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여당이, 그것도 법치를 강조해온 보수정당이 법원 결정을 사실상 무시하고 나서면서 당 안팎으로 파열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당원권 정지 징계 중인 이준석 대표와 원래 가까웠던 이들은 그렇다 치고, 안철수·최재형 의원까지 나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서병수 의원은 전국위 의장직에서 사퇴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을 보면 현재 당을 주도하는 다수파, 또는 당권파도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한다. 초·재선 의원들의 머릿수로 이들의 입을 막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사실 국민의힘 소속 의원·당직자들은 모두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이다. 법원 결정을 무시하는 게 자신들 마음에부터 편할 리 없다. 대통령도 검찰총장 출신이고, 민정당 이래로 계속 '법치'를 사실상 당의 기조로 내세워온 이들이 갑자기 법원 결정에 대해 창조적 해석을 들이밀며 '법원이 결정한 것은 비대위원장 직무정지이지 비대위 자체가 무효라는 주문(主文)은 없었다'고 우기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에도 반하는 일이고 지켜보는 이들도 민망하다. 법이나 판결에 맞서 '비합법 투쟁'을 하는 것도 해본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지, 지금 국민의힘 구성원들은 그럴 수 있는 이들도 아니거니와 그럴 명분도 없다. 본질은 겨우 당권 다툼 아닌가. 서병수·윤상현·안철수·조해진·최재형 의원 등이 지적하듯이, 법원 결정의 요체는 '전당대회에서 선출한 당 대표를 그 하위기구인 전국위 결의로 면직시킬 수 없고, 따라서 이를 결의한 전국위의 비대위 전환 결의는 무효'라는 것이다. 법원이 이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이 결정이 옳은지 그른지는 별론으로 하고, 지금의 현실에서 이미 내려진 법원 결정의 요지는 그렇다. 그렇다면 중진 의원들의 주장대로, 비대위 이전의 최고위 체제로 돌아가서 원내대표가 당 대표 직무를 대행하는 체제로 가면 되는데 당권파는 왜 굳이 비대위를 고집하는 걸까? 답은 '최고위 체제로 복귀할 경우 이준석 대표의 복귀를 막을 수 없어서'일 것이다. 설마 '법원 결정을 순순히 따르려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는 이유는 아닐 것이고. (현재 중앙언론사 중 이준석의 직함을 '전 대표'가 아니라 '대표'라고 쓰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레시안>과 <조선일보> 두 곳밖에 없다. 그의 대표직 복귀 가능성을 '보호받아야 할 법익'이라고 규정한 법원 결정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법원의 권위가 이렇다.) 그러나 당권파 입장에서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굳이 요란하게 법원과, 또 이 대표와 법정 다툼을 추가로 벌일 일이 아니다. 당장 주호영 비대위원장의 가처분 집행정지 소송부터 취하하고, 향후 3개월을 시야에 넣고 정치적 대응을 차분히 하면 된다. 우선 지도부 구성 문제. 이준석 대표가 즐겨 인용하는 <삼국지>의 제갈양은 1차 북벌에 실패하고 '승상'에서 '좌장군'으로 스스로 관직을 변경했다. 2차대전 당시 영국 상황에 비기면, 거국일치 전쟁내각을 이끌던 총리가 군단장 정도로 내려앉은 것이다. 사람들은 '읍참마속'만을 기억하지만, 제갈양 리더십의 핵심은 부하의 목을 베어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인 데 있다. 마찬가지로 그저 원내대표 목을 날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서병수 의원이 YTN 인터뷰에서 제안한 것처럼, 임시 당 대표인 주호영 비상대책위원장을 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 결의로 새 원내대표로 선출해서 직함은 원내대표이되 '당 대표 직무대행' 역할에만 집중하게 하고,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정기국회·국정감사·예산안 등의 현안은 권성동 현 원내대표를 원내수석부대표든 '원내대표 특별고문'이든 '여야협상 및 원내운영 담당 특별부대표'든 적절한 직함을 맡겨 사실상의 원내 사령탑 역할을 전담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의외로 '당 대표 직무대행'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당권파 입장에서는 묘수가 될 수 있다. 