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와 '네덜란드의 기적', 노동시간 단축과 고용 창출 : "고용 창출이 바로 민주주의, 1367(1391)시간 대 2394(2357)시간"
1653년(효종 4년) 헨드릭 하멜의 예기치 않은 제주도 표류로 네덜란드는 화란(和蘭)이란 이름으로 조선에 알려졌다. 조선에 관한 서양인의 최초의 저술 <하멜 표류기>는 1668년 암스테르담에 귀환할 때까지 17세기 조선의 활상을 세세하게 기록한 책으로 사료적 가치도 크다고 한다. 오랫동안 우리에게 네덜란드는 국토가 바다보다 낮은 나라, 풍차의 나라, 튤립의 나라 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2002년 태극전사들을 이끌고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을 통해 네덜란드가 한국을 강타했다.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
5년 뒤인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예비후보로 '대선예비후보 서울 합동연설회'(7.22.)와 '경남지역 경선돌입 기자회견'(8.28.)에서 "당원동지 여러분, 히딩크가 돼 주십시오"라며 '평당원 혁명'과 함께 히딩크를 불러낸 바 있다.
"여러분 이번 대선에서 어느 후보 찍을 것인지 결정하셨습니까? (네) 결정하셨습니까? (네) 결정 하신 분도 다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웃음) 저는 여러분께 한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마감할까 합니다. 히딩크 감독이라고 기억나시죠? 그 사람이 여러모로 평가받을 게 있지만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선수 선발이었습니다. 선수를 잘 뽑았기 때문에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발 부탁드립니다. 히딩크 감독이 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히딩크 감독이라고 생각하시고 히딩크 감독이라면 어느 후보를 뽑을 것인지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히딩크 감독이 축구계 원로를 뽑았습니까? 축구계 명문대 선수를 안배했습니까? 검증도 안 된 선수를 본 게임에 올렸습니까?
제발 히딩크 감독이 돼 주십시오. 지금 당장 제일 잘 뛰는 선수가 경기에 나가야 합니다." (7월 22일 민주노동당 대선예비후보 합동연설회-서울)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대표선수를 뽑을 때 가장 기량이 뛰어나고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뽑았습니다. 당원동지 여러분이 히딩크가 돼, 가장 잘 뛸 수 있는 선수를 선발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정파 구도라는 거대한 댐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 변화와 혁신을 바라는 평당원 혁명의 열망이 민주노동당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평당원 혁명은 마침내 민주노동당 집권으로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8월 28일 민주노동당 '경남지역 경선돌입 기자회견')
한편 네덜란드는 히딩크의 나라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타협의 대표적 모델 가운데 하나인 '폴더 모델'(polder model) 국가―폴더란 '간척'이란 뜻으로, 해수면보다 낮은 땅에서 살아온 네덜란드 조상들이 서로 힘을 모아 간척지를 개척해 바다의 위협에 맞선 것처럼 국가적 위기가 발생하면 사회적 대타협으로 극복한다는 것―로 노동시간 단축과 시간제 고용(파트타임) 활성화와 차별금지 등을 통해 고용안정에 성공, 실업위기를 극복한 것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주목해봄직한 것 가운데 하나는 1990년대 들어 촉발된 네덜란드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에 대한 논의다. 그 배경을 보면 전통적으로 강력한 고용보호로 인해 노동시장이 경직됐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과 함께, 1980년대 이후 급격히 늘어난 파트타이머, 임시직, 파견 등 유연노동자들에 대한 노동법 및 사회법상 보호가 매우 취약해 이들에 대한 보호가 중요한 과제로 대두된 때였다.
이에 따라 노동법 개정을 통해 정규직들의 엄격한 해고제도를 완화하고 유연노동자들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방안이 모색됐고, 노사 양자기구인 노동재단(STAR)에서의 합의를 거쳐 1997년 말 '유연성과 안정성법'으로 입법화됐다. 이 법안에는 △3번의 연속적 계약 이후 또는 연속계약의 총 기간이 3년 이상일 경우 영구계약으로 전환 △해고예고기간 6개월에서 원칙적으로 1개월, 최고 4개월로 단축 등 유연성 확보내용과 △3개월 동안 주당 최소 20시간 노동하면 법적으로 고용계약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 △파견업체와의 계약은 영구적인 정규계약으로 간주 등 안정성 확보내용이 담겨 있다. (정원호, 「네덜란드와 덴마크의 유연안정성 비교」, 한국노동연구원, <국제노동브리프>, 2005년 12월호)
2006년 6월 26일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서민들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라는 글을 올리며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난 3년 동안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고,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는 2008년 2월에는 빈부격차가 지금보다 더 벌어질 것"이라고 질타하면서, 노동시간 비교 속에서 네덜란드를 불러냈다. 두 나라의 노동시간은 '네덜란드 1367 시간 대 한국 2394 시간'이었다.
