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노회찬 : 그 일(의원직 상실)이 있고 2년2개월 정도 지났다. '노유진의 정치카페'라는 인터넷 팟캐스트를 1년째 하고 있다. 강연을 열심히 하고 있다. 외국에도 자주 나간다. 교민은 물론 현지인이나 대학교에서 자주 부른다. 동북아 정세 변화와 북한 문제를 비롯해 한국의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박근혜 정부와 한국정치 등 강연 주제가 다양하다.
얼마 전 네덜란드의 한 대학교에서 한국 재벌 문화에 대한 강연을 요청하기도 했다. 교민뿐 아니라 외국 현지인들도 굵직굵직한 국내 뉴스들은 많이 알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관심을 끄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3월 13일부터 네덜란드 방문합니다. 교민 여러분, 네덜란드 사회당 대표단, 노사정위 관계자 그리고 네덜란드 젊은 학생들 많이 만나고 돌아오겠습니다^^" 노회찬 페이스북(2015.3.12.)
"네덜란드 가셔서 그곳 사람들 키 큰 것에 너무 놀라거나 부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머리는 더 크실거에욧~!! 아자아잣~!" (페친 김해룡 님의 글) 노회찬이 임순례 감독의 새 영화 <제보자> 시사회에서 만난 유연석 배우와 사진을 찍으면서 트위터(2014.9.17.)에 남긴, "응사 이후 좋아하게 된 배우 유연석 군을 만났습니다. 키는 저보다 크지만 얼굴은 저보다 작더군요. 쌤쌤입니다^^"는 글을 패러디한 것이다.
※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사람들은 네덜란드 국민들이다. 2015년 네덜란드 남자들의 평균 키는 184㎝, 여자들의 평균 키는 171㎝라고 한다. (<한겨레>, 2015.5.5.) 한국의 경우 2013년 만 17세 남자 평균 키는 173.2cm, 여자는 160.8cm로 조사됐다.
2015년 3월 중순, 부부 동반 네덜란드 두 번째 방문기 : "노회찬 전 의원은 저에게는 마지막 기대주거든요"
2015년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와 김지선 여성의전화 부회장 부부는 네덜란드 동포들의 초대로 3월 13일부터 19일까지 6박7일간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방문했다. 암스테르담 지역 동포 강연(3.14.), 네덜란드 사회당 사무총장 면담(3.16.), 에라스무스대학교 부설 국제사회연구소 초청 강연(3.16.)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회적 합의모델기구인 SER(사회경제위원회) 방문(3.18.),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 방문 및 관장 면담(3.18.), 유럽 중세 상업의 중심지 벨기에 겐트(Gent) 탐방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왔다. 초청자 중 한 사람인 네덜란드 교포 장광렬 씨가 전 일정을 수행했다. 10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장광렬이 10년 만에 노회찬을 초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광렬의 대답이다.
"민주주의가 역주행을 하고 있는데, 야당은 야당 노릇을 못하고, 진보정당은 사분오열돼 있는 이 시대에 진보정당운동의 대표적인 인물, 노회찬 대표에게 한국사회에 희망은 있는 지 묻고 싶었어요. (…) 지금은 모든 게 뒷걸음치는 것 같아 보여요.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 농민 등 민중들의 삶은 점점 힘들어지는데 그들을 대변한다는 진보정당들은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이 답답해서, 한국에는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으려 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어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노회찬 전 의원을 초청했어요. 저에게는 마지막 기대주거든요."
※ 장광렬은 2000년 민주노동당에 가입해 그해 가을 중앙당에서 아셈(ASEM) 국제회의 당시 대안포럼 국제행사 담당자로 당 활동에 처음 참여했고, 2001년 2월 대우자동차 대량정리해고 때 '대우그룹회장 김우중 체포결사대' 프랑스 원정 때 현지 지원을 했었다. 그는 2003년 7월에 설립된 한국 정당사 최초의 해외지구당인 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의 초대 사무국장을 지냈고, 2008년 진보신당 초대 유럽지역위원장을 지내며 유럽 내 진보정당운동에 몸담았다. 2008년 3월 1일 장광렬은 '네덜란드에서 인사드립니다'는 글을 진보신당(3.16. 창당) 당원게시판에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내일 발기인대회에 참석하고 싶지만, 사정상 가지 못해서 안타깝습니다. (…) 제가 아는 많은 분들, 그리고 모르지만 한길을 갈 모든 분들에게 한 가지 말씀만 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우리를 보고 있는 노동자 서민을 기억해주십시오. 노동자 서민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그분들의 바람대로 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정받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말하기는 쉽지만 행동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도 항상 제 말만큼이라도 하고 있는 건지 되돌아봅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혼자서 만들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 함께 이 길을 나섰습니다. 끝까지 낙오되지 않고, 지친 사람은 일으켜주며, 이 길을 함께 걸어갔으면 합니다."