이는 현재 국민의힘 내 상황으로 보면, 반(反)이준석 그룹이 당권을 임시로라도 탈환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비대위 출범보다는 불안요소가 많다는 면에서 당내 다수파의 성에 차지 않는 방법이겠으나, 우물에서 숭늉을 찾을 일이 아니다. 괜히 서두르다가 법원으로부터 의외의 일격을 당하지 않았는가. 당권을 일단 장악하면 공간은 넓게 열린다. 가장 먼저는 사퇴할 최고위원들을 대신할 보궐 최고위원 선거를 해야 한다. 여기서 '이준석파(派)'가 최고위원 보궐에 당선자를 낼 확률은 지극히 낮다. 왜냐? 최고위원 보궐선거는 당원·일반국민 대상 직접선거가 아니라 전국위 간접선거다(국민의힘 당헌 28조 3항). 그리고 전국위는 앞서 9일 회의 당시 재적 707명 중 (투표 참여 511명) 463명 찬성으로 주호영 비대위원장 임명을 가결했다. 상임전국위도 이후 16일 재적 55명 중 (투표 참여 42명) 찬성 35인으로 비대위원 임명안을 가결했다. 즉 전국위-상임전국위는 모두 재적 과반을 현 당권파가 장악하고 있다. 이유는? 현 당권파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이 대표가 맞서는 대상이 '윤핵관'이 아닌 윤석열 대통령 본인임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이라는 명칭 자체가 대통령이 소속돼 있거나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을 뜻한다. 즉 여당은 '대통령의 당'이다. 그런데 이 대표는 대통령과 거듭 반목하는 것을 넘어 최근의 '내부 총질' 문자로 대통령과 적대관계임이 명확해졌다. (그의 책임 여부를 떠나, 현실이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의 대의기구인 전국위-상전위에서 대통령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의결이 나온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2015년 당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정의롭고 개혁적인 보수'와 '따뜻한 공동체'라는 비전,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로 요약되는 성찰적 태도,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현실감각과 이를 주장할 용기를 모두 갖추고도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고 스스로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2022년 이준석 대표는 '2015년의 유승민'이 가진 덕목 중 하나도 갖추지 못했고, 그저 능력주의와 성차별 옹호(안티 페미니즘)적 태도만이 '이준석 정치'의 내용일 뿐이다. 서병수 의장이 전국위-상전위 소집을 거부한 끝에 사퇴했지만, 당헌당규에 따르면 전국위 의장이 전국위를 소집하지 않을 경우 당 대표가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당규 '전국위 규정' 4조 1항). 그리고 당 대표가 소집할 수 있는 회의는 '당 대표 직무대행'도 물론 소집할 수 있다. 전국위 의장은 전국위원 간 호선으로 뽑히기에(당헌 21조 1항) 일단 전국위를 열면 후임 의장을 선출할 수 있다. 서 의장의 의장직 사퇴 선언도 법원 결정을 무시하고 비대위를 강행하는 데 대한 항의이지, 법원 결정에 따른 '당 대표 직무대행' 체제가 되면 그의 반발도 가라앉을 확률이 높다. 이렇게 전국위에서 최고위원 보궐 구성을 마치면, 이전의 '이준석 지도부'가 대표 본인을 포함해 최고위 구성원 9인 중 적어도 3~4인이 '이준석파'였던 것과는 달리 9인 중 최소 7인 이상을 반이준석파로 채울 수 있다. 주목해야 할 핵심적 단계는 당무감사위원회 구성 및 장악이다. 이는 당권파가 최고위를 접수한 이후 해야 할 제1과제다. 당무감사위원 및 위원장 임명은 당헌상 최고위 의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순서상으로 최고위 복원이 반드시 이에 앞서 이뤄져야 한다. 당무감사위원장은 현재 공석이고, 위원들도 임명돼 있지 않아 위원회 구성 자체가 돼있지 않은 상태다. 현재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해임할 필요도 없이 새로 임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법원 결정을 거스르지 않고 적법하게 '당 대표 직무대행' 자리를 차지하기만 해도 최고위와 당무감사위 장악을 일사천리로 해치울 수 있는 셈이다. 결원인 당직을 보충하는 것은 통상적인 당의 활동이니만큼 '권한대행'이 아닌 '직무대행'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당무감사위까지 당권파 성향 인사로 채운다면, 여러 선택지가 열린다. 첫째, 당무감사위는 당헌 42조에 따라 주요 당직자의 당헌당규 위반 또는 사회적 물의 등 부정사건 조사 기능이 있고, 중앙당 당직자에 대한 직무감찰 권한도 있다. 그 조사 결과 징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면 윤리위원회에 징계를 회부할 수도 있다. 