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운동, 독일에 묻다] 지난 연재
☞ ① 열차·트램 운행 막은 독일 '전장연', 그들이 독일을 바꿨다
☞ ② 한국의 1년 장애인 예산, 독일 1개 도시에도 못 미친다
☞ ④ 장애인 구직자에겐 '취업 시련'을 겪을 권리조차 없나
☞ ⑤ 장애인에게도 '가고 싶은 학교에 갈 권리'가 있다
2021년 9월 독일 연방선거(총선)는 독일 내 8만 5천 명의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날이었다. 이들은 질병 또는 장애로 인한 신체적, 정신적 어려움으로 자신의 사무를 처리할 수 없어 법정후견인을 가진 '피성년후견인'들. 이날은 이들이 독일연방공화국 제정 이래 처음으로 연방선거에 참여한 날이다. 그보다 2년 앞선 2019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법정후견인이 있는 장애인'이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한 기존의 연방선거법(Bundeswahlgesetz)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제20대 연방선거부터 피성년후견인 장애인들도 법정후견인의 투표 보조 속에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투표소에 직접 가지 못하는 경우에도 사전 우편투표를 통해 거주하는 곳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피성년후견인이란 성년후견인 제도에 따라 '법원에서 선임한 후견인을 통해 의사결정을 지원 받는 성인'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지난 2018년부터 이들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의 제한이 법적으로 폐지됐다. 이후 지난 2020년에는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가 '피성년후견인도 선거권이 있다'는 취지의 유권해석을 내린 바 있다. 편집자.)
1956년부터 제한된 장애인 투표권, 2019년에 와서야 위헌 결정
독일연방공화국은 1956년 연방선거법을 제정하면서부터 법령 제13조와 제14조를 통해 '후견인의 보호를 받는 피후견인의 선거권'을 제한했다. 심신의 어려움으로 요양시설 또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의 선거권 또한 중지할 수 있게 했다. 1993년 통일된 독일이 다시 한 번 개정한 연방선거법도 이 조항을 유지해 일부 장애인의 투표권을 배제했다. 1992년 개정된 법정성년후견법(Betreuungsgesetz)에 따라 당시 법정후견인이 있는 약 40만 명의 장애인들은 통일된 독일의 첫 연방선거에서도 투표하지 못했다. 독일 최대 장애인 협회이자 주로 정신장애인(Menschen mit Geistiger Behinderung)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레벤스힐페(Lebenshilfe, 1958년 설립)는 일찍부터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Selbstbestimmung)'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알리는 노력을 해왔다. 이들은 1990년 협회 기본 프로그램에 자기결정권을 포함했으며, 1992년에는 협회 강령에 "정신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노력하고 자기 결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문구를 채택했다. 1994년 9월 뒤스부르크에서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의 길"이라는 주제로 열린 레벤스힐페 총회에는 장애인을 포함해 약 800여명이 참가했다. 총회에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 스스로 알고 있다(Ich weiß doch selbst, was ich will)"는 장애인 당사자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장애인과 장애인단체를 중심으로 자기결정권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연방선거를 비롯해 지자체 선거를 두고 '법정후견인이 있다는 이유로 투표권에서 배제되는 것은 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장애인단체 뿐만 아니라 후견제도를 담당하는 판사들 중에서도 피성년후견인 장애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거 배제는 부당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개정된 후견법은 후견인으로 하여금 피후견인의 복리와 보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법률 업무'를 처리하도록 했는데, 이때 '후견인이 피후견인을 어디까지 지원할 것인가'는 법원의 판단에 따라 다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거관리위원회가 해당 장애인을 선거인 명부에 등재하고 투표용지를 발급해야 하며, 투표권을 행사할지의 여부는 장애인 당사자들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이야기했다. 필요한 경우 행정소송을 통해 투표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2006년엔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이 체결됐다. 이어 2008년 독일이 이 협약에 비준함에 따라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29조 "장애인의 투표권을 보장해 정치와 공적생활에 참여하도록" 하는 원칙이 구속력을 갖게 됐다.투표권을 넘어 '접근권'으로 … '쉬운 선거'를 위한 노력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29조를 이행하려는 노력은 몇몇 연방 주들에서 먼저 있었다. 2016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레주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는 독일 연방주로는 최초로 주선거법을 개정해 법정후견인이 있거나 정신병동에 수용되어 있는 장애인들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그 뒤로 독일 대부분의 주들은 지방선거와 주선거에서 그동안 선거참여에서 제외되었던 장애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이 투표에 원활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선거 내용을 전달하고 투표를 지원하는 체계가 마련되었다. 연방 주별로 통일된 원칙은 없었지만 해당 지자체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학습장애 및 정신장애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쉬운 언어로 만들어진 선거정보를 배포했다. 독일은 2002년 4월 장애인평등법(BGG)를 제정했다. 해당 법의 제11조는 "공공기관은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다. 1990년도부터 꾸준히 '학습장애가 있는 장애인들을 위해 쉬운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온, 멘쉬 주에어스트(Mensch zuerst - Netzwerk People First Deutschland. '사람 우선') 등 시민단체의 오랜 요구가 반영된 조치였다. 이들은 정치인들에게도 쉬운 언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각 정당들에게도 자신의 정책을 쉬운 언어로 유권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복잡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습·발달·정신장애인 뿐만 아니라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포용적 조치라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었다. 2009년 연방선거에서부터 자민당(FDP)을 제외한 주요 정당들은 △비교적 짧은 문장구조를 유지하고 △외국어 사용을 피하고 △명사형보다는 동사형으로 △수동태보다는 능동태로 △독일어의 복잡한 문법(1~4격, 가정법 등) 사용을 배제하는 등 '쉬운 언어'로 일부 선거공약집을 만들어 배포했다. 이들은 일반 언어로 만들어진 기존의 선거공약집을 멘쉬 주에어스트 단체에 의뢰해 쉬운 공약집으로 수정 제작했다(예. 2009년 독일 녹색당 쉬운 언어 선거공약집). 다만 비용적인 문제로 삽화를 포함하고, 정당에서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부 내용만 쉬운 언어로 설명하기도 했다. 2011년 베를린 시선거 당시엔 사민당, 좌파당, 녹색당이 각각 쉬운 언어로 된 선거공약집을 제공했다. 좌파당의 경우 8페이지짜리와 64페이지짜리 두 버전의 쉬운 언어 공약집을 발간했다. 이 공약집은 레벤스힐페 베를린 지부의 노바 교육프로그램(Nueva-Ausbildungsprogramm)의 일환으로 제작됐는데, 단체는 학습장애와 정신장애를 가진 수강생들과 함께 이 공약집을 만들었다(출처: Süddeutsche Zeitung). 그리고 피성년후견인 장애인들의 연방선거 투표권이 마침내 보장된 2021년 9월 연방선거가 찾아왔다. 이 선거에서 현 독일 의회를 대표하는 6개 정당은 장애인을 위한 선거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독일을위한대안당(AfD)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쉬운 언어로 선거공약집을 제공했다. 라인란트팔츠주 디츠(Diez)에 있는 한 레벤스힐페 지역 사무소에선 해당 선거를 앞두고 그동안 선거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던 지역 내 장애인과 함께 정치워크샵을 열었다. 이들은 쉬운 언어로 된 선거 정보와 각 정당에서 제공한 쉬운 언어 선거집 등을 함께 점검했다. 그동안 법정후견인이 있다는 이유로 연방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던 얀과 소피 남매도 이 자리에 참여했다. 남매는 "연방선거에 참여할 수 있어 기쁘며 기후변화를 멈추기 위해 꼭 투표를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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