마지막 코뮌 전사들이 총살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티에르 정부는 코뮌 전사들에게 총살당한 인질 100여 명과 전투에서 죽은 베르사유군 877명의 "원수를 갚으려고" 파리 시민과 코뮌 전사들 2만 명을 학살했다. 바로 '피의 일주일'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노회찬은 파리시가 2007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대중교통 수단의 한 방법으로써 자전거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둘러보았다. 파리 시내 300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자전거 역에는 이용권카드를 사용해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 부근의 역에 다시 세워 놓으면 된다. 노회찬은 직접 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를 돌아보며 자전거의 안전장치, 가격의 합리성과 운용의 효율성 등을 확인했다.
※ 2007년 여름, 파리시는 친환경적인 교통수단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인 공용자전거 대여 시스템 '벨리브'(Velib')를 도입했다. 'Velo'(자전거)와 'liberté'(자유)를 합성해 만든 이름처럼 파리 시내 곳곳을 자유로이 누비는 회색 자전거 Velib'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선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주 OECD 대한민국 대표부 홈페이지, 2017.3.3.)
해장으로 먹은 파리 바게트 빵
유럽 일정 두 번째 밤에 (최김)경호는 노회찬 일행을 자신의 하숙방으로 초대했다. 박용진은 그날 밤을 이렇게 스케치했다.
"대낮부터 사라져서 자신은 저녁 만찬을 준비하겠노라고 했지만 우리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사실 하숙생이 무슨 여유와 솜씨가 있어 저녁 음식을 준비할까? 그저 정성스런 된장찌개에 잘 고른 와인 한병 정도이겠지 (…)
오, 그러나 경호 동지는 없는 여유에 정성을 곁들인 음식솜씨로 우리를 황홀하게 했다. 연어샐러드로 시작한 식사는 스테이크, 달팽이 버터구이, 메론에 잠봉(햄)을 살짝 얹은 후식, 무리해서 구비해둔 와인으로 풍성했다. 게다가 학생시절 서울대 노래패에서 한 실력했다는 그의 공연이 시작되자 우리 일행은 행복했다." (<레디앙>, 2008.12.1.)
2020년 5월 28일 박용진 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13호의 '문화인 노회찬'에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파리의 아침, 딱딱했던 바게트는 맛이 어땠나요?」란 제목의 글을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실었다.
"이번 추억글을 쓰려고 2008년 여행 당시의 사진들을 다시 찾아보다 내가 그에게 미안해 할 일도 생각났다. 파리에서 첫날 아침, 우리는 밤새 마셔댄 와인으로 인한 숙취를 해소할 아침거리를 찾아 파리 시내를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동네 빵집 앞에 빵을 사려고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딱딱한 바게트 빵을 먹고 싶어졌다. 영 내켜하지 않는 그를 해장빵은 내가 사겠다면서 설득했다. 파리에서 파리 시민들처럼 아침에 바게트 빵을 먹는 것도 훌륭한 문화체험이 아니겠냐는 엉뚱한 주장도 곁들였다. 그는 후배의 억지 주장을 마지못해 받아줬다. 그렇게 나는 훌륭한 문화체험과 맛있는 아침 식사를 그와 함께 나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찾은 이 사진을 보니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진보정당 최고 미식가이자 미적 감각이 뛰어났던 노회찬에게 야구방망이만큼이나 딱딱한 바게트 빵으로 숙취를 달랠 아침 식사를 강요한 내가 새삼 미안해졌다. 사진 속 노회찬의 표정은 울고 싶은 표정이다. 마지못해 먹는 표정이 역력하다."
'식도락가' 미테랑과 '방랑 식객' 노회찬
2007년 누군가 노회찬에게 물었다. '정치가가 되지 않았으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느냐?' 노회찬의 답은 이랬다.
"작곡가와 요리사. 늘 새로운 것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기 때문."
'식도락가' 미테랑의 <엘리제궁의 요리사> : "섣달 그믐날 생애 최후의 만찬을 가지겠다."
미테랑 대통령은 '빠리의 산책가'라고 불릴 만큼 시내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최소한 3일은 산책. 아마도 그의 문화예술 애호정신과 식도락가 기질 그리고 15권에 이르는 저술활동을 뒷받침 하는 독서와 서적 수집에 대한 열정이 그를 늘상 걷게 만든 것 같다. (「진정한 빠리의 산책가 –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 <유로포커스>, 2006.1.9.)
