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하철 4호선에서 장애인 단체의 불법시위로 정상적인 열차 운행이 방해 받고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4호선 열차운행이 지연될 수 있사오니 양해 바랍니다. 서울교통공사는 열차 운행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7일 오전 8시, 혜화역 4호선 서울역 방면 5-3번 출입구, 스크린도어 앞 쪽으로 방패를 든 경찰들이 늘어섰다. 그 맞은편에 서울교통공사가 지목한 '장애인 단체' 활동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전동식 휠체어를 타고,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심상정, 네 명 대선후보들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피켓을 목에 건 채였다. 후보들의 사진 아래엔 열 네 글자로 압축된 '불법시위'의 요구사항이 적혀 있었다. 이들이 4인의 대선후보에게 요구하는 바는 명확했다.
"장애인 권리예산 보장해주십시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이날로 43일째 이어온 '혜화역 출근 선전전'의 핵심은 '예산투쟁'이었다. 역사 벽면을 가득 채운 선전 포스터에만 해도 '돈' 이야기가 가득했다. "예산 없이 권리 없다", "장애인 평생교육 시설 예산 국비 지원하라", "광역이동 지원센터 운영비, 5:5로 지원하라", "대한민국은 기획재정부 나라가 아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아침 출근 시간에 벌어지는 시위는 바쁘게 출근하는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겹다 민노총"
반 넘게 뜯겨진 한 선전 포스터 위로 누군가 적어 놓은 거친 필체의 문구가 눈에 띄었다. 한 시민은 현장 활동가들을 향해 경멸어린 호통을 치기도 했다.
"경찰 말 잘 들어, 이 XX들아!"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장, 장애인 활동가 김명학 씨는 "익숙한 일"이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발언과 구호 위주의 비교적 '얌전한' 시위인 혜화역 선전전은 그나마 나은 정도다. 매일 7시 30분, 지하철에 직접 탑승하기도 하는 게릴라 시위에 나갈 경우 "출근 방해하지마라"는 시민들의 성토 위에 별의별 욕설이 얹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장애인 단체가 아니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라고, 정확하게 공지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 해봐도" 서울교통공사의 방송에는 변함이 없었다. 돈을 요구하는, '장애인 단체'의 '불법시위'라는 명확한 프레임 속에서 현장 활동가들이 20년째 외쳐온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맥락은 쉽게 휘발됐다. '돈 달라고 징징댄다'는 댓글을 애써 무시해가며 43일째 이어온 예산투쟁의 맥락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적고, 시위로 인한 당장의 불편은 크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다"고 명학 씨는 말한다.
"당장의 출근길이 몇 분, 몇 십분 지연될 때 생기는 불편을 저희도 압니다. 다만 장애인은 70년째 그 불편을 겪고 있어요. 시위로 인한 ‘불편’을 저희만이 아니라 정부에도 함께 이야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가 가진 게, 몸 하나로 싸우는 것뿐입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2001년 오이도역에서 벌어진 장애인 노부부의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 21년째 이어지고 있다. 명학 씨는 "쇠사슬로 버스에 몸을 묶은 채" 투쟁하던 현장과 "6시간 동안 한강대교를 기어서 건너던" 과거 투쟁의 현장을 기억한다. 그렇게 '2022년까지 서울시내 지하철 엘리베이터 100% 설치'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시내 저상버스가 도입됐고, 현재까지 서울시 내 92.2%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장애인의 이동권은 열악하다. 광역, 시외, 고속버스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을뿐더러, 시내버스 탑승을 위해서는 비장애인의 2배 이상 시간이 소요된다. 엘리베이터 공사비가 책정되지 않은 16개 역사엔 여전히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서울시내의 이야기다. 지역의 장애인들에게 이동권은 더욱 막연한 권리다.
"약속은 다 했어요. 그런데 관심이 없고, 예산을 안 쓰니까 이행이 안 되죠"
지난해 12월부터 매일의 출근길마다 '예산투쟁'을 벌여온 이유다. 결국 필요한 건 돈이다. 혹은 돈을 쓰게 할 관심이다. 12월 31일 마침내 교통약자의이동편의증진법(교통약자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저상버스 추가 도입 의무화와 광역이동지원센터를 위한 국비지원이 명시됐지만, 예산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중앙정부의 운영비 지원이 의무가 아닌 선택으로 확정되면서, 장애인 이동권의 보장은 또 "말 뿐인 약속"으로 남을 가능성이 커졌다.
"기획재정부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보건복지부도, 서울시도 모두 약속은 했습니다. 그런데 다 어겼어요. 결국 예산이 없으면 안 돼요. 약속을 믿고 기다리라는데, 우리에겐 예산이 곧 약속입니다"
정치인들의 말에 마음을 줬다가 상처만 입은 경험이 지난 20년 간 그에겐 무수했다. 예산이 없는 복지는 없다. 돈이 따르지 않는 공약은 정책이 될 수 없다. '장애인 개인예산제'부터 '유니버설 디자인 의무화'까지 20대 대선 후보들의 무수한 장애인 정책 공약에도 명학 씨가 전혀 설레지 않는 이유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서서 대선 후보 4인방에게 이렇게 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