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A씨는 사장으로부터 수차례 성희롱 발언을 듣고 상급자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오히려 "문제 만들지 말고 퇴사하라"는 말이었다. 피해 사실을 토로했다는 말조차 사장에게 알려졌다. 1년 넘는 기간 동안 따돌림과 퇴사 압박이 이어진 끝에 A씨는 결국 해고당했다. "단둘이 카페에 가자"는 사장의 요구를 거절한 뒤였다. A씨는 지난 9월 해당 피해를 직장갑질119 젠더폭력 신고센터에 알렸다. 직장 내 젠더폭력 끝에 일어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한 직후다. 신당역 사건을 계기로 '직장 젠더폭력 신고센터' 운영을 시작한 직장갑질119 측에는 지난 9월 21일부터 12월 20일까지 총 25건의 직장 내 젠더폭력 피해 신고가 접수됐다. 강압적 구애 사례가 8건으로 가장 많았고 성추행(6건), 외모 통제(5건), 악의적 추문(3건) 등이 뒤를 이었다. 21일 직장갑질119 젠더폭력 대응팀 발표에 따르면, 이러한 젠더폭력은 다시 2차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25건의 사례 중 A씨처럼 신고 후 괴롭힘이나 사측의 방관으로 2차 피해에 노출된 사례가 11건(44%)에 달했다. 신고 후 피해자가 회사나 상급자로부터 불리한 처우를 받게 된 경우가 7건이었다. 나머지 4건은 신고 후 사용자가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고평법)'이 규정하는 사용자의 의무를 위반한 경우였다. 앞서 9월 발생한 신당역 스토킹 살해사건에서도 이러한 2차 폭력 구조가 확인된 바 있다. 가해자 전주환의 불법촬영 등 1차 범죄가 사측의 미흡한 조치 속에 합의종용 및 협박, 지속적 스토킹,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다. 직장갑질119 측은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젠더폭력은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특성상 사용자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면서도 "그러나 제보된 사례에 따르면 직장에서 젠더폭력을 당해 이를 사용자에게 신고한 노동자들은 이후 퇴사 강요 등 또 다른 괴롭힘의 피해자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경향성이 사내 성폭력 대응 시스템에 대한 노동자들의 회의로 이어진다. 같은 단체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지난 10월 14일부터 21일까지 전국 만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귀사가 직장 내 성범죄로부터 (노동자를) 잘 보호하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비율이 51.5%로 과반을 넘었다. 응답 경향엔 젠더폭력 취약성에 따른 계층별 특성이 그대로 반영됐다. 여성(63%)이 남성(42.8%)보다, 비정규직(59.3%)이 정규직(46.3%)보다 회사의 성범죄 보호 시스템에 부정적이었다.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분류된 비정규직 여성의 경우 10명 중 7명(69.2%)이 회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직장갑질119는 젠더폭력 이후의 2차 폭력이 "고평법에 의해 명백히 금지되고 있음에도 실제 사업장에서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며, 이러한 경향성이 결국 "다른 피해자의 신고를 막는 효과"로 이어져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젠더폭력을 '산업재해'의 하나로 인식하고 "다양한 젠더폭력의 특성에 따른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장 내 젠더폭력을 '동료 간의 개인적인 사건'이 아닌 업무 환경에 의한 '구조적인 폭력'으로 인식함으로써 젠더폭력 예방에 대한 사용자 및 정부·기관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관련기사 ☞ 신당역 사건은 '젠더산업재해'…"여자라서 죽었고, 일터에서 죽었다")
지난 9월 26일 열린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대책 마련 기자회견에 참여한 박은희 민주노총 여성위원장은 현행 고평법 등이 "법률적 용어를 넘어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는 (성적) 가해행위"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며 "(젠더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거나 접근"하는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박은하 직장갑질119 소속 노무사는 "노동자 보호 의무가 있는 사용자와 정부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며 "사업장 내 조직문화를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성희롱 예방교육 등 법정의무교육을 이수하여 폭력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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