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시민들은 일방적으로 죽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평화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원합니다."
말을 마친 여성이 앞으로 나서 가위를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이란에서 온 유학생 아이샤(Aisa) 씨는 잘라낸 머리칼을 치켜들고 주변 시민들과 함께 구호를 외쳤다. "Women(여성), Life(생명), Freedom(자유)." 지난 달 19일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시작돼 현재는 전 세계 도시로 확대되고 있는 여성·시민 집회의 핵심 구호였다. 5일 오전, 서울 용산구 주한이란이슬람공화국대사관 앞에서 이란 여성 아이샤 씨와 그의 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모인 국내 41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이란 현지에서 '부적절한 히잡 착용 방식'을 이유로 연행됐다 사망한 이란 여성 마흐샤 아미니 씨를 추모하고 아미니 씨의 사망 이후 이란 전역으로 퍼진 시민집회를 강제 진압하고 있는 이란 정부를 규탄했다. 또한 한국정부와 시민사회를 향해 이란 정부 압박을 위한 연대를 촉구했다.
아이샤 씨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는 이란 현지에서 히잡거부·정권퇴진 시위를 벌이고 있는 여성들이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행하고 있는 일종의 결의 행위다.
아이샤 씨가 실명과 얼굴을 밝혀가며 시위에 나선 이유는 이란 현지의 급박한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이란에선) 과격해진 경찰과 시민의 대립으로 지금까지 1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사망했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다"며 "이란은 현재 대단히 긴급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그럼에도 현지의 시민들이 "이 정부가 물러날 때까지 목숨을 걸고 혁명을 진행하겠다고 한다"며 한국정부, 국제기관, 국내외 시민사회 등지에 "함께 행동해 달라"고 촉구했다. "우리가 중동지역의 국가폭력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 그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더 많은 아이들을 죽일 것"이라며 이란 내에서 벌어진 해당 문제가 이란이나 중동만의 문제가 아님을 역설하기도 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이란의 여성 및 시민사회 탄압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지적은 히잡 거부 시위가 확대돼가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현장을 찾아 연대발언을 전한 공익인권법센터 어필 난민인권네트워크 소속 이일 변호사는 '난민 인권 문제'에 대처하는 일 또한 그러한 '개입'의 일환임을 강조했다. 이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권탄압은 "정부의 박해를 피해 한국사회를 찾아온 난민들에게서 익히 들어온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이란 정부를 규탄하는 동시에, (이란 시민 및 난민에 대한) 인권침해에 침묵하고 있는 한국정부를 함께 규탄한다"며 난민 문제 등 국제적인 인권침해 사안에 대해 침묵하는 일은 "이란 및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는 국가폭력의 동조자이거나 공범을 자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기자회견엔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불꽃페미액션, 국가폭력에저항하는아시아공동행동 등 총 41개 국내 인권·여성단체들이 연대의 뜻을 모았다. 이들은 "히잡 착용 등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 복장의 표현에 대한 통제, 국가폭력을 중단하라"며 △히잡 착용을 거부하고 국가폭력을 규탄하는 이란 현지 시위대에 대한 탄압 중단 △마흐샤 아미니 씨의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대책 마련 △무차별적 히잡 의무 착용 단속 중단 등을 이란 정부에 요구했다. 국내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를 담은 공동 항의 입장문을 이란 대사관 측에 전달하기도 했다.
문제의 히잡 거부 시위는 지난 달 13일 이란 북서부 쿠르드인 거주지 쿠르디스탄주 출신 여성 마흐샤 아미니 씨가 테헤란 시의 도덕경찰에 의해 연행됐다가 3일 만인 16일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불거졌다. 현지 경찰은 아미니 씨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 치료 중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영국 일간 <가디언>이 '아미니의 머리 CT 스캔 결과 골절, 출혈, 뇌부종이 발견됐다'고 보도하는 등 아미니 씨에 대한 타살 정황이 발견되면서 이란 현지에선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및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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