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조건에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지워지고, 물려받은 조건에서 역사를 만들어간다."
칼 맑스의 문장 인용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3부작의 하나인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그가 첫 페이지에 적었던 이 문장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인사이드경제>가 이번에 다루려는 주제를 이만큼 잘 요약해준 문장을 다른 문헌에서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앞선 정권에게 물려받은 조건
하늘 아래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없다. 앞에 존재했던 것들의 조합이나 융합이 새로운 것처럼 나타나는 것일 뿐. 다음주에 출범할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 선거 공약집 펼쳐놓고 생각해선 안 된다. 아니, 솔직히 윤석열 캠프의 노동정책이나 공약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 않았던가. 윤석열 후보가 선거기간에 내뱉은 외마디 워딩 몇 가지만 놓고 판단해서도 안 된다. "주 120시간 노동 허용"이라던지 "최저임금 미만으로 일할 수 있어야"라는 얘기들은 대통령의 노동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당시 이 워딩들이 나오던 앞뒤 맥락들을 싹둑 자른 채 선정적으로만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게다가 이런 얘기들 대부분은 행정명령이나 조치로 불가능하며 반드시 입법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들이다. 그런데 모두들 아다시피 새정부가 맞닥뜨린 조건은 '여소야대' 그것도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단독으로 과반을 점유한 국회 환경이다. 이런 조건에서 윤석열 후보의 몇몇 워딩이 곧바로 입법화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물론 국민의힘과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노동정책에 얼마나 진정성 있게 반대할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런 공생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도 당분간 '적대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0.7% 차이로 재집권에 실패한 더불어민주당 입장에선 윤석열 정부 초기에 협력관계를 가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새정부 노동정책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예측해보려면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가야 한다. 맑스가 얘기한 것처럼 윤석열 정부가 물려받은 조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잠시만 타임머신을 타고 4반세기 전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노동 유연화 공세의 역사
지난 30년 동안 한국 정부는 민주당 계열이 집권하느냐 새누리·한나라·국힘 계열이 집권하느냐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노동 유연화'를 추구해 왔다. 거슬러 올라가면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 정부(1992~1997)에서 '신(新)노사관계'를 운운하며 정리해고제를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시키던 1996년부터 얘길 시작해야 한다.정리해고란 '쉬운 해고' 그러니까 고용의 유연화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고용 유연화를 법제도로 안착시키는데 실패한다. 이제 갓 태어난 민주노총의 강력한 총파업 투쟁이라는 노동자들의 저항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날치기 통과시킨 법률들은 시행이 연기되었고 재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1년도 지나지 않아 IMF 구제금융 사태라는 한국 경제 최대 위기가 도래한다. 그 과정에 등장한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 취임도 하기 전에 노사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총파업으로 시행이 유예되었던 정리해고제에다 근로자파견제까지 얹어서 민주노총까지 노사정 야합에 포함시켜 통과시키게 된다. 고용 유연화가 한국에 처음 도입되는 순간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노동 유연화를 더 밀어붙이는데, 이른바 비정규직법(기간제법 제정, 파견법 개악)이라는 악법을 도입해서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가 상시적이고 정상적인 고용형태로 자리잡도록 법제화하게 된다. 당장 해고와 실업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비정규직 형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고용형태 유연화'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약간 실용적인 정권이라 볼 수 있는데, 노동 유연화를 직접 밀었다기보다 노동 유연화에 저항하는 노동조합의 기본권을 앗아가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노사관계 선진화'라는 미명 아래 타임오프와 복수노조 창구단일화를 밀어붙이고, 창조 컨설팅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민주노조 파괴와 조직력 약화를 도모했다. 