초청 이야기 한마당-노회찬에게 희망을 묻는다 : "한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책이 잘 팔린 이유"
네덜란드에 도착한 노회찬의 첫 일정은 3월 14일 네덜란드 교민회 초청 강연이었다. 주제는 '노회찬에게 희망을 묻는다'였다. 장소는 교민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암스테르담 바로 밑의 암스텔뻬인으로, 국제적으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의 일산이나 분당 같은 곳이라고 한다. 강연의 주요 내용을 몇 개 추리면 이렇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묻는데, 그건 한국사회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1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해서 구해서 읽어보았다. 원래 저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무슨 책이 10만 권 이상 팔렸다면, 영화 관객이 1000만 명 이상 모였다면 의무적으로 봐야 한다. 직업상 봐야 된다. 정치인이 그런 걸 모르면 되겠나? 그건 직업병 같은 거다. 그 책이 잘 팔린 이유는 제목 때문이다. 한국 독자들은 정의가 뭘까 궁금해 한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부정의가 판치고 있다." "한국의 보수정당 중 진짜 보수는 30%라는 거다. 나머지 70%는 그저 반공이다. '때려잡자 공산당!' 외치며 그저 보수 흉내만 낸다. 노무현 정부 때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만들려고 하니까 한나라당이 반대했다. 그럼 고위공직자비리장려처를 하자는 말인가? 그런 거 반대하는 거 보면 보수가 아니라 수구다. 제대로 된 보수라면 그런 거 찬성해야 한다." "고용을 늘리지 않고 오히려 일자리를 없애는 정부 정책이 문제이기 때문에 복지로 해결될 게 아니고, 1차 분배가 잘 돼야 한다. 이명박 때도 그랬고, 박근혜 때도 대선에서 그들은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서는데 민주진보세력은 고작 '그들은 믿을 수 없다, 독재자의 딸이다'라는 말로 대응했다. 이제는 민생문제의 해법을 놓고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구도로 가야 하고, 진보세력도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 힘을 늘려서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강연 1부를 마친 노회찬은 2부에 질의응답을 받았다.
질문 1 : 굴뚝투쟁, 철탑농성 투쟁 같은 노동자들의 극단적인 투쟁을 꼭 해야 하는 건지, 다른 방법으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할 수는 없는지?
노회찬 :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가 크레인 위에 올라가 농성할 때, 빨리 내려오라고 심상정 의원과 나는 30일 동안 단식농성해서 몸무게가 15킬로그램이나 줄기도 했다.
나는 노동자들이 굴뚝에 올라가서 싸우는 것보다 노동자의 대표를 국회로 보내서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게 좋다고 설득해왔다. 국회의원 선거를 비례대표제로 바꾸면 더 많은 노동자들이 국회에 들어가고 극단적인 투쟁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치는 사회의 이해관계 충돌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다.
질문 2 : 노동운동 내에서 공연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립이 있고, 통합진보당 폭력 사태에서 보듯 진보라고 말하는 자들도 내부의 강자가 약자를 무시하고 차별하는 데 해결 방안은 있는지?
노회찬 : 그것은 진보가 아직 미성숙해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이고, 진보가 자성해야 한다.
질문 3 : 네덜란드에 온 지 7년이 지났는데, 한국의 친구들이 한국은 절망적인 상황이니까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희망을 어떻게 찾을지?
