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1998년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가안보회의·국무부·국방부 등의 일급 기밀(TOP SECRET) 문서 중 일부가 일반문서로 재분류돼 공개됐다. 이 문서에는 칠레 쿠데타를 전후로 6년간 행해진 미국 정보기관의 공작 실상이 낱낱이 기록돼 있으며, 산티아고를 피로 물들게 한 쿠데타를 사실상 미국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정연주 기자(워싱턴 특파원)의 1998년 11월 30일자 <한겨레> 기사의 주요 글귀를 뽑아보면 이렇다.
"73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피노체트를 그 자리에 앉히는 데 미국이 결정적 역할을 한 사실은 최근 공개된 극비 문서들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피노체트의 대부 노릇을 해온 미국 정부에는 그의 범죄적 사실에 대한 정보를 담은 극비문서도 많을 수밖에 없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살인 고문 테러행위 죄목으로 스페인의 법정에 세우기 위해 노력해온 스페인의 발타사르 가르손 검사는 이러한 극비정보를 얻기 위해 곧 미국을 방문할 예정 (…) 가르손 검사가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75년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남미 5개국 군부독재 정보기관들이 합동비밀작전을 펴 '좌파사냥'에 나섰던 이른바 '콘도르 작전'과 관련된 정보다. 이들 5개국 정보기관들을 비밀작전을 통해 좌파인사들의 납치 살해 고문 등은 자행했으며, 칠레가 당시 이 작전의 중심지였다는 것이다."
20여건 200여 쪽에 이르는 비밀해제된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쿠데타가 일어나기 3년 전 닉슨 대통령이 리처드 헬름스 CIA국장에게 직접 관련지침을 시달하는 등 수년간에 걸쳐 쿠데타 지원공작을 전개했다. 경제봉쇄, 반대파 언론과 정당에 대한 자금지원, 국제금융기관 압박 등을 통해 사회 불안과 위기 조장이 그 핵심 중 하나였다. 칠레의 지배층과 우익은 아옌데 퇴진과 개혁 중단을 목적으로 사보타주와 직장 폐쇄 등으로 힘을 보탰다. (조기원 기자, 「남미 인권유린 '콘도르 작전' 40년 만에 단죄」, <한겨레>, 2016.5.30.)
이후 피노체트가 아르헨티나, 브라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의 친미 독재정권과 함께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1975년부터 1983년까지 국내외의 사회주의자, 반정부 인사들을 납치·살해한 '콘도르 작전'(Operacion Condor)도 미국의 조종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1975년 11월 25일, 칠레 비밀경찰(DINA)의 우두머리 마누엘 콘트레라스는 아르헨티나·볼리비아·칠레·파라과이·우루과이의 군사첩보기관의 총수들과 산티아고에서 만나 공식적으로 콘도르 작전을 수행하기로 정했다. 남미의 군사독재정권 공조로 반체제 인사 소탕을 위해 일종의 '국제협력군경테러조직'이 창설된 것으로, 콘도르 본부는 칠레 산티아고의 헌병대 본부에 설치됐다. 미국과 남미의 독재 정권들은 '콘도르 작전'의 명분을 좌파 게릴라 근절을 위한 '반공'으로 내걸었지만, 실제론 자신들의 철권통치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들과 그 가족들을 납치‧감금하고 고문하고 처형하는 데 이용했다. 미국을 배후로 6개국에서의 작전 결과 피해자는 살해 6만 명, 실종 3만 명, 투옥 40만 명에 이른다.
※ 콘도르 작전을 주도한, 피노체트의 '오른팔' 콘트레라스는 수십 건의 반인류 범죄로 500년이 넘는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2015년 사망했다. DINA에 피해를 본 가족들을 변호하는 칠레의 변호사 엑토르 살라사르는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콘트레라스는 악의 화신이었다"며 "그는 피노체트의 휘하에 있으면서 모든 범죄를 직접 저지른 인물"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2015.8.9.)
참고로 2009년 9월 1일 칠레 산티아고 법원(빅토르 몬티글리오 판사)은 피노체트 독재정권 시절 야당 정치인과 반정부 인사들을 고문·살해한 독재정권 가담자 129명에게 일괄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년 가까이 과거사 청산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이들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포 대상자들은 주로 1970년대 피노체트의 지시에 따라 '콘도르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에서 야당 인사를 살해한 사람들이다. (구정은 기자, 「피노체트정권 과거사 청산 '끈질긴 칠레'」, <경향신문>, 2009.9.3.)
당시 대통령은 뒤에서 살펴보게 될, 2006년 칠레의 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회당 소속의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였다.
전두환 신군부와 '서울의 봄', 그리고 미국
20여 년 전 필자는 '서울의 봄'의 전 과정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으로 상징되는 '신군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다단계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 결과는 신군부의 유혈 집권과 구체제의 반동적 복원이었다. <1단계>는 신군부가 군을 장악하기 위한 사전 모의와 준비단계로, 12․12쿠데타(작전명: '생일집 잔치')를 통해 동요하는 지배세력 내의 권력재편이 이루어지는 79.10.26~12.12의 시기다.
