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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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브라질에서 룰라를 만나다 : "우리 식의 '룰라 정권'은 가능한가"
"당원들이 달고 다니는 배지. 그것은 바로 당에 대한 사랑"
"이번에 집권에 성공한 브라질 노동자당은 민주노동당이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해외 좌파정당으로 손꼽힌다.
민주노동당은 1999년 국민승리21 시절 노동자당과 브라질 최대노총인 노동자단일연맹(CUT)의 공식 초청을 받아 연수단을 파견한 바 있으며 이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지난 9월에도 노동자당의 초청과 노동자단일연맹의 후원을 받아 15명의 대선연수단을 파견했다. 또한 이번 연수를 통해 민주노동당과 노동자당은 양당간 정기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윤재설 기자, 「민주노동당과 정당 외교: PT와 오랜 관계…아시아에 눈길줘야」, <진보정치> 110호, 2002.11.4.-11.10.)
2002년 9월 15일부터 20일까지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단장으로 한 민주노동당 브라질 대선연수단(당 10인, 민주노총 5인)이 상파울로를 공식 방문했다. 이 방문은 브라질 노동자당의 공식 초청과 브라질 최대노총인 CUT의 후원으로 이뤄진 것으로 브라질 노동자당은 1999년 3월에도 민주노동당의 전신인 국민승리21을 브라질에 초청한 바 있으며, CUT는 1995년 이래 민주노총과 긴밀한 연대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브라질노동자당(PT) 대선 캠페인 민주노동당 연수단 활동 보고>를 보면, 그 추진 배경과 목적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 이번 연수는 노동자당(PT)의 선거 캠페인과 정당 활동의 선진 경험을 배우기 위해 마련됐으며, 2002년 6월 연수와 관련하여 브라질 노동자당(PT)과 첫 접촉을 가진 이래 8월 초 확정 추진됨.- 이번 연수는 당의 핵심활동가들이 선거 캠페인을 훈련하고, PT의 구조․정책․활동을 배우며, 10월 브라질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PT의 선거 캠페인과 전략을 경험하며, 선거 국면에서 PT와 CUT의 정치적 관계를 이해하고, PT와 사회운동단체의 관계를 관찰하며,- 이를 통해 PT의 경험을 우리당의 활동에 응용함으로써 다가오는 대선에서 우리당의 조직역량과 선거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PT와 우리당, CUT와 민주노총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연수단은 연수 목적에 맞게 노동자당의 선거운동 준비상황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었다. 연수단은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가 룰라 후보와 조세 디르세우 노동자당 대표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다. 권영길은 친서를 통해 룰라의 10월 대선 승리를 기원하고, 두 당의 동지적 연대를 바란다고 전했다. 노회찬과 노동자당 아나 마리아 집행위원은 두 당간 교류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데 합의했으며 마리아 집행위원은 노동자당이 집권할 경우 한국브라질 양국 간 교류에서 민주노동당이 '가교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룰라의 선거 유세를 참관한 김정진 민주노동당 정책부장(변호사)은 활동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연수단은 룰라의 유세를 참관했다. 수만 명이 모여 있는 대규모 군중집회였다. 룰라가 처음 주지사 선거에 기호 3번으로 나왔을 때는 '3번에게 투표하라. 나머지는 부르조아다'라는 선명한 구호로 임했다면, 현재는 '이제는 룰라다'라는 아주 경륜있는 구호로 임하고 있다. 룰라는 전형적 투사에서 온화하고 경륜 있어 보이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상파울로 인근에서 열린 유세에 룰라가 입장하기 전에 룰라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과 반갑게 악수를 했고, 노 총장은 준비해 간 선물인 '인삼차'를 전달했다. 몇몇 재빠른 사람들은 룰라와 악수를 했지만, 평소 행동이 둔한 필자는 그리하지는 못했다. 특히, 모 위원장은 다음 총선 때 쓸 사진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했다. 기자들은 인삼차를 선물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관심 있게 물었고, 발빠른 국제국장(윤효원: 필자 주)은 인삼은 한국에서 'power'의 상징이라고 대답했다. 이 장면은 다음날 아침 텔레비전에 방영됐다."
