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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어린이날은 5월 5일이 아닌 5월 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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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어린이날은 5월 5일이 아닌 5월 1일이었다 [좋은나라이슈페이퍼]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이하며  

2022년은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원래 어린이날은 지금의 5월 5일이 아니라 5월 1일이었다. 1922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에서 창립 1주년 기념으로 '어린이의 날' 행사를 했다. '어린이의 날'은 메이데이 정신을 기반으로 아동 해방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어린이날 제정에 큰 역할을 한 방정환은 어린이를 주체적인 존재로 인식하였다. 한편 1923년 5월 1일 '소년운동의 기초조건'을 근거로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고, 어린이들이 편안히 배우고 즐길 수 있는 가정과 사회적 시설을 제공하라’는 어린이해방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방정환의 어린이교육운동은 천도교적 기초라는 특수성과 세계어린이해방운동의 한 흐름이라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아동은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주도적 삶이 중요하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기쁘고 즐거운 정신적, 물리적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방정환의 교육관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제 어린이는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스스로 행복하며 인간의 본래성으로 돌아가 전인적인 인간으로 성장되어야 할 때이다. 필자

2022년은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원래 어린이날은 지금의 5월 5일이 아니라 5월 1일이었다. 1922년 5월 1일날 천도교소년회에서 창립 1주년 기념으로 ‘어린이의 날’ 행사를 했다. 5월 1일 ‘어린이의 날’은 메이데이 정신을 기반으로 하였고 노동자 해방과 같은 맥락으로 아동 해방이 필요하다는 천도교 내부의 목소리가 그 출발로 볼 수 있다. 그 이듬해 1923년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천도교소년회 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단체들이 함께 하면서 이루어졌다.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 서울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천도교소년회,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회원 1,000여 명이 모여 선언식을 했다. 4시에 어린이들이 가두 행진을 하고 전국적으로 20만 장 정도의 선전문이 배포되었다.
▲ 방정환 선생. ⓒ<신여성> 5권 8호 1931년 9월호 43쪽
이러한 어린이날의 제정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우리는 방정환 선생을 떠올릴 수 있다. 의암 손병희의 셋째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됨으로써, 방정환은 생애 큰 전환점을 맞이 하였다. 천도교의 종교적 수련을 경험하고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망이던 보성전문학교 학생이 되어 공부도 하고 천도교의 경제적 지원으로 동경 유학도 경험하였다. 소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학을 배웠던 방정환은 그 이후 근대학교에서 수학을 했으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문명 그리고 근대의식에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 있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주체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몸 안팎에 한울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계급과 귀천에 관계없이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보았다.

방정환의 교육관에 입각한 자기주도적 어린이 

방정환은 천도교를 기반으로 전통적 아동교육론을 극복하고 새로운 교육관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아동존중사상 그리고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미래를 상징하는 어린이의 주체성을 확립하였다. 전통적 아동교육의 특징은 그리고 이런 특징을 관통하는 한 가지는 교육이 아동에게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을 어른에게 두었다는 점이다. 아동을 하나의 주체적 존재로 인식하고 전통적 아동교육론을 극복한 이로 방정환을 들 수 있다. 더 이상 ‘어린이’는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가는 과정의 연속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한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방정환의 ‘어린이’는 천도교소년운동을 주도해 나갔던 방정환의 아동교육사상의 바탕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방정환은 아동교육의 목적을 조선왕조 시대의 성인이 되는 필요한 예절교육과 심성함양교육 보다는 ‘어린이 스스로가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 결정을 하는’ 주체적인 어린이를 키우는 일에 두었다. 방정환의 새로운 아동교육관의 특징은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교육’으로 볼 수 있다. 전통적 아동교육관이 기본적인 습관형성 통해 양육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교육은 실제 사회에 나아가서 쓸 수 있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새 시대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데 공부의 목적을 두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를 ‘한울님’으로 생각하고, ‘자유, 평등, 박애, 환희, 행복의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는 서구의 민주주의의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방정환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진 않았지만 이미 ‘민주주의’의 정신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꽃피던 다이쇼 데모크라스 시기에 개벽사 동경특파원으로 동경에 갔다. 그곳에서 천도교 청년들과 함께 소통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의 주체로 어린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기주체의 확립은 자기주도적 삶의 추구라고 볼 수 있다.

