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면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 여자가 또 죽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 와 닿았다."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20대 여성 신아무개 씨는 매일 저녁 8~9시쯤 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에 도착한다. 잔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 지하철 2호선에서 버스를 환승하기 위해 내리는 때가 꼭 그 시간대다. 지난 14일 밤 9시께, 신 씨가 매일 퇴근을 위해 신당역에 들르는 그 시간대에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은 범죄현장이 됐다. 화장실을 순찰 중이던 여성 역무원이 전 동료였던 가해자 전 씨(31)에게 피살됐다. 사건 당일에도 신당역을 지나친 신 씨는 15일 아침 언론보도로 사건을 접했다. 이날 저녁 신당역 인근에서 <프레시안> 취재진과 만난 신 씨는 "신당역은 유동인구가 많은 역"이라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일상의 공간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듣고 공포스러웠다"고 심정을 털어놨다. 이번 신당역 사건은 지난 2016년 대규모 여성 대중운동의 시발점이 된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공공장소에서 일어난 여성 살해 사건이 여성들의 공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신 씨는 "일상의 공간마저도 살인을 두려워해야 하는 장소가 됐다"며 강남역 사건과 신당역 사건의 공통점을 짚었다. 27세 여성 이아무개 씨도 "(신당역 사건에 대한) 기사를 접하자마자 강남역 사건이 바로 떠올랐다"며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대상 범죄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15일 신당역 역사에 추모 팻말을 설치한 민간 여성단체 '백래시공동대책위원회 팀 해일'은 같은 날 성명을 내고 "강남역 살인사건 6주기, 무엇이 달라졌나"를 물으며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사회가 이와 같은 일에 무뎌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제도적 사각과 기관의 안이한 태도 "막을 수 있는 살인, 사회가 방관했다"
15일 경찰 발표에 따르면 가해자 전 씨(31)는 피해자와 함께 근무했던 전 동료였다. 경찰은 전 씨가 전부터 피해자에게 스토킹과 불법촬영 및 유포 협박 등의 범죄를 일삼아왔으며, 지난해 10월엔 해당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상태였다고 밝혔다.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 관계자는 전 씨가 "지난해 10월 촬영물을 이용한 협박 등 혐의로 경찰에 긴급체포"됐으며 "서울교통공사 측도 해당 상황을 이유로 전 씨를 직위해제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젠더폭력 범죄로 꼽히는 스토킹 범죄가 공공장소에서의 여성살해로 이어진 데 대해 여성들은 공포와 무력감, 그리고 분노를 토로한다. 스토킹 가해자가 전 여자친구를 스토킹하다 끝내 보복살인한 '김병찬 사건'이 일어난 것이 지난해 11월이었다. 지난 6월에도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40대 여성이 전 남자친구의 보복살인에 숨지는 등 스토킹범죄가 여성 살해로 이어진 사건은 올해 상반기에만 3건이 알려졌다. 비슷한 양상의 사건이 반복해서 발생하는 일을 지켜보던 여성들은 결국 "막을 수 있는 살인을 한국 사회가 방관했다"고 판단한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15일 <프레시안>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스토킹처벌법의 제도적 사각은 물론이고, 수사기관과 사법부가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도 있다"고 현 상황을 평가했다. 현행 스토킹처벌법은 소관부처에 따라 처벌법(법무부)과 피해자보호법(여성가족부)을 분리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고, 스토킹 범죄를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을 시 기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로 규정하는 등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에 있어 미흡한 측면이 많다. 이에 지난해 11월 여성가족부가 '스토킹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법률안을 입법 예고했지만, 송 대표는 해당 법률안에도 "피해자가 (경찰이나 검찰의 개입 없이) 적극적으로 보호조치를 요청할 수 있게 하는 '피해자 보호 명령제도'가 빠져있는 등 부실한 지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16일 오전 윤석열 대통령은 출근길 기자들과의 약식 기자회견에서 "작년에 스토킹방지법이 제정돼 시행했지만 피해자 보호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며 "법무부로 하여금 제도를 보완"하게 하겠다고 밝혔다.다만 송 대표는 "반의사불벌죄 조항 폐지 등 스토킹처벌법 보완·강화에 대한 여성계의 요구는 스토킹처벌법 제정 당시부터 이어져 왔다"고 지적한다. "현장에선 몇 번이나 의견을 내고 있지만 몇 년 동안 반영되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보호조치 요청 안 했다'는 경찰입장, 말도 안 된다"