<2단계>는 군을 장악한 신군부가 군을 자신들의 권력구도에 맞도록 재편하고 다른 국가장치들을 장악할 준비에 나서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언론회유 공작(K-공작계획)을 전개하면서 신군부와 민주화진영이 정부수립의 방도를 둘러싸고 잠재적인 대립을 심화시켜 나갔던 79.12.12~80.4.14의 시기다. <3단계>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면서 행정부 전반에 대한 장악에 전면적으로 나서는 한편, 신군부의 노골적인 정권장악 기도가 드러나면서 점차 활성화돼 가던 민중운동과 격돌하게 되는 80.4.14~5.17까지의 시기다.
<4단계>는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함께 제도정치권과 민중운동세력 및 저항적 민중에 대한 전면전을 통해 이들을 무력으로 거세시키는 80.5.17~5.27까지의 시기다.
<5단계>는 광주에서의 대학살(작전명: 화려한 휴가)로 신군부가 사회 전체에 대해 실권을 장악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등을 통해 사회정화라는 미명 아래 사회 전반에 걸쳐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유신헌법에 따라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추대돼 구체제의 반동적 복원을 일단락 짓는 시기다." (조현연, 「한국 정치변동의 동학과 민중운동: 1980년에서 1987년까지」, <한국외국어대 정치학박사 학위논문>, 1997.2.)
신군부세력의 집권과정에 대해 미국은 오랫동안 아무런 책임이 없을 뿐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한국정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①미국은 '12․12'와 '5월사태'에 관하여 결정적인 부분들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는 점 ②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작전통제권이 사실상 실제적인 통제권을 포함하지 않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 ③미국은 전두환 세력이 12․12로 군부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이들과 협조관계가 아니라 긴장관계에 있었다는 점 ④미국은 끝까지 군사적 해결방식을 지양하고 비군사적 수단을 동원할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군부에 촉구했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미국이 설령 12.12쿠데타-5.17쿠데타-5.18 유혈 참극의 배후조종세력이 아니라할지라도, 미국의 이런 주장은 사실을 왜곡‧은폐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10․26 직후부터 미국은 암호명 '체로키(Cherokee)'라는 비상대책반을 행정부 내 고위 관리들로 구성하여, 한국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노골적인 활동을 벌여 왔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상황과 인물에 대한 주도면밀한 평가작업을 함과 아울러 국내 주요 인사들을 만나 미국 국익의 관철 입장에서 구체적인 조언과 요구를 한 것, 광주민중항쟁에의 군 병력 투입에 대한 승인 및 지지 통보와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방안 협의 등에서 잘 드러났다. 한국의 민중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민주화의 봄'은 미국에게는 단지 '혼란의 봄'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미국은 한국의 진압을 알고 있었다」라는 제목의 1996년 2월 27일자 <저널 오브 커머스>지의 광주문제 특집기사에 따르면, "80년 5월 22일 소집된 백악관의 한 회의에서는 사태가 통제 불능으로 악화될 경우 미국이 직접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방안도 아울러 협의했다"고 한다.
이 회의에는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부 부장관, 리처드 홀부룩 차관보,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 보좌관,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데이비드 존스 합참의장 및 스탠스필드 터너 중앙정보국장이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1996.2.29.)
이처럼 미국은 당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주한미대사 글라이스틴의 말처럼 "박정희 대통령 암살과 12․12 군사변란 이후 우리는 한국의 정치적 전환기에 안정적인 바탕을 마련하도록 도움을 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적극적인 활동가"가 돼버렸던 것이다. (<한겨레>, 1996.3.24.)
시간이 흐르고 흘러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전직 대통령이자 신군부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됐다. 1심 공판에서는 내란 및 군사 반란 혐의로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22년6월이 선고됐고, 2심에서는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됐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두환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해 전두환은 무기징역과 2205억 원의 추징이 선고됐고, 노태우은 징역 17년에 2628억 원이 선고됐다. 죄목은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초병 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등이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우리나라의 헌법 질서 아래서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면서 "피고인들의 정권 장악에도 불구하고 결코 새로운 법질서의 수립이라는 이유나 국민의 합의를 내세워 형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8개월 뒤인 12월 22일 국민대화합을 이유로 당시 대통령인 김영삼이 15대 대선 김대중 당선자와 합의, 구속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해 관련자 모두를 특별사면하고 석방해, 이들에 대한 처벌은 유야무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15대 대선에서 이회창(한나라당),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 이인제(국민신당) 세 후보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대통령 사면조치에 대해 국민회의와 한나라당, 자민련과 국민신당 모두 대변인 성명을 통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지역 및 계층갈등을 뛰어넘어 화해와 포용의 정치를 이 땅에 구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조치를 환영한다'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성명과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4당의 환영 성명과는 달리 '전노 사면'은 통합과 번영의 시대를 여는 전기를 마련했거나 국민화합을 가져오지 못했다. 대신, 2017년 출판과 배포가 금지된 전두환의 <전두환 회고록>에는 온갖 역사적 왜곡과 허위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낯가죽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는 '후안무치'의 상징 전두환다운 일이었다.
