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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처럼 일해서 번 돈으로 병원비를 냈다…하청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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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처럼 일해서 번 돈으로 병원비를 냈다…하청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대우조선 희망버스②] 변주현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합원

6월 22일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유최안 부지회장이 0.3평 철제감옥 안에 들어가 스스로를 가뒀고, 그의 동료 6명은 스트링거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청노동자 3명은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곡기를 끊고 단식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을 살리고, 쌍용차·현대차·유성기업 해고노동자들을 복직시킨 희망버스가 7월23일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을 응원하는 희망버스를 타고 거제로 갑니다. 배 수주는 돌아왔지만, 배를 만들 하청노동자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 조선소의 현실을 알릴 예정입니다. 희망버스 참가를 호소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거제 희망버스 평택버스는 7월 23일 09시 평택 원평동주민센터 앞에서 출발합니다.

제가 22살 때, 2015년이었습니다. 조선소에서 일하면 돈 많이 준다며 일은 힘들지만 누구나 일 할수 있다는 아는 동생의 말을 듣고 일단 울산으로 갔습니다. 패기 넘치는 20대 초반에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갖고 아무것도 모른 채 현대중공업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했던 곳은 현대중공업 '특수선 사업부'였습니다. 군함, 잠수함, 해경선 등 말 그대로 특수한 배를 만드는 곳이었어요. 거대한 현대중공업 그 안에서도 특수한 배를 만든다, 말만 들어도 엄청난 일을 하는 것 같고 돈도 많이 줄 것 같고 그렇습니다. 제가 배정된 곳은 '결선'이었습니다. 간단한 전등, 스위치 연결부터 배의 좌우 균형과 함포를 다룰 수 있도록 케이블을 까고 배전반에 연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 일은 누구나 배우기 쉽지 않은 일이었고 밖에 나가면 어마어마한 단가를 받는 일이라는 것을. 그렇게 한 1년 동안 그저 성취감 하나로 일해왔습니다. 일이 익숙해질 무렵, 저는 이제야 월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점점 고단해지는 노동강도에 비해 월급은 줄어만 갔고 200만 원을 넘기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분명히 6개월이 지나면 급여를 더 준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업체 총무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야기합니다. 수주가 뭐 어떻고 적자가 뭐 어떻고 사정이 이러쿵저러쿵, 그러더니 임금이 동결된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번 해만 버텨보자고 합니다. 그리고는 무슨 동의서에 서명을 요구하며 그 자리에서 서명지를 돌립니다. 이거 싸인 안 하면 일 못한다고 합니다, 울산에 연고도 없고 갈 곳이 없었던 저는 하는 수 없이 싸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소처럼 일했습니다. 153cm의 작은 키로 어디든지 들어갔습니다. 먼지 구덩이 구석구석을 기어서, 누워서, 매달려서. 체구가 작아 유용하니 결선이 아닌 다른 일도 시켰던 것입니다. 그렇게 정처 없이 일하다가 문득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형님은 얼마 받으세요?" 하고 물으니 대답을 잘 안 해줍니다. "너랑 비슷하다." 저의 급여 금액을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비슷하답니다. 그리고 주변의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물어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도장, 보온 사람들이었네요. 얼마를 받으시냐는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얘기해줍니다. "좀 더 받는다. 근데 할 만한 일은 아니다." 저는 그 당시 최저시급(6,470원)에서 40원을 더 받고 있었습니다. 보온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여름에 우의인지 모를 바람이 전혀 통하지 않는 작업복에 방진마스크, 고무장갑, 고글을 끼고 일합니다. 눈조차 간신히 보이는 상황에서 하이바에 달린 렌턴에 의지한체 어두운 데크안을 누빕니다. 도장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비슷했습니다. 하이바에 달린 렌턴은 개인 사비로 산 거라고 합니다. 다들 나이가 꾀 들어보였습니다. 무거운 페인트통, 어지러운 신나 냄새, 또 근처에서는 그라인더 작업을 하는지 귀마개를 껴도 머리가 멍해지는 굉음이 들리고 쇳가루가 공중에 떠다닙니다. 작업자들은 혼재작업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반장들의 지시 하에 쫒기다시피 작업을 합니다. 선행에서 공정이 밀렸다고 서둘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간신히 물 한 잔 마시기 위해 마스크를 벗은 얼굴엔 물인지 땀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노동조합 파업과 관련한 담화문을 발표한 18일 오후 한 근로자가 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서문 주변에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가 본 중공업 환경은 이랬습니다. 이게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맞는지.개처럼 일해서 번 돈으로 병원비나 내게 될 지경이었고, 하물며 그 병원비를 내고도 여유가 되면 모를까 그냥 간신히 생명 연장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쉬는 시간 배 밖으로 내려갈 여유가 없어 그냥 배 안에서 쉽니다. 간간이 친구들과 연락을 하면서 근황 얘기를 합니다. 편의점, 피시방, 카페 알바 등을 한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친구들은 제가 현대중공업에 다닌다고 하니 대기업에 다닌다며 감탄했습니다. "이욜 변 대기업 다니네! 대단하다." 하지만 친구들의 이런 감탄에 별로 기쁘지 않았습니다. "잘 모르겠다. 그래봤자 200만 원 안 넘드라"고 얘기하니 다들 놀랍니다. 생각보다 짜다고. 힘든 일 한다고 들었는데 그거 밖에 안주냐고, 그럴 바에 편의점 알바 하는 게 낫겠다고 친구들이 말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더 이상 오르지 않는 임금에 어째서인지 갈수록 고되어 가는 노동강도를 몸소 느끼니 성취감 마저 증발해 갔습니다. '최저시급이 오르면 그나마 낫지 않을까?' 아니었습니다. 최저시급이 올라도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주말출근도 하고 특근도 매일 하면 그래도 하는 만큼 받겠지' 했는데 그냥 병원비만 늘 뿐이었습니다. 잔업 해서 더 벌었다고 생각한 돈은 그저 물리치료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소 일이 이렇습니다. 묵묵히 일만 했더니 최저시급 주면서 사람 호구로 봅니다. 밥 먹는 시간부터 쉬는 시간, 직반장들, 소장들, 이눈치 저눈치 봐가며 정말 현대판 노예나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피땀 흘려 조선소 배가 크고 멋지게 지어질 때 저의 삶은 나아지는 것 없이 골병으로 무너져갔습니다. 그렇게 채 3년이 안 되서 그만두었습니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주는 곳으로 삶을 옮겨가며 일합니다. 그래봤자 조선소 바닥이 거기서 거기입니다. 하청노동자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 대우조선의 하청노동자들 파업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오죽했으면 파업을 할까? 그리고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호소에 저도 모르게 '그렇지. 계속 이렇게는 못살지'하며 중얼거릴 정도였습니다.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이 그 누구보다 이해가 갑니다. 저는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 해봤지만 이분들은 하청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고자 목소리를 내고 파업하는 것 아니겠어요? 하루에도 수십명이 다치고 매년 사람이 죽어가는 조선소 현장입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청노동자들 거들떠도 안 봐요. 이번 일을 계기로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얼마나 저임금에 시달리는지 전 국민들이 알아주고 공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대우조선 하청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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