노회찬 : 아직 진보정당에 희망은 있다. 많은 이들이 차라리 새정치연합에 들어가서 정치를 하는 게 어떠냐고 권하는데, 새정치연합은 아무리 못해도 2등은 하고 100석 정도는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낡은 정치행태를 바꾸기 어렵다.
대통령 선거 때 새누리당은 모두가 합심해서 꼭 이기려고 노력하는데, 새정치연합은 대통령 후보 측 사람들만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뒷짐지고 있었다. 나머지는 국회의원 자리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은 2등만 하면 되고 자기는 국회의원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뭉친 정당에서 어떤 개혁을 할 수 있을까? 정치가 바뀌려면 비례대표제가 돼야 한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정당명부 투표에서 받은 투표율은 13.4%(☞ 13.03% : 필자 주)였다. 만약 선거제도가 독일식 비례대표제였으면 국회의원 40명이 진보정당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면 진보정당은 성공할 수 있다.
질문 4 : 롤 모델은 누구인지?
노회찬 : 호치민을 좋아한다. 위기에 놓였던 베트남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서 민족통일을 이룬 그의 강한 면뿐만 아니라 영웅으로 우상화 되지 않고, 옆집 아저씨처럼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돼 '호 아저씨'라고 불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검소한 사람이었다. 베트남은 다른 나라에 정부관료나 경제계에 부패가 적은 데 그것은 바로 호치민의 영향이다.
한 방청객은 "1992년 대학생 때 백기완 대통령후보 선거운동을 했을 때, 찌라시를 시장에서 돌리는데 그 내용을 이해하는 국민들이 별로 없었다"며 "노회찬 대표의 강연은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쉬운 말이라서 좋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진보세력이 이렇게 많이 국민에게 친근하게 변했다는 걸 보게 돼 감개무량하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다음날인 3월 15일 일요일에 노회찬과 김지선 부부 일행은 공식일정 없이 헤이그 인근을 방문하고 저녁에는 동포 가족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했다. 유럽 여느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도 일요일은 대부분의 행사가 자제된다고 한다. 노회찬과 김지선 부부 일행도 네덜란드식으로 휴식을 취했다. 네덜란드 왕실을 정점으로 귀족들의 문화를 제외하면, 네덜란드에는 세 개의 문화가 있다. 그것은 개신교, 가톨릭, 그리고 노동계급(사회주의) 문화다. 세 문화권 모두 일요일에는 쉬자는 데 의견 통일을 보았고, 대부분의 상점은 일요일에 문을 닫았다. 물론 네덜란드 사회도 점차 미국화돼 일요일 시내에서 쇼핑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암스테르담 시내 중심가는 1년 365일 옷가게와 관광상품점들이 문을 열고 있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네덜란드 사회당 방문과 헤이그 대학 강연
3월 16일 월요일. 노회찬-김지선 일행은 장광렬의 안내 속에 네덜란드 사회당(Socialistische Partij, SP) 중앙당사가 있는, 700년의 역사를 지닌 아머스포르트(Amersfoort)로 갔다.
노회찬의 네덜란드 2차 방문 당시 유럽 대부분 나라들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우경화'되고 신자유주의적인 경제노선이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네덜란드의 경우는 노동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대안으로 더 왼쪽에 있던 정당들을 선택하게 되는데 네덜란드 사회당 역시 이런 부류에 속했다.
잎서 살펴본 빔 콕의 네덜란드 노동당(Partij van de Arbeid, PvdA)은 1894년 창당한 사회민주노동당을 계승해, 1946년에 창당된 네덜란드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1940년대부터 네덜란드 좌파의 대표적인 정당으로 있었던 유서 깊은 정당으로, 네덜란드 복지제도의 기틀을 확립한 정당이다. 네덜란드 사회당의 경우 창당 당시 명칭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네덜란드 공산당'이었다. 1971년 주로 68세대로 이뤄진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의 마오이즘(모택동주의) 정치서클에서 시작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폐기하고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전면 수용했다. 선거를 통한 집권을 표방한 뒤 선명한 좌파 노선을 걸었다. 1994년 약 1.5%의 지지를 받으며 2석으로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 2012년 선거에서는 9.7%의 지지를 얻어 제4당으로 15석을 확보했다.