박근혜 정부는 보수의 본류답게 다시 전면적인 노동 유연화를 밀어붙이게 된다. 일반해고·통상해고 도입으로 '더 쉬운 해고'라는 고용 유연화를, 기간제법·파견법 개악으로 비정규직 사용기간 4년 연장 등 고용형태 유연화를, 직무·성과급제를 통해 임금체계 유연화를, 취업규칙 변경 완화를 통해 노조 파괴와 조직력 약화 등 노동 유연화 종합세트를 만들어 밀어붙였다. 이는 다시한번 민주노총 총파업 총궐기 등의 저항에 부딪혔고 한국노총마저 돌아서게 했다. 일반해고·통상해고, 취업규칙 변경 등 양대 지침을 밀어붙이긴 했지만 문재인 정부 등장 직후 폐기되었다. 김영삼 정부와 박근혜 정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노동개악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지만, 민주노총과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며 정권 자체가 몰락하게 된다.문재인 정부의 노동시간·임금체계 유연화
문재인 정부의 경우 전임 박근혜 정부가 노동 유연화 종합세트를 밀어붙이다가 조직노동의 저항에 부딪힌 선례를 타산지석 삼아 다른 전략을 구사한다. 고용 유연화, 고용형태 유연화는 사실상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완성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박근혜 정권은 여기에다 '쉬운 해고'까지 밀어붙이니 엄청난 저항을 낳은 것 아닌가. 그러니 고용 유연화, 고용형태 유연화는 더 밀지 않고 '노동시간 유연화'와 '임금체계 유연화'에 집중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인 노동시간·임금체계 유연화의 내용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주 52시간제를 법제화한다면서 휴일 중복할증을 폐기해 오히려 장시간 휴일노동을 유도했고, 마찬가지로 주52시간제 도입을 핑계로 탄력근로제를 개악하면서 선택근로제 개악에도 나선 바 있다. 코로나19를 핑계로 특별연장근로를 광범위한 부문에 허용해주기 시작했으며, 재량근로제·유연근무제도 엄청나게 확대하며 노동시간 유연화를 집행했다. 임금체계의 경우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을 통해 최저임금 제도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임금체계 유연화를 밀어붙였다. 남은 부문이 있다면 공공부문에 직무급제 도입을 통해 직무·성과급제를 전면화하는 것인데 아직 이 분야까지 유연화 공세가 진행되지는 않은 상태이다.문재인 정책 이어갈 윤석열의 노동 유연화
앞선 정권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문재인 정부
그러나 과거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조건에서 자유로웠던 정부가 하나 있다. 바로 문재인 정부. 왜냐고? 앞선 정권이었던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으로 탄핵이라는 불명예 퇴진이 이뤄졌고, 이 과정 전체가 1천만 넘는 촛불시위라는 엄청난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노동 유연화를 진두지휘한 관료들에게는 '적폐'라는 딱지만 붙여도 쫓아낼 수 있었다. 모든 정권에서 노동 유연화 로비에 나섰던 전경련이나 경총 역시 박근혜 국정농단에 부역한 세력으로 낙인찍혀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여소야대라는 국회 상황이 있어서 입법이 용이한 조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야당이 국회 과반을 점한 상황도 아니었다. 입법이 필요치 않은 행정조치로만 보자면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조건을 활용해서 문재인 정부는 뭘 했던가? 포괄임금제 규제를 담은 지침은 완성해 놓고도 발표하지 않았고,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은 자회사라는 황당한 방식을 도입해 질 나쁜 일자리가 양산되었다. 불법파견 판정은 늘었지만 자본가들은 정규직 전환이 아니라 과태료와 소송으로 버텼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행정적 제재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여소야대 국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입법에 열심이었다. 노동기본권 입법이 아니라 노동개악 입법 말이다. 주52시간제를 핑계로 휴일 중복할증을 폐지했고, 탄력근로제·선택근로제 개악을 밀어붙였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고무줄처럼 늘려서 최저임금 제도 자체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이런 입법을 밀어붙일 때 야당은 걸림돌이 된 적 없다. 아니,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문재인 정부가 이런 입법을 밀어붙일 때 싸웠던 대상은 노동자들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글을 마무리할 시점에 발표된 윤석열 인수위 국정과제를 보니, 노동정책은 '문재인 정부 시즌 2'라고 해도 좋을 만큼 현 정부 정책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스스로 이미 오래 전부터 노동 유연화에 집중해 왔던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그 정책방향을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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