1995년 말 미테랑은 연례행사인 이집트 순례길에 올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암세포 전이로 인해 자신에게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나날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식도락가 미테랑은 프랑스로 돌아와 선언한다. "섣달 그믐날 생애 최후의 만찬을 가지겠다." 가족과 지인 서른 명 정도가 초대받은 가운데, 미테랑은 손님과 별도의 식탁에서 프랑스 최상류층에게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메뉴의 요리를 앞에 두고 혼자 식사했다.
석화에서 시작된 음식이 나오면 깨어났다가 먹고 다시 잠에 빠져들기를 되풀이하는 사이 코스 요리는 마지막 요리에 이르렀다. 미테랑의 최후의 만찬은 바로 오르톨랑 통구이였다. 이후 미테랑은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다가 (79세를 일기로) 1996년 1월 8일 세상을 떴다. (<한국일보>, 2021.4.3.)
"요리는 기쁨이고 예술이며 삶"이라는 메시지를 곳곳에서 보여주는 영화 '엘리제궁의 요리사'(Les Saveurs du palais, 2012, 감독 크리스티앙 벵상)는, 미테랑 대통령의 식탁을 책임진 파리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 관저)의 유일한 여성 셰프 라보리 오르탕스(카트린느 프로 역)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두 가지 갈래로 진행된다. 대통령을 둘러싼 참모들, 그들과 이미 한 배를 탄 주방 권력자들, 그리고 이 완고한 기존 셰프들 사이에 뛰어든 '낙하산 탄 여인' 오르탕스의 분투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녀가 만들어내는 연어로 가득 채운 양배추 요리, 허브향이 코를 자극하는 양갈비 구이, 송로버섯과 절묘한 궁합을 이루는 빵, 송아지 고기와 돼지고기를 이용해 케이크처럼 만들어낸 이름도 아름다운 '오로르의 베개' 등 그야말로 다이어트를 방해하는 온갖 요리들이 화면에 가득 찬다. (<매일경제>, 2015.4.2.)
지침이 있으면 좋겠다는 오르탕스에게 미테랑은 말한다.
"단순한 요리, 복잡하게 짜 맞춘 건 질색이다. 지나친 조리의 기교나 불필요한 장식이 싫다. 난 음식의 맛을 느끼고 싶다. 순수한 본연의 맛을. 첫날 해준 산새 버섯과 계란 요리는 할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음식이었다. 그런 프랑스의 맛을 계속 보여 달라."
오르탕스가 따라 준 와인과 송로버섯 브레드를 먹고 마시며 미테랑은 말한다.
"사람들 때문에 힘들죠? 나도 그래요. 바람, 추위, 고독 속에서 강해졌죠. 역경…. 하지만 개인적으로 역경은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해줘요. 인생의 묘미죠."
'블랙뤼미에르(필름스토커)'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추억이다"라면서, <매일경제>에 올린 글(「[영화] 블랙뤼미에르의 영화 뒤집기 '엘리제궁의 요리사'」, 2015.4.2.)에 이렇게 적었다.
"대통령의 말은 결국 그 어떤 장소에서건 부딪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과의 관계로 귀결된다. 그 부딪침과 난무하는 파열음 속에서도 인간의 자존감을 잃지 않는 것을 영화는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평범한 이 영화가 수많은 요리 영화들 중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나가는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다는 점이다. 금방 식어버리는 혹은 질려버리는 자극적인 맛 대신 은은히 우려낸 육수가 모든 소스의 베이스가 되는 음식처럼."
'방랑 식객' 노회찬의 <음식천국> : "음식은 상처받은 영혼과 마음을 치유해준다."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은 '먹기 위해 사노라'고 대답하며 소탈하게 웃던 노회찬. <음식천국 노회찬>의 이인우 작가는 "그 우문직답 속에는 평생 민중의 삶을 직시하며 진보정치를 추구해 온 한 '사회주의자'의 진실이 을밀대 육수 맛처럼 스며들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음식천국 노회찬: 맛집에서 나눈 '노회찬의 삶과 꿈>(일빛, 2021)은 한겨레 이인우 기자가 100여 명에 이르는 노회찬의 길동무들과 노회찬이 사랑한 27곳의 식당, 주점을 다니며 나눈 이야기와 추억을 담은 책이다. 이인우는 「내가 꿈꾸는 나라-염리동 평양냉면집 '을밀대'에서」라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노회찬은 미식가였다. 부르주아적인 '탐식의 도락가'라는 말이 아니다. 그는 동네 뒷골목에 수줍은 듯 숨어 있는 맛집을 좋아한 방랑 식객이었고, 음식 만들기도 잘한 용문객잔의 주방장이었다. '노회찬'이라는 희대의 정치인을 '미식'이라는 도락의 틀로 재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노회찬이라는 사람의 인간미 속에 음식의 세계가 있다는 건 그 자신에게나, 주변의 지인들에게나 다 같이 축복이었다."