1995년 이런 상황 전개에 앞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대표 노회찬)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전두환 외 46명을 고소·고발했다. 죄명은 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내란목적살인미수·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반란목적군용물탈취·일반이적·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이었다. 이에 대해 검사 김상희가 '서울 마포 합정 426-2 푸른산빌딩 2층 진정추 사무실 노회찬' 앞으로 보낸 결과통지는 '불기소처분'이었다. 불기소처분이란 고소나 고발된 범죄 용의자에 대해 수사를 한 검사가 용의자를 재판정에 세우기 위한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 결정을 뜻한다. 이는 1995년 7월 18일 12.12와 5.18 수사를 맡은 서울지검 공안1부장 장윤석 검사의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상징되는 검찰의 '공소권 없음의 불기소 처분'과 동일한 논리였다.
특별사면 조치 두 달여 전인 1997년 10월 7일 권영길과 노회찬 등의 국민승리21은 '전두환·노태우 사면 반대 범국민 서명운동' 발대식을 가졌다. 국민의 의사를 거스른 채 정략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전노 사면'에 대해 절대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조건 없는 전노 사면' 반대는 70%를 크게 상회했다. 다른 정당들과는 달리 1997년 국민승리21 권영길 대통령 후보 정책공약자료집 <21세기형 민주진보사회를 향한 한국사회 대개조 플랜>을 보면, '전‧노사면 절대 반대, 전‧노사면 부추기는 정치권의 정략정치 반대' 항목에서 국민승리21은 이런 주장을 펼쳤다.
△ 올바른 과거청산과 사회정의의 구현을 위해, 그리고 후손에게 욕되지 않은 역사를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전‧노에 대한 사면이나 형집행정지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 무고한 양민을 집단학살하는 등 인류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자와의 화해란 어떠한 이유로도 있을 수 없다. 전‧노씨의 사면에 대해 절대 반대하는 것은 진실과 정의와 자유의 이름으로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워 21세기 선진정치로 나아가는 바탕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 따라서 사법부의 선고형량만큼의 형을 살게끔 해야 한다. 여기에는 '선 반성, 후 사면'이나 '선 양심수 전면 석방, 후 사면 논의' 등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죄에 대한 개인적 반성이나 양심수 전면 석방은 사면문제와는 별개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 '(花無十日紅 權不多年)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고 해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권력은 십 년을 못가고 활짝 핀 꽃도 열흘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정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말이다. 영원할 것만 같은 권력이나 아름다움도 흥함이 있으면 언젠가는 쇠하게 마련이다. 그만큼 정치권력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비유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노태우. 2021년 10월 26일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장례는 5일간 국가장으로 진행됐다.전두환. 2021년 11월 23일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노태우 국가장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던 김부겸 국무총리는 "노 전 대통령은 합법적 절차로 국민 손에 뽑혀 대통령이 됐고 추징금도 완납했으며 유족들이 광주에 진정성 있게 참회해왔다"며 "국가장은 국민 수용성 여부를 중요하게 판단해 결정되는 사안"이라고 밝힌 바 있다.
노태우는 떠나기 전 나름의 역사적 참회와 반성의 뜻을 밝혔다. 아들을 통해 "5·18 희생자에 대한 가슴 아픈 부분, 그 이후의 재임 시절 일어났던 여러 일에 대해서 본인의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는 유언을 전했다. 아들 노재헌은 2019년 8월을 시작으로 3년째 5·18 묘지를 참배하며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죄의 뜻을 표명해왔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진정성을 믿어줄 때까지 계속 사과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연합뉴스>, 2021.10.27.)
전두환은 마지막까지 희생자들에 대한 참회와 사죄 없이 떠난 민주주의 암흑기의 독재자였다. 유족들도 사죄는커녕 "내 남편 전두환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아버지", "나라의 영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망언을 계속했다. "살육과 고문 주범이 사과 한번 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고 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족들의 뻔뻔함'에서 전두환은 피노체트와 닮았다.
2006년 12월 10일 피노체트는 끝까지 자신이 일으킨 유혈 군부 쿠데타를 옹호하면서 모든 죄를 떠안은 채 세상을 등졌다. 인권유린 혐의로 피노체트를 기소했던 히람 빌라그라 검사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피노체트의 죽음은 우리에게서 심판과 처벌의 기회를 앗아갔다. 나는 피노체트가 심판받지 않은 것에 대해 애도를 표한다"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단죄받지 않은 피노체트」, <한겨레>, 2006.12.12.)
2000년 6월 산티아고 항소법원이 전 칠레 군부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종신 상원의원의면책특권 박탈판결을 내리자, 그의 큰딸은 "아버지는 무죄이며, 아버지가 몰락할 경우 군인과 민간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아버지는 법원의 면책특권 박탈판결을 '정치재판'으로 간주하고 있다"면서 "전직 대통령이라면 누구나 재임시절의 일들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끼듯이 아버지의 일도 이런 범주에 속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 정도를 넘어선 덮어씌우기"라고 주장했다. (「피노체트 딸 "면책 박탈되면 많은 사람 다칠 것"」, <연합뉴스>, 2000.6.8.)