참고로 입헌군주국 네덜란드는 다당제 국가로, 의회가 상하원으로 구성돼 있으며 실권을 쥔 하원은 전국단일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고, 상원은 광역지방자치의원들의 투표로 결정된다.
네덜란드 사회당 중앙당사를 방문한 노회찬 부부는 얀 마라이네슨 전 당대표와 한스 반 하이닝언 사무총장과 대담을 했다. (장광렬, 「좌파정당 진보정당,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기반해야: 노회찬과 함께 한 네덜란드-벨기에 여행기-3」, <레디앙>, 2015.4.13.)
1970년대 사회당을 창립하고 당을 노동당 다음 가는 좌파정당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당의 대표를 지낸 얀 마라이네슨은 브라반트 지방 작은 공업도시 오스(Oss)에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자신문>을 집집마다 돌면서 배포하면서 지역에서 성장해온 정치인이었다. 얀 마라이네슨은 "우리가 무엇을 하려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대중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냐가 중요하다"며 대중노선을 강조했다. 사회당은 캠페인이나 방송 인터뷰에서 항상 대중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와 활동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며, 지식인의 현학적인 언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중앙당사 빨간색 탑에는 '사람이 우선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한스 반 하이닝언 사무총장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경제정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노회찬은 한국은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지방자치제, 정치범 석방 및 사면 복권, 언론 출판의 자유 향상 등을 이루었고, 바로 한 달 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대중적 노동운동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1992년 총선 이후 노동자계급 정치세력화가 시작돼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과 2004년 원내 입성을 거두었으나 진보정당 내부의 갈등으로 현재는 정의당이 국회의원 5석으로 제3당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이어 한국의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로 돼 있어 양대 보수정당이 나눠먹기를 하고 있고, 이런 벽 때문에 진보정당은 비례명부에서는 10% 이상의 득표를 하지만 의석수는 훨씬 적다며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들의 표가 동등하게 대접받도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네덜란드 상황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회찬 : 네덜란드의 사회적인 합의 모델(사회경제위원회 Sociaal-Economisch Raad, SER)에 대한 사회당의 입장은 무엇인가?
한스 : 노사 간의 사회적 합의는 양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질 때 제대로 굴러갈 수 있으나, 노동자를 대표한 노조 대표자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대로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는 노사가 힘의 균형을 이루었으나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는 사회 전반에 경쟁의 법칙이 관철되고 노동자의 단체협약을 통한 권리 보호가 점점 약화돼 왔다. 이는 노동조합이나 노동당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자본 측의 압력에 한발 두발 양보하며 물러서다 보니 노동자들의 조직력은 약화되고 싸울 의지조차 잃어버리게 됐다.
※ 1950년에 설립된 공공기관인 네덜란드 SER은 노조연맹, 사용자연맹, 정부가 지명한 독립적 인사 등 노사정 3자 대표 각 15인 등 총 45명으로 구성(1990년 이후 각 11인, 총 33명으로 축소)된 공공자문기구로 정부는 정책을 의회에 상정하기 전에 SER의 법적‧정책적 자문을 구한다.
노회찬 : 영국의 노동운동이 80년대 마가렛 대처의 강력한 우파개혁에 맞서다 역사적 패배를 한 것에 비하면 네덜란드 노동운동은 대화와 타협으로 심각한 패배는 피한 것 아니냐?
한스 : 조금씩 조금씩 빼앗기는 패배의 연속보다는 완전한 패배가 더 나을 수도 있다. 현재에도 우파인 자유민주당과 좌파인 노동당이 연정을 하고 있지만 노동당이 자기의 지지기반의 이해관계를 반영시키기보다, 자유민주당의 정책을 쫓아가고 있다.
노동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복지와 노동권 신장을 가져온 사회민주주의 이념은 이미 그 역사적 임무를 다했으므로 이젠 더 이상 할 역할이 없다고 선언했지만, 지금 생활인들은 사회민주주의가 후퇴해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한스 사무총장은 "사회당이 성장하게 된 것은 네덜란드에 노동-자본의 힘겨루기에서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해진 신자유주의 시대에 신물을 느낀 노동자들이 사회당을 찍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자기 당이 성장하는 것은 좋지만 노동자들이 고통이 커지고 있는 현실은 결코 즐겁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사회당 대표단 면담을 마친 뒤 노회찬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재벌과 노동자'를 주제로 에라스무스대학교 국제대학원(ISS) 초청 강연을 했다. 3월 18일에는 SER(사회경제위원회)을 방문해 '사회적 합의모델'을 주제로 좌담회를 했고, 이준 열사 기념관장과의 면담을 한 뒤 네덜란드 지방선거 개표 파티에 참석했다.