제도적 보완이 이루어져도 쉽게 고쳐질 것 같지 않은 문제가 있다. 애초에 "범죄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수사·사법 기관의 태도" 문제다. 이번 사건의 쟁점 중 하나는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접근금지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5일 경찰은 언론 등에 '지난해 10월 피해자의 신변보호 신청으로 1개월간의 신변보호가 이뤄졌으며, 피해자의 요청으로 조치가 종료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송 대표는 "피해자가 보호조치를 요청하지 않아 예방이 어려웠다는 말은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보호조치를 하지 않는다'는 제도적 원칙도 없을뿐더러, 법률상으론 스토킹 범죄에 있어 가해자 접근금지나 정보통신망 차단 등의 잠정조치를 수사·사법기관의 판단에 따라 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행 스토킹처벌법 제8조에 의하면 검찰은 스토킹 가해자의 스토킹 위험도를 판단해 잠정조치를 직권으로 청구할 수 있다. 법원은 스토킹 위험도가 인정될 시 범죄 중단에 관한 서면경고(1호), 피해자나 주거지 등으로부터 100미터 이내의 접근 금지(2호), 피해자에 대한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금지(3호), 유치장 또는 구치소에의 유치(4호) 등의 잠정조치를 조치할 수 있다. 송 대표는 "스토킹은 살인으로 연결될 수 있는 범죄이기 때문에 초반에 강력하게 공권력이 개입해야 한다"며 "이번 사건의 경우 불법촬영 및 협박 등 혐의로 구속영장까지 신청된 사건이기 때문에 그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음에도 (수사·사법기관이) 그러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스토킹 위험도에 대한 기관의 '안이한 태도'는 지난 2월 일어난 구로 스토킹 살해 사건에서도 불거진 문제다. 당시 구로경찰서는 검사의 보완수사 요구를 이유로 잠정조치 4호를 검찰에 신청하지 않았고, 신변보호를 받던 피해자는 가해자 조 씨(56)의 보복살인에 노출됐다. 결국 피해 당사자들에겐 심각할 수 있는 사안이 경찰, 검찰, 법원 등 수사·사법기관의 눈에는 "인지되지 않는 꼴"이다. 송 대표는 "경찰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의 (보호조치) 신청이 없었다는 입장만 반복해서 말한다면, 이는 결국 자신들이 판단하고 조치했어야 할 것들은 하지 않고 피해자 탓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해자 전 씨의 구속영장이 법원 판단에 의해 기각된 점도 마찬가지의 맥락을 지닌다. 지난해 10월 촬영물을 이용한 협박 등의 혐의로 전 씨가 긴급체포된 당시, 경찰과 검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서울서부지법은 '주거지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그 영장을 기각했다. 이후 지난 1월 전 씨가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2차 고소됐을 땐 경찰도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다.여성노동자 안전문제도 ... "온갖 여성혐오 뒤섞인 젠더폭력 사건"
회사 차원에서 사건을 예방할 수 없었냐는 지적도 있다. 서울교통공사 측이 제공하는 노동환경이 역무원의 안전을 충분히 보장하고 있느냐는 지적이다. 김정섭 서울교통공사노조 정책실장은 15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번 사건은 근본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젠더폭력 사건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면서도 "한편으론 오랜 기간 동안 제기되어온 역무원의 안전근무 환경 문제도 겹쳐있다"고 지적했다. 김 정책실장은 "역무원이 서울 내 150여개 역사를 '2인 1조' 형식으로 순찰하기엔 인력이 터무니없이 모자라다"며 "역무원들의 근무환경은 이전부터 '매 맞는 역무원'이란 말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로 열악했다. 악성 민원인들에 의한 모욕이나 폭행사건이 끊임없이 이어져왔으며, 이러한 폭력은 일반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 심각하기도 하다"라고 강조했다. 서울교통공사 노조 소속 '책읽는여성노동자모임'은 15일 성명을 발표하고 "사내 성폭력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조치 하지 않은 책임, 분리조치 후 피해자가 근무하는 공간이 안전하지 살피지 못한 책임, 역무직원이 위험에 처하더라도 공동대응할 수 있는 최소인력을 배치하지 않은 책임" 등을 서울교통공사 측에 제기했다. 경찰, 검찰, 법원 혹은 공사까지 범죄를 막을 수 있었던 기관이 여러 곳이라는 말은, 그 책임 또한 사회 전반에 걸쳐 물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해당 사건을 두고 일상, 법률, 노동 등 생활영역 전반에 걸친 "온갖 여성혐오가 뒤섞여 있는 복합적인 젠더폭력 사건"이라는 수식이 붙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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