천도교를 기반으로 한 선진문물에 대한 이론적 탐색 

1920년대 초 천도교 개벽사 동경특파원으로 일본 유학을 간 일은 그에게 어린이를 위한 예술문화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을 안겨주었다. 실제 정식 학생으로 학과에 입학하진 못했지만 동경 도요대학 문화학과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었다. 방정환은 이 시기 일본에서 유행하던 다이쇼시기 자유교육 그리고 그 영향으로 인한 예술자유운동을 경험하였다. 이 때 동경유학생 중심으로 아동문화연구회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교육활동을 해 나갔다. 또한 일본체류 중에도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어린이교육운동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비교적 생경하였던 ‘어린이’에 주목하여, 1920년대 ‘어린이’라는 개념어를 일반적으로 쓸 수 있게 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동화와 동요, 그림을 보급하고, 1923년 3월에는 최초의 본격적인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 창간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일본에서의 선진문물을 체험한 방정환은 조선에 맞는 예술문화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근대화’와 ‘식민지’ 상황을 동시에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양상은 일본과 달랐다. 방정환이 선진문물에 대한 이론적 탐색을 바탕으로 예술성을 추구한 점은 분명하나 이러한 활동은 천도교적 기반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방정환이 추구했던 예술문화운동은 천도교소년회의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다만 방정환의 이러한 활동은 1920년대에 주로 이루어졌다. 그는 1899년에 태어나 1931년에 생을 마감했고, 33세의 짧은 생을 살았다. 방정환 사후 <어린이> 잡지의 편집진도 변화하고 많은 소년운동 단체들도 이념적 갈등으로 분화하면서 초창기 ‘어린이날’ 제정의 취지가 점점 무색해져 갔다.

어린이인권의식의 성장으로 본 어린이해방선언문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방정환은 학교교육이 아닌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방정환의 어린이인권의식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글은 '1923년 5월 1일 소년운동협회 이름으로 나눠준 전단지 전문'을 들 수 있다. 그 중 다음 '소년운동의 기초'의 세 가지 선언문을 주의깊게 보아야 한다.
一.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禮遇)를 허(許)하게 하라.一.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無償) 또는 유상(有償)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一.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위의 선언문에서는 ‘어린이해방’을 천명하며, 세 가지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첫째,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 둘째,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 셋째,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방(改变)’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1. 명사)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함, 2. 명사)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의 강점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유사어로는 ‘자유’가 있다. 첫 번째 뜻을 바탕으로 ‘어린이해방’을 글자 그대로 해석 하자면, “어린이의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어른이 어린이들한테 베풀어주어야 할 시혜(施惠)가 아니라 어린이들을 완전한 인격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 방정환선생과 소년들. ⓒ<신여성> 5권 8호 1931년 9월호 43쪽
그러면 어른이 어린이들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어린이들을 완전한 인격으로 대우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달리 이야기 하면, 본래 가지고 태어난 어린이의 권리를 지켜준다는 의미이다. 어린이들은 이러한 권리를 가진 독립된 사람이며, ‘작은 어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윤리적 억압에서의 해방’ 이라는 것은 전통사회에서 강조했던 ‘장유유서’의 폐해에서 아동이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경제적 억압에서의 해방’은 아동들이 배우는 일보다 노동하는 일에 고된 일상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아동들에게 교육의 정신적, 물리적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린이들은 마땅히 위의 세 가지에 대한 권리를 누려할 존재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소년운동의 기초’의 세 가지 선언문은 마땅히 ‘어린이해방선언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

