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에서 찾는 인간의 존재 의미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다."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이 묵상록에 적은 글귀이다. 이 글귀가 담긴 묵상록의 제목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이고, 우리에게는 이 묵상록에서 제목을 딴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동명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헤밍웨이의 동명 소설에서도, 이 글귀에서도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가족, 친구, 연인 등 친밀함에 기초한 관계는 물론 동료시민, 국민, 노동자와 사용자, 학생과 선생님, 국제관계, 가상세계 등 다양한 사회적인 관계들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관계를 맺고, 이어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정말 친밀한 관계도 크고 작은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관계가 아예 틀어지기도 한다. 사회적인 관계들도 마찬가지다. 시민들은 복지, 인권, 민주주의 등 다양한 사안에 대해서 서로 충돌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차이와 충돌은 생산적인 토론을 촉진하는 양분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토론이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결할 제도가 작동해야 한다. 여기서 '민주적'이란 강자가 이기는 힘의 논리가 상호존중과 인정의 문화를 바탕으로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뜻이다. 갈등의 민주적인 해결은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의 절반은 전쟁의 역사라고 할 정도로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경우도 잦았다. 그만큼 민주적인 갈등해결이라는 이상을 달성하기에 녹록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평화권
흔히 '평화롭다'고 말하면 어떤 상태를 떠올릴 수 있을까? '고요함', '평온함', '안전함', '행복함', '새로운 생명' 등 긍정적인 단어들이 주로 떠오를 것이다. 반대로 “평화롭지 않다”는 말은 '파괴', '소란스러움', '절규', '슬픔', '상실' 등 부정적인 단어들을 연상시킨다. 평화는 인간이 달성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렇다면 평화를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평화학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란 '힘의 논리'를 따르는 폭력이 아니라 평화적 수단을 활용해서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권운동이 힘을 발휘해왔다. 평화를 인권의 언어로 다듬어 모든 인간이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고,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평화권' 개념으로 제시한 것이다. 평화권을 옹호하는 인권운동은 냉전시기에 급성장하였다. 두 차례 대규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오히려 평화가 찾아오기는커녕 핵무기라는 새로운 차원의 대량살상무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평화운동과 인권운동의 노력에 힘입어 1984년에 유엔총회는 '인류의 평화에 대한 권리 선언(The 1984 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to Peace)'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평화에 대한 권리는 크게 세 가지 차원의 평화를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전쟁처럼 직접적인 폭력(direct violence)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상태이다. 둘째, 빈곤, 불평등, 차별 등 구조적인 폭력(structural violence)을 제거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이다. 셋째, 폭력의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기억에 대한 권리이다. 이 세 가지의 의미는 상호보완적이다. 평화를 위협하는 폭력적인 상황은 빈곤, 차별 등 사회적인 제도가 무너지면서 악화되고, 폭력적인 상황은 사회적인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한 조건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의 상흔을 제대로 직시하지 않으면 폭력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평화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시민들은 의무 담지자에 해당하는 국가가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갈등을 예방 또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즉, 각국 정부가 시민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도록 요구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제주도와 평화권
1945년 38선에 따라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 어느덧 8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남과 북은 대화로 남북갈등을 풀어보려는 노력보다 군사력 증강을 통한 '적대적 공존'을 추구해왔다. 올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에서 전 세계 국방비 지출 현황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일본을 제치고 9위를 기록했다. 심지어 한국의 국방비 지출이 2.5% 줄고, 일본의 국방비 지출이 5.9% 증가했음에도 순위 변동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북한의 핵 위협에 맞선 '튼튼한 안보'를 위해서 군비증강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논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더욱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이다. '힘이 없으면 사랑하는 가족을 지킬 수 없다'는 식의 논리는 군대를 다녀온 독자들이라면 꽤나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군비경쟁에 의존하는 상태를 평화롭다고 할 수 있는가? 2005년 1월 27일 노무현 정부는 제주도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공식 선포하였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 제주도는 어떠한가? 강정해군기지가 생겼고, 제주 제2공항과 연계된 군사시설 건설 의혹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강정해군기지가 민간과 군대가 함께 사용하여 경제발전과 국가안보를 모두 추구할 수 있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이라고 한다. 하지만 군사기지가 생긴 이후 각종 군사훈련과 관함식 등이 열리고,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 평화의 섬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제주도는 한반도의 후방 “병참기지”가 되어가고 있다. 군사기지 공사를 위해서, 각종 군사훈련을 위해서 제주도의 바다와 땅은 파괴되고, 방치되어 왔다.이러한 환경파괴는 지역발전의 토대를 훼손하고, 빈곤과 불평등을 부추겨 장기적으로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 강정해군기지가 건설된 이후 주변 산호군락이 황폐화되는 등 해양생태계가 무너지고 있는 징조들이 드러나고 있다. 깨끗한 자연환경은 평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한 핵심 조건 중 하나이다. 특히 바다에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제주도의 특성을 고려할 때 해양오염은 지역경제와 직결되는 사안이기도 하다. 제주도에 드리운 군사적 긴장은 첫째로 제주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주민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평화적 권리를 침해한다. 그리고 제주도 지역경제의 토대인 자연환경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평화권을 침해한다. 한발 더 나아가 관계로서 평화를 생각해보면다면 제주도민들의 평화권에 대한 침해는 인간과 자연의 평화로운 관계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한편 올해 대한민국 정부의 제주 4.3사건 추모식 불참과 계속되고 있는 역사왜곡은 폭력과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고,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라고 보기 어렵다. 과거사에 대한 왜곡과 외면, 현시점 군사기지 건설로 인한 주민들의 삶의 터전 파괴는 제주도의 군사요새화를 축으로 서로 맞물려있다. 이러한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평화권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오늘날 평화권 담론은 갈등을 대화를 통해서 해결하기 위한 관계의 회복을 국가의 의무로 부여한다. 평화는 힘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평화권은 비록 국제법이나 우리나라의 법률로 명문화된 권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평화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로서 인정받고 있다. 제주도를 정말 '평화의 섬'으로 두고자 한다면 정부는 제주도민의 평화권 보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제주도민의 평화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노력은 제주도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전체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본 연재에서는 한국인권학회·인권법학회에서 공동 발간하는 학술지 <인권연구>에 실린 시의성 높은 논문을 선정하여 소개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논문은 아래 링크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전체댓글 0