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에 대한 물음이 쏟아지는 나날이다. 인권보장을 외치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사이, 한편에선 그 목소리의 정당성을 두고 격론이 펼쳐진다. 갖은 물음에 답하기 위해 <프레시안>과 한국인권학회가 만났다. 인권은 사회적 화두인 동시에 연구와 학문의 대상이다. 학계가 쌓아온 '인권학' 연구를 사회적 화두로 다시 던진다. 사회학계 신진 김민성 박사가 글을 쓴다. 편집자 주.
나의 삶이 누군가의 기억이 된다는 것은 실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탄생을 기리고 세상과의 작별을 애통해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에게 매년 돌아오는 10월 30일은 조금 특별한데, 바로 필자가 태어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생일에는 즐거울 겨를도 없이, 일어나 눈을 뜨자마자 믿을 수 없는 참사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나의 생과 대비되는 허망한 죽음들 앞에서 그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어떤 재난이 사회적 참사인가
정부는 참사 직후 용산구를 재난안전법에 따른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피해자에 대한 장례비와 치료비 등을 제공했다. 이 모든 조치는 이 사건이 사회적 재난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동법은 '사회적 재난의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하고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사회엔 아직도 '행사'의 책임 소지를 두고 공방이 오가고 있다. 사회적 재난은 인간의 부주의나 고의로 인해 발생한 재난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폭우나 산사태로 인해 사람이 다쳤을 때, 사고 당시에는 자연의 무서움을 탓할 수 있겠지만 이후 사건 해결 과정에서 관계 당국의 부주의나 태만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면 이는 인재, 즉 사회적 재난이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2017년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2014년 세월호 참사와 같이 명백하게 인간의 부주의나 고의로 발생한 사건뿐만 아니라 2011년 우면산 산사태와 같이 외견 자연재해로 여겨지는 사건들도 사회적 재난으로 분류된다. 과거에 재난은 신의 영역으로 인지되었지만, 이제 재난은 인간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산업과 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력이 막강해짐에 따라, 전문가들은 기후붕괴와 같은 생태계의 변화도 인간이 초래한 재난이라 진단한다. 가령 2022년 파키스탄 국토의 1/3을 물속에 잠기게 만든 최악의 홍수, 2020년 4개월간 발생한 호주의 초대형 산불 역시 사회적 재난이라 할 수 있다. 이태원 참사가 인재였다는 증거 또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좁은 골목길에 불법증축이 이루어졌고, 사고 당일에는 인파 사고를 방지할 충분한 인력이 배치되지 않았다. 시민들의 안전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재난 관련 기관들의 명령체계에도 문제가 존재했다. 다시 말해 이태원 참사는 인간의 부주의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사회적 재난인 것이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위 사건들이 사회적 재난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걸까?"여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오." … 세 가지 부인 기제
'부인(denial)의 사회학'으로 저명한 인권사회학의 개척자 스탠리 코언의 말을 들어보자. (스탠리 코언 (2009).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 조효제 옮김. 창비) 그에 따르면 개인 차원의 부인은 어쩌면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순기능일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위협에 직면한 사회 전체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코언은 사회에 존재하는 부인 기제를 ‘어떤 것을 부인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우선 엄연한 사실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거나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문자적(literal) 부인이 존재한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의 현장조사에서 "저는 그날 이태원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태도에서 이러한 부인 기제가 잘 나타난다. 