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어린 생명들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지난 2014년, 이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슴에 새겼던 다짐과 각오였다. 그 맹세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8년 전, 제대로 피지도 못한 어린 꽃봉오리들이 남쪽 바다 차가운 해파(海波) 속에 수장된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청춘의 꽃이 만개한 20~30대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가 서울 한복판 인파(人波) 속에서 스러져갔다. 어린 생명들의 죽음 앞에서 쏟았던 눈물과 통곡은 아무런 교훈도 남기지 않은 채 증발하고 젊은 주검들만 즐비하게 우리 곁에 남았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또다시 젊디젊은 청춘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풍경은 슬프고도 그로테스크하다. 이 나라에는 각종 깃발이 넘쳐난다. 새 정부 들어 깃발은 더욱 휘황찬란해졌고 가짓수도 많아졌다. 자유, 공정, 상식, 동행, 행복, 자율, 창의, 번영, 글로벌 중추…. 그러나 이런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이 지니는 무게와 가치는 이런 모든 구호를 압도한다. 살아 있어야 자유를 누리든, 창의력을 발휘하든, 행복과 번영을 누리든 할 것 아닌가. 생명이 소실되면 모든 것은 무화(無化)된다. 조금 전까지 웃고 떠들고, 연인과 밀어를 속삭이던 젊은이들이 순식간에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현실은 너무나 초현실적이다. 청춘의 고뇌와 환희, 기대와 불안, 사랑과 방황이 일거에 소멸되고 남은 그 텅빈 암흑과 적막…. 약동하는 삶의 환희를 만끽해야 할 젊은 청춘들의 갑작스러운 부재 앞에 국가가 내건 거룩한 언어들은 이태원 골목길에 뒹구는 낙엽처럼 허무하다. 국민의 생명 보호가 제1의 임무인 국가는 그 책임 완수에 철저히 실패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번 참사의 명칭을 '이태원 사고'로 통일하고 '피해자' 대신 '사망자'로 쓰자고 말한다. '참사'와 '사고'는 확연히 다른 말이다. '참사'는 통상적인 사고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사고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참사에는 억울함, 슬픔, 황당함, 처참함, 원통함 등이 깃들어 있다. 정부가 '참사-희생자' 대신 '사고-사망자'라는 표현을 기를 쓰고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이런 어이없는 죽음이 과연 발생했을까? 정부는 '객관성과 중립성'을 내세우지만 '사고-사망자' 표현이야말로 객관을 가장한 왜곡이고 물타기다. 하기야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 '해상교통사고'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룬 정권이니 '이태원 사고' 정도가 아니라 '핼러윈 사고'로 부르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을 것이다. 이 정부의 머릿속에는 이번 참사를 '핼러윈 축제를 하러 몰려든 철없는 젊은이들의 탓'으로 여기는 인식도 잠복해 있는 듯하다. 실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서양 축제인 핼러윈에 왜 한국의 젊은이들이 난리법석이냐"는 마뜩찮은 시선도 있다. 그런데 축제나 행사의 '원적지'를 따져 사고와 참사를 구분하고, 희생자 책임의 무게를 재려는 사고는 과연 정상적인가? 1960년 1월26일 밤, 설을 앞두고 고향에 가는 귀성객들로 북새통을 이룬 서울역에서 31명이 깔려 숨지고 40여명이 다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민족 고유 명절 설' 때문에 일어난 참사든 '외국 축제 핼러윈' 때문에 일어난 참사든 본질은 결국 같다. 중요한 사실은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후진적 안전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당국의 '책임불감증'은 그때보다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는 점이다. "경찰·소방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망언'은 책임불감증의 정점을 이룬다. 이 발언으로 국민 분노의 화약고가 터지고, 시민의 잇따른 112 신고 전화에 경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정황까지 쏟아지자 정부는 허겁지겁 '일선 경찰 책임묻기'에 나섰다. 서울용산경찰서장을 대기발령 조처하고, 서울경찰청과 용산경찰서 등 8곳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이는 등 갑자기 방향을 '유턴'했다. 그런데 이번 참사가 애꿎은 일선 경찰서나 파출소 경찰관들한테만 책임을 묻고 이들을 희생양 삼아 어물쩍 넘어갈 사안인가? 불가하다! 사실 이태원 핼러윈 축제는 용산경찰서가 매년 치르는 업무 중 중요도 1순위 행사였다. 경찰서장이 늘 직접 현장에 나가 지휘했다. 코로나 사태 와중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참사 당일 용산경찰서장이 나간 현장은 이태원이 아니라 용산 대통령실 부근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퇴진 촉구대회'였다. 경찰의 관심 우선순위가 '시민 안전'이 아니라 '정권 안전'에 쏠려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단지 용산경찰서만이 아니다. 