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노회찬, 칠레 사회당의 아옌데 대통령과 마주치다 : 1973년 9월 11일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
노회찬재단 기록연구실이 재단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는 <노회찬의 오늘> 9월 11일자인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9월 11일 하면 어떤 사건이 떠오르나요? 아마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2001년 뉴욕의 '9.11테러'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9.11테러로 인해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붕괴되고 알링턴의 국방부 펜타곤이 공격받아 일부가 파괴됐으며, 2996명의 사망자와 최소 6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그보다 28년 전에 칠레에서 일어난 '참극'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1973년 9월 11일. '민주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인 칠레의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적 길'을 열어가다가, 임기 3년 만에 육군 참모총장 피노체트(Augusto Pinochet)가 주동이 된 쿠데타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건이 발생한 날입니다. 연간 300일 이상이 맑은 칠레 산티아고. 그날도 화창한 날씨였지만 이상하게 라디오에서는 비가 내린다는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 쿠데타를 개시하는 군부의 작전암호였습니다."
노회찬의 길동무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은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가 쓴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서해문집, 2017)를 언급하면서 「아옌데, 21세기 리더십의 길을 열다」는 제목의 칼럼에 "<살바도르 아옌데>를 읽자"며 이렇게 적었다.
"오늘날 세계인의 공통 과제는 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에 다시 속을 채워 넣는 일이다. 한 마디로 저마다의 조건에서 사회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다. 한데 그러자면 신자유주의 지구화 30여 년을 거치면서 더욱 집중되고 거대해진 저 자본 권력과 대결해야만 한다. 사자의 용기로 싸워야 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실제로 무릎 꿇리기 위해 온갖 여우의 수에 능통해야 한다. 미국의 '샌더스 정부'는 그렇게 월스트리트와 싸워야 한다. 영국의 '코빈 노동당'은 그렇게 시티(런던의 금융 중심가)와 싸워야 한다. 스페인의 '우니도스 포데모스 정부'는 그렇게 유럽연합 엘리트들과 싸워야 한다. 이 땅에서도 역시 그렇게 재벌 지배 연합과 싸워야 한다. 아옌데와 칠레 민중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권한다. 21세기에 필요한 정치 리더십이 무엇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살바도르 아옌데>를 읽자." (<프레시안>, 2016.7.12.)
살바도르 아옌데, 그는 누구? :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사회당) 출신의 대통령
2008년 칠레 국민 150만 명이 뽑은 '칠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1위, 그의 이름은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7.26.~1973.9.11.)였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칠레의 소아과 의사 출신 정치인이다. 아버지와 삼촌들은 급진당의 핵심당원이었다. 집안 분위기의 영향으로 정치에 관심이 있던 아옌데는 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운동권 학생' 아옌데는 반정부 투쟁을 하다가 두 번 구속됐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가 의사로서 하층민들의 처참한 삶을 보며 분노했듯이, 아옌데 역시 의료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며 사회적 모순을 실감했고 이를 타개하는 방편으로 사회주의에 입문했다.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사회정의, 빈곤과 질병의 관계 등에 대한 신념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칠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깊이 뿌리내린 나라였다. 유럽에서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칠 때에도 칠레에서는 선거와 의회 제도가 계속 작동했다. 칠레에는 합법화된 '공산당'이 있었지만 아옌데는 '사회당'을 창당(1933.4.19.)하는 데에 앞장섰다. 소련의 세계 혁명 전략을 추종하며 코민테른의 지시를 따르는 공산당이 아닌, 남아메리카와 칠레의 현실에 맞는 사회주의 정당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정치 목표는 '좌파연합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받아, 선거로 집권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낸다'는 것이었다. 1937년 아옌데는 사회당의 깃발 아래 하원의원이 됐고 31세 때 '인민전선'이라는 이름의 연립정부에서 보건부장관을 맡기도 했으며 상원의원도 역임하는 등 정치적 이력을 쌓아 나갔다. 아옌데는 '대권 장수생'이었다. 1952년, 1958년, 1964년 모두 6년 임기의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칠레의 보수 세력과 좌파들의 분열 탓에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리고 1970년이 왔다. 1970년의 칠레는 극대화된 사회적 모순으로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토지 없는 농민들과 열악한 조건의 노동자들은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 1969년에 1939건, 1970년에 5295건의 파업이 일어났고 농민들의 토지 점거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으니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 칠레 서민들의 열망으로 번져 가기 시작했다. 이에 197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고질적인 분열 상태에 놓여 있던 칠레의 좌파 세력도 6개의 정파로 구성된 '인민연합'(Unidad Popular)을 결성했다. 아옌데는 민중 시인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1971)인 공산당 후보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 1904~1973)와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며 인민연합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칠레의 저항가수이자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의 대표적 가수였던 빅토르 하라(Víctor Jara, 1933~1972)는 아옌데의 선거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벤세레모스>(Venceremos,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이 노래는 선거 때만이 아니라 칠레의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국민들의 투쟁을 상징하는 노래로 생명력을 얻게 됐다.