한편 노동자당 중앙당사 1층의 풍경은 노회찬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왔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중앙선대본부장을 맡은 노회찬은 당시를 회상하며 <선대본 일기>(2004.1.19.)에 이렇게 적었다.
"홍보실장이 유니폼 샘플을 보여준다. 디자이너는 저녁에 온다고 한다. 2002년 10월 브라질 상파울루에 갔을 때 놀라웠던 것 중의 하나는 뻬떼(노동자당, PT)의 홍보능력이었다. 브라질은 상업광고에 있어서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뻬떼의 정치홍보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사람이 걸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뻬떼의 로고와 캐릭터로 장식하여 내놓고 있었다. 상파울루 도심에 있는 뻬떼 당사의 1층은 아예 뻬떼의 간행물과 유니폼, 그리고 각종 캐릭터 상품을 파는 매장이었다. 여성, 어린이, 노동자, 지식인 등을 향한 뻬떼의 정신은 모자, 유니폼은 물론 귀걸이, 목걸이, 넥타이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징물로 반영돼 있었고 하나하나가 감동스런 디자인으로 표현돼 있었다. 함께 간 김문영 홍보국장에게 모든 것을 하나씩 다 사가지고 가도록 했다. 민주노동당이 다른 보수정당과의 차이 중 하나는 배지를 달고 다니는 당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된 보수 4당의 당원 수는 600만 명이 넘지만 우리 국민들은 그들의 당 배지를 구경한 일이 거의 없다. 반면 민주노동당원들은 입당과 더불어 당으로부터 배지를 선물로 받는다. 거래처 영업에 나설 때에도 양복에 달고 나가는 당원이 있는가 하면 배지가 잘 보일 수 없는 겨울 스웨터에도 굳이 달고 다니는 당원도 있다.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달고 다니는 배지. 그것은 바로 당에 대한 사랑이다. 민주노동당원이라는 자부심이다. 민주노동당을 알려내겠다는 의지이다. 민주노동당원임을 커밍아웃하는 용기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원이다. 나에게 물어보라. 나는 항상 답할 준비가 돼 있다.그러나 이런 당원들에게 이제까지 당은 배지 하나만을 달아줬을 뿐이다. 뻬떼에게서 배워야 한다."
2004년 2월 3일 노회찬의 <선대본 일기>(「오랜만에 '기자답지 않은 기자'를 만났다」)에도 2002년 브라질 대선과 룰라가 등장했다. "부재자투표소 설치 기준을 낮춰달라는 '(대학 부재자투표)운동본부' 학생들에게 한나라당 이재오 정개특위장이 '참정권을 줬으면 됐지 뭘 더 달라는 거냐, 시골 가서 투표하고 오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면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노동자후보 룰라를 당선시킨 2002년 브라질 대통령선거의 투표율은 90%였다. 이러한 놀라운 투표율이 가능했던 것은 전자투표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전국 6만 6000개의 전자투표소에는 40만 6000대의 전자투표기가 설치됐다. 1억1500만 명의 브라질 유권자들은 이 선거에서 대통령 외에도 주지사, 연방 상원의원, 연방 하원의원, 지방의원을 동시에 선출했다. 컴퓨터 화면상에서 후보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이 투표에서 유권자들은 많은 경우 25번의 버튼을 눌러야 투표를 마칠 수 있었다.
1996년 대선에서 최종 투표결과가 나오는 데 1주일이 걸렸던 브라질이다. 적도를 끼고 있는 열대우림에서 투표함을 나르는 데도 사람 목숨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자투표를 처음 실시한 2002년 선거 결과는 다음날 새벽에 밝혀졌다. 빠른 개표는 물론이고 개표의 공정성 시비도 일어나지 않았다.
브라질의 선거연령은 16세이다. 16세와 17세는 자신이 원한다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 18세부터 70세까진 의무적으로 투표해야 한다. 70세 넘는 노인은 투표하지 않아도 벌금이 없다.
첫 좌파 대통령을 탄생시키고, '브라질의 가난한 사람들이 나라를 되찾았다'며 환호한 2002년 대선 결과는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다."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여의도에 입성한 노회찬을 인터뷰하면서 황호택이 '룰라 사진을 방에 걸어놓은 이유는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노회찬은 이렇게 답했다.