박규님 현 노회찬재단 운영실장의 여는글 「산하에 봄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책은 노회찬이 남기고 간 벗들을 위해 그가 "미안해, 미안해."하며 정성스럽게 차려 준 밥상이다.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그가 생전에 즐겨 찾았던 맛집을 순회하며 식탁을 차려 놓고 많은 벗들을 초청했다. "이 음식은 말이야…"로 시작되는 그의 음식에 대한 예찬은 언제나 깊고 친절했다. (…) 그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아마도 전쟁 같은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며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밥과 술을 나누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정호영 셰프는 추천글(「책에서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을 통해 이렇게 마음을 전했다.
"노 의원님께서 갑자기 떠나신 뒤로 '○○에서 행복합니다.', '○○ 때문에 행복합니다.', '○○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라고 쓰신 그분의 '맛집' 서명(sign)을 접할 때면, 정말로 '맛객'이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가 천국! 행복합니다'라는 자필 서명은 그 결정판이었습니다."
"요리를 업으로 하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맛'은 곧 추억이고 기억이고, 함께 나눌 때 결국은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노 의원님과 그 분을 그리워하는 지인 분들의 이야기를 담은 <음식천국 노회찬>을 넘기다보면 특히 허영만 화백님의 <식객 II 1,2,3>의 몇몇 구절들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기억 속의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맛은 함께 나눌 때 추억이 된다.""맛의 끝은 사람이다.""음식은 상처받은 영혼과 마음을 치유해준다."
황교익 맛칼럼니스트의 추천사는 이렇다.
"당신이 먹었던 음식이 당신이지요. 당신이 머물렀던 장소가 당신이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당신입니다.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요. 노회찬의 식탁에서 신화 노회찬이 역사 노회찬을 불러내고 있네요. 그의 식탁 곁에 앉아 인간 노회찬을 듣습니다."
닫는 글 : "그의 죽음은 내게 간절하던 하나의 꿈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 "그는 인생의 찬비에 내몰린 이들에게 우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프랑스의 '문화 대통령 미테랑'은 1995년 6월 임기를 완수하고 물러나 회고록을 집필하며 자신의 죽음에 대비했다.
"정치인은 행동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임기와 책무가 완수되고 나이를 먹어 지평선에 가까워지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글을 남길 필요가 있다"고 서문에 적은 미테랑은, "할 수 있었던 일은 다했다"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의 좌우명이 자신의 묘비명에 새겨지길 바란다며 회고록(<두 목소리에 담긴 회고>)을 맺었다. (<중앙일보>, 1995.4.11.)
앞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노회찬> 편에서도 밝힌 것처럼, 2014년 어느날 노회찬은 '생전에 묘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는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써달라고 할지도 의문이지만 굳이 써야 한다면, '잘 놀다 간다', 이렇게 쓰고 싶다."
과연 노회찬은 미테랑처럼 '할 수 있었던 일을 다 했을까?' 그리고 '잘 놀다 갔을까?'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 <키어 하디와 노회찬> 편에서도 인용한, 거울(물)에 비친 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는 신영복 선생의 '무감어수 감어인(無鑒於水 鑒於人)'이라는 경구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노회찬의 길동무였던 목수정, 한애규 두 분 작가의 회상으로 오늘의 기록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노회찬은 내면으로부터 콸콸 기쁨과 용기, 분노와 지혜가 솟아 나오는 사람이었다. 그는 삶의 기쁨을 모두 찾아 누리며 인생을 풍요롭게 살았다. 여기서 '풍요'는 물론 물질적인 것과 무관한 풍요다. 한 인간으로 사랑받고 사랑을 전하며 문화와 예술을 마음껏 흡입한 자가 누리는 풍요였다. 그는 노동운동과 정치라는 자신의 방식으로, 뜨겁게 세상을 사랑하다가, 스스로의 원칙을 침해한 사건을 용서치 못해 그토록 사랑하던 세상과 결별했다."
