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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은 한국에서 과연 좌파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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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공산당'은 한국에서 과연 좌파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㊶] part 4 변방의 정치는 변방이 아니다 : 레흐 바웬사 上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시리즈 모아보기)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part 3 스칸디나비아(북유럽) 복지모델을 만나다

part 4 변방의 정치는 변방이 아니다

㊳ 들어가는 글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건 창조의 기회를 얻는 것이다(☞바로가기)

㊴ 넬슨 만델라 上 27년 6개월의 투옥, 교도소의 '핵인싸'가 되다(☞바로가기)

㊶ 넬슨 만델라 下 "'우리는 함께 가야 한다', 우분투!"(☞바로가기)

노회찬, 바웬사의 나라 폴란드를 방문하다 : "촛불은 스스로를 태우면서 주변을 밝게 만듭니다"

체코, 헝가리와 더불어 지역적으로 유럽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다리 역할을 하는 '중유럽'에 속한 나라.  유럽에서 아홉 번째로 큰 나라.  '잠들지 않는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가 태어난 곳.  수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절멸시키기 위해 지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전쟁범죄의 가장 큰 희생 국가. 1989년 동구권에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나라. 이 나라의 이름은?  정답은 폴란드다.

"영화 한편 소개합니다. <바웬사, 희망의 인간>"

▲노회찬 페이스북(2014.8.24.) 갈무리
2014년 8월 24일 노회찬은 페이스북에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 제목은 <바웬사, 희망의 인간>.
"영화 한편 소개합니다. <바웬사, 희망의 인간> 1980년대 노동자의 자유와 인권을 주창하며 폴란드 자유연대를 이끌었던 레흐 바웬사 이야기입니다. 폴란드가 배출한 '안제이바이다'라는 거장의 손끝에서 탄생하여 영화 자체로도 작품성을 꽤 인정받으며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초청됐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26일 화요일 6시 30분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 2관(종로3가역 14번 출구)에서 상영됩니다. 인권, 노동, 정의와 복지 그리고 자유와 화해에 관한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노무현재단 노무현시민학교에서 영화축제 형식으로 선보이는데 25월 변호인 / 26화 바웬사(노동) / 27수 링컨 / 28목 팔메 / 29금 만델라 순이랍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 권영길 선생님과 변영주 감독, 오동진 영화평론가 등과 이야기도 나누는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⑥ 민주화 투사편>(웅진주니어, 2012) 책 표지 갈무리
그에 앞서 2012년 노회찬 정의당 20대 국회의원은 한 권의 책에 추천사를 썼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여기서 민주공화국은 무엇을 뜻할까요? 바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래서 헌법 제1조 2항에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국민들에게 주인 된 권리를 돌려주는 거예요. 촛불은 스스로를 태우면서 주변을 밝게 만듭니다. 세 분의 민주화 투사는 촛불 같은 희생정신으로 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찾아 주고, 평화를 지키는 데 큰 힘이 돼 주었습니다. 세 분의 삶이 여러분이 꿈을 이루는 데에도 커다란 힘과 용기를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 분의 민주화 투사"를 호명하며 노회찬이 추천한 책은, 강철웅이 쓰고 송래현이 그린 <인류를 뜨겁게 사랑한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 6: 민주화 투사 편(만화)>(웅진주니어, 2012)로, 김대중, 아웅산 수치, 레흐 바웬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레흐 바웬사, 그는 누구? :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봄'을 이끌어낸 '솔리다리티'의 지도자

▲2009년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와 1980년 8월 레닌 조선소에서 파업을 지도하는 바웬사 (사진 출처: 위키백과)
노회찬이 추천한 영화와 만화책 속의 인물 레흐 바웬사는 누구일까?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 1943.9.29.~)는 폴란드의 노동운동 지도자 출신의 정치인으로 민주적으로 선출돼 1990~1995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앞서 소개한 강철웅의 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폴란드 최초의 자유 노동조합인 자유노조연대를 이끌며 폴란드 노동자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 공로로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자신이 조선소의 노동자였던 레흐 바웬사가 이끌었던 노동운동은 임금 인상과 같은 경제 문제를 넘어서서 폴란드의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공산권에서 일어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민주화 운동으로, 세계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가 세운 자유노조연대에는 1천만 명이 가입했습니다. 레흐 바웬사는 노동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1989년 폴란드 최초의 민주적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나치에게 희생당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바웬사는 초등학교와 직업학교 교육만 받고 1967년 그단스크에 있는 레닌조선소에 전기공으로 취직했다. 바웬사가 정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68년 프랑스의 학생대봉기 때문이었다. 그 영향으로 1970년 폴란드에서 파업이 시작될 때 파업의 지휘역을 맡기에 이른다. (「폴란드 노조지도자 바웬사 자서전 <희망의 길> 펴내」, <출판저널>, 1987.8.20.) 