노회찬이 폭로한 '작계 5027' 및 '전략적 유연성'과 주한미군의 역할 : "국방부 장관은 미국에서 달러로 월급을 받는 사람인가?"
앞서 <빌리 브란트와 노회찬> 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첫해인 2004년을 통틀어 신문과 방송에 가장 많이 나온 민주노동당의 정치인은 노회찬 의원이었다."
"그 시작은 용산미군기지 이전 문제와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문제에 대한 폭로였다. 9월 즈음부터 시작된 노회찬 의원의 '폭로정치'는 약 6개월간 치밀한 기획사업으로 진행됐으며, 신문 1면을 오르내리며, 용산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한 국민적 인식을 바꿔버렸다. 당시 당은 국가보안법 투쟁에 올인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설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정용상 기자, 「노회찬, 진보적 폭로정치의 전형을 보여주다」, <매일노동뉴스>, 2005.9.22.)
2004년 11월 11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 앞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 1차 회의록(2003.4.)을 공개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암살 작전' 및 '기습적 대북 공격' 관련한 내용을 언급했다.
"현재 추진 중인 미2사단 재배치는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정밀타격(Surgical Strike)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이를 작전계획으로 만든 것이 '작계 5027-04'입니다. 현 '작전계획 5027-04'는 정밀 폭격기술을 활용해 특정목표를 공격하는 방안이 들어있습니다."
"9.11테러 직후 작성된 '작계 5027-02'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암살 작전과 함께 미국의 신안보 독트린에 따라 한국 정부와 상의 없이 기습적으로 북한을 공격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작계 5027'(Operational Plan 5027; OPLAN 5027)은 한반도 유사시 '전쟁 시나리오'의 중심이 되는 작전계획으로, 5027이란 숫자는 미 국방성이 지구상 각 지점을 코드화 한 것 중 한반도의 코드란 설이 있다. 태평양사령부(PACCOM)의 작전 번호가 5000번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미군은 10개의 통합전투사령부를 두고 있는데, 각각 아프리카 사령부·중부사령부·유럽사령부·북부사령부·태평양사령부·남부사령부·우주사령부·특수작전사령부·전략사령부·수송사령부·사이버사령부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중 지역별 사령부는 각각의 해당지역을 관할하고, 그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작전을 주도해서 수행한다. 참고로 2021년 9월 국민의 힘 대선후보 토론회(홍준표-윤석열)에서, "작계 5015 아시죠?"라는 홍준표의 질문은 윤석열의 진땀을 빼게 했다. 윤석열을 당황케 만든 '작계 5015'는 한국이 전시작전권을 환수한 이후 북한과의 전쟁을 상정한 '신형' 작전계획이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윤광웅 국방부 장관을 질타한 노회찬 발언의 핵심내용은 이랬다.
윤광웅 : (2급 비밀인 한미미래동맹정책구상(FOTA) 회의 자료를 일부 공개한 것과 관련,) 비밀열람 권한 제한을 포함해 수사의뢰까지 검토 중이다.
노회찬 : 허위사실이라고 했으면서 수사하겠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어제 대정부질문에서 이를 모두 부인한 국방부 장관은 스스로가 위증을 고백한 셈이다.
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국민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사람인지, 미국에서 달러로 월급을 받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빨리 수사 의뢰를 해라. 수사과정을 통해서라도 용산기지 이전협상과 한미관계가 국민들에게 낱낱이 알려져야 한다. 내 주장이 맞다면 국민이 당연히 알아야 할 사안을 밝힌 것이고, 내 주장이 틀리다면 그것은 국가기밀도 아니다. 따라서 '기밀 누설' 운운 하는 국방부의 주장은 모순이다. 오히려 국익에 반하는 국방부의 거짓말과 보신적 비밀주의에 경고한다.
2004년 11월 30일 노회찬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정부문서 하나를 공개했다. 2003년 7월에 열린 제3차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에 앞서 한국측 협상팀(NSC·외교부·국방부·기획단 포함)의 사전준비회의에 제출된 문서로, 제목은 '주한미군 지역역할 수행 대비책'이었다. 이 문서는 미 2사단의 평택 이전이 주한미군의 광역기동군화, 동북아 신속기동군화를 위한 것으로, 기존 한반도에만 국한되던 주한미군의 역할이 주변 분쟁까지 확장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평화운동 진영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주장이 정부 공식문서로 확인됐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현재 미국이 한반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주한미군 지역 역할'의 주된 내용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선제 군사 개입을 위한 것이다. 미국은 중국, 북한을 표적으로 하는 주한미군 지역 역할을 구상하면서 한국군 참여도 요구했다. 결국 주한미군의 지역 역할이 단순히 대테러전에 한정되지 않고 중국 등 잠재적 패권국가와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이 있는 북한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명시한 것이다."
'한국군 참여'가 포함된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 시나리오를 폭로한 노회찬은 기자회견을 통해 주한미군 후방배치를 위한 용산기지 이전은 '대북 공격용 미군 재배치'이며 또 한국에 배치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대북 공격용 미사일'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 전쟁준비를 위한 이 두 가지 미국의 요구를 한국이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면서, '용산기지 이전 비준안 통과' 반대와 패트리어트 마사일 배치 100억 예산 전액 삭감을 요구하고 나섰다(김희원, 「노회찬 '주한미군 역할, 北·中 선제 군사공격 위한 것'-미, 전쟁준비 용납 안돼」, <폴리뉴스>, 2004.11.30.)
