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명 중 1명 사망
피해구제법이 실행되어 그동안 피해자로 인정된 사례는 4350명이고 그중 사망자는 4명 중 1명꼴인 1066명입니다. 25%의 엄청난 사망률이죠. 전쟁이나 테러 혹은 비행기 추락이나 선박 침몰 사고가 아닌 평화 시에 발생한 사건 중에서 피해자 사망률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죠. 가습기살균제 사건을 왜 사회적 대참사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정사망자 1066명을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9세 이하가 189명으로 전체의 18%나 됩니다. 이는 60대 미만의 연령대에서 가장 높은 수치와 비율로 사망자 5명 중 1명이 9세 이하의 어린이와 영유아라는 이야기입니다. 끔찍한 일인데, 가습기살균제가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영유아와 어린이들에게 집중적으로 노출되었고 다수를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독성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2022년 7월 26일을 기준으로, 3284명의 생존한 피해인정자 중에서는 10~19세의 십대 청소년이 1221명으로 무려 37%나 됩니다. 10명 중 4명꼴이죠. 참사가 알려지고 가습기살균제의 제조판매가 금지된 지 11년이 지난 후의 일이므로 실제 이들이 살균제에 노출되고 아프기 시작한 때는 9세 이하의 영유아와 어린이 시기였습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11주기'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이 사건이 시작된 지 11년이 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계산하고 부르기 때문이죠. 올해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8주기였고 사건이 일어난 지 8년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경우 사건이 처음 시작된 때는 2011년이 아니고 그보다 17년이나 이전인 1994년입니다. 1994년에 지금의 SK케미칼(당시의 유공)이 '가습기메이트'란 이름의 가습기살균제를 처음으로 만들어 팔았습니다. 이후 17년 동안 약 50종류의 제품들이 2011년까지 1000만 개가 판매되었고 2011년 8월 31일에서야 처음으로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까 2022년 8월 31일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28주기'라고 해야 맞습니다. 2011년부터의 11년은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드러난 지 11년째'라고 해야 정확한 설명이죠. 노을공원 나무심기에 참석한 이장수 씨는 1995년 50일밖에 안된 딸 의영이를 잃었습니다. 서울역의 서쪽 출입구인 서부역 앞에 있는 소화아동병원에서 원인미상의 호흡부전으로 사망했는데 아빠는 의영이가 죽은 이유를 20년이 지난 뒤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가습기살균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전이라 의료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너무 어린아이여서 폐사진도 찍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의영이는 피해자 여부에 대한 판정이 불가한 상태입니다. 8월 31일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열린 피해자 유품전시행사에 참여한 의영이 엄마는 27년 전 의영이가 입었던 배냇저고리를 꺼내서 의영이 영정사진 앞에 놓았습니다. 의영이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최초의 어린이 영아사망 사례입니다.참사 발생 30년째인 2024년의 꿈
2년 뒤인 2024년은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시작된 지 30년이 됩니다. 참사가 처음 알려진 2011년부터는 13년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2024년 말까지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상당부분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18이나 4.3 혹은 6.25 때의 각종 학살사건과 같이 정치와 사상으로 인해 진상을 규명할 계기가 올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 정도 오랜 시간이 지났으면 문제가 해결되고 차분히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시간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2년 뒤에 우리가 그런 시간을 갖기 위해서 앞으로 2년 동안 어떻게 일이 진행되어야 할까요? 기업의 피해자 배보상, 법원판결, 정부책임규명, 재발방지 제도보완 등의 여러 분야에서 해결되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사건의 시간적 흐름과 중요도 등을 고려해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2023년 초, SK, 애경, 신세계 등이 피고로 진행중인 과실치사상 형사재판의 항소심 판결에서 피고들에게 유죄가 선고됩니다. 