메이데이 정신과 어린이날 

'어린이해방선언문' 이 공포되기 1년 전, 1922년 천도교소년회가 5월 1일에 '어린이의 날' 행사를 하였는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5월 1일은 전 세계적으로 노동절을 기념하는 메이데이이다. 1922년 5월 1일에 ‘오늘이 어린이의 날’이란 취지를 가두선전하고, "10년후의 조선을 려(慮:생각)하라"라는 선전물을 뿌리면서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하였다. 1923년, 1924년, 1925년에도 5월 1일에 '어린이날'을 기념하였다. 하지만 1927년부터 어린이날이 5월 첫째주 일요일로 바뀌게 되었다. 이주희의「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아동보호일 제정과 그 성격」이란 최근 논문에서 보면, 조선총독부는 1927년 5월 5일을 ‘아동보호일’로 제정한다. 또한 ‘아동보호일’을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것은 1926년 12월 2일부터 4일까지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전국아동보호사업대회 결의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식민지 내 아동보호를 목적으로 제국신민을 양성하고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아동보호일’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27년 어린이날이 공휴일이 된 점은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를 열기에는 평일이 많았기 때문에 어린이날 행사를 주관하는 소년단체 측의 자발적 결정이었다는 이유도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메이데이와 겹치고 일제가 장악하고 있는 교육기관이 어린이날 행사를 방해하여 5월 첫째 주 공휴일이 어린이날이 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학계의 논의가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1939년부터는 어린이날 행사가 아예 중단이 되었다. 그러다 해방 이듬해 1946년 5월 5일에는 어린이날 기념식이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김안서, 윤석중, 정흥교 등이 모여 광복 후 첫째 5월, 첫 일요일인 5월 5일로 어린이날을 확정지었다. 추후 1961년에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고, 1975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 어린이날이 5월 첫 번째 일요일 날로 바뀐 뒤의 포스터, 아래에 '오월첫공일'이라고 쓰여 있음
5월 1일 메이데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어린이날’의 기념일이 식민지하에서 바뀌는 과정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인간해방이라는 큰 틀에서 노동자해방은 어린이해방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의 이념문제와 일제의 감시로 어린이날 행사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편 어린이를 주체로 세웠던 본래 어린이날 취지와 무관하게 어린이날 날짜가 휴일로 바뀌면서, 어린이를 보호의 대상으로 인식하도록 해서 어린이날의 격을 떨어뜨렸다. 예를 들면 일제는 어린이날을 5월 첫 공휴일로 만들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어린이날에 무료 개방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업화된 어린이날 선물과 유희적 놀이로 어린이들의 해방정신을 약화시켰다. 일제는 ‘아동애호주간’을 만들어 철저하게 독립된 주체로 세우기 위한 ‘어린이날’의 원래적 의미를 퇴색시켰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은 그만큼 초기 어린이날이 가진 의미가 크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린이해방’을 근거로 ‘어린이인권의식’을 성장시키고자 했던 초기 어린이날 정신의 의미를 중요하게 봐야한다.

세계어린이해방운동의 보편적 흐름 

방정환의 어린이교육운동은 천도교적 기초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세계어린이해방운동의 보편적 흐름 속에서 이루어졌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린이날의 선언문 속에서 우리는 어린이해방운동의 단초를 발견하였다. 또한 어린이날의 행사가 5월 1일 세계노동절인 메이데이에서 그 기원이 왔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다. 서구 근대사에서 18세기에는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과 1789년 프랑스혁명을 통해 시민에 의해 전제군주제가 무너졌다. 19세기에서 20세기는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성장한 자본가들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동자의 계급해방 과정이 있었고, 제국주의에 침략당한 식민지국가의 민족해방 그 뒤를 따랐다. 조선은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1906년 통감부 설립을 거쳐, 1910년 강제 합병되어 총독부에 의해 식민통치를 받게 된다. 이후 35년에 걸친 식민지 조선의 교육 상황은 식민지형 국가교육체제가 정착되는 과정이었다. 3·1운동 전후 민족해방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일본제국이 군국주의(파시즘) 체제로 전환되면서 식민지 조선의 교육은 크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식민지 조선의 교육은 고등교육과 중등교육은 극히 제한적이었고, 초등교육을 중심으로 하였다. 초등교육 기관의 훈육과 규율은 어린이들이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통제되어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 교육 상황에서 방정환이 보여준 새로운 교육관에 입각한 어린이는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완전한 인격체’였다. 식민지 제도교육 속에 내재한 동화와 차별이라는 모순된 교육의 이념과 정책에서 벗어나, 사회 교육의 한 방편인 소년회활동과 잡지를 통한 교육은 독립된 하나의 주체로 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어린이를 권리의 주체로 본 것은 20세기에 와서이다. 여기서 어린이를 권리의 주체로 본 두 인물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인물은 <어린이의 세기>의 저자 엘렌 케이(Ellen K. S. Key, 1849~1926)이다. 그녀는 스웨덴 출신의 문필가이며, 1900년 스웨덴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의 세기>가 발간되었을 때는 관심을 끌지 못하였으나, 2년 뒤 독일에서 독일어로 출간됨으로써 큰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는 특별히 교육과 학교에 대해 논의를 공론화하였으며, "어린이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어린이의 개성을 존중하는 것"을 교육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엘렌케이는 학교에서의 획일적인 훈육과 평준화의 압박이 어린이의 개성의 성장에 해가 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견해는 방정환이 획일화된 제도교육을 비판하고, 예술을 중심을 어린이들의 개성을 존중했던 바와 일맥상통한다. 두 번째 인물은 폴란드의 어린이운동가이며.<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1918)>, <아이들이 존중받을 권리(1928)>의 저자인 야누쉬 코르착(Janusz Korczak, 1878~1942)이다. 야누쉬 코르착은 방정환과 유사점이 많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후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코르착은 억압받는 아이들에게, 방정환은 식민지 아이들에게 온 정성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둘째, 선진 문화와 학문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탐구했다는 점이다. 코르착은 루소, 페스탈로치, 몬테소리 등에서 교육학적 영감을 얻었고, 방정환은 일본의 도요대학에 청강생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선진문물을 접했다. 셋째, 코르착과 방정환의 교육실천은 종교적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방정환은 천도교를 기반으로 아이를 한울님으로 모셨으며, 코르착은 유대교의 ‘하시디즘’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고유한 인격체로 보았다. 결론적으로 방정환이 보여준 어린이교육운동의 실제가 어린이를 권리 주체로 인식했던 서구의 엘렌 케이와 야누쉬 코르착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천도교라는 특수한 민족종교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세계적인 어린이해방운동의 보편적 흐름에도 부합하는 일로 볼 수 있다.