"조국의 깊은 시련으로부터 민중의 외침이 일어나네. 이미 새로운 여명이 밝아와 모든 칠레가 노래 부르기 시작하네. 불멸케 하는 모범을 보여준 한 용맹한 군인을 기억하며 우리는 죽음에 맞서 결코 조국을 저버리지 않으리.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수많은 사슬은 끊어지고 우리는 승리하리라, 우리는 승리하리라."
노래 가사처럼 1970년 9월 4일의 역사적인 선거에서 아옌데와 그의 인민연합은 승리했다. 대선에서 36.6% 득표율로 승리한 아옌데는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민주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칠레 사회당)의 대통령이 됐다. 임기는 3년이고 최대 6년까지 허용됐다.
아옌데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의 지지자들은 호치민과 체 게바라의 초상화를 흔들며 열광했다. 네루다는 승리의 감동을 이렇게 노래했다.
"칠레 인민의 가혹한 착취로 짜내는 구리가 묻힌 저 저주스런 언덕에서도 자유의 힘찬 물결이 솟아올랐다."
대통령이 된 아옌데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La via chilena al socialismo)이라는 사회주의 정책 실행에 착수했다. 이에 따르면 대규모 산업(특히 구리 광산과 은행)의 국유화, 정부의 의료 및 교육 복지 관리, 영양실조로 병든 어린이에 대한 무료 우유 배급, 연금 개혁, 토지개혁, 공공 근로 사업을 통한 일자리 제공 등 빈곤층의 사회경제적 후생 증진 추진 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옌데의 정책 추진에 다국적 기업들과 미국 등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칠레에 대한 경제투자를 끊기 시작했다. 닉슨 행정부의 압력으로 국제 시장에서 구리(칠레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 가격이 떨어지면서 수출 소득이 떨어졌다. 그의 임기 내내 토착민·빈민층과 백인 정착민 출신 상류층 사이에 긴장이 높아져갔다. 당시 칠레의 상황과 아옌데의 리더십에 대해 상반된 평가가 존재했다. 앞서 인용한 장석준의 칼럼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회과학 서적 전성기이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국내에도 칠레 인민연합 정부 사례를 다룬 책이 몇 권 나왔었다. 내가 살바도르 아옌데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이 책들을 통해서였다. 한데 이 시기에 나온 책들은 대부분 아옌데에 대해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 책들은 아옌데를 사회 변혁의 실패에 책임져야 할 유약한 지도자, 개량주의자, 의회주의의 환상에 눈 먼 인물쯤으로 그리곤 했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 시절 민중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이들의 기억은 사뭇 달랐다. 아리엘 도르프만, 이사벨 아옌데,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로베르토 볼라뇨, 루이스 세풀베다 등의 칠레 작가들은 하나같이 사랑과 존경의 어조로 '대통령 동지'를 회상했다. 파트리시오 구스만의 전설적인 다큐멘터리 <칠레의 전투>가 전하는 아옌데의 생전 모습도 그러했다.