경찰청장, 서울경찰청장 등은 참사가 일어난 뒤 한참 뒤, 그것도 소방청 라인을 통해 보고를 받은 대통령실보다도 늦게 상황을 접수했다. 경찰 수뇌부의 관심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과만 보고 따지자면 대통령실 용산 이전과 이태원 참사는 가느다란 선으로 연결돼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 정부는 행정안전부 안에 경찰국을 신설하는 등 외청으로 독립해 있는 경찰청에 대한 행안부 장관의 통제권을 대폭 강화했다. 그런데 그것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경찰을 권력에 예속시켜 입맛대로 휘두르고 '시국치안'을 강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시민의 '안전치안' 능력 강화는 관심사 밖이었음이 이번 참사로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이상민 장관의 발언은 단지 '사후 책임회피'만이 아니라 국민 안전 문제에 대한 평소 태만한 인식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권 상층부의 기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풍항계에 따라 움직이는 경찰수뇌부의 속성상 이미 이태원 참사는 예고됐던 셈이다. 이태원 참사로 대한민국은 '나쁜 의미'에서 '글로벌 관심 국가'가 됐다. K-팝, K-방역 등 K로 시작되는 모든 단어가 우리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지만 'K-치안'이라는 용어가 생긴다면 정반대가 될 것이다. 이번 참사로 외국인이 26명이나 숨졌다. 글로벌 시대에 글로벌한 참사가 일어났는데 한국의 행안부 장관은 '내수용' 엉뚱한 발언을 했다. 한국 정부가 책임이 없다고 말하니 자국민을 잃은 해당 국가들은 어떻게 느끼겠는가?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단순히 '조롱거리' 차원이 아니라 '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바이든 발언'도 그렇지만 대한민국 국격과 국익의 훼손, 외교적 갈등에 앞장서고 있는 이들은 다름 아닌 정권 권력자들이다. Ⅱ. 이태원 참사와 세월호 참사의 유사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일고 있다. 두 참사가 전혀 별개의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공백' 등과 달리 이번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곧바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는 등 기민히 대응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든다. 그러면서 "두 사건을 무리하게 엮으려는 것은 억지 정치공세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이런 주장대로 두 참사는 전혀 다른 성격일까. 두 참사에서 모두 국가는 없었다. 국가 시스템의 총체적 마비라는 점에서 두 사건은 정확히 겹친다. 국민의 대규모 죽음이 '제1참사'라면 정부의 책임 회피, 적반하장의 태도는 '제2참사'의 시발점이다. 돌이켜보면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정권이 서서히 무너져내린 것은 단지 박 대통령의 7시간 공백이나, 참사 초기 청와대의 컨트롤타워 기능 부족 때문만이 아니다. 박 대통령의 책임의식 부재, 사태에 임하는 진정성의 부족, 과도한 방어적인 태도는 사태를 더욱 비극으로 몰고 갔다. 당시 정부여당은 세월호 진상규명 요구를 정권을 흔들려는 기도로 매도했고, 국민의 끝없는 슬픔과 분노는 나라의 안보와 경제를 해치는 퇴행적 행태로 비판했다. 불행히도 이 정권은 그 행로를 정확히 답습하고 있다. 수많은 국민이 억울한 비극적 죽음을 당했는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아직 사과할 기미가 없다. 정부여당 사람들은 "추모만 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시민 안전 정보' 업무에는 손을 놓고 있던 경찰은 시민사회 동향까지 염탐하며 이번 사태의 정치적 파장을 예측하는 등 '정권 안보 정보' 수집·분석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인색한 눈물'도 두 사건에서 나타난 권력자들의 유사점이다. 눈물을 흘렸느냐 아니냐가 진정성의 척도는 아니지만 심리상태의 일단을 엿보게 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도 눈물에 인색했다. 참사가 일어난 지 34일만에야 대국민담화 발표를 했고 그때 얼핏 눈물을 비쳤으나 그 액체는 곧바로 말라서 증발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싸늘하게 등을 돌려버렸다. 이번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부인 김건희 여사도 역시 눈물에는 인색하다. 그는 '남편의 영달'과 '본인의 무탈'을 위해 무속까지 동원해 지극정성으로 빌어온 게 분명하지만 과연 한 번이라도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빌어본 적이 있을까. 한술 더 떠서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태원 참사 관련 외신기자회견 도중 웃고 농담을 할 정도였으니 이 정권 사람들의 진정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부질없어 보인다. 세월호 때 박근혜 정부는 해경을 해체했다. 그러나 사회는 더 안전해지지도 않았고 대한민국은 한 걸음도 더 전진하지 않았다. 균형감을 잃고 무리하게 항해하던 권력의 선체는 조금씩 침몰해갔다. 