"이날의 폭로 역시 일간지들의 1면을 장식했다. (…)
노회찬 의원의 연이은 폭로는 미국 정부까지 나서게 만들었다. 12월 7일 미 국방부 대변인은 한국정부에 '우회적 유감'을 표명했다. 이는 진보진영이 정보전을 통해 미국정부를 움직인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용상 기자, 「노회찬, 진보적 폭로정치의 전형을 보여주다」, <매일노동뉴스>, 2005.9.22.)
2004년 12월 6일 노회찬은 보도자료(「주한미군 지역역할에 대해 떳떳하게 논쟁하자」)를 통해 "그동안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합의는 없었다고 했지만, 이 보도(<중앙일보> 2004.12.6.)에서 미 국방부 관계자는 미국은 GPR(해외미군재배치계획)에 따라 해외주둔 미군을 유사시 어디로든 이동시킬 수 있는데 이는 양국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 원칙'에 합의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미 국방부 관계자가 '협상내용 폭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위반'이라며 협상내용 공개를 문제 삼은 것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한미간 협상내용은 모두 비밀에 부쳐야 하고, 미국이 허락하지 않는 한 공개되지 말아야 한단 말이냐. 외교를 포함한 정부의 활동이 국익에 도움 되는지 철저히 감시하는 것이 국회 입법부의 권한이자 의무다. 한국민의 반발을 의식해 이를 숨긴 채 지역역할 확대를 협상하려는 미국이야말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에 대해 합의된 것이 없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면, 미국 측에 이 뜻을 명확히 전달하고 지역역할 확대를 용인치 않을 국민의 뜻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라."
노회찬이 집요하게 정치적 이슈로 삼은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이란 미국이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세계 어디서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해외주둔 미군을 유연하게 배치하려는 전략을 말한다. 공식적으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처음 언급된 것은 2003년 한미연례안보회의(SCM) 공동성명에서였다. 이 성명에서 한미 양측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지속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다. 전략적 유연성의 본격적인 협상은 2005년 2월 시작됐다. 2005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이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의 의지에 관계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은 그 후 우리 측의 입장이 됐다. 협상은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모두 12차례 열렸다. 결국 2006년 1월에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존중하되 미국은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한국이 동북아 지역 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주한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
평화와 애국(심)에 대하여 : "과연 전쟁이 해결책일 수 있을까? 전쟁에서 이기면 평화가 찾아올까?"
노회찬은 남북 간의 군사적 대결과 한반도의 긴장을 조장해온 자유한국당 등 한국의 '얼치기 보수'가 마치 보수의 전유물로 생각하며 앞세워 온 '애국, 애국심'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2014년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이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20세기의 세계사적 갈등 속에서 배웠듯, 자기 나라가 살기 위해 다른 나라를 희생시키는 애국에는 여전히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함께 잘살 수 있는 애국이어야 하고, 애국이란 이름하에 자신들의 권력욕을 합리화시키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진정한 애국은 그 사회 공동체가 자부심을 갖고 갈등 없이 잘살게 만드는 것이다.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체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애국이다."
"국민들이 자기 나라에 자부심을 갖는 순간 애국심은 저절로 나온다. 애국심은 강요하거나 교육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은 누구의 역할인가? 그건 정치인들의 역할이다.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이 정치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한 예로, 2017년 9월 20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노회찬 20대 국회 정의당 원내대표는 자유한국당이 전술핵 재배치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겠다는 것에 대해 "유례없이 핵 구걸단이 방미한 거죠. '한 핵 줍쇼' 이렇게. 정말 작년에 왔던 각설이들이에요"라고 꼬집었다. 2017년 10월 25일 전술핵 재배치 요청을 위해 자유한국당 방미단을 대표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미국외교협회(CFR)에서 열린 전문가 간담회의 발언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대한민국은 그 동안 대내외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왔습니다. 그러나 굳건한 한미동맹이 있었기에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의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한·미 양국 모두의 성과이며 세계 역사적으로도 자랑스러운 업적입니다. 저와 자유한국당은 이러한 가치를 지키고 이어나가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공포의 핵균형을 이루는 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핵우산 약속만으로는 5000만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1991년 한국에서 철수한 전술핵을 조속히 재배치해야만 합니다."
홍준표가 말한 '공포의 핵균형'은 북한이 핵을 보유한 이상 우리도 핵을 들여 공포의 균형을 맞추자는 주장이다. JTBC 시사토크 프로그램 <썰전>(2017.9.14.)에서 보수 쪽 패널인 박형준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의 논리와 동일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적성국 가운데 핵을 갖고 힘의 균형이 있었을 때 평화가 유지됐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을 오래 했지만 핵 균형 때문에 전쟁이 나지 않았다. 서로 두려움 때문에 함부로 전쟁을 못 했다."