※ 참고로 37개 정당이 참여한 2021년 네덜란드 총선에서는 '자유민주국민당' 21.87%(34석), 사회자유주의 정당으로 이른바 '강남좌파'들이 가장 많이 지지하는 '민주66' 15.02%(24석), 극우 성향의 '자유당' 10.79%(17석), 자유주의 중도 우파 노선을 추구하는 '기독민주애원당' 9.50%(15석)를 획득했다. 좌파 진영의 경우 '사회당' 5.98%(9석), '노동당' 5.73%(9석), '녹색좌파당' 5.16%(8석)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유럽 주류 좌파 정당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 등에선 주로 극우 정당, 그리스·스페인에선 극좌 정당들이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와 관련한 여러 해석 가운데 "좌파 정당의 자양분이 됐던 토양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분석에 주목해봄직하다. (고정애 특파원, 「유럽 좌파가 몰락한 까닭은…」, <중앙일보>, 2016.12.11.)
"20세기엔 노동자라면 공장 문을 열고 쏟아져 나오던 이들을 떠올리곤 했다. 유사한 노동 패턴에 유사한 여가·문화를 즐기는 비교적 균질한 집단이었다. 이들 사이에선 연대가 가능했고 또 강했다. 2000년대 들어선 이게 달라졌다. 노동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집단이 분화되면서 공통분모랄 만한 게 줄어만 갔다. 여기에 세계화의 수혜는 대도시와 특정 산업에 집중됐다. 자동화의 폐해는 단순직에서부터 덮쳤다. 이른바 양극화다. 이제는 노동자라면 무한 경쟁에 노출된 외로운 1인을 떠올릴 지경이 됐다. 여기에 반이민·반난민의 인종주의 성향이 짙어졌다. 극우 정당이나 포퓰리즘(대중주의) 정당들이 힘을 얻는 이유다. 자유주의적 중산층과 노동자라는 두 바퀴로 굴러가던 좌파 정당으로선 후자가 크게 흔들리게 된 것이다." "보수당이 좌클릭을 하며 좌파 정책을 차용하면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가는데 비해 좌파 정당들은 새 맞춤형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영국 언론인 존 해리스는 '만일 좌파 정당들의 현재 곤경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변화를 요구하는데 능하지만 어떤 변화여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미숙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21세기에 걸맞은 신념과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닫는 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노회찬-김지선 부부 : '불출 노회찬'
네덜란드 방문 중에 잠깐 시간을 낸 노회찬-김지선 부부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이 전시돼 있는 헤이그의 마우리츠하이스 왕립박물관(Mauritshuis, The Royal Picture Gallery)을 방문했다. 대표 소장품은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65)는 렘브란트, 프란스 힐스와 함께 "17세기의 전형적인 자본주의 국가"였던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3대 화가 중 한 명인 얀 페르메이르(Jan Vermeer, 1632~1675)의 명화로, 이름에서 말하듯이 소녀가 걸고 있는 진주 귀고리를 그림의 초점으로 사용했다. 네덜란드가 절대 해외 전시를 허락하지 않는 작품으로 유명한 이 그림은 '북유럽의 모나리자' 또는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며 '회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대해 오페라 해설가 한형철은 한 칼럼(<중앙일보>, 2021.3.21.)에서 이런 호기심을 던지기도 한다. "그녀의 두건이나 의상을 보면 신분이 귀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지요. 종교화가 사라진 당시의 네덜란드 화가들이 주로 부자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생계를 유지했는데, 왜 화가는 신분이 낮은 소녀를 그렸을까요, 혹시 그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뮤즈였을까요?" 사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특정한 인물을 모델로 한 초상화라기보다는 '트로니(tronie)'로 보는 편이 적합하다는 견해도 있다. 