윤석열 대통령은 과연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가. 이번 사건의 해법으로 경찰청 해체라도 내놓을 텐가. 최고권력자의 치열한 자기 성찰과 반성, 진정성이 없이는 어떤 해법과 처방을 내놓아도 백약이 무효임을 역사는 웅변한다. Ⅲ. 10월30일부터 11월5일까지는 정부가 선포한 '국가 애도 기간'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부는 오늘(10월30일)부터 사고 수습이 일단락될 때까지 국가 애도 기간으로 정하고, 국정 최우선 순위를 사고 수습과 후속 조치에 두겠다"고 밝혔다. 이 말은 곱씹어볼수록 의문이 피어오른다. 윤 대통령이 말한 '사고 수습 일단락'의 의미는 무엇인가. 156명이 떼죽음을 당한 대형 참사를 일주일만에 수습해 매듭짓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게다가 국민의힘 사람들은 "지금은 애도할 때이지 진상규명이니 책임 문제를 말할 때가 아니다"고 앞을 다투어 말한다. '닥치고 애도'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태가 수습될 것이며 무슨 후속 조처가 나올 수 있다는 걸까. 애도는 단지 희생자의 영정에 꽃을 받치고 묵념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애도의 의미를 그런 협소한 울타리 안에 가두어서도 안 된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에서 사랑하는 누군가 죽어서 우리 곁을 떠나면 그와의 감정적 고리를 끊음으로써 그에게 투자했던 심리적 에너지(리비도)를 회수해 다른 사람에게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애도 이론을 펼친 프로이트도 아들을 잃은 친구 루드비히 빈방거를 위로하는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러한 상실 이후에 애도의 극심한 상태가 진정되리라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우리가 위로할 길 없는 상태로 있을 것이며 죽은 이를 대체할 사람을 결코 찾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지요. 무엇이 그 틈을 메꾸든, 설령 그 틈이 완전히 메워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뭔가 다른 것으로 남아 있어요. 실제로 그래야 해요. 그것은 우리가 버리고 싶지 않은 사랑을 영속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어떤 방식으로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치유되지 않고 "위로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다. 정신과 의사인 프로이트 애도 이론의 방점은 '성공적인 애도'가 아니라 오히려 '우울증'에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친구 폴 드 만이 죽은 뒤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얘기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와 같이 얘기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 그에 관해 이야기한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죽은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죽은 사람이 말을 하기를 바란다니! 한 연구논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설명한다. 데리다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죽었으니까 더욱 그와의 약속들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약속이란 그것을 약속하는 첫 순간부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몰라도, 죽음을 넘어서까지 약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약속에 응답하거나 그 약속을 위해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조차, 우리 안에 있는 죽은 타자를, 첫 순간부터 관련시킨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모든 것이 종료되는 시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사람과의 약속을, 죽음을 넘어서까지 지키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는 시점으로 보고자 했던 것이다. (왕철,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애도 이론 – "나는 애도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이번 참사로 숨진 젊은이들에게 우리 국가와 사회가 했던 약속은 무엇이었는가. 희생자 대부분은 어릴 적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온 세대다. 국가와 사회는 분명히 약속했다. "안전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은 결코 없게 해주겠다." 그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모든 것의 종료 시점이 아니라 그 사람과의 약속을, 죽음을 넘어서까지 이행하는 시점으로 본 데리다의 말에 대입해보면 과연 우리의 애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애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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