1심 무죄판결이 뒤집힌 것입니다. 2022년 8월 25일 바뀐 재판부를 상대로 무려 3시간여 동안 항소이유를 설명하며 1심 판결의 잘못을 조목조목 짚었고 공판전담 검사까지 배치하며 절치부심한 검찰이 피해자들을 대리한 변호사들와 합심해 항소심 재판에 전념한 결과입니다. 이후 대법원도 2심 결과를 인용해 최종적으로 피고기업들에게 유죄가 선고됩니다. 이는 그동안 꼬였던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계기가 됩니다. 피해자들이 제기한 민사소송, 환경산업기술원과 국민건강공단이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들도 형사재판결과에 따라 모두 기업들이 패소합니다. 둘째, 2023년 상반기, 항소심 형사재판 결과가 유죄로 나오자 기업들은 피해지원 조정안을 이행합니다. 형사재판에서 패소한 애경은 물론이고 옥시도 피해자들의 대규모 민사소송시도를 우려해 조정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피해자들과 전국의 환경시민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전개한 옥시애경 불매운동이 이룬 성과이기도 합니다.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시민사회가 옥시 즉 레킷벤키저에 대한 규탄운동을 전개하고 옥시코리아의 전 사장 거라브제인의 한국소환 수사를 압박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셋째, 2023년 하반기, 국회에서 두 가지 중요한 법안을 손질합니다. 하나는 모든 분사형 스프레이식 생활화학제품에 대한 흡입독성안전시험을 의무화한 것입니다. 제품안전법(생활화학제품 및 살생물제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이라는 기존법을 개정한 것입니다. 이전에는 스프레이식 제품의 성분만을 독성물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독성물질의 규정범위가 좁고 독성물질이 아니어도 여러 가지 화학재료를 섞어서 만든 생활화학제품의 경우 호흡기로 흡입되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컸습니다. 때문에 유사참사 예방에 큰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어 우려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개정된 법이 시행되는 2024년부터는 시장에 처음 출시되는 모든 스프레이제품들은 반드시 출시 전에 제품사용과정에서 노출되는 화학물질 흡입 시 독성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시험증명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아쉽지만 이미 시중에 출시된 제품들은 판매량과 흡입가능성에 따라서 일정 기간 내에 안전시험을 순서대로 거치도록 유예기간이 주어집니다. 따라서 향후 2~3년 내에는 한국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스프레이 제품은 소위 'No Safe Data, No Market'의 안전원칙이 실현됩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발생 30년이 되어서야 겨우 제대로 된 유사참사 재발방지 조치가 시행되는 겁니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죠. 넷째, 2023년 하반기, 국회가 손질하는 두 번째 법안은 바로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법'입니다. 2021년 나온 피해지원 조정안이 법적근거가 없어서 가해기업들이 일방적으로 거부하자 몇 년 동안 무력한 상태로 피해자들의 고통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피해지원 조정안 내용에 더해서 어린이와 청소년 피해자들에 대한 평생지원의 내용과 사망유족들에 대한 지원 등의 내용이 더해졌습니다. 이러한 피해지원내용은 100% 배보상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기업들에게 필요한 기금을 강제로 걷을 수 있는 법적근거를 바탕으로 이전처럼 기업들이 오리발을 내밀며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막게 됩니다. 피해지원조항 외에도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추가되었는데, 하나는 사망자를 추모하고 참사를 기록하고 널리 알리는 참사기록관을 세울 근거와 함께 정부와 기업이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찾도록 하는 조항입니다. 이러한 내용들도 사실 처음 구제법 만들 때부터 포함되었어야 했지만 세 번째 법 개정에 가서야 추가되었습니다. 다섯째, 2024년 상반기, 국회청문회가 열려 정부책임을 확인합니다. 환경부, 산업부,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청, 공정거래위원회와 소비자원, 기재부 등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책임이 있는 10여 개의 정부부처 책임자들과 실무국장들이 과거의 직무유기, 소극행정, 제도미비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와 국민들에게 사과합니다. 청문회 결과를 모아서 대통령이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담화문을 발표함으로써 정부책임에 대한 진상규명이 사회적 해결 방식으로 마무리됩니다. 