(…)
클라크의 전기를 읽으며 이러한 인상은 더욱 확고해졌다. 아옌데는 자본 권력에 감히 맞선 '사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제압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 행위를 때맞춰 감행할 줄 알았던 '여우'이기도 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아옌데, 21세기 리더십의 길을 열다」, <프레시안>, 2016.7.12.)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
이런 상황에서 아옌데의 재집권이 두려웠던 미국과 친미 성향의 칠레 기득권층의 전략은 이러했다. (이창희, 「칠레의 2019년... 대한민국이 얻어야 할 교훈-[오늘날의 책읽기]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를 읽고」, <오마이뉴스>, 2019.11.20.)
첫째, 아옌데 정부에 참여한 정치세력을 분열·약화시킨다.둘째, 칠레 군부와의 접촉을 확대한다.셋째, 비 마르크스주의 정치세력과 정당을 지원한다.넷째, 반 아옌데 성향 언론사를 지원·육성한다.다섯째, 이들 언론사를 통해 아옌데 정부가 민주적 절차를 전복하려 할 뿐 아니라, 쿠바와 소련이 칠레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는 선동을 조장한다.
1973년 3월 안팎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옌데는 1970년 대선 때보다 더 많은 표를 얻으며 재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옌데의 지지층은 견고한 만큼 그 반대자들의 완강함 또한 그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아옌데가 모색한 돌파구는 또 한 번의 투표였다. 자신의 신임을 걸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그 승리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투표일은 1973년 9월 11일로 정해졌다. 하지만 국민투표는 실시되지 못했다. 투표 당일인 9월 11일 새벽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1915.11.25.-2006.12.10.) 국방장관이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옌데는 총을 들고 끝까지 저항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옌데가 방아쇠를 당긴 AK-47 자동소총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같은 친구 살바도르에게, 피델로부터."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민주적인 선거로 정권을 잡은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선물한 총이었다.
모네다궁 공격을 지휘한 쿠데타군 지휘관은 군사평의회에 짤막한 전문을 보냈다.
"임무 완수. 모네다 접수, 대통령 사망."
아옌데의 사망 소식을 들은, 1970년 아옌데 대선 승리에 "무책임한 칠레 국민들로 인해 한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왜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던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과, CIA를 통해 수백만 달러를 칠레군 장교들의 호주머니에 넣어줬던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환호했다. (김진호, 「피노체트 사망…"어둠이 갔다" "장군 추모" 칠레의 두 마음」, <경향신문>, 2012.7.10.)
산티아고의 봄은 짧았다. 30여 년의 투쟁을 통해 숱한 우여곡절 끝에 수립된 칠레의 민주정부는, 단 3년의 짧고도 고된 집권을 무력의 위협으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됐다. 피노체트 측이 망명을 권하며 준비한 헬기를 물리친, '선거로 집권한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라디오 생방송을 통한 마지막 연설은 이랬다.
"역사적 순간에 서서 저는 인민의 충성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제 목숨을 바치려 합니다. (…) 역사는 우리 편이며,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민입니다. (…) 깨어 있어야 합니다. (…) 존엄하고, 더 나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의 권리,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 내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나는 칠레와 그 운명에 대한 신념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어둡고 쓰라린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 멀지않은 장래에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가는 위대한 시대가 다시 열릴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미 국무부 장관을 지냈던 헨리 키신저는 "미국은 쿠데타를 직접 실행한 것은 아니지만,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는 최고의 전제 조건들은 미국이 창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칠레 군부의 쿠데타를 기획한 핵심 추동자였다. 미국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통해 합법 정부를 전복시킨 피노체트는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야당 정치인들을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이듬해인 1974년 대통령이 된 피노체트는 국회와 정당, 언론자유, 인신보호영장제도, 노동조합을 없앴다. 1990년까지 17년 동안 집권하면서 극단적 반공주의를 앞세운 철권통치로 3만8000명이 고문과 옥살이를 했고, 3200명이 피살되거나 실종됐으며 50만 명이 망명길을 떠났다. 피노체트 정권은 시장만능주의 경제학의 메카인 시카고대학 출신들('시카고 아이들', The Chicago Boys)을 경제부처에 배치하여 국유화를 취소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시장만능주의 정책을 폈다. 쿠데타 몇 달 뒤 시카고대학 경제학과의 영수 밀턴 프리드먼과 아널드 하버거가 칠레를 방문해서 '칠레 경제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찬양했다.