"도대체 우리 대다수 서민들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머리가 나빠서인가? 남들 열심히 일할 때 먹고 놀아서인가? OECD 최근 발표에 따르면, 2005년 1년 동안 노르웨이 노동자들은 1년간 1360 시간 일했고, 네덜란드 노동자들은 1367 시간, 독일은 1435시간, 프랑스는 1535시간 일했다. 세계적으로 일벌레로 유명한 일본 노동자들도 1775시간 일한 반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2004년 통계로 2394시간 일했다. OECD 통계를 볼 것도 없이 국제노동기구(ILO)에 의하면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지난 30년간 세계 1위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최장노동시간 부문에서 감히 한국을 제치고 1위를 하려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열심히 일한 죄 말고는 이 땅에서 태어난 죄밖에 더 있는가?"
2008년 7월 10일 <초록교육연대> 초청강연에서도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공동대표는 "고용창출이 민주주의"라면서 네덜란드를 다시 호명했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고용이다. 정규직 임금의 50% 미만을 받는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60%를 차지하는데, 외국은 20~30% 정도밖에 안되고 스위스는 비정규직 임금을 낮게 주면 형사 처벌 받도록 돼있으며 네덜란드는 오히려 비정규직이 불안하므로 임금을 더 주도록 해 놨다."
노회찬의 오랜 길동무이자 드라마로도 제작된 인기 웹툰 <송곳>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의 <우리가 몰랐던 노동이야기: 하종강의 노동 인권 교과서>(나무야, 2018.5.1.)를 보면 벽돌공이 장래희망인 네덜란드의 한 중학생 일화가 나온다.
"벽돌공이 일하는 데 가서 보니까 하루 종일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일할 수 있더라고요. 나는 음악을 좋아하거든요. 벽돌공이 돼서 평생 음악 들으며 행복하게 살 겁니다."
그리곤 제대로 된 노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꿈이 현실과 멀지 않은 이유는 벽돌공의 수입이 대학 교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직종 간 임금 격차가 별로 없고 비정규직 차별이 없으니 그야말로 직업에 귀천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학문에 뜻이 없으면서도 취직 때문에 억지로 대학에 가는 일이 없고 공부를 진짜 좋아하는 학생들만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대학에 가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이 되니까 교육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이 된 것이다."
"'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노동자 된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듣는 등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학교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학교에서 이런 것들을 전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한 반에 서른 명 남짓한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서 나중에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정규직이 되는 사람은 고작 한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 하루 동안 열 명이 취업을 하면 그 가운데 여덟 명이 비정규직 일자리다. 우리 청소년들도 거의 대부분은 노동자가 될 것이고 그 중에서도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나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이런 내용을 배우면서 노동자가 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이런 내용을 배우면서 경영자가 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 노동 문제를 이해하는 수준이 같을 수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만 자기 불편을 감수하면서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노동자가 파업한다고 비난하면 오히려 몰지각하고 교양 없는 사람이라는 핀잔을 듣는다. 프랑스에서는 대사관 부대사나 법원 판사도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핀란드에서는 교사뿐만 아니라 교장선생님도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캐나다에서는 경찰도, 호주에서는 소방관도, 심지어 독일에서는 군인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있다. 공부를 많이 했거나 지위가 높다고 해서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인식이다."
'네덜란드 병'에서 '네덜란드의 기적'으로: 빔 콕과 '바세나르 협약'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을 보면 네덜란드에 대해 "17세기의 전형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네덜란드는 19세기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인접 국가들과는 달리 산업 자본주의로 빠르게 성장하지 못했다. 경제학 용어 가운데 네덜란드가 들어가는 말이 있는데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 그것이다. 그 유래를 보면, 1959년 네덜란드는 북해 유전의 발견으로 인한 석유 수출로 막대한 돈이 해외에서 밀려들어왔고 덕분에 일시적인 경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통화가치의 상승 및 물가 급등으로 인해 국내의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면서 결국 1960~1970년대에 극심한 경제 침체를 겪게 됐다. 이처럼 네덜란드 병이란 주로 자원 부국이 자원의 수출로 인해 일시적으로 경제 호황을 누리지만, 물가와 통화 가치상승으로 인해 국내 제조업이 쇠퇴해 결국 경제 침체를 겪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자원의 저주'(Resource curse 또는 Paradox of plenty)라 불리기도 한다. '병'을 치유하고 '기적'(Dutch Miracle)을 이뤄내는 데 네덜란드는 성공했다. 2002년 1월 20일 KBS 일요스페셜 <네덜란드의 기적>이 방영, 세간의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구상에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라는 것이 이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의 공통된 찬사였다.