파리에 거주 중인 목수정 작가가 갑작스런 비보를 듣고 이틀 뒤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이다. (「파리에서 만난 노회찬, 모두를 놀라게 한 사연: [노회찬을 기리며] 기쁨과 용기, 분노와 지혜로 가득했던 노회찬」, <오마이뉴스>, 2018.7.25.) 목수정은 2008년 11월 19일 노회찬의 프랑스 CGT(프랑스 노총) 강연에서 문화정책에 대한 한 유학생의 물음에 대한 답을 기억해냈다.
"비행기가 한 대도 오가지 않는 공항을 수천억씩 들여서 짓고 또 짓는 이 나라가, 예술은 가난 속에서 나온다고 굳건히 믿고, 예술에는 단호히 지갑을 열지 않는다. 그것이 산업적 가치를 입증하든 하지 않든,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 사회는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예술이 건강하게 사회에서 싹트게 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이다. 국가만큼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체계는 없다. 국가는 예술의 내용에 대해서 권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할 뿐, 예술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호메이니 시절,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미국 영화 수입급지 조치를 내리고, 대신 이란 영화에 대한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결과, 이란 영화는 세계 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갖게 됐다."
2008년 7월 빈소를 찾은 목수정을 또 다른 노회찬의 길동무인 김민정 시인이 만나 둘은 대화를 나눴다. 김민정은 노회찬을 통해 초면인 목수정과의 인연을 이었다.
"그녀와 나는 본격적인 책으로의 수다에 앞서 작정한 것도 아닌데 같은 목소리로 한 사람의 이름을 둘 사이에 앉혔다. 만나면 반갑다고 책 권하던 사람, 노회찬. 헤어질 때 아쉬우면 책 보라던 사람, 노회찬. 어디로 갔을까. 구두만 남겨놓고 그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있다 없으니까 영 간 거겠지 싶으면서도 나는 초면의 우리 둘을 어색하지 않게 계속 이어주고 있는 그의 존재감을 연신 재확인하고 있었다." (<한국일보>, 2018.7.27.)
목수정은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18호 「(문화인 노회찬) 문화적 유희로 충만했던 동시대의 전인(全人)」에 이렇게 적었다.
"이건희의 죽음으로 세상이 들썩이는 지금, 노회찬을 회고하는 글을 쓰고자 책상에 앉았다. 이건희, 삼성X파일, 노회찬의 폭로, 의원직 상실로 이어지는 사건의 결말에 그의 죽음은 자리한다. 한 때, 그에게서 최초의 문화대통령 탄생을 꿈꿨기에, 그의 죽음은 내게 간절하던 하나의 꿈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는, 한순간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멈추지 않았고, 부지런히 그것을 충족시키며 살았다. 그렇게 연마한 지식과 경험이 그에게 통찰과 혜안을 허락했고, 그것으로 충만한 삶을 누렸던 사람, 모두가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맹렬히 싸우길 멈추지 않았던 사람이다."
노회찬의 오랜 지인인 한애규(테라코타 작가)가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9호(2020.1.30.)의 '문화인 노회찬'에 실은 「전시장에 들어서다」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그의 고교동창들을 비롯한 다양한 직업을 가진 몇몇이 가끔 혹은 자주 자리를 함께했다. (…) 한번은 클래식음악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엔 왜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가 나오지 않느냔 의문을 누군가가 제기했을 때, 그의 의견은 이랬다. 왕과 귀족과 사제들의 권위가 교회 첨탑만큼이나 높았던 시절의 음악과 시또양(Citoyen. 시민, 평민)의 시대의 음악이 같을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계보는 시대의 전환을 거쳐 비틀즈와 퀸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음악 뿐 아니라 예술 전반에 관한 그의 생각은 일관적이었다. 유명한 그의 말대로 예술은 만 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만인을 위한 것. 특수한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한다는 생각을 그는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세상>이라는 말로 표현해왔다. 그 모임은 우리 각자가 하던 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누이는 쉼터 같은 곳이었다. (…) 자리를 파하고 작가 흩어질 때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커다란 검정 우산을 건네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인생의 찬비에 내몰린 이들에게 우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간 뒤 남겨진 검정 우산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기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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