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난 9월 미국 순방 중 불거진 '비속어' 논란에 대해 대통령실이 내놓았던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발뺌은 궁지에 몰린 정치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지만 이번 경우는 특이하다. '증거'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본인이 직접 들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인데 '기억 부재'란 엉뚱한 해명을 내놓았다. 한술 더 떠서 윤 대통령은 '선택적 기억'과 '선택적 기억상실'의 신묘한 머리구조까지 선보였다. 몇 개 단어로 이뤄진 짧은 문장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겨냥한 얘기는 한 적이 없다"고 기억하면서 "'이 XX들' 얘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윤 대통령의 말은 일정 부분 진실일 수 있다. 사람은 너무 일상화된 행위에 대해서는 특별히 기억하지 못한다. 평소 된장국을 즐겨 먹는 사람이 어느 날 식사에서 자신이 된장국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별식'이라면 몰라도 만날 지겹게 먹는 음식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윤 대통령에게 ' XX들'은 '별식'이 아니다. 그러니 비속어 사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윤 대통령의 주장은 딱히 거짓말이 아닐 수 있다. 김은혜 대통령실 홍보수석이 '이 XX들'은 한국의 야당을 지칭한 것이라고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김 수석의 주장은 '바이든' 부분을 빠져나오기 위한 '해명 아닌 해명'이지만 최소한 비속어 사용만큼은 시인했다. 녹화된 영상의 발음이 너무 정확한 탓도 있지만 바이든 발언에 대해 우긴 것처럼 "대통령은 그런 비속어를 사용할 분이 아니고 그럴 이유도 전혀 없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김 수석은 자신의 '보스'가 '평소 비속어를 많이 사용하는 분'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김 수석의 해명을 통해 우리는 윤 대통령이 "야당 XX들'을 입에 달고 지낸다는 사실을 역으로 추론할 수 있다. 언어 습관은 인식의 거울이자 행동의 모태다. 국가 최고지도자의 비속어 사용이 위험한 이유다. 백성을 하늘로 여기지는(以民爲天) 못할망정 국민을 욕하며 함부로 대할 때 어떻게 국가가 순탄하게 굴러갈 수 있겠는가. 야당을 비속어의 대상으로 삼을 때 협치를 통한 원활한 국정운영은 물건너간다. 언론사를 비속어 대상으로 삼으면 언론 자유는 질식한다. 대통령실이 윤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서 문화방송 기자들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것도 윤 대통령이 "MBC XX들"이라며 '격노'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적반하장이라고 한다. 대통령실이 저지른 '반헌법적 폭거'의 무도함과 부당성에 대해서는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다만 궁금한 게 있다. 윤 대통령이 이번에 바이든 대통령을 만났을 때 비속어 논란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저는 결코 대통령님 비하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믿어주십시오. MBC라는 나쁜 방송사가 사실을 왜곡해서 벌어진 소동일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MBC 기자들은 전용기에 태우지 않는 방식으로 혼을 내주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할 용기는 없었겠지만 미국 쪽에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바이든 폄하' 발언의 실체를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바이든 대통령일 수 있다. 남이 하는 말 가운데 자기 이름이 튀어나오면 본인이 가장 잘 알아듣는 법이다. 외국어로 해도 마찬가지다.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들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한국어 능통자는 미국 정부에도 많으니 백악관은 이미 윤 대통령 발언의 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겠지만 속으로는 '나는 다 알고 있어'라고 냉소를 흘리지 않았을까. 미국은 자기네 수정헌법 제1조(언론·출판, 표현의 자유)를 어떤 가치보다도 숭앙하는 나라다. 그러니 '언론을 탄압하는 한국 대통령'을 바이든 대통령은 어떻게 바라볼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을 보니 내가 정말 싫어하는 트럼프가 생각나는군. 앞뒤 안 맞는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뉴욕타임스> <CNN> 등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에 대한 비상식적 태도도 비슷하고….' <1984년> <동물농장> 등으로 친숙한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을 돌아보며' 등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총통이 이러이러한 사건에 대해 "절대로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다, 절대로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그가 2 더하기 2가 5라고 말한다면, 그렇다. 2 더하기 2는 5다.' '히틀러는 유대인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도 있으며, 그자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이 공식 역사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만일 대통령이 비속어 사건에 대해 "절대로 일어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다, 절대로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비속어 사건은 MBC가 만든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공식 역사가 될 것이다.' 대통령실과 국민의 힘은 온갖 궤변을 짜내 윤 대통령의 억지를 뒷받침하느라 바쁘다. 화를 내는 윤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보복책까지 짜냈다. 외국 언론들마저 '날리면'이 아니라 '바이든'이 맞다고 말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MBC 기자 전용기 탑승 배제라는 '2+2=5 산수'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외교는 결국 국내 정치의 연장이다. "내 외교 정책의 첫 번째 원칙은 국내 정치를 잘한다는 것"(윌리엄 글래드스톤 전 영국 총리)이라고 선언한 정치지도자도 있을 만큼 국가지도자의 '국내 정치 점수'는 외교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내 여론의 든든한 지지가 있어야 외교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어떤가. '인기 없는 대통령(unpopular leader)', '세계에서 가장 미움받는 지도자(world's the most-disliked leader)'. 외국 언론이 윤 대통령을 묘사할 때 앞에 붙이는 수식어다. 이제는 '언론 자유를 위협하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달게 됐다. 동남아 순방 기간 만나는 다른 나라 모든 지도자들이 윤 대통령의 이런 평판을 모를 리 없다. '글로벌 망신'이다. 외국 지도자들한테 은근히 손가락질을 받는 대통령이 외교 현장에서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윤 대통령이 이런 상황을 감지할 지적 능력과 감수성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는 데 있다. 나라의 품격은 점점 떨어지고, 역사는 뒷걸음치고, 한국에 대한 외국의 조롱은 늘어만 가는 현실, 윤 대통령의 'XX정치'가 빚어낸 위험하고 안타까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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