16년간 암스테르담 시장을 지내고 내무장관까지 지낸 인물이 공직기간 중 단 400만 원을 유용한 사실이 네덜란드 최악의 부패 스캔들이 되고 있는 나라, 200여 명의 국회의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자가용 운전수를 두고 있는 이가 없는 나라. 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는 나라, 청교도 전통에 따라 가진 자가 극도로 검소한 삶을 살고 있어 계층간 위화감이 없는 나라,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여 실업 발생을 막고 있는 나라. TV에 비친 네덜란드는 너무나도 부러운 '인간의 공동체'였다. (이승선 기자, 「네덜란드의 기적<1> 노·사·정이 만들어낸 번영」, <프레시안>, 2002.1.22.)
'네덜란드의 기적'을 이룬 데는 폴더 모델의 가장 유명한 사례인 '바세나르 협약'(Wassenaar Agreement, Wassenaar Accord)이라는 노사정 대타협이 있었다. 기적을 이끌어낸 주역은 루드 루버스와 빔 콕이었다. 루드 루버스 총리가 이 드라마의 감독이었다면 노총위원장이었던 빔 콕은 주연배우였던 셈이다.
재정 적자 축소, 기업의 수익성 회복, 임금인상 억제, 일자리 나누기 등을 골자로 하는 '새 정부 계획'을 내놓은 루버스 총리는 노사가 타협하지 않으면 정부가 개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총리가 네덜란드 병을 치료하겠다고 나서자 노사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조명신 기자,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모델 만든 이들은 누구?: '네덜란드 모델'의 두 주역, 루버스와 빔 콕」, <오마이뉴스>, 2010.11.16.)
'네덜란드의 기적'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 1982년 '바세나르 협약'은, 당시 네덜란드의 전경련에 해당하는 VNO-NCW 회장 크리스 반 빈의 식탁에서 이루어졌다. 반 빈 회장이 직장에 나가는 아내 대신 아이를 돌보느라 주로 집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세나르 협약은 네덜란드 경제와 사회의 대전환점이었다. 바세나르 협약으로 노동계는 임금 동결을 약속했고 사용자는 노동시간 단축과 이를 통한 고용 창출로 화답했다. '기독교민주당 아펠' 소속의 루드 루버스 총리(1982~1994)가 이끄는 정부는 재정 및 세제 지원 등으로 힘을 보탰다. 실제로 기업은 근무시간을 주 40시간에서 38시간으로 줄임과 동시에 시간제 일자리를 늘려갔고, 정부도 법정 노동시간을 36시간으로 줄였다. 그리고 시간제로 일을 하더라도 종일제 노동자와 하는 일이 같다면 급여체계나 연차와 같은 혜택들을 동등하게 받도록 법으로 보장했다.
이런 타협의 배경에는 노·사·정 간 신뢰가 자리잡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자와 노동자 대표들은 독일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을 공동으로 전개하면서 신뢰를 쌓았다. 전후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노사 관계 안정이 필요했다. 임금 인상 억제를 노동자들이 수용하기 위해서는 사회보장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어야 했다. 노사간 이해관계는 노사정이 폭넓게 참여하는 사회적 합의기구를 통해 조율됐으며, 정부와 의회는 이를 정책과 입법에 반영했다. (「<노동개혁> 네덜란드 일자리 유연성·안정성 동시 추구」, 연합뉴스, 2016.2.2.)
