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관통하는 문구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온라인에서 봤습니다. 지금 저희 유가족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 많은 시민 여러분들이 저희와 같은 곳에 서주신다면, 유가족들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함께해 주세요."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故) 이주영 씨 오빠 이진우 씨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딛고, 절대 꺾이지 않기로 했다.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 모인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의 다짐이다. 30일 오후 7시께,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 모인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은 대통령집무실을 건너편에 두고 촛불을 밝혔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공동 주최한 이번 추모제는 지난 16일에 이은 두 번째 시민추모제다.
"민석아!"
무대 위 화면에 고(故) 최민석 씨의 이름과 사진이 스치자 한 유가족이 쓰러져 오열하기 시작했다. 옆자리의 여성이 말없이 그를 부둥켜안았다. 그 또한 붉은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유가족이었다. 희생자들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새 62일, 서로의 "곁을 지켜내기 위해" 유가족들은 모이고, 안고, 손을 잡았다.
더 빨리 모였다면 슬픔과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졌을까. 한 데 모인 유족들은 10월 29일 참사 당일로부터 겪은 외로움을 토로해냈다. 12시간이 넘도록 가족의 행방을 찾아 뛰어다닌 그 시간 동안 그들에게 "국가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종철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정부가 진심으로 사과 후, 유가족들을 모아 서로 소통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공간과 추모관을 미리부터 제공"해줬어야 했다며 "유족들은 10월 29일 이후 정부로부터 철저히 버려졌다"고 회상했다. 방치 속에 "죽을 것 같은 시간"을 보낸 유족들은 '더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기관증인들이 허위·회피성 답변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도 이유 중 하나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지난 27일 국정조사특별위원회 기관보고 당시 "행정안전부엔 유족 명단 자체가 없다"고 말했지만, 이후 29일 2차 기관보고에선 김상한 서울시 복지정책실장이 "장례식장에서 사망자 신원과 유가족 연락처를 정리하고 사망자 현황 자료를 정리해 행안부에 자료를 공유했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무대에 오른 한 유가족은 "이럴 거면 왜 국정조사를 하느냐"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희생자 이주영 씨의 오빠 이진우 씨도 "수많은 기관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모른다고 거짓말만 하고 있다"라며 국정조사에 "무력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지난 27일 국회에서 열린 국조특위 1차 기관보고 당시 유족들은 "국정조사를 단순히 형식적인 절차로서 안일하게 대처하지 말고 진실규명을 위해 성실하게 나서달라"고 호소했지만 29일 열린 2차 기관보고에서도 피감기관 및 여당 측 위원들의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유족들이 가장 강력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2020년 경찰청 문건에 등장한 압사 위험 대비 계획이 왜 2022년에는 사라졌는지'에 대한 사항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유족들은 "절대 꺾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난 가족들을 위해서다. 유가족협의회 측 이종철 대표와 이정민 부대표를 비롯해 이날 발언대에 오른 7명의 유족들은 모두 "명확한 진상을 알고 책임자가 처벌 받는 걸 볼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입을 모았다.
"책임지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지 않아서, 돌아가신 언니오빠들의 부모님들이 아주 힘들어하고 있어. … 우리 엄마와 같은 유가족들에게 용기와 힘을 내라고 내가 기도할게, 언니, 내가 많이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해."-희생자 고(故) 조한나 씨의 동생 조서희 씨 "유족의 누구나가 이렇게 (정부에게) 바랄 겁니다. 하나, 사실 규명을 공개하라. 둘, 행정당국 관계자를 처벌하라. 셋. 희생자 죽음에 행정당국은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라, 희생자의 유가족과 국민에게 정식으로 진상을 밝히고 사과하라. 사과하라. 사과하라."-희생자 고(故) 정주희 씨의 아버지 정해문 씨 "저희에게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은 없어졌습니다. 10월 29일 이후,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명확한 진상을 알고 책임자가 처벌 받는 걸 봐야합니다. 올해를 관통하는 문구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을 온라인에서 봤습니다. 지금 저희 유가족의 상황이 그렇습니다."-희생자 고(故) 이주영 씨 오빠 이진우 씨
이날 현장엔 수많은 시민들이 유족들에게 "곁을 내어주고자" 함께 모였다. 2018년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고(故)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는 "저의 경험으론 유족들에게 지금 가장 위로가 되는 길은 많은 연대로 유족들의 곁을 지켜주는 것"이라며 시민들에게 "유족들과 함께해 달라"고 요청했다. 참사 당일의 현장을 인근에서 목격한 이태원 상인 김현경 씨는 이태원 광장 분향소를 대상으로 한 일부 보수단체의 비난을 가리켜 "저는 괜찮다"고 단언했다. 이날 오후 이태원 광장에 마련된 희생자 분향소에선 일부 분향소 설치에 반대하는 이태원 상인을 앞세운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분향소를 철거하라"며 소요를 일으켰다. 김 씨는 "우리 상인들이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당신들(유족들)만 하겠나" 되물으며 "분노는 유가족이 아니라 이리저리 내빼는 진짜 책임자들을 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참사 당일, 그의 아들 둘도 이태원에 갔다. "아직 무대에 오를 용기가 없다"며 편지를 보내온 이도 있었다. 참사 희생자의 친구 신홍누리 씨는 현장에서 대독된 편지에 "(희생자들의) 곁에 있는 많은 분들이 잘 지내길 바랍니다. 무력감이 찾아올 때도 있겠지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마음을 적었다. 추모제는 대통령실을 향한 구호를 끝으로 마무리 됐다. "대통령은 사과하라, 진실을 규명하라, 책임자를 처벌하라, 2차 가해를 중단하라, 유가족 공간을 마련하라, 추모 공간을 마련하라" 지난 10월 29일 이후 언론을 통해 수없이 보도된 바 있는 유가족들의 요구사항이 2022년의 끝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반복됐다. 추모제 이후 별도의 공식 행진은 없었다. 다만 유가족들은 촛불을 들고 이태원 광장의 희생자 분향소까지 걸음을 옮겼다. 적지 않은 시민들이 한 번 더 분향코자 뒤를 따랐다. 못 다한 추모는 그들의 새로운 일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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