즉 1970년 식량파업 때 공산당 정권이 시위대에 발포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반정부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그로부터 10년간 감찰, 재고용, 또 감찰, 해고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바웬사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1980년 레닌조선소의 식료품값 인상 항의 시위 당시 파업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바웬사는 경영진과의 협상에서 요구사항을 관철시켰다. 고무된 인근 지역 노동자들도 합세해 '공장간 파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얼마 뒤 이 위원회는 자유노조 '연대'(Solidarność=솔리다리티)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 노동조직으로 탈바꿈했다. (구정은 기자, 「1990년 레흐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취임」. <경향신문>, 2009.12.9.)

1980년 8월 총파업이 폴란드 전역을 뒤흔들어놓았고, 솔리다리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폴란들 국민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500여 일 간은 '폴란드의 봄'이라 불리었다. 폴란드 당국은 1981년 12월 계엄령이 선포, '연대'는 불법화됐고 바웬사는 재판절차 없이 11개월 동안 구금당한 후 계속 격리된 생활을 했다.
▲<희망의 길: 바웬사 자서전>(희성출판사, 1987) 표지 갈무리
바웬사의 자서전 <희망의 길>을 보면 1983년 3월 22일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83년 3월 22일 바웬사는 솔리다리티의 투사 6명이 재판받는 것을 방청하기 위해 코스잘린의 군사재판소로 가던 중이었다.  (…)  방청객들에 대한 의례적인 신분증 확인이 있는 가운데 군인들이 바웬사가 탄 차를 정지시켰다. 5분 후면 재판이 시작될 것을 알고 있는 바웬사는 마음이 급해졌고, 상부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는 군인 또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둘 사이에 법과 법 실행에 관한 논박이 30분간 있고 나서 다른 명령이 전해져 와 바웬사는 재판소로 갈 수 있게 된다. 재판소 건물 앞에 이르자 군중이 몰려들어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낸다.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재판관이 바웬사를 영접한다. 그 재판관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기는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재판소로 들어오는데 어떤 장애물이 있었는지 군인들이 막고 서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잠시 후 재판은 시작됐다. 과연 희망이란 거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바웬사의 노벨평화상을 대신 수상한 부인 다누타 여사 (경향신문, 1983.12.12. 기사 갈무리)
1983년 노벨상위원회는 시상발표문에서 바웬사가 극심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면서 노동자들의 자체적인 기구결성권을 얻어 내기 위해 헌신한 공로로 평화상을 시상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바웬사의 이 같은 헌신이 UN에 의해 규정된 기본권인 보편적 결사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보다 광범위한 운동으로 볼 때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바웬사는 그의 조국의 문제들을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협상과 협력을 통해 해결하려는 결의를 보여주었으며 전 세계인의 평화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대변한 인물이었다고 극찬했다. (<가톨릭신문>, 1983.10.16.)

바웬사는 1980년 자유노조운동을 주도, 3년째 연속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다가 1983년에 비로소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로써 바웬사는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 이래 동구권에서는 2번째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됐다. 폴란드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자였다.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의 에길 아즈비크 위원장은 평화상을 수여하면서 바웬사를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 역대 수상자들과 함께 '인권의 승리자'라고 칭찬했다. 특히 바웬사가 동구권에서는 처음으로 자유노조를 결성, 투쟁했지만 폭력만은 배제했다고 격찬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1983.12.12.)

바웬사는 그다니스크의 자택에서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이번 노벨평화상은 폴란드 국민 전체에 수여된 것이며 전 세계가 자유노조의 이상과 투쟁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고 말했다.  바웬사는 귀국이 불허될 것을 우려, 부인 다누타를 노르웨이 오슬로의 시상식에 대신 보내야 했다. 12월 10일 수상식장에서 바웬사는 다누타가 대독한 짤막한 수상 연설을 통해 불법화된 폴란드 자유노조의 수백만 노동자들의 환희와 희망을 전달했다.
"상반된 이해관계가 있더라도 증오와 유혈사태가 아닌 참된 화해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질 때 이 세계를 보다 밝은 길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이야말로 곧 인류의 고귀한 이상인 연대의식이라는 도덕적인 힘을 고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수상의 영광을 그동안 함께 투쟁을 벌여온 그다니스크의 노동자들에게 돌린다."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바웬사에게 축하 전문을 보냈다. 교황은 전문에서 노벨평화상이 "진실한 대화와 상호협력의 평화적 방법을 통해 전 세계와 폴란드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 의지와 노력에 의해 수여됐다"고 밝혔다.  폴란드 정부당국은 바웬사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해 당시 아무런 논평도 하지 않았으나, 관영보도기관들은 폴란드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선전공세의 일환이라면서 못마땅하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한편 소련의 몰락이 가속화하면서 폴란드 경제사정이 악화되자 정부는 바웬사 측과의 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원탁회의'에서는 헌법 개정이 합의돼 자유노조의 합법화, 자유선거에 의한 상원 신설, 하원 460석 중 35%의 자유선거, 대통령제 신설 등이 결정됐다. 노조가 다시 합법화된 가운데 치러진 1989년 6월 총선에서 '연대' 세력이 압승을 거뒀다. (상원에선 99%, 하원에선 허용된 의석 35%를 모두 차지) 집권당인 통일노동당(공산당)이 다수의 의석을 상실했다.
※1989년은 동유럽에서 동시다발로 혁명이 일어난 해다. 이번 혁명은 공산혁명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유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이 해에 폴란드에선 자유노조의 결사체인 솔리다리티(Solidarity) 운동으로 비공산정권이 들어섰고, 동독과 서독을 가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에서 민주화시위로 공산정권이 붕괴됐고, 중국에서도 텐안먼(天安門) 사태가 일어났다.  역사가들은 141년 전 1848년에 전 유럽에 동시다발로 일어난 '1848년 혁명'(Revolutions of 1848)에 빗대 이 해의 혁명운동을 '1989년 혁명'(Revolutions of 1989)이라고 명명한다. (…) 