이렇게 이뤄진 협약으로 경제안정과 경제성장이 이뤄졌다. 하지만 바세나르 협약 정신이 흐트러지면서 네덜란드 경제는 1992년 다시 불황에 빠졌다. 제조업 일자리 100만개 중 10분의 1이 1992~94년에 사라질 정도였다. 이런 경제 위기 속에 1994년 총선에서 네덜란드 사상 최초의 좌우익 연합정권인 '자주색 연정'(Purple Coalition)이 탄생하면서 바세나르 협약을 이끌어냈던 노조 지도자 빔 콕이 총리가 됐다. 자주색 연정은 빔 콕의 노동당(적색), 자유당(청색), 민주당(중도파)과의 연정을 뜻하는데, 빔 콕 정부는 연정에 바탕해 정부지출 삭감, 세금 감세, 시장경제 활성화, 규제 완화, 사회복지제도 수정, 민영화 등 과감한 조치를 실시했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기적'을 이끌어낸 주역인 빔 콕(Willem "Wim" Kok, 1938.9.29.~2018.10.20)은 네덜란드 노동당(PvdA) 소속 정치인으로, 8년간(1994.8.22.~2002.7.22.) 총리를 지냈다. 바세나르 협약 당시 노동자 측 대표로 나섰던 빔 콕은 노동계로부터 배신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길이 아니고는 '네덜란드 병'을 치유하고, 일자리를 늘릴 수 없다고 확신했으며, 총리가 된 후에도 이 기조를 지켜나갔다. 네덜란드 경제의 악순환 고리는 선순환 구조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경제성장률은 오르고 실업률은 감소했다.
빔 콕, 한국에 오다 : "정부는 세금을 낮추고, 기업은 고용을 늘리고, 노조는 일자리 재분배에 합의"
총리직을 마친 뒤 빔 콕은 몇 차례 초청 방한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1996년 6월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초청으로 양국의 경제협력외교 방안 논의를 위해, 2005년 5월 노무현 정부 때는 한국노동연구원 초청으로 노사정 사회적 협의와 경제발전의 경험 소개를 위해, 2009년 11월 이명박 정부 때는 '새만금 명예자문관'으로 위촉되면서, 2011년 7월에는 '서울시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 주최 국제 컨퍼런스 강연을 위해, 2012년 2월에는 한국개발연구원(KDI) 주관 '글로벌 코리아 2012'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한 달 뒤인 3월에도 가톨릭대 드러커경영센터와 한국피터드러커 소사이어티, 뉴패러다임인스티튜트가 공동 개최한 '독일과 네덜란드 경제, 왜 강한가-사회책임 지식경제의 힘' 토론회와, 인간개발연구원이 주최한 '자본주의의 대변화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연회에 잇따라 참석했다. "오랜 화합의 리더십으로 복지·성장 두 토끼를 잡았다"는, 네덜란드 병을 치유하고 기적을 이끌어낸 비결에 대해 빔 콕은 한국을 방문해 이런 어록을 남겼다.
"사회경제위원회(SER) 같은 협의와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 신뢰'다.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는 것은 서로의 목적과 이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신은 네덜란드에도 당연히 존재하며 이에 따른 분쟁과 파업도 발생한다. 그러나 대화가 실패했을 때만 이런 수단에 의존한다는 것이 네덜란드 사회의 불문율이다." (2005.5.)
"정부는 세금을 낮추고, 기업은 고용을 늘리고, 노조는 일자리 재분배에 합의했다. 이런 폴더모델 체제가 결정적으로 파업도 줄이는 평화적인 사회적 분위기와 높은 경제성장과 고용률을 이룩하는데 기여했다." (2011.7.)
"투쟁만 하는 노조는 이제 설 곳이 없다. 노조도 기업과 국가 성장에 동반 책임 의식을 갖고 패러다임 변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2011.7.)
"내 일생을 통해 얻은 많은 교훈 중 하나가 개혁의 필요성을 수용하는데 오래 기다린 국가일수록, 개혁의 정치사회적 폐해가 더욱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정부와 사회파트너인 기업, 노동조직들과의 공동의 책임을 나누지 못한다면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훨씬 복잡해진다." (2011.7.)
"가장 조화롭고 성공한 사회란 정부, 민간부문, 노동조합을 포함한 시민사회 등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할 준비가 된 사회다. 이를 가능하게 할 포용하는 정치는 우리의 미래다." (2012.2.)
"나라가 고령화를 앞둔 상황에선 건전한 재정과 합리적인 분배는 국가 미래와 직결돼 있다. 정치 리더들이 '동전 한 닢이라도 어떻게 잘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 합리적인 복지는 가능해진다." (2012.3.)
"한국인들은 빠른 경제성장에 만족하지 않고 삶의 질 제고와 일과 삶의 조화, 양극화 해소, 복지 확대, 고용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와 그 가족은 이제 자신들의 삶에서 일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 육체적·정신적 건강, 가족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
일과 삶의 조화는 모든 사람에게 동기부여를 한다." (2012.3.)