이미 현재의 윤리위가 직권으로 당무감사위 회부 절차 없이도 이 대표에 대한 당원권 정지 6개월 징계를 내리기도 했지만, 앞서 제기된 바 있는 절차상의 문제를 보완해 더 적법한 방식으로 추가 징계 회부도 가능하다. 지난 27일 의원총회가 윤리위에 이 대표 추가 징계를 촉구한 것은 말 그대로 '촉구'이지 어떤 구속력을 갖는 실효적 행위가 아닌 반면 당무감사위는 징계를 직접 '회부'할 수 있다. 둘째, 당무감사위를 통해서는 윤리위 회부 이외에도 또 하나의 대안이 가능하다. 당원소환이다. 국민의힘 당헌 제6조의2에 따르면 "법령 및 당헌당규, 윤리강령을 위반하거나 당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해당(害黨)행위를 한 당 대표 및 선출직 최고위원"은 당원소환의 대상이 되고, 전체 책임당원(약 30만 명)의 20%의 청구가 있으면 "당무감사위 의결을 통해 당원소환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당규 '당원 규정' 제3조의3의 4항) . 이 말을 뒤집으면, 다수 책임당원의 요구가 있더라도 당무감사위만 장악하고 있으면 당원소환 투표를 발의할 수 없다는 말도 된다. 때문에 이를 공석으로 비워둔 것은 '정치 파워게임의 영재'로 불리는 이 대표의 명백한 실책이다. 셋째, 당원소환은 최근 이 대표가 당원모집에 열을 올린 점 등을 감안할 때 다소 불안요소가 있다고 본다면, 아예 '원 포인트'로 전당대회를 여는 방법도 있다. 법원 가처분 결정의 요지가 (그 당·부당을 떠나) '전국위 결의로는 전당대회의 지명을 뒤엎을 수 없다'는 것이라면, 전당대회 스스로 그 지명을 철회하게 하면 된다. 국민의힘 당헌 14조에 따르면 전당대회 소집 요건은 '상임전국위 의결 또는 전당대회 재적 대의원 1/3 이상의 요구, 또는 책임당원 1/4 이상의 요구'이다. 상임전국위는 위원 과반을 당권파가 장악하고 있으므로, 전당대회 개최 의결에 문제가 없다. 전당대회 의장을 겸하는 전국위 의장이 소집을 거부해도 "전당대회 의장이 임시전당대회를 소집하지 않을 경우에는 당 대표가 소집해야 한다"는 전당대회 규정(당규) 6조 2항을 따르면 된다. 전당대회 대의원은 일반 책임당원이나 유권자가 아니라 '1만 인 이내(당헌 12조)'로 구성되는 당원들의 간접 대표자들이다. 윤석열 대통령을 대선후보로 지명했던 작년 11월의 2차 전당대회 당시 대의원 재적인원은 약 8000여 명이었다. 30만 당원 전체보다, 이들 대의원을 대상으로 온라인 전당대회를 열어 투표로 의사를 묻는 것이 더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러면 법원이 지적한 '실체적 문제'를 실질적으로, 편법이 아닌 정공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전당대회가 열리면 대의원 투표 결과도 당권파의 의지대로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 이 대표가 대표직을 따냈던 작년 6.11 전당대회 당시에도 이 대표는 국민여론조사에서 압승해 승리한 것이지 당원투표에서는 2위 나경원 후보에게 4%포인트(약 5000표)가량 뒤졌다. 그마저도 결과가 우려된다면, 대통령실과의 소통으로 윤 대통령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지지 메시지를 받아내 이를 투표에 활용해도 되고, 당 대표 직무대행으로서 각 당협을 통해 대의원 명부 자체를 새로 구성(재확정. 당규 '전당대회 규정' 3조 1호) 해도 된다. 그리고 설사 결과에 100% 확신이 없다 해도, 어쨌든 전당대회 대의원 투표 성사-가결의 확률은 최소한 법원의 가처분-본안소송 승소 확률보다는 확실히 높을 것이고, 더 중요하게는 정당의 정치적 결정을 사법부에 의존하지 않는 방법이 될 것이다. 즉 법원 결정을 부인하고 굳이 비대위 전환을 고집하지 않아도, 법원 결정문 취지와 당헌당규의 범위 내에서도 충분히 △윤리위 징계 △당원소환 △원포인트 임시전당대회 개최 등 여러 복수의 대안이 존재하는 셈이다. 일개 출입기자가 언뜻 보기에도 이 정도이니, 수십 년 '정당 밥'을 먹어온 전문 당료 집단이나 직업 정치인들의 지혜를 모으면 더 좋은 방안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 대표의 가처분 승소를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져 굴욕감이 들지라도, 현 상태대로 끝없는 대치가 이어지는 상황 자체야말로 이 대표에게 최대한의 정치적 이득이 된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 대표직에 복귀하게 된다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 당장 시간이 급한 것은 윤 대통령이다. 어떤 길이 대통령을 위한 것인지 여당의 '윤핵관'들은 더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대선·지방선거 승리를 거두고도 이유 없이 펼쳐진 여당 내홍 사태로 인해 과연 정기국회가 제대로 가동되기는 할지 걱정하고 있는 유권자들을 생각해 주는 것은 감히 바라지도 않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