문자적 부인은 고의적 거짓 여부와 상관없이 사실을 시인하려 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둘째,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사건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해석적(interpretive) 부인이 있다. 한 극우단체는 이태원 광장에 설치된 시민분향소 앞에서 '유가족과 시민대책회의가 정치적 목적으로 야당과 손을 잡았다'고 단정하며 희생자들에게 폭언을 일삼았다. 바로 이 같은 태도에서 해석적 부인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외부세력과 결합한다면 더 이상 선량한 피해자로 볼 수 없다'는 논리를 취했다. 해석적 부인을 하는 이들은 전문용어를 쓰거나 프레임을 만들어 사건의 성격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셋째, 사실이나 통상적 해석은 받아들이되, 사건에 따라오는 심리적·정치적·도덕적 함의를 부정하거나 축소하는 함축적(implicatory) 부인이 존재한다. 피해자들에게 치료 또는 장례비용이 이미 지급되었고 어느 정도 보상이 되었으니 '현 상황에서는 책임자 파면과 처벌보다 진상규명이 우선이다'라고 주장하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 해당되는 이들은 참사 자체는 인정하지만 참사를 시급히 조처해야 할 도덕적인 사건으로 여기지 않거나, 참사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공감하기를 꺼린다. 함축적 부인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사건의 함의에 침묵하는 태도로 진화한다. 사건 해결에 대한 의지와 당사자의 직접적인 참여가 있어야 가능한 지휘부 수사 및 책임자 처벌보다, 피해자 참여 없이 피상적인 진상규명만을 우선시하는 정치권 및 사고 책임자들의 태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각각의 부인은 사건에 대한 사회심리적 상태에서 기인한다. 문자적 부인은 무지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고, 스스로 도저히 진실을 인정하기 힘겨울 때도 발생할 수 있다. 해석적 부인은 어떤 사실이나 사건 자체를 정말 이해하지 못한 결과일 수 있고, 도덕적·법적 책임을 회피 또는 이용하기 위한 행위에서도 초래될 수 있다. 함축적 부인은 정치적·도덕적·심리적 불안을 덜기 위한 계산적 행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재난 상황에서 지켜져야 할 열 가지 인권 원칙
부인의 기제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재난에 대한 정부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재난은 발생 그 자체로 인권의 상실을 초래한다. 따라서 모든 재난 대응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해야 함은 물론, 그 전 국면에서 인간 존엄과 인권 보호가 중시되어야 한다. 재난 상황은 질병, 경제적 곤궁, 나아가 불처벌, 피해자 비난 문화 등으로 전이될 수 있기에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인권적 제도와 절차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즉 ‘인권에 기반한 접근'은 공감과 시인을 바탕으로 한 인도적 재난 대응의 핵심이 된다.재난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연구를 수행해온 사회학자 유해정은 재난상황에서 지켜져야 할 10가지 인권 원칙을 제시한다. (유해정(2020) <재난 피해자들의 인권침해 경험연구>. 민주주의와 인권, 20(2): 129-168.)
①신속하고 책임 있는 대피, 구조, 수습에 관한 권리, ②재난 시 필요한 지원을 받을 권리, ③재난 및 피해자와 연관된 모든 의사결정과 정보를 제공받고 진실을 알권리, ④재난 및 인권침해자에 대한 책임 묻기를 통해 정의를 실현할 권리, ⑤배・보상을 포함한 체계적 피해회복과 생애주기에 맞춘 치유에 관한 권리, ⑥기억과 추모의 권리, ⑦철저한 재발방지 및 안전에 관한 권리, ⑧공정하고 책임 있는 언론을 만날 권리, ⑨이 모든 과정에 의미 있게 참여하고 협의하면서 ⑩차별 없이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받을 권리가 그것이다. 주목할 점은 모든 권리의 이행이 재난의 책무 주체인 국가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재난에 인권이 통합된다는 것은 안전 패러다임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피해자 권리에 대한 사회적 공감, 이를 바탕으로 한 피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 있는 태도는 재난 해결의 첫걸음이 된다.※ 본 연재에서는 한국인권학회·인권법학회에서 공동 발간하는 학술지 『인권연구』에 실린 시의성 높은 논문을 선정하여 소개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논문은 아래 링크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소개 논문> <다운로드 방법> 링크 클릭→(오른쪽) 클릭//journal.kci.go.kr/jhrs/archive/articleView?artiId=ART002913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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