"나는 네덜란드 같은 복지와 사회보호가 완비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게 자랑스럽다. 그 점은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스칸디나비아 3국도 마찬가지다. 사회복지와 예산은 일종의 딜레마다. 교육, 보육, 사회안전 등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다. 더 좋은 복지를 원한다면 그 대가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인적자원) 중 어느 것에 더 중점을 둘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또 늘어나는 예산에 대처하기 위해 전체 세수를 늘리기보다는 계층별로 차등적 세율을 적용하는 부자 증세가 더 바람직하다. 갑작스러운 변화보다 점진적 방안이 필요하다. 복지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2012.3.)
참고로 한국의 경우 1998년 1월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 모델을 수용해 '노사정위원회(2007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2018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개칭)'를 설립했지만, 아직까지 의미있는 전기를 마련해 내지는 못하고 있다.
노회찬, 2005년 3월 네덜란드를 첫 방문하다 : "해외까지 나와 당원들과의 대화로 밤을 새는 사람"
노회찬은 네덜란드를 두 차례 방문했다. 첫 번째 방문은 17대 국회 법사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5년 3월 네덜란드 교민들의 초청으로 아내 김지선과 함께 방문했다. 첫 방문은 2005년 3월.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위원은 국회 법사위의 해외사법제도 시찰단의 일원으로 유럽을 방문했다. 폴란드 일정을 소화한 뒤 노회찬은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던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재판(헤이그 국제유고전범재판소, ICTY)을 보기 위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 2000년 시민혁명으로 실각한 밀로셰비치는 그 뒤 전쟁범죄자로 수감돼 재판을 받던 중 2006년 3월 감옥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1990년대 유고 내전 당시 보스니아계를 잔혹하게 학살한 '발칸의 도살자' 3인방을 심판하는 국제전범재판이 2017년 마무리됐다. 재판 중 옥사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 지난해 징역 40년을 선고받은 라도반 카라지치 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지도자에 이어 세르비아계 군 총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가 2017년 11월 22일 법정 최고형인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유고 내전에서 벌어진 반인도적 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가 다룬 마지막 주요 사건이었다. (…)
무엇보다 ICTY의 경험은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ICC)를 설립하기 위한 로마조약이 채택되는 결실로 이어졌다. (<경향신문>, 2017.11.24.)
일정을 마친 뒤 골프를 치기로 한 다른 의원 일행과는 달리, 노회찬은 유럽 당원들이 많이 있는 독일 뒤셀도르프로 가서 당원 및 지지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 이후 한 당원의 집으로 몰려간 사람들은 평소 인터넷 동영상으로만 봤던 노회찬에게 밤새 질문을 던졌고, 노회찬은 그 질문들을 일일이 받아주며 날이 샐 때까지 이야기를 이어갔다. 10년 뒤 당시 노회찬을 수행한 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 초대 사무국장 장광열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그때 진보정치인으로서 그의 면모를 보았다. 그는 국회의원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해외까지 나와 당원들과의 대화로 밤을 새는 사람이었다. 벌써 10년이 지난 일이지만, 꼭두새벽까지 당원들과 술잔을 맞대고 같이 이야기하고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다음 날 또 당원들과 나들이에 나선 노회찬 의원의 인상이 그 때 깊이 남아 있었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는 대중을 웃기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었지만, 당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차분하고 냉정하기까지 했다. 그때 우리는 뒤셀도르프 인근의 과거 탄광지역을 돌아보고, 서둘러 기차를 타고 헤이그로 돌아왔었다." (장광렬, 「유럽의 한국인들이 노회찬 전 의원을 초청한 이유: 노회찬과 함께 한 7일간의 네덜란드-벨기에 여행기 -1」, <레디앙>, 2015.4.6.)
노회찬과 일행이 뒤셀도르프 탄광지역을 찾아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뒤셀도르프를 비롯해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 딘스라켄 등의 도시가 모여 있는 루르 지역이 1960∼70년대 7900여 명에 달하는 한국인 광부들의 피와 땀이 서린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963년 12월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내린 한국인 광부 1진은 딘스라켄의 로베르크 광산에 배치됐다. 로베르크 광산을 포함, 3곳의 광산은 당시 뒤스부르크 함보른 탄광회사에 속해 있었다. 화제를 모았던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가 매몰됐던 곳이 바로 함보른 탄광회사 소유 광산이었다.(<세계일보>, 201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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