하지만 한국의 전술핵 재배치는 이들의 논리와는 달리 북한 핵 개발로 인해 나올 수 있는 최악의 경우의 수다. 미국은 북한 핵 문제를 핵확산 억제라는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해왔다. 또 설사 북한이 핵무기 고도화에 성공했다고 해도, 핵 위협을 상쇄할 능력은 충분하다고 본다. 한반도 문제의 권위자인 셀릭 해리슨은 자신의 책 <코리아 엔드게임>(삼인, 2003)에 이렇게 적었다.
"한반도의 경우, 미국은 설사 북한이 선제 핵 공격을 감행한다 할지라도 압도적인 제2격 대응 능력을 갖고 있다. 또 인접 지역의 다양한 핵무기와 핵 탑재 가능 무기들로 보복을 가할 수 있다.
이런 신뢰할 만한 억지력이 존재하는 한 재래식 전략에 대항하는 핵 선제공격의 위협은 과잉 살육이다." (지유석, 「전술핵으로 공포의 균형 맞추자고? 타당한 주장인가?: 공포의 균형보다 핵 보유국 북한을 다루는 법부터 찾아야」, <오마이뉴스>, 2017.9.19.)
해리슨의 지적대로 한반도에 북한의 핵 선제공격을 무력화할 대응능력이 충분한 상황에서 전술핵 재배치마저 이뤄지면 동북아는 핵무기 과열지구가 될 위험성이 너무 높은 게 사실이다.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주축이 돼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일구는 길을 오랫동안 천착해온 이삼성 한림대 정치학 교수는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한길사, 2018)에서 무력으로는 결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킬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전면전이 시작하면 중국 인민해방군이 자위를 명분으로 전쟁에 개입하고, 이는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새롭고도 영속적인 분단을 야기한다고 역설한다. 해법은 대화뿐으로, 이삼성은 북한이 그동안 요구한 것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무력화'라며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평화체제를 보장해야 북한이 비핵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전망한다. (<연합뉴스>, 2018.4.26.)
'북한의 평화 제스처가 기만적인 술책에 불과하기에 화답은 북한의 시간 벌기 전략에 넘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삼성의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에 담긴 역사해석과 처방에 물론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삼성은 북한은 이미 핵무장을 완성했다고 강조한다.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한 핵무장과 장거리핵미사일 능력을 바탕으로 평화협상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미 양국에게 군사행동의 리스크는 이제 더욱 커졌다. 회담에 응하는 것이 마치 북한을 타격할 얼마 남지 않은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는 잘못인 양 비판하는 것은 사태 파악을 거꾸로 잘못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책소개 중에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노회찬의 관점은 셀릭 해리슨과 이삼성과 동일하다. 2018년 2월 창비에서 주최한 '지혜의 시대' 연속 특강 시간에 노회찬은 이렇게 묻고 답했다. (노회찬, 「전쟁은 선택지가 아니다」,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엄밀히 말해 우리 앞에 놓인 길은 전쟁 또는 평화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전쟁이 해결책일 수 있을까요? 전쟁에서 이기면 평화가 찾아올까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는 합니다. 안보, 안보 부르짖는 사람 중에는 전쟁이 나면 보이지 않을 사람이 태반이라고 말입니다. 어쨌든 전쟁에는 너무나 큰 댓가가 따르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반드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합니다."
"우선 한반도에는, 남쪽이든 북쪽이든 핵무기가 없어야 합니다. 현재 남쪽에는 핵무기가 없으니 북한의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지요. 한반도에 핵무기가 있는 채로는 절대로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핵무기를 용인하는 순간 우리 역시 핵무기를 보유해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고, 나아가 일본까지도 핵무기를 가지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후손에게 동북아시아가 핵무기 화약고가 된 위험한 상황을 물려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반도 비핵화는 굉장히 복잡하며 어려운 과제이고,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큰 영향력을 미치는 미국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평화란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 멀리서 오지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빠르고 편한 지름길은 없습니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누구도, 보수라 할지라도 전쟁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보수가 아닙니다. 가짜지요. 극우라면 모를까 건강한 보수라면 절대 전쟁을 고려해서는 안 됩니다. 보수든 진보든 평화와 안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돌아온 아옌데, '아옌데의 후예들'
의사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을 역임한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 1951.9.29.~)는 2006년 칠레의 최초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4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바첼레트는 연임 불가 규정에 따라 4년이 지난 2013년 12월 대선을 통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바첼레트는 2006년 대통령 당선 당시에는 53%의 지지율로 당선됐지만 2010년 퇴임할 때는 지지율이 85%에 육박했을 정도로 칠레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임기 중 하루 2.5개꼴로 무려 3500개의 유아학교가 빈민가에 세워졌고, 소득 하위 40% 이하 가정의 0∼4세 아동은 무상급식과 무상교육을 받게 됐다.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일자리를 갖기 시작해 실업률이 떨어졌고 출산율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바첼레트는 남녀 동수로 구성된 내각 장관들과 함께 칠레의 번영을 모색했다. 그리고 군부독재 정권 시절 자행됐던 국가폭력 피해자들에게 정부 차원의 '배상'과 '진실 규명'을 일관된 의지로 추진했다. "칠레가 당신과 함께한다."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동안 자신이 외쳤던 구호를 바첼레트는 잊지 않았으며 그녀의 진심이 국가폭력 희생자들에게 전해졌다.