"2002년 15명을 이끌고 단장으로 브라질 대선을 참관했습니다. 룰라도 만나봤죠. 경제수준, 군사독재의 경험, 노동운동을 뒤늦게 시작해 정당을 만든 과정이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룰라 사진을 가리키며) 저게 포스터입니다. 홍보 정치기술을 연구하기 위해 홍보물을 몽땅 가져왔거든요. 소련이 망하고 전 세계에서 본뜰 사회주의 정당 모델이 없는데 그나마 사회주의적 이상을 갖고 있고 우리와 비슷한 게 브라질 노동당입니다." (황호택, 여의도 입성한 '토론의 달인' 노회찬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빨강이든 파랑이든 색깔 진하게 가져야"」, <신동아>, 537호, 2004.5.27)
브라질 노동자당의 '누클레오'와 한국 민주노동당의 '분회' : "분회'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자부심의 원천"
한편 '민주노동당 브라질 대선 연수단'의 길잡이로 함께한 오삼교 위덕대 교수는 <연수단 활동보고서>에서 브라질 노동자당과 룰라에 대해 이렇게 밝힌 바 있다.
"PT는 브라질 기층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CUT 창설 주도세력이 창당한 브라질의 대표적 노동자 정당이다. 브라질 좌파 정당에는 PT, PDT, PC do B, PSB, PCB 등이 있으나 PT가 가장 광범위한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받고 있다. PT의 대선 후보였던 룰라는 1978년 노동자 대투쟁을 이끌었던 지도자로 1989년, 1994년, 1998년 연속 좌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로 선출돼 높은 득표력을 보였다."
"누클레오(Nucleos)는 지역단위 기초조직으로 대도시의 경우 사회운동부문별, 직장별, 직업별, 지역별로 구성되며 모든 당원은 반드시 이 누클레오에 가입돼야 한다. PT에 가입한다는 것은 바로 지역이나 직장의 누클레오에 가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클레오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당에서 논란이 되는 문서는 누클레오에 배포돼 당원간의 토론에 이용된다. 누클레오를 통해 당원은 교육과 조직, 대중동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받는다."
오삼교가 지적한 당의 기초조직으로서 누클레오는 민주노동당 조직체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2002년 3월 16일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됐다. 노회찬의 최측근 길동무이자 '진보정당의 영원한 조직실장' 오재영은 당시 당의 조직국장이자 '당발전특별위원회' 조직소위 간사로 활동하면서 '분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2003년 3월 당대회에서 '당 쇄신'을 위해 결의한 실천과제로서 '분회의 획기적 강화'는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중앙당-광역지부-지구당-분회'라는 당조직 골간체계 속에서 민주노동당은 분회를 의사소통공간이자 당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치투쟁의 무기로 정의하면서, 지역과 직장에 당을 알려내는 기본단위로 삼았다. 조직체계상 가장 밑이지만 당을 지탱하는 토대라는 것이었다. 당과 현장의 연결고리로서 당시 '분회'는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자부심의 원천 가운데 하나였고 기성 정당들에게는 부러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정치활동의 기초단위이자 당원들의 생활공동체"였던 민주노동당의 분회는 브라질 노동자당의 누클레오가 모델이었다. 2002년 3월 300여 개에 불과했던 분회조직은 2003년 12월 900여 개에 이르렀으며, 특히 8월 23~24일 무주에서 열린 '2003년 제3차 전국 분회장 수련회'에는 이전보다 두세 배가량 많은 700여명의 분회장이 참여하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초창기부터 활동한 민주노동당 당직자들은 '진보정당 영광의 순간'을 꼽을 때 2003년 8월 무주를 빼놓지 않고 기억하곤 했다.
