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고착화
최근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음악을 관통하는 주제는 강력한 자의식이다. 무대 위 찬란하게 빛나는 나의 모습 (아이브, 'I AM'), 모든 금기를 거부하며 새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는 힘찬 포부 (르세라핌, 'Unforgiven'), 특별하다 못해 스스로에게 별 다섯 개를 부여하는 자긍심 (스트레이 키즈, '특')이 꿈틀거린다. 명품 앰버서더를 넘어 인간 명품 호칭을 장려하는 케이팝에 있어 치열한 생존경쟁과 살인적인 스케줄, 두려움은 극복해야 할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황홀한 우상과 성공의 단맛, 환상의 세계를 아우르는 세계관을 강조하는 케이팝은 셀러브리티의 음악이자 셀러브리티를 위한, 셀러브리티가 되고 싶은 이들을 위한 힘찬 구호와 행진을 목표로 한다. 케이팝은 대중의 공감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다. 해외 차트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고 수백만 장 단위의 앨범 판매고를 올리는 그룹이라도 그들의 팬이 아닌 이상 멤버 수가 몇 명이며 어떤 음악을 지향하는지를 꿰차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대중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인들의 유명한 노래라서, 그저 스트리밍 서비스의 차트 상위권에 올라 있어서 음악을 소비할 뿐이다. 한국의 시스템이 만든 한국의 가수인데도 정작 그들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왜 인기가 있는지 이해할 길이 없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음악이다. 회사는 더 큰 수익을 위해 소속 가수들의 활동 일정을 무리하게 기획한다. 1년에 앨범 한 장 발표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1년에 2번 이상의 컴백도 익숙한 시대가 됐다. 숨 가쁜 일정 가운데 진지한 토론과 새로운 도를 통해 기획자들의 독특한 개성을 주입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결과는 무한한 동어 반복과 고민 없는 레퍼런스지만, 팬덤이 만족하는 선은 유지하기에 매번 최고의 음반 판매량을 갱신한다. 대중은 유튜브 뮤직 상위권을 차지하는 팝과 제이팝에서 대안을 찾는다. 제작자의 확고한 방향 지시를 바탕으로 사소한 일상의 감정을 노래한 뉴진스, 스스로의 결함을 인정한 (여자)아이들, 팝 성향의 이지리스닝을 지향한 피프티피프티의 케이팝이 폭넓게 사랑받으며 롱런하는 이유를 돌아봐야 한다.팬덤의 고충
팬이 되기도 쉽지 않다. 과거처럼 가수를 응원하고 그들의 음악을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팬으로 인정받는 게 아니다. 원한다면 버블 같은 유료 서비스에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가수와 개인적인 메시지를 나누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이돌 그룹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매년 소속사가 공식 모집하는 팬클럽에 가입비를 내고 회원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그룹의 음악방송 무대를 현장에서 보는데 유리하며 치열한 콘서트 티켓 예매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 콘서트 티켓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KSPO 돔 등 시설의 대관료는 크게 오르지 않았는데도 팬데믹 이전 10만 원, 12만 원대에 형성되던 아이돌 콘서트 티켓 가격은 15만 원을 넘어 20만 원을 돌파했다. 지난 5월에는 하이브의 콘퍼런스 콜에서 미국 티켓마스터가 채택하고 있는 수요에 따른 티켓 가격 변화 시스템 '다이내믹 프라이싱(Dynamic Pricing)'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팬덤이 반발하는 일이 있었다. 국내 음악 방송 활동 기간이 2주 내외로 짧은 데다 공연 가격도 비싸지니 한국 가수의 '내한 공연'이라는 씁쓸한 우스갯소리가 나온다. 참석도 쉽지 않다. 대부분 해외 공연을 겸하는 월드 투어로 진행되는데, 한국에서의 공연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지방에 거주하는 팬들은 치열한 티켓 예매 경쟁을 이겨낸 후 새벽부터 일어나 교통비와 숙소비를 추가 지불하며 기꺼이 나의 우상을 만나기 위해 상경한다. 필수 지참품이 되어버린 응원봉과 기타 응원 도구 비용은 덤인데 그마저도 수량이 넉넉하지 않아 애를 태운다. 지난 5월 13일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5년 만에 콘서트를 연 '가왕' 조용필이 관객 전원에게 응원봉을 무료 제공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며 케이팝 팬들은 부러움과 소속사를 향한 원망의 목소리를 냈다. 응원하는 가수의 생일 카페 등 팬덤의 자발적인 행사 지출을 제외하고 나면 굵직한 오프라인 팬 활동만 이 정도가 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가 지지하는 가수가 새 앨범과 함께 돌아오면 앨범을 구매해야 한다. 그런데 앨범은 한 장만 살 수 없다. 소속사는 개별 멤버, 그룹의 다양한 콘셉트에 맞춰 다양한 앨범 패키지를 구성한다. 가짓수가 너무 많다 보니 기본적으로 3~4장 이상 앨범을 구입해야 한다. 단출한 구성이라도 복수 구매는 필수다. 기획사가 앨범마다 무작위로 끼워 넣는, 멤버들의 사진이 담긴 포토카드를 수집하기 위해서다. 유튜브에 '앨범깡', '포카깡'을 검색하면 자신이 응원하는 그룹 멤버들의 포토카드를 확인하기 위해 박스채로 쌓여있는 앨범 수십, 수백 장의 비닐을 기계적으로 뜯는 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앨범 과소비는 그룹 사인회 당첨 확률을 높일 뿐 아니라, 첫 주 판매량을 의미하는 '초동' 판매 경쟁에서 응원 가수의 위상을 확인하는 지표로 작용한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리는 가수라면 앨범 판매량의 중요성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국내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가 개편된 후 앨범의 모든 곡을 차트 상위권에 올리는 '줄 세우기'가 불가능해지자 팬덤은 지지하는 아티스트에게 왕관을 씌우고자 앨범 판매량, 그중에서도 선주문과 첫 주 구입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의 통계에 따르면 케이팝 팬덤 활동 소비자의 52.7%가 굿즈 수집을 목적으로 음반을 구매하며 1인당 평균 동일 음반을 4.1장 구매한다고 한다. 소속사는 음반 판매량의 지속적인 증가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팬덤의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버려지는 앨범이 야기하는 환경 파괴 문제도 흘려 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케이팝에 실패할 자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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