2010년 3월 11일 퇴임식 당시 칠레 국민들은 규모 8.8의 지진이 일어난 엄청난 국가적 재난의 와중임에도 "대통령 고마웠어요. 2014년 다시 만나요"를 외쳤는데 그 바람대로 대통령으로 다시 복귀하게 됐다. (CBS노컷뉴스 권영철 선임기자, 「[Why뉴스]칠레는 왜 바첼레트를 다시 선택했을까?」, <노컷뉴스>, 2013.12.17.)
대통령으로서 바첼레트의 성공은 수평적 민주적인 관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소통한 덕분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첼레트가 대통령 시절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직언할 참모를 곁에 둬야 한다. 현장을 다 가볼 수 없기 때문에 대통령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주변에 둬야 한다. 요구되는 것은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 로열티(충성심)다. 어떤 경우든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이건 이렇게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신뢰한다." ('칠레는 왜 바첼레트를 다시 선택했을까?',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2013.12.17.)
※ 2009년 11월 10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은 6월 4일 칠레 산티아고의 모네다 대통령궁에서 <연합뉴스>를 비롯한 6개 외국 언론사 특파원과 조찬 간담회를 가졌다. 일문일답 가운데는 피노체트 군사독재와 관련된 소회도 있었다.
질문 : 피노체트 군사 정권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고문을 당했지만 국방부 장관 시절 과거 군사 정권의 인사들까지도 포용한 적이 있다.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한 것인지, 과거사 청산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바첼레트 : 우리들은 그 당시 일을 잊지 못한다.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잘 풀어나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모든 사회에는 충돌과 의견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런 것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들 중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민주주의적 방식이 더욱 소중하다.
2009년 11월 29일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고 "2010년 서울에서부터 정권 교체를 하자"는 기치 아래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면서 바첼레트 대통령의 칠레를 호명했다.
"지구 반대편 칠레를 보십시오. 대통령이 저소득층 0~4세 아동들에게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의료 지원을 선언했습니다. 3년 전 1500개였던 국립보육원은 이제 4000개가 넘었습니다. 하루에 2.5개씩 보육원을 지었습니다. 그 결과 칠레의 출산율은 반등을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행복한 탄생을 위해 저는, 선거 때만 되면 대표적인 거짓말 공약이 되고 있는 공립 보육시설 확충을 이뤄내겠습니다. 현재, 보육시설 수의 12%, 수용인원의 25%에 불과한 공공 보육시설을, 임기 내에 보육시설 수의 30%, 수용인원의 50%까지 비중을 높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이명박 대통령이 이 문제에 나설 수 있도록 시민들의 총의를 모아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끝장승부를 보겠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축복 속에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 '출산율 2.0시대의 서울'을 열도록 하겠습니다." (류정민 기자, 「노회찬 "2010년 서울에서부터 정권교체": 서울시장 선거 출마선언…"요람에서 무덤까지 행복한 변화"」, <미디어오늘>, 2009.11.29.)
2013년 바첼레트의 대통령 복귀에 대해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는 이렇게 평가했다.
"집권 여당의 경제민주화 공약보다는 바첼레트의 사회양극화 해소 공약이 주효했던 것 같다. 바첼레트의 공약 중 우리나라와 달리 법인세를 현행 20%에서 25%로 점진적으로 올려 교육재정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증세를 통해서 복지를 확충하겠다는 걸 칠레 국민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공약을 내세우면서 증세는 하지 않겠다고 하는 박근혜 정부가 참고해야 할 부분이다. 복지공약은 지키지 않으면서 증세를 하지 않겠다는 공약만 지키겠다고 버틸 것이 아니라 공약을 새롭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CBS노컷뉴스 권영철 선임기자, 「[Why뉴스]칠레는 왜 바첼레트를 다시 선택했을까?」, <노컷뉴스>, 2013.12.17.)
한편 2014년 2월 27일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딸 이사벨 아옌데 상원의원이 최초의 여성 상원의장으로 선출됐다. 이사벨은 상원의장에 선출된 뒤 "아버지도 상원의원을 역임했다. 딸인 제가 상원 역사에서 최초로 여성 의장으로 뽑힌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사벨이 상원의장으로서 수행할 첫 공식행사는 3월 11일 열리는 바첼레트 대통령 당선자의 취임식이었다. 취임식에서 이사벨 상원 의장은 바첼레트에게 대통령을 상징하는 어깨띠를 둘러 메주는 역할을 했다. 칠레 언론은 대통령 취임식과 관련, "사회주의 정권을 세운 대통령의 딸이 사회주의 정권의 바통을 이은 여성 대통령에게 어깨띠를 메주는 역사적인 장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2015년 5월 이사벨은 집권 중도좌파연합의 최대 정당인 사회당 대표를 맡았다. 82년에 걸친 칠레 사회당 역사에서 여성이 대표를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사벨은 대표로 선출된 뒤 사회당 소속인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확인했다. 바첼레트는 2014년 3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두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콘도르 작전'으로 상징되는,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인권탄압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가진 바첼레트 칠레 정부와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정부는 군사정권에서 자행된 인권범죄에 관한 정보 교류에 합의했다.