※취재팀, 「분회장 수련회 이모저모」, <진보정치>, 146호(2003.9.1.~9.7.) O (…) 충남도지부 이용길 지부장은 "분회장, 그대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열띤 강연을 펼치면서, 민주노동당의 주황색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아 눈길. 그에 의하면 민주노동당을 상징하는 색깔이 주황색인 이유는 "119구급대와 소방대원, 쓰레기 청소부의 작업복이 주황색인 것처럼 파탄난 민중생활을 응급처치하기 위해 119처럼 달려가야 하고, 역사의 쓰레기인 보수정치를 청소부처럼 깨끗하게 쓸어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이같은 이 지부장의 해석에 분회장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박수세례를 퍼붓기도. O (…) 노회찬 사무총장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을 개구리에 빗댄 한나라당 의원들을 향해 "개구리를 모욕하지 말라"며 충고. 노 총장은 "우리가 정작 배워야 할 것은 개구리"라며 "민주노동당은 '올챙이' 시절을 잊고 제3당으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갖추고, 시도 때도 없이 주절대고 울어야 하며, 어디로 틜지 몰라 긴장할 정도로 새롭고 참신해야 한다"고 말해 회의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민주노동당 분회 조직화와 활성화 성과에 대해 조직국장 오재영은 "분회장 대상 홈페이지 마련, 분회통신의 꾸준한 발간 등 조직국 차원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각 지구당 활동가들이 분회조직의 유용성·중요성을 스스로 깨닫고 힘을 쏟은 결과"라고 말했다. (「당발특위 보고서 '논란' 끝 채택」, <진보정치>, 161호, 2003년 12월 22일)
오재영의 겸손한 말과는 달리, 사실 이 사업은 사무총장과 조직국장의 열정과 헌신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재영의 동지이자 아내 권신윤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그때 남편은 집에 와서도 마치 콜센터처럼 일했다. '몇 명이나 모아야 분회야?' 이런 전화가 전국에서 쏟아지더라. 사회성이 좋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우리 동네에서 분회 모델을 만들어보겠다고 동네 술자리에도 열심히 나갔다." (조현연, 「노회찬, '진보정당 영원한 조직실장' 오재영을 만나다」, <프레시안>, 2019.3.22.)
닫는 글 : "실패와 패배를 통해 배우고 변화했다"
"룰라는 투쟁을 통해 지도력을 단련시키고, 수십 년간 거듭되는 실패에도 오히려 의지를 불태우며 살아왔다. 승리는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며 패배는 겸손과 학습하기를 가르친다. 실수와 패배는 좋은 학교요, 좋은 스승과 같다.
패배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슬퍼진다. 룰라와 노동자당은 그들이 겪은 패배들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패배를 통해 배웠고 발전했으며 변화했다." (브리뚜 알비스, 박원복 옮김, <브라질의 선택 룰라: 금속노동자에서 대통령으로>, 가산출판사, 2003)
실패와 패배를 통한 성찰과 변화는 결국 '룰라와 노동자당의 승리와 성공'으로 이끌었다. 2010년 2월 진보신당 부설 상상연구소가 기획한 <리얼 진보: 19개 진보 프레임으로 보는 진짜 세상>(레디앙미디어)가 출간됐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의 글 「반MB연대를 넘어 '민들레연대'로」 가운데 "우리 식의 '룰라 정권'은 가능한가"라는 소절이 있다. 이 소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한, 한국의 미래, 진보의 살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아가 좁은 의미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생명과 안전의 문제를 제기한 작년 촛불시위의 시대정신을 받아 안은 초록 생태 민주주의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나 (신)민주연합론은 철 지난 상품을 낡은 포장지로 싸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어 노회찬은 이 대목에서 한국과 브라질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노회찬은 조돈문 교수의 <브라질에서 진보의 길을 묻는다-신자유주의 시대 브라질 노동운동과 룰라 정부>(후마니타스, 2010)를 참고하라면서, 김대중‧노무현 정권과는 달리 집권 말기 룰라 정권이 80%라는 지지율 고공 행진의 직접적 배경에 대해 이렇게 썼다.
"룰라 정부는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개혁에 충실했다. 집권 초기에는 지지층의 기대에 비해 그 속도와 폭이 미진하다고 많은 비판도 받았지만, 어쨌든 집권 말기인 지금까지 은행 국유화를 포함한 금융자본 규제, 기본소득제 도입과 같은 복지 확대, 농지 재분배,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 맞선 독자적인 국제 전략 등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이것이 룰라 정부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애정이 기반이 되고 있다."
