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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정답을 '가르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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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정답을 '가르칠' 수 없다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소수자 학생 배제 공언한 2022 개정 교육과정안
지난 달 22일, 2022년 개정 교육 과정이 확정 발표되었다. '성소수자', '섹슈얼리티', '재생산권' 등을 비롯하여 소수자들의 언어가 대거 삭제되고, '자유'를 강조하는 등 그 과정은 마치 진보와 보수가 '이념 전쟁'을 하는 것 같은 양상으로 수차례 보도되었다. 실제로 소수자와 인권 옹호의 언어들이 교육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은, 학교 교육이 적극적으로 소수자 학생을 배제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많은 인권단체들에서 문제 제기했듯, 이번 국가 교육 과정은 차별적이고 반인권적이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우리는 어떤 단어가 들어가고 어떤 단어가 빠졌다는 것 이전의 문제를 살펴야 한다. 교육의 내용을 가지고 보수와 진보가 싸운다는 것은, 그 두 진영 중 어느 쪽인가가 주도권을 갖고 '단일한' 방향의 교육 과정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교육 과정에 문장과 단어 단위의 구체적 가이드라인이 있고 이를 전국의 학교가 따라야 한다는 세팅은 과연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타당한 방식일까? 교육권은 국민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이다. 교육권은 교육기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 교육의 내용이 어떠한지 또한 권리의 중요한 부분이다. 교육은 단지 인류가 이미 검증한 사실과 지식만을 정답 위주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재 사회의 모습,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의, 움직임, 변화를 함께 담고 있고, 교육받는 이 또한 그 사회의 구성원이므로 그 안에서 자신의 의견을 확립하게 되는 것이다. 교육 과정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육 과정에서 이러한 내용을 삭제하고 전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교육권의 침해이다.

교육은 정답을 '가르칠' 수 없다

한국의 교육은 전반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접하고, 이를 가지고 토론하고, 자기의 결론을 도출하고 연마해 나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과서와 교사가 하는 말이 '정답'이며 학생은 이에 쉽게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문을 던지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평가의 권한이 교사에게 있고 청소년이 비청소년(어른)보다 낮은 존재, 아랫 사람 취급받는 문화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교육이 교사 개개인의 사상에 크게 좌우되어 교사가 학생을 세뇌할 수 있다는 우려와 공포는 여기에서 나온다. 때문에 국가가 교육 과정에서 세밀하게 조정한 한 가지 톤의 내용만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교육이 정치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이유이지만, 애초에 전혀 정치적 지향이나 성질이 담기지 않았다는 의미에서의 중립이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번 논란에서 드러나듯이 그 결과 도출된 교육 과정은 전혀 정치 중립적이지 않다. 그저 친정부적일 뿐이다. 정권 친화적으로 만드느라 국제적으로 인류가 보장하고 옹호해야 한다고 합의한 보편적 인권의 내용조차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은 이번 교육 과정은, 마치 지구가 평평하고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 교과서를 보는 기분이다. 그렇다면,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더 인권적인 내용을 담아 교육 과정을 만들면 되는 일일까? 다음 정부, 다다음 정부에 교육 과정을 바꾸면 해결되는 문제일까? 이번 교육 과정에서 성소수자, 섹슈얼리티, 노동 등의 단어가 빠지거나 교체되고,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결과물을 도출한 과정에서도, 전 정권에서 '민주시민교육'을 강조하던 맥락에서도 한결 같이 전제된 주장이 있다. '학교/공교육에서 이러이러한 내용을 가르치면 학생들이 자라서 저러저러해질 것이다'라는 도식이다. 하지만 사실 교육의 과정은 A를 집어넣으면 B가 도출되는 식으로 단순하지 않다. 청소년은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정보를 얻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받아들이거나 비판하거나 의문을 제기한다.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반대하는 주요 주장에 등장하는, '공교육/어른/교사/부모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게 맞다고 시키는 대로 동의하는 청소년'은 허구이다(실제 수업 현장에서 즉각적 반박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이지, 학생들이 내용에 수긍하기 때문이 아니다). 특히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아니라 인문/사회적 지식이나 주장, 정보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또한, 교과서 안의 내용이 아무리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해도, 100% 인권적이고 소수자를 옹호하는 개인을 '완성'시킬 것이라 믿는 것, 반드시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 기대하는 것 또한 잘못일 것이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고 소수자 차별적인 학교의 풍경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험의 정답을 위해 공부하는 교과서 내용과 현실의 삶은 점점 더 괴리될 것이다. 교육 과정에서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서술하더라도, 현재 사회에서 소수자는 차별받고 있고, 힘 센 사람들의 목소리는 더 쉽게 더 많이 접할 수 있으며, 교육 제도와 사회는 경쟁적이고, 학생들은 생존 경쟁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의 태도나 사고하는 방식은 교과서의 내용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사회의 내용을 함께 채우는 동료 존재인 학생으로

교육에 전혀 방향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어떤 시각이 절대적이라는 결론을 전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여러 시각에서 여러 논의가 있고, 이런 목소리와 저런 목소리가 있다는 것들을 평면적이지 않게, 맥락을 살려 소개하고, 바람직한 가치와 방향을 함께 찾아가야 한다.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으로 학생들 자신의 의견을 점점 더 사회에 반영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어야 한다. 한국 교육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은 올해 출범한 국가교육위원회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중장기적 교육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는 협의체인 국가교육위원회의 위원 중 청소년의 자리는 없다. 학생 몫으로 배정된 2명의 위원은 모두 비청소년인 대학생이 임명되었다. 이는 청소년, 초·중·고 학생은 한국 사회의 교육 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라는 편견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사회가 소수자를 옹호하고 점점 더 인권적인 곳이 되기 위한 방법의 한 가지로 교육의 내용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논의는 '어떤 것을 가르칠 것인가?' 말고도 이 배움의 과정에서 '학생/청소년'을 어떤 위치로 대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학생을 단지 국가가 정해서 학교와 교사를 통해 내려보낸 교육 내용을 흡수하는 존재로 대상화한 상태라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해도 청소년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환대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교육 과정이 교육권을 보장하는 과정이 되기 위해선 그 안에 담기는 문장과 단어만이 아니라 학생들을 바라보는 관점과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26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송원초등학교에서 열린 신입생 예비소집에서 예비 초등학생이 엄마와 전시된 교과서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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