2018년 대통령직 퇴임 후부터 2021년 현재까지 바첼레트는 유엔 인권최고대표로 재직 중이다. 미첼 바첼레트는 유엔 인권최고대표로 사형제도 폐지와 대북 경제제재 완화, 북한 인권 개선, 차별 혐오 금지 등의 정치적 메시지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장영은, 「분노에 기댄 보복이 아닌 '진실·치유·통합'…그는 약속을 지켰다-미첼 바첼레트」, <경향신문>, 2021.2.3.)
유엔 인권최고대표 바첼레트의 정치적 메시지인 사형제도 폐지, 대북 경제제재 완화, 북한 인권 개선, 차별 혐오 금지 등은 생전에 노회찬이 애써온 정치적 이슈이기도 했다.
닫는 글: '절망', 그리고 '희망'에 대하여
"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환하는 것이다. 현재의 실천 속으로 생환된 역사만이 힘이 된다. (…)
오늘의 실천 속에서 생환하는 일은 그야말로 역사적 과업이다. 역사를 배우기보다 '역사에서 배우는' 참된 각성의 시작이다." (신영복)
아옌데는 그를 '생환'(生還)하려는 길동무들과 후예들, 그리고 '희망'을 잃지 않은 칠레 시민들을 통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병철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화전민 정치'는 어떤가」(<경향신문>, 2021.7.28.)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노회찬과 아옌데를 함께 호명하며 새로운 희망에 대한 염원을 노래했다.
"5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든 이유 중 하나가 '이게 나라냐'는 절망적 분노였다. 분노가 축적되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한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정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기존 정치판에 불을 확 지르고 씨를 다시 뿌리는 '화전민 정치'로 활활 타오르길 바란다. 화전민 정치는 고 노회찬 의원의 '불판갈이론'과 맥을 같이한다. 이제는 화석화된 정치판을 화전민 정신으로 송두리째 바꾸고 새로운 작풍의 기운을 넣을 때가 됐다. 혹자는 이를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모두 역사화해서 집에 잘 보내드리는" 것으로 풍자했다.
칠레의 민주제를 수호하다 쿠데타로 죽임을 당한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절망적인 상황은 없다. 절망에 이르도록 방치하는 상황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4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오늘부터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라고 다짐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현 상황을 일거에 바꾸기란 용이하지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2022년 3월 9일에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새롭게 희망을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절망이 더는 없어야 하기에 하는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병철이 인용한 아옌데의 말은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 장군이자 시인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이 한 말이라고 한다. '기동전 전략의 선구자'였던 그는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 등에 야전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히틀러의 참모 중 그에게 직언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구데리안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절망적인 상황은 없다. 단지 절망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Es gibt keine verzweifelten Lagen, es gibt nur verzweifelte Menschen.") ("There are no desperate situations, there are only desperate people.")
앞서 본 것처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는 그 암울한 순간에도 아옌데는 "이 어둡고 쓰라린 순간은 극복될 것", "위대한 시대가 다시 열릴 것"이라며 희망을 강조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어둡고 쓰라린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 멀지않은 장래에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가는 위대한 시대가 다시 열릴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망'을 가리켜 '깨어 있는 자의 꿈'이라고 했다. 신영복은 "희망이란 오늘을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다가설 수 있는 창"이라는 말을 남겼다. 노회찬이 "창당만으로도 평생의 꿈의 절반이 이뤄졌다"고 말한 민주노동당의 당가는 이렇게 노래했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자유로운 민중의 나라 노동자 해방을 위해오늘의 절망을 넘어 희망의 역사를 열어라 …"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과, 어두운 밤길을 함께 걷는 길동무들에 의해 노회찬의 삶이 그의 꿈과 함께 생환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희망'에 대해 남긴 노회찬의 트위터 말글을 소개하면서 오늘의 기록이야기 <아옌데와 노회찬> 편을 마친다.
"언제 비가 내릴지 모를 흐린 하늘이군요. 그렇다고 해가 뜨지 않은 건 아닙니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지 맙시다. 희망은 태양처럼 이미 있습니다. 다만 내 눈에 잠시 안보일 뿐입니다. 희망찬 하루를 보내시길!!!" (2009.7.7. 트위터)
"분노는 짧지만 희망은 깁니다. 분노는 뜨겁지만 물도 끓일 수 없습니다. 희망은 종유석입니다. 흘린 땀과 눈물이 하루하루 만들어 가는 돌기둥입니다. 벗들이여 희망의 하루 만드소서!" (2009.12.1. 트위터)
"흐르는 것이 강물뿐이랴. 세월도 어둠도 겨울도 결국 흘러가는 것. 봄이 얼어붙은 대지를 빗방울처럼 적시며 다가오듯 진흙밭에서도 저 푸른 봄미나리는 뿌리를 내려가고 있습니다. 허망한 것은 얼음장 같은 아집일 뿐 희망은 봄처럼 다가오고 있습니다." (2010.2.8.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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