이어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비교되는 이 차이점에 대해 노회찬은 한국과 브라질의 민주화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한국의 경우와는 달리 브라질의 민주화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6월 민주항쟁'과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의 연속 발전에 성공했다. 정치 민주주의에 그치지 않고 이를 사회경제 민주주의로 확대 발전시키려는 세력이 성장했다. 이 연속 발전을 상징하는 게 바로 노동자당의 룰라 정부다. 반파쇼 민주화의 한 주역이었던 노동자당은 정치 민주화의 열기를 노동자 서민의 권리를 확대하는 사회경제 민주화의 열망으로 이어갔다. 그리고 그 열망을 대변하면서 룰라 정부가 등장했고 또 성공했다."
"실패와 패배를 통해 배우고 변화했다."
진보정당의 설계자이자 개척자로서 노회찬의 정치적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노회찬은 근거 없는 낙관과 극단적인 냉소 모두를 경계하면서 실사구시의 태도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낙관의 근거"를 만들면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변화의 전망을 열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앞서 <레닌과 노회찬> 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에게 실사구시는 "진보의 기본 원리이자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구영식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진보와 정치', '진보의 기본 덕목으로서 실사구시'에 대해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구영식 : '진보적 가치'와 '정치적 현실주의'는 양립 가능한가?
노회찬 : 양립해야만 하고, 양립할 수 있다. 사람이 권력을 가까이 하면 탁해질 수밖에 없다거나 인간이 권력과 관계를 맺으면 점차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며 타락해간다고 하는데 이런 관점이 과연 옳을까?
정치가 원래의 기능을 하면 할수록 신뢰받는 권력의 과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도달돼 있는 현실이다.
구영식 : 진보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다른가?
노회찬 : 똑같은 것은 아니다.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정치적일수록 진보성을 잃는다거나 두 가지가 양립하기 힘들다고 보는 경향들이 더 많았다. 내가 세속화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정치는 엄연한 하나의 현실이고, 진보주의자의 기본 덕목은 실사구시다.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 위에서 현실을 바꾸는 게 진보주의자의 덕목이라면 이것은 양립해야 한다. 진보의 가치는 정치화되는 만큼 실현되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정치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2010년 영화감독 변영주와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현실을 만만하게 안 보려는, 다시 말해 근거 없이 낙관적으로 보는 걸 반대하면서 동시에 그 반대편인 극단적인 냉소로 빠지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보는데, 실상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거든요. 그러면 앞으로 전망이 없느냐. 지금까지와는 다른 낙관의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
우리가 지식과 논리로서 예측한 거 이상의 역사의 변화의 역동성에 대한 신뢰는 상당히 있는 편이죠."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다섯 번째 기록 이야기를 마치며>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는 다섯 번째 기록이야기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을 이제 마칠 때가 됐다. 이번 기록이야기에서는 '노동운동가 노회찬', '진보정치가 노회찬' 만이 아니라,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의 삶을 추구한 '인간 노회찬'의 여러 삶의 모습을 곁들이면서 함께 나누려 했다. 하지만 애초 생각한 것만큼 잘 된 것 같지는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노회찬의 삶의 여정 일부를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까 한다. 기록이야기를 정리하던 중, <노회찬 평전> 작업을 마무리 중인 이광호 작가와 주고받은 이야기 가운데 한 장면을 소개하며, 이번 기록이야기 연재를 마친다. 2019년 7월 1주기 추모제 때 참석한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적시게 한, 유족 대표로 김지선 선생이 말하는 장면이었다.
"노회찬은 평생을 너무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마음과 신념은 너무 크고 유쾌하고 낙관적이었습니다.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노회찬이 사는 동안 함께 가는 동지들을 당신보다도 너무너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함께 가는 동지들을 당신보다도 너무너무 사랑했다"는 노회찬. 그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밤이 깊으면 별은 더욱 빛난다"는 글귀와 함께, 연재 시작을 알리는 여는글에서 인용한 것처럼,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은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걷는 길동무"라는 글귀를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먼훗날' 다시 만나게 될 때 "아름다운 세상 만들고 왔노라"면서 환한 얼굴로 같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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