그러자 시카고대학 출신으로서 종속이론 중에서 유명한 '저발전의 발전' 가설을 만든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공개편지를 학술지에 실어 살인마 정권을 찬양한 두 명을 정면 비판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도 프리드먼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을 공개 비판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 「네루다, 피노체트, 바첼레트」, <한겨레>, 2009.9.22.)
피노체트의 업적이라는 경제성장의 실상은 지표상의 성장일 뿐 극심한 빈부격차를 낳았다. 칠레의 경제성장 모델은 이후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 레이거노믹스 등 신자유주의로 이어졌다. 1990년 권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피노체트는 7년간 군총사령관으로, 면책특권을 갖는 종신 상원의원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국을 오가며 소일하던 피노체트의 말년 설계가 어그러진 것은 1998년 스페인 법정이 구속영장을 발부, 신병인도를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쿠데타 때 다수의 스페인 사람들을 살해한 혐의였다. 피노체트는 뜻밖에 영국 감옥에 갇혔고, 마침내 정의가 실현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대처 총리의 도움으로 무사히 칠레로 돌아갔고, 2006년 늙어 죽을 때까지 정의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이달 초 칠레 법원이 쿠데타 때 고문, 학살 혐의자 129명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칠레의 과거사 청산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이정우 경북대 교수, 「네루다, 피노체트, 바첼레트」, <한겨레>, 2009.9.22.)
2000년 3월 피노체트가 돌아오면서 칠레는 양분됐다. 광적인 지지자는 환호했고, 탄압의 희생자와 유족들은 300여 건의 줄소송을 냈다. 칠레 대법원은 그의 정신 및 건강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단 한 번도 법정에 세우지 않았다. 2004년 미 상원 조사 결과 피노체트는 2700만 달러(약 270억 원)의 불법자금을 외국은행에 은닉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2006년 12월 10일 91세를 일기로 피노체트가 사망했다. 칠레는 피노체트의 죽음에 두개의 얼굴을 드러냈다. 어두운 역사의 마감을 축하하는 측과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는 '장군'에 대한 추모가 엇갈렸다. (김진호, 「피노체트 사망…"어둠이 갔다" "장군 추모" 칠레의 두 마음」, <경향신문>, 2012.7.10.)
"중대한 인권 학대를 종식 및 예방하며 권리를 침해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를 요구하고자 행동하고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세계 최대의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그의 사망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죽음으로 칠레의 가장 어두운 역사의 장이 끝을 맺어서는 안 된다. 국제앰네스티는 칠레 당국이 사면법의 부제를 선언하고, 수천 건의 실종, 고문, 사법 관할 밖의 처형에 연루된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조사와 기소를 허용할 것을 촉구한다. 희생자들의 가족들과 생존자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권리가 있으며, 그들은 정의의 구현과, 법정에서 재판 받을 필요가 있다. 피노체트는 죽음으로써 이제 이러한 인권 범죄들로부터 영원히 벗어났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피노체트의 죽음은 칠레 당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정부들에게 인권 범죄에 대한 정의가 하루 빨리 구현돼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줄 자명종이어야 한다."
'남미판 박정희'라 불린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피노체트가 사망한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인권의 날'인 12월 10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나치가 전 세계에 던진 충격 속에 유엔 총회가 채택(1948.12.10.)한 <세계인권선언>(The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에게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제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의 권리와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체제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제30조. 이 선언에서 말한 어떤 권리와 자유도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남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으로 자기 권리를 사용할 권리는 없다.
※ 2013년 칠레의 작가이자 아옌데의 조카인 이사벨 아옌데(Isabel Allende)는 1973년 9월 11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던 날이 그녀의 삶과 그녀의 나라가 이후 어떻게 변하게 됐는지 '국제앰네스티'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소회를 전했다. (「독재자 피노체트 치하의 삶: 우리의 자유를 묻던 날」, <국제앰네스티>, 2013.11.)
앰네스티 : 피노체트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리란 것을 언제 알게 됐나요?