정부책임자들에 형사책임을 물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 정부책임을 밝혀내고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는 데까지 꽤 힘들고 긴 과정이었습니다.여섯째, 2024년 상반기, 국회청문회에 이어서 전국규모의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찾기 행사가 진행됩니다. 정부가 주관하고 공영방송인 KBS가 생방송으로 중계합니다. 이산가족찾기와 같은 형식과 인구센서스 조사의 방식이 적용되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가가호호 방문면접조사와 제품구매기록을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한 달에 걸친 피해자 찾기 사업이 진행됩니다. 이 사업은 국제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보여서 외신의 보도가 이어집니다. 일곱 번째, 2024년 8월 31일 참사 30주기의 날, '가습기살균제 참사 희생자 추모식'이 정부공식행사로 개최됩니다. 사건이 시작된 지 30년째 사건이 알려진 지 13년 만의 일입니다. 이날 추모사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발표되었는데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국가적 재난', '가습기살균제 참사 국가기록관 착공', '참사의 교훈을 국제사회가 공유해 생활화학제품으로부터 안전한 지구촌을 만들기 위한 유엔환경협약 추진' 등입니다.답답한 현실
잠시 행복한 꿈을 꾸었나 봅니다. 이 글을 쓰는 2022년 9월 20일의 현실로 돌아옵니다. 지난 11년간의 가습기살균제 문제해결과정에서 어려운 때가 많았는데 지금도 답답한 시기입니다. 그동안 사건이 어떻게 흘러왔나 돌아봅니다. 1994년 첫 제품 출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 2001년 옥시RB 뉴가습기당번 본격 출시 그리고 이어진 대형할인마트 PB상품출시로 두 번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 2011년 참사가 수면 위로 드러나다 → 2016년 검찰수사, 옥시불매운동, 국정조사로 참사가 주요 사회의제화되다 → 2017년 대통령이 사과하고 피해구제법 시행으로 피해자지원 시작되다 → 2019년 8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청문회가 이틀간 생방송으로 중계되다 → 2021년 SK애경 등에 대한 형사재판 1심판결 무죄선고와 이어진 피해지원 조정안에 대한 옥시와 애경의 거부. 가습기살균제 문제해결을 위한 법적 기구인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참위)가 지난 6월 10일 3년 6개월의 조사활동을 마쳤고 9월 10일까지 3개월 동안 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9월초에 공개된 사참위 종합보고서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이러한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해 권고안을 제시한다'며 주요 권고 12가지를 담았습니다. 특별법에는 사참위의 권고에 대해 정부기관은 이행해야 하고 국회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치적 상황이 바뀌어서 보수적인 윤석열 정부가 권고사항을 제대로 이행할지 의문스럽습니다. 2020년 하반기 문재인 정부 때 특별법을 개정하면서 가습기살균제 진상규명 기능을 삭제해버렸던 민주당이 사참위의 권고를 귀담아 들을지도 의문입니다.가장 한국적인 사회현상
<기생충>에 이어 <오징어게임>이 미국의 주요 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도 벌써 여러 번 듣습니다. 한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이라고 하죠. 문화적으로만 그럴까요? 한국전쟁과 남북대치 그리고 DMZ는 가장 한국적인 정치외교상황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사회적 현상은 무엇일까요? 저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라고 봅니다. 20세기 말에 시작해 21세기 들어 30여 년 동안 계속되는 참사, 대한민국 국민 5명중 1명꼴인 1000만 명이 경험하고 무려 2만 명이 사망한 참사지만 피해자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영구미제사건', 경제선진국 대한민국의 어두운 그림자,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소비자 대학살 참극… 이 정도면 넷플릭스에서도 3부작 수십 편의 시리즈 드라마감 아닌가요? 한류에 환호하는 세계인들에게 익숙한 SK, 삼성, 롯데 등 한국기업들과 레킷벤키저, 테스코, 헨켈 등 유럽기업들이 연루된 '기업 드라마'로 충분히 관심을 끌 것입니다. 여기에 폐 손상과 폐 이식, 천식과 같은 질병을 다루는 '의학 드라마', 증거를 숨기고 발뺌하는 기업들과 이를 찾아내 책임을 추궁하는 검찰의 흥미진진한 '법정 드라마' 그리고 길거리에서 농성하는 '피해자 드라마'와 사건의 실체를 밝히려는 '사회운동 드라마'의 성격까지…. 이제 결말을 낼 때입니다. 대한민국에서 30년간 끌어온 이 참혹한 대참사를 끝내고 어떻게 매듭지을지는 대한민국 시민들의 손에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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