트로니는 '얼굴'을 의미하는 17세기 네덜란드어다.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과장된 표정을 보여준다는 특징과 함께 트로니는 특별히 아름답게 만들어졌거나 혹은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색다른 의상을 입은 모델을 가슴 높이까지 그린 전형적인 인물화'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2020년 5월 20일 tvN의 <유 퀴즈 온 더 블록>(55회)은 "세계적인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숨겨진 비밀이 밝혀져 큰 화제를 모았다"며 퀴즈를 냈다. 네덜란드 연구진이 최신 기술을 이용해 그림을 정밀 분석한 결과, 소녀의 얼굴에서 이것이 발견한 것인데요. 이전의 일부 미술학자들은 소녀에게 이것이 없는 것을 근거로 작품 속 인물이 허구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 아리송한 문제의 정답은 '속눈썹'이었다. 2020년 마우리츠하이스(Mauritshuis) 왕립미술관의 연구팀은 적외선을 활용한 여러 차례의 촬영 등을 통해 2년간 그림을 조사하면서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그림 가장 바깥층의 아래에 숨겨진 몇 가지 비밀을 밝혀냈다. 연구팀에 따르면, 속눈썹 외에도 베르메르가 그림을 완성하기 전 소녀의 귀, 머리에 둘러싼 스카프의 위치, 그리고 목의 뒷부분의 위치를 변경한 것이 확인됐고 현재 어두운 색으로 칠해진 소녀의 배경이 원래 짙은 녹색의 커튼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연구팀은 여전히 그림의 실제 주인공을 찾아낼 수 없었음에 아쉬움을 표명하면서도 오히려 이런 미스터리가 관람객들로 해금 그녀가 누구일까 추측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Mintgreen,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누구일까?」, <brunch>, 2020.8.11.)
2020년 5월 서울 강서구 원당곱창에 모인, 노회찬과 함께 진정추 진보정당추진위원회와 진보정치연합 활동을 함한 '길동무'들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두런두런 나눈 이야기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었다.
"노회찬은 음악은 물론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의원 시절 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그곳의 박물관뿐만 아니라 미술관도 빼놓지 않고 들렀다. 부부 동반으로 네덜란드 헤이그를 방문했을 때는 마우리츠하이스 왕립미술관에 들러 명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직관'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나중에 취미로 그림 공부를 시작한 부인 김지선 씨에게 이 그림의 모사를 격려했는데, 원화 못지않게 잘 그려내자 노회찬은 그 그림을 의원실에 걸어놓는 불출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인우, 「진보정치 꽃 피운 야생화 씨앗」, <음식천국 노회찬: 맛집에서 나눈 '노회찬의 삶과 꿈'>, 일빛, 2021)
'불출 노회찬'의 이름을 있게 한, 김지선의 모사 작품은 현재 노회찬재단 '노회찬의 서재, 봄'에 자리를 잡았다.
인문학 작가 박홍순과 민간인 신분 조국과 노회찬의 풍자적 언어 : "법 앞에 만 명만 평등", "강요된 엄숙함의 그물을 뚫고 웃음이 터져 나올 때 희망의 숨통이 열린다"
노회찬이 떠나고 1년이 지난 2019년 7월, 노회찬재단은 전태일기념관에서 '노회찬 1주기 추모미술전시회'('함께 꿈꾸는 세상 노회찬을 그리다')를 열었다. '노회찬을 추모하며 함께 꿈꾸는 세상을 그린다'는 기조로 노회찬을 그리워하는 미술작가와 사진작가 50여 명이 참여, 작품을 출품했다.
노회찬의 오래 전 길동무이자 한때 화가를 꿈꿨던 박홍순 인문학 작가가 관람객들에게 미술작품을 설명하는 도슨트 역할을 맡았다. ('박홍순과 함께하는 작품+노회찬 읽기') "(노회찬) 선배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품 설명을 마친 뒤 박홍순은 "혼자 전시장을 천천히 돌아보는 도중에, 전시장 한쪽에서 촌철살인의 풍자가 담긴 발언 장면을 모아놓은 영상물을 발견했다. 짧지 않은 영상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잠시도 눈과 귀를 떼지 못했다"고 글에 적었다. (박홍순, 「노회찬의 풍자적 언어」, <시그널>, 2020.11.13.)