방정환의 어린이교육운동의 현재적 의미 

어린이날 제정에 앞장섰던 방정환의 어린이교육운동은 지금도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그 결정에 책임을 지는 완전한 인격체’로 여전히 살고 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입시 경쟁 속에서 부모들은 아이의 온전한 성장을 간과하고 ‘공부’ 한 가지로 평가의 준거를 삼고 있다. 이러한 ‘학부모’에게 인정받기 위한 아이들은 여전히 ‘주체’를 잊게 된다. 최근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1949~)의 <인정투쟁>에 관한 논의가 많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목적격 나'와 대상화되지 않는 어떤 자발성으로서의 '주격 나'의 긴장관계를 전제"로 개인의 ‘정체성’형성과정을 해석한다. 사회적 투쟁이 상호인정이라는 주관적 관계가 된다는 점인데,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원리가 작동한다. "자신의 사랑을 유지한다는 감정의 확실성 없이 사랑하는 주체가 사랑받는 사람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상대의 반응을 자신 속에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된 인격체가 되기어려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동의 자기주도적 삶을 중요하게 생각한 방정환의 교육관은 현재도 그 의미가 크다. 둘째, 어린이인권 성장의 측면에서 우리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이 이제 빨간불이라는 점이다. 방정환재단에서는 2009년부터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함께 OECD국가와 비교하여 우리나라 어린이청소년행복지수를 조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수 있는 내용은 주관적 만족도와 행복도 지수가 OECD국가 중에 꼴찌라는 점이다. 국가 경제 발전에도 불구하고 행복지수가 이렇게 바닥이라는 점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중에 행복지수가 높은 아이들은 ‘회복탄력성’이 높은 아이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회복탄력성은 아이들에게 즐겁고 기쁜 정신적, 물리적 환경이 조성될 때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윤리적 해방, 경제적 해방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가정과 사회시설 조성 또한 중요하다. 이는 100년 전 ‘어린이해방선언’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AI와 제4차 산업혁명의 기술발전이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계화된 물질문명이 인간에게 위협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의 성품과 마음을 닦는 일이 인간의 본래성으로 돌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방정환이 보여주었던 주체성을 지닌 어린이는 이러한 맥락에서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본래성을 돌아간다는 것은 지식위주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OECD에서 2018년도에 제시하였던 Education 2030의 학습틀인 지식, 기능, 태도 및 가치의 통합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전제로 삼고 있다. 이제 우리는 1922년 첫 어린이날 기념으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2년 어린이날을 곧 앞두고 있다. 전통적 교육의 한계였던 어른이 중심이 된 교육이 아닌 어린이가 주체로 선 교육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제 어린이는 부모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스스로 행복하며 인간의 본래성으로 돌아가 전인적인 인간으로 성장되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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