이사벨 : 사람들이 때로 군사 쿠데타 가능성에 대해서 얘기했었습니다만, 아무도 진지하게 믿지 않았고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칠레는 오랜 세월에 걸쳐 견고해진 민주주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군사개입은 거의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앰네스티 : 칠레에서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실종됐습니다. 사람들은 당시 이 무서운 상황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나요?
이사벨 :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제 친구들도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독재정권의 억압과 부패를 눈감으며 모르는 척했습니다. 독재정권의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은 무기력하게 고립돼 갔습니다.
앰네스티 : 어떻게 피노체트가 17년간 통치할 수 있었습니까?
이사벨 : 공포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고 피노체트는 이를 성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피노체트는 군대와 사법부를 장악했고, 의회를 폐쇄했습니다. 출판의 자유, 인신보호, 비판할 권리도 없었습니다.
피노체트가 도입한 경제시스템은 철권통치 아래 강제노동으로 자본가들만 이득을 보았고, 결국 칠레에서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격차는 심각해졌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노체트에 대한 지지는 하락했고, 마침내 선거를 통해 피노체트를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천 명이 피노체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린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빅토르 하라 :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조국과 민중을 뜨겁게 사랑했던 전사들"
살바도르 아옌데, 파블로 네루다, 빅토르 하라. 이들 세 명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 이전 사회주의 칠레를 상징했던 인물들이다. 칠레의 혁명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펜이 총이었다면, 같은 나라에서 같은 시대를 살다가 같은 시기에 작고한 빅토르 하라에게는 기타가 총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제국주의와 파시스트의 심장을 겨눈 총알이 있었다. 시 그리고 노래. 네루다는 민중 속으로 시를 들고 갔고, 하라는 민중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국과 민중을 뜨겁게 사랑했던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칠레 군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의 소용돌이에 갇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빅토르 하라, 그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 2008.10.14.)
공산당 출신으로 상원의원까지 지낸 네루다는 1971년 대선에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출마를 사양한 채 아옌데를 적극 지지했었다. 집권에 성공한 아옌데는 네루다를 프랑스 대사로 임명했다. 건강 악화로 2년 여 만에 귀국한 네루다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군부와 우파의 아옌데 정권을 겨냥한 '백색 테러'를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1973년 쿠데타 직후 군인들이 네그라섬 그의 집을 수색하러 왔을 때 네루다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마음대로 둘러보시게. 여기 당신들한테 위험한 것은 오로지 '시'밖에 없으니."
그로부터 12일 뒤인 9월 23일 그는 산티아고의 한 병원에서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 늙은 시인의 여린 가슴이 더 이상 반역의 유혈참극을 견뎌내지 못했다. (정인환 기자, 「피노체트의 '탱크와 군화발' 자국 선명한 발파라이소」, <한겨레>, 2005.11.25.)
사망 당시 69세였던 네루다가 전립선암으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는 점에 미뤄 일단 공식적으로는 자연사로 정리됐지만, 망명을 위한 출국 하루 전 돌연 사망한 사실을 두고 독살설이 끊임없이 나돌기도 했다. 암살 의혹이 끊이지 않자 칠레 정부는 2013년 네루다의 무덤에서 유해를 발굴해 조사에 착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타살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잠정 발표했다. (<경향신문>, 2016.4.28.)
노래를 통한 사회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누에바 깐시온 운동의 기수였던 빅토르 하라. 그는 군부를 비판하는 노래를 부르며 민중 운동을 지원하고 군부의 쿠데타 모의를 규탄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의 행보는 피노체트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는 1973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에 의해 즉시 체포돼 산티아고 에스타디오 경기장에 구금됐고, 심한 구타를 당한 후 나중에 44발의 총탄 자국과 함께 시체로 발견됐다. 누에바 깐시온의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을 실천해왔던 그의 손목은 부러져 있었다. 1973년 9월 14일과 15일 집단 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도 빅토르 하라는 인민연합 찬가 <벤세레모스>(우리 승리하리라)를 쉬지 않고 부르며 동지들을 다독거렸다고 한다. 2018년 7월 3일, 칠레 법원은 빅토르 하라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던 8명의 퇴역 군 장교들에게 1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살해를 은폐한 혐의를 받는 9번째 용의자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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