풍자가 담긴 노회찬의 수많은 어록 가운데 박홍순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것 아닙니까" 라는 일침이었다.
"우리 <헌법>은 제11조 1항에서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함을 규정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익숙한 내용이다. 공정한 재판은 물론이고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원칙이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점 역시 대부분 알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상식처럼 돼있으니 말이다. (…) 풍자는 차별과 억압이 습관처럼 스며들어온 일상에 날카로운 경종을 울린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하던 삶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노회찬의 정치 언어에는 그러한 힘이 있다.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처음에는 웃음이 터진다. 곧이어 현실을 직시하고 분노하게 된다."
노회찬의 말은 박홍순으로 하여금 예리한 통찰력과 재치로 18세기 영국 사회를 풍자한 윌리엄 호가스의 정치 풍자화를 떠올리게 했다.
"특히 <선거 향응>은 선거와 법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이해를 대변함으로써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도록 만든다는 사회원리가 얼마나 허구로 가득한지를 잘 보여준다. (…) 탁자에는 후보자들과 부유한 귀족들이 앉아 있다. 아예 큰 나무통에 술을 부어놓고 퍼마신다. 정력에 좋다고 알려진 굴이 탁자 위에 가득하다. 왼쪽에는 한 사람이 돈을 세고 있다. 귀족들이 후보에게 제공한 돈이리라. 푸른색 깃발을 펄럭이는 창밖의 토리당 대열에서 벽돌을 던진다. (…)
호가스의 정치 풍자화를 마주하는 순간 소수만을 위한 법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분노가 고개를 든다." (박홍순, 「(문화인 노회찬) 풍자의 예술, 풍자의 정치」,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2호, 2019.6.28.)
"웃음을 동반하는 노회찬의 언어는 일시적 기분 전환을 넘어서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 삶에 쫓겨 무심코 지나치던 사회 문제에 대해 귀를 쫑긋 세우고 관심을 끌게 한다"면서 박홍순은 이렇게 글을 마무리한다.
"노회찬의 풍자는 두려움의 대상을 희극적 대상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내면으로부터 저항의 가능성을 확산시킨다. 웃음의 대상이 된 지배세력은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싸울 수 있는 대상으로 격하된다. 그가 우리에게 준 웃음은 권위와 두려움에서 일시적 탈출이 아니라 적극적 저항의 길을 연다. 강요된 엄숙함의 그물을 뚫고 웃음이 터져 나올 때 희망의 숨통이 열린다. 그 웃음을 타고 저항의 심리적 조건이 성장한다." (박홍순, 「(문화인 노회찬) 풍자의 예술, 풍자의 정치」,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2호, 2019.6.28.)
2019년 7월 27일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청와대를 떠난 직후 '민간인' 신분 첫날의 일정으로 '노회찬 1주기 추모미술전시회'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노회찬재단 조승수 사무총장은 페이스북에 전시회장에서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조국의 사진을 공개했다. 조승수는 게시물에 "전시회에서 잠시 자원봉사하는 조국 선생, 고맙습니다"라는 문구도 함께 적었다. 조국도 페이스북에 조승수의 글과 사진을 공유하며 "노회찬 의원의 후원회장이었던 바, 1주기 추모 미술 전시회를 방문했다"며 "법사위원으로 '법이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일갈했던 고 노회찬, 그가 그립다"고 덧붙였다. 1년 전인 2018년 7월 24일 노회찬의 빈소를 방문한 뒤 조국은 페이스북에 추모의 글을 올렸다.
"(…) 노회찬, 노동과 복지를 중시하는 확고한 진보적 신념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념과 당파의 차이를 넘어서는 인간적 매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담대함과 소탈함, 유머와 위트, 그리고 넓은 품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오래전 어느 허름한 선술집에서 의원님과 어깨 걸고 노래 부르던 일이 생각납니다. 올해 초 눈 오던 날, 나눴던 대화를 떠올립니다. '진보정치의 별'이 졌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하늘에 새로 빛나는 별이 있으면, 의원님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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