폴란드에서 공산정권이 붕괴되면서 그 여파는 동유럽 전체로 확산됐다. (김현민 기자, 「시나트라의 '마이웨이'처럼 일어난 동유럽 혁명」, <아틀라스뉴스>, 2021.4.20.)

바웬사는 공산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거부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1989년 9월 비공산 연립정권이 출범했다. 마조베츠키가 총리가 됐는데 공산진영 최초로 비공산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폴란드 역사에서는 이 시점부터의 폴란드를 '제3공화국'이라고 부른다.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990년 11월에 치러진 첫 직선제 대선에서 바웬사는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바웬사는 역사적인 '민주 폴란드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바웬사는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으나 경제정책의 실패로 1991년과 1993년 총선에서 참패하여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민주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동거정부가 형성됐고 1995년 대선에서도 패배했다. 바웬사 이후 폴란드 정계는 우파인 '법과 정의(PiS)'와 '시민연단(PO)'이 양대 축으로 자리잡았다. 

즉 2005년 (9월) 총선과 (10월) 대선에서 사회민주당은 군소정당으로 몰락하고 말았고, 이후에는 '법과 정의'와 시민연단이 정권을 주고받는 보수양당제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임상훈, 「한국과 닮은 꼴... 유럽은 왜 이 나라의 앞날 걱정했나: [임상훈의 글로벌 리포트] 폴란드가 "열 배나 더 흥미로운 나라"로 불린 이유」, <오마이뉴스>, 2020.7.18.)

2005년 폴란드의 정치 상황에 대해 노회찬은 <난중일기>(2005.3.10.)에 이렇게 적었다.
"폴란드는 지금 정치적 대전환기에 들어섰습니다. 집권당인 민주좌파연합의 지지율은 5%선. 중도파와 우파가 다음 선거에서 집권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총선 시기를 앞두고 갈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빠르면 5월, 늦어도 9월엔 현재의 여당이 야당이 되거나 해체될 가능성이 큽니다. 2001년 9월 총선에서 41%의 득표율로 집권한 민주좌파연합은 19%에 이르는 높은 실업률과 각종 부정부패사건으로 지지율이 급락했습니다. 민주좌파연합의 실권은 폴란드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사실 폴란드는 여타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른 국가사회주의 권력 해체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웬사의 자유노조운동으로 공산당 권력이 흔들린 점이 바로 반공산당 세력과의 대화와 타협을 촉진시켰고, 이로 인해 폴란드 공산당은 공산당에 대한 청산과정 없이 단계적으로 정권을 이양하고 그 결과 1989년 이후 주도적인 좌파세력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됐습니다. 2001년 9월 총선에서 민주좌파연합이 집권한 것은 자유노조세력의 약화에 기인한 것입니다. 해체 및 몰락 직전의 일본 사회당이 40여 년 만에 집권하게 됐던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제 민주좌파연합의 실각은 1980년대 말 이래의 구공산계열 대 비공산계열의 경쟁구도가 종언을 고하는 것을 뜻합니다."

※ 2011년 11월 바웬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경향신문>, 2011.11.4.) 하루 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강연을 할 예정이었지만 바웬사의 방문은 이뤄지지 못했다.

"나는 1981년 룰라를 처음 만났고 우리는 격렬하게 논쟁을 했다. 룰라는 확신에 차 사회주의를 옹호했고 이는 대선에서 패배하는 요인이 됐다.  나는 시스템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자본주의를 건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공산주의를 허물어야 하는 나로서는 당시 룰라가 옳다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고 나서 나는 그가 여러 가지 점에서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자본주의를 건설했지만, 지금은 룰라가 보았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얼마나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보고 있다."
한 달 전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는 "'월가 점령 시위'를 지지한다. 자본주의는 개선돼야 하며, 사회주의는 좋은 목적이 있음에도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된 노회찬

"피고인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대림보일러, 금화공업사, 태화기공사 등에 위장취업하여 공원으로 종사하던 자로서…."(노회찬에 대한 임정수 검사의 <검찰 공소장> '공소사실' 첫 문장, 1990.2.10.)

ⓒ노회찬재단
대학시절 노회찬은 노동현장으로의 '존재 이전'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4학년 때인 1982년 가을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 들어가 6개월 후인 1983년 2월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땄다. 어영부영 다니며 그냥 자격증만 딴 것이 아니라, "근면 성실히 면학"한 상장과 "솔선수범한 학교생활" 표창장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단히 열심히 직업학교를 다닌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용접공 노회찬'은 인천지역으로 들어가 1980년대 전반기부터 형성됐던 정치서클들을 통합해 노동현장에 기반을 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조직인 인민노련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미국에 종속돼 있고 정치권력이 자본과 결탁하여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을 수탈하고 있다는 현실인식 아래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함으로써 통일을 이룬다는 통일이념을 가지고,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을 노동자들에게 고취시켜 투쟁과 혁명을 감당할 노동자 정당을 결성할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로서 산하에 중앙집행위원회, 지구위원회, 분회 등의 기구를 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노련'->인민노련: 필자)의 활동은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여 남한 단독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다음 북한과 통일을 이룬다는 북한의 선전선동활동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어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므로 '인노련'(-> 인민노련: 필자)은 국가보안법 제7조 제3항 소정의 이적단체에 해당한다." (노회찬에 대한 대법원 선고 90도2607 판결문, 1991.2.8.)

※ 참고로 인민노련은 1988년 10월 수정 강령에서 조직의 목적과 활동목표를 이렇게 설정하고 있었다.
"인노련(->인민노련: 필자)은 당면한 민족해방과 민중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있어 인천.부천 지역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구심이 되며,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고 여러 형태의 대중조직을 촉진시키며, 노동자들의 모든 투쟁을 발전시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정치부대화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노동자들의 전국적인 정치적 통일과 노동자 정당의 건설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한편으로, 인노련은 파쇼 정권에 반대하여 싸우는 모든 계급.계층 및 정치세력과 적극 연대할 것이며, 특히 전민중의 정치적 통일조직을 형성해 나아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엮음, <87.88년 정치위기와 노동운동: 인노련 선집>, 거름, 1989, 37쪽)

'남한의 자생적 사회주의자 조직'인 인민노련 활동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자 '위장취업 노동자' 노회찬은 "죄명: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6월, 자격정지 3년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 안양교도소,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92년 4월 1일 만기출소했다. 출소한 이후 노회찬은 합법적이고 대중적인 진보정당운동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당면과제라고 판단했고 이 운동에 전념했다.  그 후 노회찬이 설계하고 개척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와 진보정치연합,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정의당은 "진보적 이상과 현실주의가 만날 접점을 탐색하는 탐험가"(천관율, <시사인>, 568호, 2018.8.6.)였던 노회찬에게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노회찬은 이상주의자여서 세상을 바꿀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는 현실주의자여서 그 목표를 이뤄낼 수단을 찾아내야만 했다. 진보는 너무 큰 목표여서 정치를 쓰지 않고는 이룰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진보 정치가로 살았고, 진보 정치가로 삶을 마감했다." (천관율, 「노회찬은 이런 정치인이었습니다」, <시사인>, 568호, 2018.8.6.)

"변하지 않은 것은 목표이고, 변한 것은 방법입니다.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신념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은 현실에 다가설수록, 구체화될수록 변하고 있습니다. 학습을 계속하는 이유는 이 변화를 올바르게 끌어내기 위해서지요."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2018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대신 수상하는 부인 김지선과 동생 노회건 (KBS 뉴스 화면 갈무리)
▲국민훈장 무궁화장 훈장증 사진 갈무리 ⓒ노회찬재단
"위는 인권옹호 활동을 통하여 국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다음 훈장을 추서합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8년 12월 10일 대통령 문재인"
노회찬이 떠나고 몇 달 뒤인 2018년 12월 10일 '2018 인권의 날 기념식'에서 노회찬은 대한민국 인권상을 수상하고, 그에 대한 포상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됐다.  현행 상훈법상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을 세워 국민의 복지 향상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국민훈장이 주어지며, 무궁화장은 5등급의 국민훈장 가운데 1등급에 해당한다. 노회찬의 '공적 요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용접공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1982년부터 노동자의 인권 향상에 기여했으며, 정당 및 국회 의정활동을 통해 여성, 장애인 등 약자의 인권 향상에 기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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